20240505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열왕기하 10:12-19
어떤 나눔에 보니까 꽃도 예쁘다 하면 예뻐진대요. 그러고 이제 남편에게 '당신 참 멋지다.'했더니 남편은 너무나도 영혼이 하나도 없이 '당신도 예쁘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남편에게 주위에서 '아유, 50만원 받았다.', '목걸이 받았다.' 남편한테 얘기하면 남편은 날마다 '내가 선물이야.'그러고 넘어갔다는 거예요. 우리 남편 같은 남편이 있네요. 정말 제가 생일 이런 거를 한 번도 안 했어요, 우리 남편이. 그런데 아들이 꽃다발을 주면서 엄마에게 무릎 꿇고 아빠 보고 전해주라고 하니까 너무 감동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막상 50만원 받으면 그렇다고 제가 어디에 쓰겠나요. 자, 여기서 누가 가장 진실합니까? THINK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예후가 여호나답을 만나자마자 '네 마음도 진실하냐?' 묻는데요. 여러 각도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질문이에요. 결국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바른 마음으로 서야 하는데요. 오늘 '네 마음도 진실하냐?'는 질문에 '진실합니다.'로 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로잡힌 것을 봐야 합니다.
12 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도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13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 이스르엘에서 아합 집에 속한 왕자 70명과 모든 사람을 처형한 예후는 이제 수도 사마리아로 향합니다. 이제 예후에게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입성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르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도중에 휴게소가 있었어요. 즉, 이름하여 목자가 양털 깎는 집이에요. 양털을 깎으려면 양을 묶어야 하자나요, 그렇죠? 그래서 이제 원래 이름은 목자가 묶는 집인 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간, 그 곳에 아하시야의 형제들이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즉 조카들인데요. 왜냐하면 아하시야의 형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었자나요, 그렇죠? 여호람이 다 죽여버렸어요, 형제들을. 그래서 그 어린 자식들을 아하시야가 돌봐야 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들 역시 아하시야의 모친인 아달랴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겠죠. 바로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조카들도 아하시야처럼 육적인 DNA는 다윗의 집 사람인데 영적으로는 아합의 집 사람으로 자란 거예요. 그러니 때마다 시마다 외갓집에 지금 놀러가는 거예요. 이 지금 상아궁에 사는 북이스라엘의 가장 휴양지가 이스르엘궁이자나요, 그렇죠?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을 출발해가지고 사마리아를 지나 이스르엘로 향하는 신나고 설레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그간 외갓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요, SNS가 있었으면 알텐데. 그래서 이스르엘로 가다가 잠깐 쉬려고 목자가 양털 깎는 집 휴게소에 들린 거예요. '너희는 누구냐?'고 묻는 예후에게 아하시야의 조카들이 신분을 밝히는데요. 그렇게 구지구지 북쪽의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간다고 밝히는 거죠. 왜죠? 자기들은 다윗의 후손임이 자랑스럽지가 않고, 아합 집의 태후, 그 이세벨 집안, 이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시진핑 자손이다.', '바이든 집안이다.' 이러는 거예요. 아하시야도, 그냥 그의 조카들도 이세벨 왕할머니만 생각해도 너무 든든하고 좋아요. 여러분 이 3대를 내려오는데 이게 얼마나 무너지기 힘든, 완전히 종교입니다, 종교. 한 사람의 불신결혼의 영향력은, 지위도 있고 돈도 있으면 이렇게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장소 이름이 목자가 양털 깎는 집이라고 그러자나요. 목자가 양을 묶는 집이래요. 아하시야는 도망을 가도 정원의 집 길로 도망했자나요. 죽는 순간까지 저 푸른 초원 위의 우리집을 찾은 것이죠. 그 찾은 집은 다윗의 집이 아니고 아합의 집이었어요. 이 조카들이 다 똑같이 아합의 세력에 다 묶여 있는 거예요. 이세벨이 지워준 무시무시한 멍에를 멍에인 줄 모르고 그저 금면류관으로 이고 지고 지금 쓰고 있어요. 그래서 이들이 정체를 밝히자마자 예후는 사로잡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14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 그냥 잡으라고 해도 되는데 구지구지 사로잡으라 산채로 잡으라고 해요.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도 남지 않고 42명을 다 죽였는데요. 이 일은 그 2장 23절, 24절에 보면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곰에게 찢겨 죽은, 그 우상 숭배에 오염된 젊은 이들의 수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온 나라가 금송아지에 전부 다 오염됐어요.아하시야의 조카들은 이렇게 사로잡힌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불과 1 시간이 됐을까요, 2 시간이 됐을까요. 