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3. 열왕기하 4:18-30 '평안입니다' - 김양재 목사님
1. 하나님의 사람을 믿음
수넴 여인의 부부가 나이도 많은데 아들을 낳고 정말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가정의 모습으로 이제 들판에 나가서 아이가 놀았음. 그러다가 아이가 아마 일사병이라도 걸렸는지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다가 죽게 생겼음. 늘 지혜로운 수넴 여인은 평소에 남편에게 신뢰를 얻었는지 남편이 아이 엄마에게 데려가라고 함. 그래서 엄마에게 데리고 왔는데 아이가 죽었음. 이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오늘 보겠음
그녀는 먼저 전자동으로 성전으로 생각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그 침상을 딱 생각했음. 그리고 찾았음. 그 침상에 죽은 아이를 두고 남편에게 가서 말함.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오겠다고 함. 아들을 주실 때도 지혜롭고 아이가 죽었는데도 지혜로움. 장차 받을 환란에 대한 연습을 잘해서 그런가봄
그런데 만약 이걸 남편에게 먼저 말했으면 어찌 됐을까? 당장 엠블런스 불러, 내가 대학병원에 전화해놓을테니까 빨리 가. 그렇게 지금까지 하나님, 하나님 하더니 꼴좋네 했겠음. 이 남편도 안식일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 사람에게 가냐고 함.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계속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극존칭을 쓰는데 남편은 그 얘기를 듣고도 그자한테 왜 가냐고 함. 늘 큐티하며 하나님께 묻다보면 이런 것이 분별이 됨. 그래서 남편에게 평안을 빌어요. 히브리어로 샬롬임. 아이가 죽었는데 평안입니다라고 한 것임. 이런 것이 훈련이 되어야함. 문제가 계속되는 인생 가운데 어떤 경우에도 샬롬은 별일 아니에요, 걱정마세요, 평안입니다 이렇게 읊조릴 수 있겠는가?
문제는 왜 주시는가 항상 반복되는 훈련 가운데 성숙 지수가 높아가는 가운데 점점 많은 사람을 감당해가라고 주시는 것임. 그러니 성도는 이런 사건이 딱 오면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할 사명이 있음. 태양을 본 사람은 어떤 사건에서도 사명이 있기 때문임.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고,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임
이걸 남편에게 속여야겠다는 의도가 아님. 아무리 내 남편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할말이 있고 안할말이 있음. 믿음이 약한 남편을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평안이에요, 샬롬을 외치는 것임. 샬롬은 내적, 외적으로 닥치는 근본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함. 이 남편은 엘리사의 게스트 하우스를 다 지어줄 정도로 수넴 여인을 사랑했음. 그리고 그 집이 내 집에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대단한 남편임. 그런데 지체가 되지 못함. 그래서 아들이 죽은 얘기는 할 수가 없는 것임
남편은 수넴 여인의 말을 누구보다도 잘 들어주는데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 그러나 여인이 탁월하지만 남편에게 맞춰야 게스트 하우스라도 짓지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상대방과 상관없이 자기 얘기만 하면 게스트 하우스는커녕 아들도 살리지 못함. 구원의 열매가 없음. 세심한 배려는 이렇게 이어지는 것임. 남편은 믿음보다는 성품이 크다고 보여짐. 여러분도 하나님보다 솔직히라는 미명 아래 기도 받고 처방받아야 할 일을 그르치게 할 수가 있음. 그래서 여인의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상대방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구원의 디테일임
믿음 없는 남편에게 억지로 평안이니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태양을 본 사람의 그 확신을 가지고 평안이에요 웃으면서 아이가 죽었는데 평안이에요 이거 보여줘야 함
우리는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음.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확신 있게 평안이에요. 인생에서 내 믿음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가 믿는 대상이 중요한 것임. 하찮은 내 믿음 뭐가 중요한가. 그 대상이 확실치 않아서 아들을 살리지도 못하고 낳지도 못하고 구원의 열매도 없는 것임
남편에게 샬롬을 외쳤던 여인은 나가자마자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 나귀 타고 가면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촌음을 아끼며 사환 보고 빨리 달려가라고 함. 다급하고 갈멜산까지 거리가 꽤 멀음. 구원이 중요한 사람은 연기를 잘할 수밖에 없음. 교만한 사람은 이런거 깨닫지도 못하고 진실한 사람이 왜 연기를 해? 솔직해야지 이럼. 이게 못 알아들어서 그러는 것임. 아이 아빠를 사랑하면 그 아빠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정말 웃겨 이렇게 되는 것임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배우가 되어야하는데 설명이 안되는 부분임. 수넴 여인 계속 연기함. 그래서 구원이 디테일이고 떨림으로 세심한 배려를 상대방에 따라 하는 것임
