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2 주일설교 <팔복산의 온유> 마태복음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함 너무 좋아하지만, 팔복산의 온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팔복산에 잘 올라가고 계십니까? 참 낮은 구릉언덕같은 산이지만 참 올라가기 어려운 산같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쉽게 갈 것 같지만, 진짜 가기 힘든 결혼/자녀/회사 등의 목적지가 멀리 있어 보입니다.
먼저 그 산을 예수님께서 가셨기에 우리는 제자로서 선택이 없네요. 하나님 나라 제자만이 누릴 수 있는 조건적 복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은혜로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간절히 우리가 누리길 바라시지만 우리가 거절하는 복이 팔복입니다. 팔복산에 올라가며 온유함은 중요한 조건인데요, 온유함 없이는 골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온유에 대해 살펴봅시다
- 온유함은 십자가로 훈련되어져 가야 합니다. (5절)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 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이름 중에 온유가 많습니다. 그렇게 지어놓으면 평생에 부담될 것 같아요. 사랑이라던지.. 자고로 이름은 겸손하게 지으라고 하죠? 옛날부터 개똥이 말순이 ampbullampbullampbull 귀할 수록 그렇게 지으랍니다. 최고의 이름은 큐티하며 짓는 적용 이름입니다. 온유는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얼굴이 공격적이지 않고 배려하고 표정과 말씨가 고운 것이 온유라면 우리는 팔복산에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 오는데도 얼마나 깨어서 왔습니까? 교회가라 교회가라~ 오면서 싸우고, 차 안에서 싸우고, 가면서 싸우고 ampbullampbullampbull 이런게 온유라면 팔복은 물건너 갔습니다.
온유로 번역한 헬라어 프라우스는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을 누린다고 합니다. 이걸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아나윔으로 온유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이사야 1:6처럼 가난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구브리다 와 같습니다. 겸손한 온유한 등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를 아무 차이없는/똑같은 내용을 말만 바꿔 표현했을까요? 팔복은 다 같은 성정이라고 했지만, 하나씩 달리 말할 때는 강조점 - 포인트가 다릅니다. 자기의 가난을 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보여주나? 그것이 온유입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내가 가난함을 아는 사람은 타인에게 온유함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제 온유한 자는 가난한 자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주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뜻에 길들여져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온유의 뜻은 이런 게 있습니다. 들판의 야생마가 있는데, 정말 앞뒤로 길길이 뜁니다. 그래서 사납기에 조련사에게 맡깁니다. 힘들게 훈련하여 이제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오른쪽 왼쪽 전속력! 채찍으로 치며 바람같이 달리는 그 모습이 프라우스 온유의 뜻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유와 다릅니다. 우리가 물론 속이 달라지면 겉도 달라지기도 하죠.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라 그 능력이 뛰어나고 강하지만 그 거친 부분이 잘 다스려졌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부드러움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다스려져야 합니다. 요즘 BTS 다음 뉴진스가 가장 핫합니다. 인터뷰에서 이러더라구요. 즐기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걔네들이 10대인데, 1류로서 연습은 지옥훈련 방불하더이다. 관절약부터 다 챙겨먹더라구요. 마찬가지로 훈련하지 않으면 말은 뒷발짓할 수도, 거칠게 물수도 있습니다. 온유는 힘이 없음이 아니라, 힘이 있으나 그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무엇으로?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입을 닫는 것입니다. 이혼할 수 있으나 이혼하지 않는 것. 말 할 수 있으나 말 하지 않는 것. 내 생각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함입니다.
적용/
여러분의 온유는 성품입니까? 말씀으로 통제받는 온유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엄부자모입니까, 엄모자부입니까?