그 짧은 시간에 이 사로잡혀 있다는 게 뭔지 태어나서 처음 경험했을 거예요. 너무 두려웠겠죠. 그런데 거기서 끝났어요. 이렇게 육이 사로잡히는 사건을 당하면 내가 사로잡혀있는 죄악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해야 되는데 이들은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어요. 자기 정체성을 다윗의 집에서 찾지 않고 부자인 아합의 집에서 찾고 있는데 어디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구조 안에 있어야 그나마 한, 두 마디라도 들어둘텐데 구조 자체가 말씀을 무시하는 아합의 집 구조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향해서는 귀를 막고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하시야나 그 조카들은 아합의 집 죄악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웅덩이에 빠져 있었는데 그걸 전혀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예루살렘에 사는 왕족인데 지나가는 선지자 한 명이 없었겠습니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해. 태어나고보니 아합의 집 사람인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걸, 내가 부자로 태어난 걸 내가 어쩌라고. 왕족으로 태어난 걸 어쩌라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당부하신 것 하나 고르라고 하면 열왕기상 9장 4절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 이거는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어요. 오직 남, 북 왕들이 따라야 할 길은 오직 다윗의 길이었어요. 이게 하나님의 길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15절에 나오고 오늘 제목이기도 한 '마음이 진실하다.'라는 말은 곧 '마음이 바르다.', '마음이 구부러지지가 않았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열매가 하나님을 향하여 똑바로 서 있다.'는 뜻이에요. 해바라기처럼 하나님 바라기가 되는 게 마음이 진실한 것이고, 바른것이고 그렇게 사는 게 다윗의 길을 가는 건데 아하시야나 그 조카나 전부 그 길을 떠나서 아합의 집 길을 갔어요. 그것은 뭐예요? 자기만 높이고, 자기 가족만 좋고, 가족 우상, 가족 신화에 빠져있는, 그렇게 자기를 향해 굽은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게 사로잡힌 거예요. 이게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가 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로잡혀 있는 죄들이 있어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사로잡힌 건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할 줄 알아요. 이게 가장 분명한 증거예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해요.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채로 태어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거짓 아비 마귀에게 잡혀 있다고 그러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다 사로잡힌 채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지 몰라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말 자체를 부인해요. 이 시대도 그래요. 그래서 전부 다 주제가가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냐?' 그걸 이 시대는 전부 법으로 보호를 해주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아합의 집 길이에요. 지금 이게 하나도 남김 없이 심판을 받는다 이 뜻입니다. 42명 다 죽었자나요, 그렇죠? 그래서 사로잡히는 사건이 와야 하는 거예요. 진짜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을 보라고, 육에 묶이고, 사로잡히고, 구덩이에 빠져야 내 영을 묶고, 사로잡고 있고, 구덩이에 빠뜨리고 있는 심각한 죄악을 보게 되는 것인데요. 여러분 지금 사로잡혀 있습니까? 가족에게, 직장 사람에게, 일에, 질병에, 불안에, 여러 중독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내 죄가 아니예요? 재수가 없어서 걸렸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떻게든 살리시려고, 그 굽은 길에서 돌이켜 어떻게든 바른 길로 오게 하시려고, 거짓을 떠나 진실하게 하시려고 딱 맞춰 주신 환경이에요. 거기서 말씀을 듣고 내가 사로잡힌 존재라는 걸, 이런 환경에 사로잡힌 게 문제가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죄악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것을 볼 때 최고로 진실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자유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환경이 좋은 아합 집의 왕자, 다윗 집의 왕자들이 University of Samaria, University of Jerusalem 왕자들께서 한 명도 마지막까지 회개를 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심판이, 왜 그런 줄 알아요? 끼리끼리 군중 심리여서 아무도 회개 안 하니까 그게 선인 줄 알아요. 적용 질문이에요.