남편에게 아들이 죽은 것을 밝힐 수만 있었다면 당연히 아들을 데리고 왔을 것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수넴 여인이 아는 것임. 엘리사에게 달려온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 것임. 그때 하나님 믿는 사람이 희귀함
세상은 이런 여인을 앞 다르고 뒤 다르다, 약장수 같다, 어떻게 죽은 아들 앞에서 평안입니다 할 수 있지? 저도 죽은 남편을 두고 아니 무슨 큐티를 해? 구원받아서 감사하다고? 그랬는데 남편 영접했다고 그 자리에서 너무 기뻐했다고 함. 그런데 젊은 여자가 남편이 죽어 가는데 지금 기뻐했다? 이게 이해가 안됨. 그래서 수넴 여인이 이해가 안되는 것임. 별소리 다 들었기 때문에 수넴 여인 이해가 됨. 유교적인 우리나라에서 저의 행동은 너무 이상하고 기이하기까지 함
적용질문)
사건이 생겼을 때 누구를 제일 먼저 생각하나요?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와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중 어떤 말을 자주 합니까?
구원을 위해 연기를 해본 적이 있나요? 아니면 연기하는 사람을 진실치 못하다고 비난합니까?
2. 하나님의 사람에게 털어놓음
여러 도시를 순회하던 엘리사가 왜 당시에는 갈멜산에 거했을까? 우리도 잘 모름. 그런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여인이 엘리사의 거처를 알고 있다는 것임. 자신의 스케줄을 알려줄 만큼 긴밀한 관계인데 하나님과 그만큼 소통이 되는 믿음이다라는 뜻임. 그 당시 갈멜산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친 종교적인 성지였음. 그곳에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음.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인 것이 다 맞아떨어짐. 멀리서도 수넴 여인을 딱 알아봤음. 초하루나 안식일도 아닐 때에 여인이 급하게 갈멜산을 오르는 모습을 발견하니까 걱정이 됨. 그래서 게하시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함. 여인이 평안하냐,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세 번이나 반복해서 정말 평안을 원하는 것임. 여인이 게하시를 통해서 물어본 그말에 또 평안하다고 답을 함.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이 집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지금 간파하고 있음.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때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전에 엘리사를 통해 들려주는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새록새록 들리는데 계속 샬롬을 해주니까 지금 그말이라도 해주니까 너무 감사한 것임. 샬롬을 계속 물어봐주는구나. 계속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호칭하고 있음. 그러나 이 평안을 믿지만 수넴 여인은 게하시에게도 남편에게처럼 평안입니다라고 연기를 함. 진실한 제자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진실하지 못함. 엘리사 제자 게하시는 당장 다음 장에 야망으로 문둥병에 걸림. 수넴 여인이 이것을 미리 분간을 했음. 게하시가 진실하지 못한 것을 알았음. 사심이 있음. 이렇게 분별해내는 것이 너무 중요함.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면 시간을 낭비할 것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우리 아들에게 와줘야 한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와줘야 한다고 한 것임. 남편에게도 함구를 하고, 게하시에게도 함구를 하고, 내 죽어가는 일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함구를 해야 할 때가 있음. 그래서 세심한 배려로 늘 할말 안할말을 분별해야 아들을 낳고 평안해지는 것임
이 여인은 계속 함구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니까 정확하게 대상을 찾았음. 이것이 중요함. 내가 마음껏 말할 대상이 게하시도 아님. 지금 게하시가 수넴 여인을 물리쳤음. 엘리사에게도 게하시가 아니고 수넴 여인이고, 수넴 여인도 남편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였음. 다 털어놓을 지체가 한사람이도 있어야 평안임. 그렇다고 남편하고 안사는가? 게하시하고 같이 안가는가? 믿음의 분량이 각각 따로 있음. 그들에게 할말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할말이 따로 있는 것임. 하나님의 사람을 보자마자 여인이 그 발을 안았음. 아마 통곡했을 것 같음. 엘리사도 그의 영혼이 괴로워한다고 함
