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5:9-15
깨끗하게 되었더라
김양재 목사님
1.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9-12절)
이제 나아만을 고치기 위해서 어린 소녀가 안주인에게로, 안주인이 나아만에게로, 나아만이 아람 왕에게로,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로, 그리고 엘리사로 이어지는 우연 같은 만남이 지금 이어진다. 이것은 준비된 우연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중 아래에 있다. 내 인생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 여기에 내 생각이 들어갈 틈은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 무언가 이룬 사람들은 그 악한 내 생각이 하나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믿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렀다고 한다. 여호람 왕에게 갈 때는 은십 달란트, 금 6천 개, 의복 10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다. 도움을 청하는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갔다. 근데 엘리사를 찾아가는 나아만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점령군 사령관의 모습으로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선지자의 집 문 앞에 딱 섰다. 이 세계적 지도자인 나아만은 벌써 사람을 차별하고, 하나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기 병이나 고쳐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내 생각이 있다. 그래서 나아만은 말을 탄 채 '이리 오너라' 하면서 대문 앞에서 버티고 있다.
이런 나아만을 특별대우하지 않고 여전한 방식으로 사자, 곧 비서를 보낸다.한마디로 나아만의 내 생각에는 이건 문전박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푸대접을 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예언을 한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분노했다. 그래서 엘리사의 집 문에서 몸을 돌이켜 떠난다. 나아만의 그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내 생각은 모든 것의 분노를 가져온다.
그래서 어디에 분노했을까?
⓵ 첫째로 선지자 자신이 직접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화가 났다.
아람의 총사령관인 나아만이 누구 집 문 앞에서 기다려 봤겠나. 이스라엘 왕도 아닌 선지자가, 큰 저택도 아닌 산속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직접 나와서 인사하기는 커녕 종을 보내 처방만 내리니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확 상했다. 이게 선한 것이 없는 내 생각이다./
⓶ 화가 난 두 번째 이유는, 선지자의 처방도 너무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병을 고치기 위해 아람에서 안 해본 주술과, 시술과, 요법이 없었다. 그러니 나아만은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적어도 자기의 여호와 하나님께 치료를 구하는 화려한 의식도 벌이고, 신비한 술법도 쓰면서 온 정성을 다해 자기를 치료해 주리라 기대했다. 늘 자기 생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선지자라는 인간이 자기 종 한 명을 틱 보내더니 '강물에 가서 씻으면 나올거다' 말 한마디 툭 던지고 마니까 이제 어처구니가 없었다.
⓷ 세 번째 이유는 그 처방의 내용도 너무너무 찌질했기 때문이다.
나아만이 요단강을 너무 잘 안다.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남쪽 사해까지 흐르는 그 강의 길이가 한 360km 정도로 꽤 긴데 지형 상 그 물은 흙이 많이 섞여서 색이 누렇다. 더러워 보일 뿐 아니라 신비하거나 영험할 것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반면 나아만의 고향,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흐르는 아바나와 바르발은 서쪽 산지에서 흘러나온 강이라서 매우 맑고 깨끗하다. 전체 길이는 요단보다 짧아도 훨씬 생명력이 있어 보이는 강이다. 그러니 나아만 입장에서는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단강에 들어가는 게 전부라면 굳이 적국 깊숙한 곳까지 올 필요가 없다. 자기 집 옆에 있는 아바나와 바르발이 요단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좋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단에 들어가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은 나아만에게 너무 초라한 치료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리에서 하는 내 생각은 이 분노만 일으키는 것이다.
말들과 병거들이 상징하는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다. 나아만은 내 생각으로 특별히 꽉 차서 거만할 수밖에 없는 군대 장관이다. 이런 거만한 나아만에게 엘리사의 태도나 그가 전한 말씀은 속을 뒤집어지게 하는 공격일 뿐이다. 도저히 봐줄 수도 없고,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내 생각이 꽉 차 있는데 들어야 할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지금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아만의 병을 고쳐줄 말씀이다. 근데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어떻고, 태도가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이런 판단을 하는 내 생각이 강하게 있는 것이다. 내가 맞는데, 내 방식이 옳은데, 당신이 뭐를 알아, 당신이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세계를 알아, 정치를 알아, 이러는 것이다.