[적용] 보통 나를 누구라고 소개하나요? 누구라고 소개하고 싶나요? 어떤 상황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내가 보고 인정해야 할,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은 무엇입니까?
2.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해야 합니다.
15 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이르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 예후가 그 다음으로 우연히 만난 사람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에요. 여러분, 사라의 구속사를 들었는데 아브라함의 후첩 그두라가 낳은 여섯 아들 중에 넷째가 미디안이에요. 그 미디안의 소생 중 겐 족속이 나오는데 그 겐 족속의 소생 중에 레갑 자손, 그 중에서 여호나답인 거예요. 우리는 그 구속사를 통해서 그두라 자녀들을 동쪽 땅으로 쫓았다는 걸 기억할 것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일부가 모세를 따라 이스라엘에 합류했고, 또 갈렙 자손의 한 갈레로 자리잡게 되었어요. 이방 출신이지만 모세와 연결되고, 또 유명한 갈렙 가문에 들어갔어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인데 모세 따라 나섰다가 영적으로 최고의 가문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원가지가 아니자나요. 자기 주제가 이방인이었던 레갑 가문 사람들은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가르치고 몇 백 년을 지켜왔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삭의 후예라고 해도 떨어져나간 에서가 있는데 그두라의 자손이라도 돌아온 택자도 있어요. 성경은 전적인 선택임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감옥을 가고 무엇을 했어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택자는 알아보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여호나답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이름 속에 함축이 되어있는데요. 한 마디로 그래서 이제 몇 백 년 동안 영적으로 뼈대있는 집안의 선조라는 뜻이에요. 여호나답은 이로부터 몇 2백 년 후에 예레미야 35장에 보면 자기 후손들이 여기서 지켜야 할 특별한 가훈을 남겼는데. '평생 포도주 마시지 마라. 살 집을 짓지 마라. 포도원이나 밭이나 농사 지을 수 있는 씨앗도 가지지 말아라. 장막에 살아라.' 구별된 삶을 살라는 거예요. 여호나답이 왜 이런 가훈을 남겼을까요. 어떻게 256년 동안 이 영적인 전통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어떤 이유도 얘기해주지 않는데요. 오늘 이 사건이 중요한 계기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요. 아합 당시 레갑 가문 족장이었던 여호나답은 지금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이제 그 300년쯤 가문의 신앙 전통을 지키며 살았는데요. 그러기 때문에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미친 악한 영향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며 보고 있었을 거예요. 당연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도 관심 있게 보며 응원했을 것이고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도 현장까지 가서 지켜봤을 거예요.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아합의 집 길에 대해서 너무나 슬퍼하고 분노하며 절망하며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온 나라가 바알교로 뒤덮이는 악을 보면서 마치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님 어찌하여 이 악을 내버려 두십니까. 언제까지 그냥 두시겠습니까.' 부르짖었을 거예요. 하나님이 언제 이 악을 심판하실 건지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을 때 일시에 아합 가문을 몰살시키는 예후가 등장한 거예요. 그냥 여호와의 심판을 기다리던 여호나답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 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반가워서 지금 마중까지 나가는 거예요.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후와 여호나답이 절친이었다고 이렇게 보기도 하는데요. 그러니까 보자마자 안부를 전한 거죠. 이것이 바로 바라크예요. 축복했다는 거죠. 여호나답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어요. 왜냐하면 그동안 아합 집 관점에서 보면 여호나답은 루저 아니예요. 찌질한 방해꾼 아니예요. 