쓰고 쓴 사건과 상처와 마음을 남편에게 쏟았더라면 가정이 깨졌을 것임. 동네 이웃들에게 쏟았더라면 이야깃거리만 되었을 것임. 게하시에게 쏟았다면 다른 목적으로 이용만 당했을 것임. 여인 촛불들 아닌 태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음. 오직 하나님 사람 앞에 와서야 그 쓴 마음을 털어놓는 것임. 주님도 여인이 괴로운 이유를 엘리사에게 숨기셨음. 여인이 직접 자기 입으로 털어놓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심. 사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고, 더 잘 설명해주실 수 있음. 그런데 여인이 직접 털어놓게 하심. 자기 말로 쏟아내는 것 자체가 치유라는 것을 주님도 인정하시는 것임. 여인이 엘리사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언제 내 주께 아들을 구했어요?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지금 하나님 사람 엘리사에게 말하지만, 이건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인 것임. 너무 욕하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 막 기도하다가 남편이 딱 오면 평안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임. 연극을 해야 함. 구원이 안타까운 사람은 이것이 됨. 엘리사에게는 말해도 받아줄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임. 야다의 하나님을 같이 경험했기 때문에 설득이 필요 없음. 한마디만 하면 딱 아는 것임. 이게 최고의 인간관계임. 사실 행복은 편하고 대인관계가 잘되면 그거보다 행복이 없음. 행복은 대인관계가 잘되는 것임. 남편 못 알아듣고, 게하시는 뒤끝이 있음. 단어 하나에 오해를 해서 용납 공동체가 못되고 오해 공동체가 되는 것임. 여인 입장에서 너무 옳은 말임. 아들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아들을 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농담도 예술이시네요 하면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주시고 나서 다 키우기도 전에 갑자기 데려가셨다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하나님 탓을 했음. 여인의 마음이 씀.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여인은 내 인생에 아들은 없다, 다른 것 다 있어도 이제 인생에서 바랄 소망이 없다고 인정하며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생각도 못한 아들을 주셨음. 그 아들이 인생의 소망을 줬다는 것임. 평안할 수 없는 인생이었는데 아들이 오니까 너무 평안할 줄로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임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 가짜 평강을 주셨다는 아주 찢어지는 마음을 토로하는 외침임. 이 마음을 털어놓는 털링을 엘리사 외에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누가 들어줄 수 있겠는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향해 말씀을 외치고 심방 다니고 환란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엘리사니까 그렇게 쏟아놓는, 그 쓴 마음을 들어줄 수 있는 것임
엘리사에게도 수넴 여인이 지체고, 수넴 여인에게도 엘리사가 지체가 되었음. 이거 잘못 듣고 모두 담임목사한테만 오면 설교 잘못 들은 것임. 그 당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희귀했음. 우리들 공동체는 이렇게 쏟아내는 털링을 들어주는 공동체임. 들어주는거 잘하는 목장이 최고인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말을 목장에 와서 다 털어놓음. 진짜 공동체라는 증거임. 물론 공동체에서 실수할 때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겠음. 이런 연약한 부분도 우리가 함께 나누면서 성장해야할 부분임. 누구든 처음에 자기 말하기 바쁨. 남의 말 들을 겨를이 없음. 그런데 계속 자기말만 하는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됨
여인이 내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했냐, 어떤 사람한테 이렇게 울분을 토로해야 되고,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평안입니다 거꾸로 적용이 됨. 나에게는 모두가 와서 평안입니다 라고 하면 내가 편하지 않은 사람이네 이렇게 적용하면 아주 좋은 학생임
아무데서나 죽겠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그건 대인관계를 망침. 편하지 않은 사람은 대인관계가 될 수가 없음. 예수 믿으면서 이런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음
할말 안하고 안할말 하고 이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임. 뒷담화 하지 말고 말 옮기는거 하지 말고 그걸 공동체에서 배우는 것임. 큐티를 하다보니까 지혜가 샘솟음. 성숙한 집안 분위기, 목장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수넴 여인 같은 사람 한사람 있으면 억만금을 주고도 못사는 공동체가 되는 것임. 예수 믿는데 왜 이렇게 덕이 없냐 이런 얘기 들으면 되겠는가. 조용히 하다가 이렇게 소리 지를 때는 질러야함. 그러나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바람. 내가 언제 아들 달라고 했냐고 그랬더니 엘리사가 알았다고 게하시를 보낸 것임
적용질문)
나는 목장에서 내 마음을 다 털어놓습니까? 털어놓지 못한다면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지체의 나눔을 잘 들어줍니까?