나아만이 나병이라는 고난이 있으니 자기 집 여종이 전한 말을 들었고, 왕에게 부탁을 했고, 직접 이스라엘 왕에게 왔다. 또 그가 알려주는 대로 엘리사의 집까지 왔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가 낮아질 수 있는 내 생각의 한계였다. 여러분, 내 생각은 한계가 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기를 맞는 태도를 보고, 그가 내린 처방을 듣자 지금까지 참았던 화가 압력솥 터지듯 한 번에 폭발했다. 성품으로 하면 터지는 때 온다. 누르고 눌러도 눌리지 않는 내 생각의 거만함 때문이다. 금 그릇이 아무리 낮아지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만함은 잘난 사람들만 갖는 태도가 아니에요.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마음이 다들 종류별로 있다. 나아만의 거만함은 '나만 잘났어'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잘하는 거는 바로 이 나아만의 한계인 것이다. 이게 나병이 아니면 나아만의 한계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니 내 생각은 어디서나 있다. 나는 남보다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생각이 제일 교만한 생각이다. 그것이 가장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교만함의 끝판왕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목장에서 나누는 걸 보고 여러분들이 찌질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한 사람인 것이다. 저거 왜 찌질하지? 나는 쟤보다는 나아. 이런 사람들. 제일 교만한 사람들이다. 내 생각의 이 거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거만함은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커진다. 이 거만함은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한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결코 깨끗하게 될 수 없다. 영적인 복의 첫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되는 것이다.
큐티하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찾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기. 다들 문제가 안 풀리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하면서 다 같이 큐티하며 질문하기에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 적용
Q. 내 생각으로 분노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Q. 그리고 더 나가서 말씀을 듣고 분노해서 예배나 목장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던 적은 없습니까?
Q. 나는 적어도 거만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나의 고등교만, 고등거만이 있을까요?
Q. 그래서 가족, 직장, 목장을 향해 내게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데...라며 거만하게 기대하는 내 생각은 무엇입니까?
2. 벌 떼처럼 나아와 해석해 주는 지체들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13절)
말들과 병거들을 몰고온 나아만 행렬은 지금 분노해서 왔던 길을 돌아가고 있다. 나아만은 지금 너무 열 받았다. 천하보다도 귀한 자신의 힘과 시간을 들이면서 온 길인데 병을 지금 고치지 못하고 헛걸음을 했으니 이제 너무 속이 상해서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제 그 어린 소녀를 잡아 죽이려고 별렀을 것이다. 수행하던 종들도 잔뜩 분노하신 장군님 눈치 보느라고 아무 말도 못 하면서 갔을 것이다. 종들은 장군님 눈치 보느라고 당장은 아무 말도 못 했지만은 돌아가는 길에 아 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다 생각했다. 근데 이거는 장군의 부하 중 제일 높은 사람 한 명이 혼자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복수로 종들이 그러다. 종들 여럿이 함께 벌떼처럼 이제 장군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오다는 [나가시]라는 뜻은 그냥 가까이 간다는 뜻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로 나아가는 거를 말한다. 기분이 많이 안 좋은 장군님을 잘 설득하려고, 기분이 또 상하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면서 꼭 들으셔야 하는 말씀을 올리려고 그런 마음에 준비를 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지금 나아가는 것이다. 아마 그냥 벌떼처럼 나와서 장군 앞에 다들 납작 엎드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군을 지금 장군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인이라고도 하지 않고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다. 내 아버지여. 주인을 향한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죠. 지금 이 종들이 잔뜩 굳은 나아만의 마음을 녹이는 아이스 브레이킹- 마음 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어려운 일 하라고 말했다면 그대로 하셨을 것 같은데.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시라고 하면 시내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비시라고 하면 이런 건 잘할 거다.'
'그런데 선지자가 하라고 말한 것이 너무 쉬워서 우습죠?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흙탕물 같은 요단강에 내려가서 씻으라니 말이 됩나? 그리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냥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떨까?'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처방하는 방식과 내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에요. 마음이 높아서 그 말씀이 들리지 않고 튕겨져 나간다. 나아만이 내 생각으로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말씀을 그의 종들은 들었다. 종들은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장군보다는 비천한 환경에 있는 종들이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낮았다.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순종할 수 있는 낮은 환경에 있다. 종들이 잘나서가 아니에요. 낮은 환경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 대한 칭송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 환경을 만드신다. 왜냐하면 평소 당한 게 많기 때문에 분노하는 주인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 종들은 요단강에 들어가기도 또 굉장히 쉽다. 이 종들은 더럽다고 이러지 않는다. 그래서 벌떼같이 나와서 외치는 것이다. 벌떼처럼 나와서 해석해주는 지체가 있을 때 이제 물에 들어가기가 쉽게 된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겉으로 아무리 거만해 보여도 속으로는 살 수가 없이 힘들고, 우리가 겉으로 아무리 강해 보여도 속은 다 연약한다. 이 곤고함을 홀로 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벌떼처럼 나와서 말씀을 해석해 주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이혼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있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혼도 막아지고, 자살도 막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 연약하지만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불러주신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 적용