그런데 지금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한 사람 예후가 와가지고 아합 집을 무너뜨리면서 복을 빌어주는 거예요. 위로가 좀 되었을까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예후의 질문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번역에는 그냥 '자기 마음이 여호나답의 마음을 향해 진실한 것처럼 여호나답 네 마음도 진실하냐?' 묻는 것처럼 되었는데요. 원어로 보면 순서가 반대예요. '네 마음도 진실하냐?'부터 묻고'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해 진실한 것처럼 말이야.' 이거 순서가 중요합니다. 물론 예후의 질문은 아주 전략적인 거였어요. 예후는 아합의 집을 심판하는 도구로 지금 쓰임받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후는 아합과 이세벨과 요람의 총애를 계속되는 받으면서 아주 밑바닥부터 훈련 받아 장관이 된 뼛속 깊은 아합 가문의 사람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합하고 똑같은 악이 자기에게도 똑같이 있는데 이거를 때려부수자니 얼마나 아이러니 하겠어요. 그런데 남유다도 아니고 선한 것이 없는 북이스라엘 사람 중에 영적으로 뼈대 있는 집안에 확실히 구별된 한 사람 여호나답이 예후를 인정하고자 찾아왔으니까 최고의 명분이 생긴 거예요. 나라를 개혁하려면 명분이 중요하자나요. 내가 아무리 누굴 죽여도 나를 뒷받침해주는 세력이 없으면 안되는 거예요. 예후는 정치 천재라 여호나답을 금세 끌어들이고 이용을 합니다. 게다가 예후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직접 기름 부음 받은 것도 아니고 선지자 제자한테 기름을 부음 받았으니까 정치인들은 또 이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일석이조인 거예요. 그런데 예후의 '네 마음도 진실하냐?'는 이런 인본적인 질문은 영적인 여호나답에게는 굉장히 생각하게 하는 질문인 거예요. 지금 여호나답, 이 레갑 족속은 아주 믿음의 가문이에요. 아합과 이세벨의 멸망을 기다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몰아내고 싶어해요.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하는, 라나님을 향한, 또 나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진실하고 바르다는 데에 의심을 해봤겠어요, 여호나답이?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질문을 꼭 사람을 통해 물어요. 예후를 통해 지금 물으세요. '여호나답 네 마음이 진실하냐?' 무슨 생각이 났을까요. 아합에게 저항하다가 순교한 선지자들 생각났겠죠.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다니며 고생하던 것 생각났겠죠. 엘리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합의 집을 그래도 돌이켜보려고 수고했던 것 생각났겠죠. 자신은 어떻습니까? 사마리아 수도에 살고 있어요. 마음으로만, 생각으로만 이리 판단하고, 정죄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몸은 사마리아 자기 집에 가만히 있어요.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 마음이 진실하냐?' 이 질문이 여호나답을 새롭게 일깨웠다고 생각을 합니다. 좀 더 다루겠지만 31절에 보면 예후가 이제 이겨서 바알교는 제하고 그렇게도 원했던 금송아지교는 제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이 여호나답은 개혁 공신의 상을 딱 포기하고 후손들에게 '이거는 아니다. 나그네 인생처럼 살아라.' 그러니까 이제 집 짓고 살지 말고, 다 농사 짓지 말고, 유목민으로 그래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포도주도 먹지 말고. 이거 명령했어요. 죄악에 맞서는 영적 전쟁에 마음으로만 함께 하고 몸은 함께 하지 않았던 자신의 진실되지 않음을 회개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 사마리아에 있던 집과 밭을 다 팔고 광야에 들어가서 이렇게 이제 사막의 교부들처럼 그런 수도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 처절한 회개의 적용이 그 후손들에도 256년 동안 이어져 예레미야 시대까지 갔을 거예요. 그때 예레미야 때 막 데려다놓고 예레미야도 막 포도주를 먹어가면서 '포도주 한 번 먹어봐. 먹어봐.' 하나님이 시험해보라 그랬거든요. 안 먹었어요, 끝까지. 자, 여기서 여호나답은 깨달은 게 많는데 승승장구하며 사마리아까지 온 예후는 이런 거 알 턱이 없어요. 그저 더 확실한 승리를 위한 명분을 얻으려고 여호나답과 서로 손을 잡고 한 편이 됐을 뿐이에요. 서로 생각하는 게 달라요. 이걸 분별해야 돼요.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혹시나가 역시나예요.
16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7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 16절, 17절입니다.