-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5절)
땅을 준다니까, 아주 귀가 번쩍 열리죠? 부동산 등기를 내 앞으로 해준다는 뜻일까요? 그들이 기업으로 받는 땅은 무엇일까요? 유산입니다. 잠깐 있다 사라질 우리에게는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것만 기업입니다. 이 세상 땅은 몇 중으로 걸어놓고 땅을 못사게 해도 지진한번에 다 무소용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도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있는 땅에서 나의 분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에 쫓겨 피난 갈 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저주를 하는데, 네가 사울을 죽였기에 피를 흘려 아들이 반역하고 화를 자초한거야! 이렇게 저주해주니, 사울 쪽에 말로는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다윗 중 다윗이 예수의 조상입니다. 예수님과 맞서는 건 결국 사단이고 사울은 사단입니다. 사단은 그래서 맞는 말 같은 말을 합니다.
사울과 다윗. 믿음 없는 사람이 보면 똑같지만, 두 사람 중에 사울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내 가난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제일 어려운게 사람 분별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분별하지 못합니다. 내 구속사가 없으면 분별이 안됩니다. 내 보기에 좋은 것만 좋아보인다라는 점입니다. 외모 ampbull 스펙 ampbull 학벌 등등. 사울과 다윗은 완전히 사탄과 예수님 관계입니다.
날마다 결정해야 하는 우리 인생에 정말 결정은 중요합니다. 이 저주의 욕설을 우리는 듣기 힘듭니다. 작은 한 마디도 평생 남습니다. 우리는 평생 이런 말이 상처로 남습니다. 이때 응징할 힘이 있다면 목을 메고 복수하고 싶지만, 이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지도자 자리에서 얼마든지 혈기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내 아들도 나를 죽이려하는데, 하물며 사울의 베냐민 사람들이랴?! 그들은 저주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다윗이 지금 자기 자식을 죽일수도 안 죽일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타인을 대하는 게 온유입니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으니 시므이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시므이 속의 가난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과 온유는 같은 뜻 맞습니다.
이때를 이후로 시편 37편이 쓰입니다
[시편 37:7]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유의 반대 말은 악함입니다. 온유는 말씀이라면, 악함은 말씀이 없는 것이겠죠. 그러면 악인의 특징은 자기 생각, 자기 힘으로 세상을 주무르려 한다는 것이죠. 자기 손에 있는 칼을 마구 휘두르며 하나님이 없다며 당당하게 외침입니다. 자기를 부자로 여기니 애통함도 없고 교만합니다. 말씀이 안들리면 그러므로 악인입니다.
우리도 사실은 다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육이 무너지는 고난을 허락하셨고,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 후 돌이켰는데 그 돌이킴조차 우리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생각하니 갈등되어 바닥에 붙어 웅크리고 절망할 뿐입니다. 아들을 살리자니 내가 죽고, 아들을 죽이자니 나라가 망합니다. 돈이 없어 가난한 게 아닙니다. 이 상태니까 가난한 것입니다. 이 가난 할 때, 웅크리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손 잡아 일으켜주셔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가난 할 때 목장에서 손 잡아 일으켜주셨다고 다들 합니다. 다들 나를 한 번 불러줬다고 ampbullampbullampbull 누가 뭐라고 해도 그 기막힌 상황을 생각하면 주님께 길들여지길 너무 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는 이런 배경으로 쓰인 것입니다.
37:11절 땅 차지하면 풍부한 화평이라고 합니다. 등기부 소유가 내 것이 아니어도 풍부한 화평으로 즐거워 하는 사람은, 이 땅을 얻었다고 합니다. 내가 나를 욕하는 저 원수를 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있어 인내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하지 말랍니다. 목장에서 하지말랍니다. 그럴 때 듣는 것입니다. 너무 사소한 것 같지만, 야생마 같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맞춰가는 것. 이것은 믿음이 있어야 맞춰갈 수 있습니다.