Q. 여러분은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일단 '아니!! 그게 아니고!!'부터 하는 편이에요?
Q. 벌 떼처럼 나아와 외치는 지체들의 말을 들었더니 어느덧 깨끗함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 공동체를 맹신주의라고 생각합니까?
Q. 지체들과 함께 나아가 공감해주고 해석해 줘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3.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14-15절)
나아만은 이제 못 이기는 척하고 아람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요단강 쪽으로 내려갑니다. 종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까 내려가는 것이다. 공동체가 적용하도록 도와서 내려가게 한다. 그래서 낮아지게 됩니다. 종들의 말을 인정했다. 그 모든 처방을 인정했다.
7번이 될 때까지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목장에 와서 갑자기 변하면 좋겠지만 영적 진실성의 결과는 인내니까 이렇게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한 진실성에 의심을 품고 하던 일을 중단하기가 쉽다.
좋은 강에 들어가서 고친다면 이게 주술과 다름이 없죠. 근데 말씀대로 순종해서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강에 들어가서 치유되는 게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제안과 편지와 대화가 오고 갔지만 실제 치료는 너무 간단하게 끝마쳐지는 것이다. 열왕기서 기자는 나아만이 어떻게 치료받았는지 그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요단강 물속에 자신을 완전히 잠글 정도로 내려갈 뿐 아니라 그 일을 7번 반복한다. 아울러 성경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주로 죽음을 상징한다. 이 죽어지는 순종은 십자가의 겸손을 의미하고요, 회개를 의미하고, 거룩으로 나가는 것이다.
물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다, 잠근다. 이게 [타발] 동사인데요. 10절에 엘리사가 명령했을 때는 [라하츠]를 썼다. 그러니까 나아만이 엘리사가 명령한 이 [라하츠] 동사보다 [타발]은 더 철저하게 몸을 씻었음을 보여준다. 그 몸을 잠그다라는 의미인 [타발]은 성경에 16번밖에 사용되지 않는 단어인데 주로 제사 의식이나 정결 의식에서 피나 물에 몸을 담그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7은 완전함을 나타내는 완전수죠. 그래서 레위기 14장의 정결례에서 7이라는 숫자가 나타난다.
근데 오늘 14절 마지막에 깨끗하게 되었더라는 계속적 [와우]에 깨끗하다는 의미를 지닌 [타하르]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인데. 이제 해석을 하면, 나병에 걸린 나아만의 흉측한 피부가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된 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게 아니라 요단강에 7번 몸을 이렇게 담근 직후에 바로 단번에 이루어졌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리고 때 13바퀴 돌 때까지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여리고가 무너졌다. 그래서 이 본문 14절의 [타하르]는 병의 치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요. 이 단어는 제사 의식이나 정결 의식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요. 레위기 14장 문맥에서 [타하르]는 단지 깨끗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가 있다. 뭐라고요?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나아만은 엘리사가 명령한 것보다 더 진심으로! 기대치보다 회개를 했고, 그러므로 단순히 나아만을 육적으로 치료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거라는 거죠. 병 낫기보다 이게 목적이 돼야 되는 것이다.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결과, 그 살이 어린아이처럼 되었다는 것은 나아만도 그 2절에 어린 소녀가 가졌던 믿음을 똑같이 갖게 되었다는, 어린아이의 살 같이 희어졌다.
이 같은 회복을 체험한 후에 오늘 15절에 엘리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도로 와서 [슈브]동사는 거의 대부분 영적인 회심을 수반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니까 나아만은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하나님께 돌아왔다. 궁극적으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료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성도 여러분, 결국 깨끗한 자는 살아난 자이고, 살아난 자는 겸손한 자이고, 겸손한 자는 남을 낫게 여기는 자! 이것이 깨끗한 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백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 적용
Q. 여러분은 병 낫기가 목적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목적입니까?
(기도제목)
- 은우언니
1.내 생각을 버리고 벌때 공체에 묻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깨끗한 한주 살도록
- 세정
1. 내 생각과 아집을 버리고 벌떼 공동체의해석을 잘 듣고, 묻고 갈 수 있도록
2. 동생이 이번주도, 앞으로의 예배에도 계속 참석하여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3. 아버지가 잘 회복되어서 회개하고 예배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수 있길
- 다님
1. 잠을 잘수있도록, 생활예배가 회복되길
2. 지금의 이시간을 덜 아프고 누리며, 하나님의 쓰임이 인정되길
- 지윤
1. 건강회복 (어지럼증, 체력)
2. 생활예배 잘 드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