예후가 지금 인생의 정점에 있죠. 그런데 그때 나오는 단어가 오늘 보니까 나의 열심이에요. 그것도 그냥 열심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이에요. '이 열심을 보라.' 자신이 있어요. 보여주고 싶어요. 세상이 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라는 말이 쓰인 사람이 딱 2명인데요. 예후가 지금 그렇게 쓰고 있고요. 다른 한 명이 누군지 아세요? 아무리 제가 설교를 하면 뭐 하겠어요, 여러분들은 오늘 듣고 내일 잊어버려.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길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이렇게 말해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 말을 2번이나 해요. 차이가 뭐예요. 엘리야는 인생의 최저점 같은 고난 가운데 이렇게 고백한 것이지만 예후는 최정점처럼 보이는 순간 이렇게 자기 열심을 자랑해요. 엘리야는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말하지만 예후는 친구 여호나답을 향해 당당하게 말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박해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한 열심을 말하지만 예후는 이기고 또 이기는 자기 열심을 말해요. 하나님은 이 열심도 사용하셔서 아합 집에 대한 심판을 완료하셨어요. 최후의 보루 수도 사마리아에 있던 아합 사람들까지 남김 없이 진멸하셔서 엘리야를 통해 하셨던 예언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성공하고 성공하지 않고 상관 없이 울리는 말씀대로 적용하고 가면 잘 되고 못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호나답과 예후의 차이가 뭘까요? 여호나답은 스스로 진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늘 마음 졸이며 살았어요. 그런데 '네 마음이 진실하냐?'는 청천벽력 같은 질문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은 거예요.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못한 자신을 생각하게 됐어요. 하지만 예후는 그 시선이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어요. 자기가 이루고 있는 일만 생각하고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만 봐요. 죽여야 할 요람과 아하시야와 이세벨만 보이고, 자기 편을 들어주는 여호나답만 보여요. 그러니 자기 마음이 여호나답에게 진실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해 어떤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왜요? 이기고 또 이기고 있기 때문에, 환경이 겸손한 거지 겸손한 사람 이 세상에 없어요. 사람에게 진실하기가 너무 어렵죠. 사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사람에게 진실해 보이기는 어렵지 않을 수 있어요. 수 많은 사건이 사람을 속여서 나오는 거자나요. 그러니까 속이기도, 속기도 그건 인간의 특기예요. 시간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나게 해주지만 잠깐 진실한 사람으로 다 포장할 수 있어요. 이게 잘 될수록 자신도 속아 넘어가고 말아요. 그러면서 우리들의 주제가는 '나같은 사람도 없다, 야. 나를 믿어. 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냐?' 맨날 이게 주제가죠. '내가 너한테 해 준 게 얼마냐? 생각해봐, 너 지금 평생 나같은 사람 봤어?' 맨날 아내한테도 '당신 나같은 남편 봤어?' 우리 남편, 전국의 남편 중에 자기가 최고래요.'나같은 남편을 봤냐?'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 진실해보이는데 만족하면 안됩니다. 실제로 진실하려고 힘써야 해요. 그러다보면 진실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보게 되죠. 진실은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구제하고, 참고, 인내하고 이런 게 진실이에요? 하나님이 100% 옳으시면 나는 100% 죄인이자나요. 그러니까 '내가 틀렸구나.'가 진실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제 1로 시작해. 나는 100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 앞에는 내가 언제나 틀린 거예요. 하나님 나라를 1밖에 모르는 사람, 나는 60개를 알아. 그러면 59개는 그 사람 몰라. 그러니까 내가 언제나 누구한테 틀릴 수가 있는 거예요. 믿는 내가 무조건 잘못한 거고, 우리들교회 성도라면 무조건 사과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들 억울한 일에 치를 떠는 거예요.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요. 그러니까 내가 틀렸다는 거에 대해서는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 마음이 아합의 길도 아니고 예후의 길도 아니고 다윗의 길을 따르는 마음,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마음, 이게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인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가족과 지체에게 내 마음은 진실합니까? 하나님을 향해서는 어떻습니까?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있나요? 그 열심은 성공 때문입니까, 구원 때문입니까? 내가 항상 틀렸다고 생각합니까?