'목사님은 좋은데 목자들은 싫어요'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3. 하나님의 사람을 떠나지 않음
게하시에게 빨리 가라. 유람하면서 가지 말라. 내 지팡이를 가서 얼굴에 놓으라고 하는데 가다가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도 하지 말라 그런데 게하시는 인사를 함. 인사하거든 대답하지도 말라고 했는데 대답함. 그리고 엘리사의 지팡이를 너무 자랑함. 내가 엘리사의 후예다 이러면서 자기를 뽐내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앎. 그래서 대답하지 말고, 인사하지 말고 다 알아도 안되는 것이 있음
수넴 여인은 끝까지 엘리사여야만 한다고 했음. 게하시는 겉으로는 엘리사 제자로 경건해보이지만 결정적인 구원의 일은 결국 야망이 있기 때문에 왜곡해서 듣고 일이 안되게 하는 사람임. 엘리사와 수넴 여인은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게하시는 그렇지 못해 보임. 그런데도 엘리사가 선지생도 중에 제일이라고 고른 사람이 게하시임. 수넴 여인이 분별을 훨씬 더 잘하는 것으로 보임.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축복을 받아야함. 그만큼 엘리사 밑에도 이런 사람이 있는 것임. 수넴 여인의 남편도 그런 것임. 그렇다고 안사는가? 우리한테 지혜가 필요한 것임
여인이 부탁하는 모습이 그냥 엘리사가 엘리야를 쫓아갈 때 모습 같음. 엘리야가 엘리사 보고 가라, 가라 하니까 절대 내가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엘리사가 이 여인이 떠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자기 마음하고 같구나 그것을 헤아리게 된 것임.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게 되었음.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그것만이 진정한 평안임을 믿었기 때문임. 아들이 죽은 상황에서도 남편을 배려하고, 사실을 감추고, 게하시에게도 감추고,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야하는지 정확한 근원에 소금을 뿌려야 되는데 이 여인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수넴 여인의 문제의 핵심은 아들의 죽음이 아님. 평안이 없음임. 그래서 평안을 부르짖음
수넴 여인은 아들이 생기니까 하나님 자리에 아들이 가있는 것임. 근데 그것은 생각 못했던 일임. 평생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너무 하나님을 섬기다 너무 너무 좋은 아들이 생기니까 아들 평안에 취해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떠난 것임. 그것을 이제 깨닫게 된 것임. 그래서 멀리서 여인을 본 엘리사가 가족 모두의 평안을 급하게 물었음. 엘리사가 살짝 수넴 여인의 가족이 걱정되었음. 예전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음. 아들이 너무 좋아서, 아들 평안을 만나서, 진짜 평안을 지금 놓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던 아들이 한순간에 죽는 사건이 오자, 우리에게 큐티는 이때 발휘를 하는 것임. 여인이 think를 딱 한 것임. 내 삶의 결론임. 어떤 사건도 내 삶의 결론임. 내가 헛된 평안을 구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평안을 누리려고 했구나. 그래서 샬라 잘못된 희망으로 속았다는 말을 하는 것임. 엘리사한테도 얘기를 하지만 내가 나한테도 속았다고 함. 수넴 여인도 아들의 기쁨을 몰랐음. 그래서 잘못된 희망으로 속았다는 말을 하는 것임. 내 자신에게 속았다. 진짜 평안은 오직 하나님 곁에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온다는 것을 기억했음. 엘리사에게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가서 우리 아들을 살려주세요 라는 말도 되겠지만, 사실은 이런 죄악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내가 주님을 결단코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고백한 것임. 엘리사가 그 경험했기 때문에 이 말을 알아들었음. 이런 평안이 임했으면 좋겠음
적용질문)
잠시 아들이 주는 평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주시고자 주신 사건은 무엇입니까?
잠시의 아들은 무엇이고, 갑자기 온 사건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까?
박소영
1. 가짜 평안에 속지 말고 진짜 평안이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2.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고 쉼을 잘 누리기를
김경은
1. 잠시 아들이 주는 평안이 내 동굴에 들어가는 것인데, 잠시 평안 쫓지 않기를
2. 가면 벗고 진정한 평안 누리기를
이소영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닌 말씀 안에서 평안을 찾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