내가 저주하지 말라니까 잠시 후 시므이는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십니다. 우리의 일을 우리가 복수해야될 것 같지만, 온유하게 행할 때 복수는 남이 해줍니다. 하나님이 해줍니다. 다윗은 그렇게 온유함으로 이땅에서 천국의 모형인 다윗의 왕국을 세웁니다. 온유하니 바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죠. 천국을 가지면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남편이 제 옷에 샴푸 한 통을 다 부은 사건에서, 저의 조련사이신 하나님의 말씀. 에스겔 말씀, '벙어리가 되라' 그 말씀 앞에 내 생각을 꺾고 가난한 마음으로 입을 그저 다물었습니다. 그게 온유입니다. 온유는 내 성품이 변화됨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것. 내 생각이 조련사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련됨입니다.
나의 비참함을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렇게 훈련되니까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저주하게 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온유를 부드러움이 있으나 배후에는 강철과 같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을 소망하기에 우리는 내 생각을 꺾을 수 있습니다.
적용/
부동산 때문에 좋아요? 너무 분해요? 너무 아깝습니까?
부동산과 천국 중 어디에 더 관심이 갑니까?
나는 겉으로 온유합니까, 사납습니까?
우리는 다윗과 사울 중에 분별이 절대 안됩니다. 사울은 왕이고 다윗은 목동이었으니까요.
- 가족간의 온유가 가장 힘든 온유입니다.
가장 온유 하니까 땅을 주셔야겠는데, 모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죽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백성이 모세를 돌로 치려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백성이 모세를 치려고 난리치는데, 그 때 형제인 미리암과 모세를 비방할 때 가장 온유했다고 합니다. 40년 광야생활하고 바로와 싸워 출애굽했는데, 민족 해방을 위해 동고동락했던 아론이 딱 비방한 것입니다. 백성이 돌로치려할 땐 이런 가난한 심령이겠어요? 아론과 누이가 비방할 때가 가장 가난해질 때입니다. 가난의 정도가 완전히 찼을 때입니다. 그때 온유가 승합니다. 식구가 나를 괴롭힐 때 가장 큰 온유가 올라옵니다. 가장 힘든 싸움이 백성들이 돌로 치는 싸움이 아니라 집안 싸움입니다.
도대체 이들이 뭘 비방했나요? 여호와가 모세하고만 말씀하냐, 우리하고도 한다. 어떻게 모세는 이방여자인 구스 여인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입니다. 구스여인은 문자적으로 가나안 여인은 아니었는데, 후처를 취한 것입니다. 모세는 더구나 애굽과 가까운 구스에서 컸습니다. 출애굽기 9:20에서는, 10개 재앙을 내리시는 권능을 보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 외에 잡족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옆의 족속들이 같이 출애굽했습니다. 그들은 더 겸손하니까 경건할 수도 있습니다. 이방 잡족들 중에는 믿음으로 결단한 여성들이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서두에는 다말, 밧세바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속사로 앞뒤전후 분별해야합니다. 구스여인을 분별없이 이방인이라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모세뒤에서 뒷담화하며 백성들을 이간질 하는 반대세력질이었습니다.
1장에 비방했는데, 2장에는 이 비방의 얘기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을 때, 큐티하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가장 큰 응답입니다. 그래서 여전한 방식의 응답이 가장 큰 응답입니다.
모세의 영적권위에 눌려있습니다. 인내하기 어렵습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80년을 믿었던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물러가실 때도 있지만 갑자기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인내와 갑자기는 연결됩니다. 남편의 구원은 갑자기 이뤄졌습니다. 끈질기게 인내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왔습니다. 그러나 이 스토리를 풀로 들으면 갑자기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가난과 온유는 같으면서 다른 말인것처럼 갑자기와 인내는 다른것 같지만 같은 말입니다.
이 비방에 대해서 모세는 또 온유합니다. 말려들지 않습니다. 나에게 실제적으로 죄를 지적할 때 듣는 게 온유함입니다. 거지같은 나를 욕좀 하기로서니, 듣지 못하는 우리는 목장에서 얘기합시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갑자기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그때는 기다려야합니다. 내가 가난하지 않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십자가의 온유입니다.