'이것만은 아니지.' 이런 건 이 땅에 없다고요, 내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집사님이 우리들교회 와서 설교 때마다 20년이 되었어도 말씀이 안 들리는 성도가 있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날 두고 하시는 말씀이구나. 그래거 내가 보청기로 들으면 잘 들릴까. 외국의 보청기를 주문해서 들을까. 그런데 어려서부터 살아온 과정 과정이 내가 역경을 이겨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해서 이겨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기 때문에 아내는 당신이 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전혀 안 들렸어요. 그런데 드디어 이제 이 생각한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그 전에 그 역경을 다 내가 극복했었는데 그것이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해 이렇개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참 맨날 듣는 나눔 같지만 저는 막 이런 나눔을 들으면 감동이, 너무 보람이 있는 거예요. 진짜 말씀이 안 들리거든요.
우리가 이제 이렇게 목장을 한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것이자나요. 믿음의 분량과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수 없는 옳고 그름의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어요. 그냥 편할려면 목장 안 해요. 설교만 해도 다 사람들 모이는데요. 그러니까 여러분 가치관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목자 때문에 달라지지 않아요. 붙어만 있으면 주님이 각자에게 편지를 보내실 때까지 붙어만 있게 하시는 것이 최고의 목자세요. 그런데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요. 그래도 너무나 다 연약하니까, 연약한 성도들이 모였는데 그 악영향을 주는 담임 목사 비방과 교회 비방은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목원들은 이런 목원 때문에 그 말을 진짜인 줄 알고 목장을 떠나버리기 때문에 그거는 따끔하게 훈육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집에서 아빠가 형편 없고 술을 먹어도 다른 사람이 와서 막 내 아빠를 욕해 주면 이거는 아닌 거예요. 우리 교회에서는 그래도 제가 부모 아니겠어요? 그런데 부모를 막 욕하고 '아무개씨.' 막 이러는데 가만히 있는 건 더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비본질적인 문제, 목장 시간에 담배를 피고 온다든지. 이거는 피고도 오는 게 어디예요. 계속 나가서 피라고 격려를 하셔야지 그런데 저를 향한 비방이나 이 모두를 구원 때문에 해야 되기 때문에 뭐든 여러분들이 진실하셔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 죄를 보지 않으면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이 많지 않자나요. 다 분량이 각각이에요. 연약해요. 그래도 또 경계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 계속 제 욕을 하기 입이 좀 아프지 않아요? 그런데도 욕을 하시면서 오시는 게 또 감사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제가 대신 울어드릴테니까 붙어만 계세요, 붙어만 계세요.
3. 내 계책에 의존하면 안됩니다.
18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 예후의 혁명이 드디어 완성되었어요. 아합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싹쓸이 했어요. 예후가 이제 할 일 다 했자나요. 그럼 이제 왕 노릇하며 대접받아도 되는데 멈추지 않았어요. 사마리아에 사는 모든 백성을 불러서 선언합니다. 자기가 아합보다 바알을 더욱 많이 섬기겠다고 해요. 아합의 집과 바알은 하나자나요, 다윗과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그러니 바알 숭배자들은 예후가 아합의 집을 진멸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어요. '다음은 우리 차례구나.'하면서요. 기다리는 게 더 힘들어요. 그런데 와 새로운 임금님이 뜻밖의 커밍아웃을 하면서 자기가 더 아합보다 바알주의자라는 거예요. '난 많이 섬긴다. 바알에게 큰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까 모두 바알 선지자들 다 데려와라. 오히려 오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 그러니까 바알숭배자들은 '경사났네.' 이렇게 됐어요. 가장 믿었던 아합의 집이 끊어져서 자기들도 죽은 줄 알았는데 더 큰 지지자가 생긴 거자나요. 그런데 이 모든 게 뭐라고 하세요? 예후의 계책이라고 하는 거에요. 계책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옮기면 속임수예요. 그리고 그 어원은 울퉁불퉁하고 구부러진 거 말이에요. 아까 진실하다는 것이 뭐라 그랬죠? 바르다, 굽어있지 않고 똑바르다. 그런데 그 반대예요. 그래서 마음이 진실한 것과 계책은 반대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은 계책을 쓸 수 없어요. 구부러진 방법을 쓸 수 없어요. 계책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예후는 여호나답을 향해 자신, 진실하다고 주장했어요. 하나님 향해서도 열심 타령하면서 진실하다고 확신했을 거예요. 그래서 진실을 입증하려고 솔직히 자기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유익이 없을 듯한 바알교 척결을 시도하는 거예요. 틀림 없이 여호나답이 건 드라이브 였을 거예요. 여호나답을 보면서 자기가 이걸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여호나답의 목적은 오직 아합의 집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바알교 척결, 금송아지교 척결이었거든요. 북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던 한 사람인데, 그런데 사실은 자신과 너무 다른 예후와 손을 잡으면서 바알교를 뿌리채 뽑기를 강력하게 주장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딱 보면 예후가 이 중요한 일, 사실상 아합의 집 심판보다 더 중요한 이 바알교 척결을 하면서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기도했다는 말도 없어요. 선지자를 불렀다는 말도 없어요. 묻지도 않아요. 왜죠? 싸움에는 자기가 일인자, 일인자. 누구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요. 상황을 보면 기막히게 좋은 작전이 그냥 딱딱 떠올라. 예후는 아이디어 뱅크예요. 이번 작전도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 제1회 전국 바알교 부흥회를 기획해서 홍보하는 거예요, 지금. 가장 큰 축제를 열겠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전부 오라고, 안 오면 다 죽이겠다고 해요. 당근과 째찍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 지 그냥 아는 거예요. 그냥 전략의 천재 맞습니다. 우리들교회 이런 후임이 오면 대박이에요, 대박. 그렇죠? 예후야말로 열심의 최고봉인 거예요. 누구라도 그 열심을 볼 수 있어요. 보면 다 인정을 해요. 그런데, But, 하지만 그 안에 진실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조차 진실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아요. 가짜예요. 그래서 그 엄청난 열심은 인본적인 열심이에요. 나를 위한 열심, 내가 잘 되고 내가 높아지기 위한 열심이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열심이에요. 이 열심의 끝이 바로 속임수예요. '이게 맞다. 이 길이 맞다. 이렇게 하는 게 맞다.' 계속 이렇게 스스로 속이면서 욕심을 연료 삼아 불태우고 있는 열심은 결국 속임수로 끝나는 거예요. 잠깐 옳은 거 같아요. 결국 가짜인 거예요. 예후의 열심이 이렇게 속임수와 계책으로 끝난다는 거 사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여호나답은 왜 가만히 동조할까요? 여호나답에게도 아직 깨어져야 할 게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호나답도 혼자 거룩하게 살면서 속만 끓였을 뿐 나서서 당해본 일이 많지 않아서 아직 분별이 안되는 게 있어요. 바알교를 한 번에 없앤다는 그 목적이 너무 좋기 때문에 수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아요. 이런 기대가 다 무너지는 시간이 여호나답에게도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는 예후도, 여호나답도 100% 진실한 사람은 없다고요. '네 마음도 진실하냐?' 이 질문으로 회개해야 할 때가 아직 차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물어야 해요. 내 계책에 의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물으며 성경을 펴야 합니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작전을 의지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돼요. 공동체에서 묻고, 지체들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형식이 우리 마음 속에 진정성, 진실성을 세워주고 지켜줍니다. '뭘 이런 걸 물어.' 이런 생각이 영적 진실성을 좀 먹는 거니까 절대로 넘어가지 마시고 사소한 일도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 열심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루, 하루 살아갈 때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어떤 목원이 '목장에서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안전장치를 하는 거예요.' 목원이, 목원이. 그런데 이 내가 주제가 되어서 머리 속으로 생각하지만 삶으로는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계속 THINK를 하는 거자나요.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계책이 통해서 좋아했던 일이 있습니까? 아직도 자랑스럽습니까, 이제는 부끄럽습니까? 반대로 계책이 막혀서 회개한 일이 있습니까? 내 열심과 계책을 내려놓고 목장에 물으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