내가 가진 본래의 마음으로는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면 온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내 성품이 변화됨이 아닙니다. 아더 핑크는 하나님에 대해 자기 고집을 꺾는 것이 온유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합니다. 온유한 자는 내 가난을 보는 사람, 웅크리고 거지같은 내 모습을 보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니까 온유로 나갑니다. 남에게 칭찬받고 조롱받을 때가 온유함의 표본입니다. 칭찬받을 때는 내가 선한 게 없으니까 들을 말이 아니네 해야하고, 악한 내게 조롱하는 말에는 반응합니다. 그렇다고 칭찬받는데 내가 선한 게 없다고 들을 얘기 아닙니다! 하며 끊어내면 또 아닙니다. 속으로 하셔야됩니다.
적용/
가장 비방하고 싶은 사람이 가족입니까, 공동체입니까, 회사에 있습니까
나의 가난이 너에게 온유로 나타나는 비율이 몇 프로나 되고 있습니까?
[나눔]
나눔질문
- 내가 못참는 남에게서 포착되는 가난함 - 그것이 바로 나의 가장 약점인 것을 인정하는지?
- 어떻게 그 가난함을 길들이는 적용하겠는지?
A.
- 좋아했었던 여자사람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관계의존적이다. 그래서 남사친이었다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정도로 선을 잘 못 지키고 관계 자체에 소유욕이 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 오해하기가 쉽다. 바로 이 지점을 왠지 한번 말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해도, 중요하게 들을 것 같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또 반응하면 그것대로 마음이 상할 것 같다. 또 나도 말하는 지혜가 많지 않아 고민이된다.
- 말씀으로 생각해보니, 내가 말 하고 안 하고는 별로 안 중요하고 정말 왜 그렇게 말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동기를 잘 생각해봐야겠다.
B.
- 가족들이 떠오른다. 동생이 많이 아팠다보니 항상 동생에게 가족들의 케어가 쏠려있었다. 나도 받고 싶은 케어가 많았는데 왜이렇게 괘씸하고 아쉬운지 모르겠다. 제일 아쉬운 점은 내가 그 당시에 돈이 부족해 삼각김밥 먹고 다닐정도로 긴축해서 살았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 보상심리가 많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동생이 나아짐에따라 요즘에서야 나를 신경쓰는 것 같은데 지금은 마음이 그것도 짜증이 조금 난다. 마음이 이러니까 교회도 잘 안 나오고싶고 그렇다.
- 교회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나누기.
C.
- 나는 본부장님한테서 가장 내가 가난함이 보이는 사람이다. 성인 ADHD를 앓는지, 스케쥴이 왔다갔다 안지켜지는 일도 많고 컨펌했던 일을 갑자기 처음부터 다시 시킨다던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습을 자꾸 보여줘서 실망스러운 가운데 사건이 하나 찾아왔다.
지하철광고 제작 건으로 나는 본부장님을 도우려고 했으나, 본부장님은 따로 업체를 선별해서 공유없이 준비를 했고 마침내 공개가 될 땐, 내가 작업하지 않은 왠 생뚱맞은 광고가 제작되어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니, 이것을 설명하는 우선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말을 다 지나서 해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이 사람에게서 참 그 마음에 가난함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 본부장님을 2달넘게 무시하고 미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수련회 마지막날 공황이 왔다. 공황이 다시 오니 마음이 급격히 가난해졌고 그런 상태에서 면담을 하니 면담내용보다 본부장님 마음을 먼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본부장님은, 회사생활은 나보다 오래하셨지만 참으로 사람 마음 얻는 법이 서툰 것 같다. 자신을 도와줄 팀원들이 여기에 있는데 도구로만 생각하는 본부장님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팔복산에 가고, 팔복산의 온유함에 대한 말씀까지. 나의 가난함이 보이니까 비로소 남의 가난함도 보였고 그것으로 그 사람 탓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