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5 주일설교 <팔복산에 갑시다!>
본문 마태복음 5:1-4
- 김양재 담임 목사님
성령의 우리들행전으로 쓰라고 했는데 다음 제목을 뭐라고 할까 하다가 다음이 마태복음이라 주님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5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팔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팔복산으로 불리고 그 위에는 팔복교회가 지어져있다고 합니다.
1. 제자가 돼야 합니다.
(1-2절) 4장 마지막에 예수님이 고치시는 능력을 보이시며 각종 무리가 주님을 쫓았습니다. 육신의 병도 셀 수 없으나 마음의 병도 너무 많습니다. 안면기흉으로 태어나 얼굴 전체가 수포로 덮인 식구가 흉하다고 때리고 음식도 못먹게 치아를 다 뽑았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병자입니까 식구들이 병자입니까?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병행 복음
에이로는 보다를 넘어 알다, 관찰하다, 자각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병 낫기만을 바라는 그들의 슬픔을 보시면서도 그들을 정확히 관찰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나온다고 하십니다.
마태는 앉아서 가르치시고 누가는 인자로 오신 예수님으로 표현하여 서서 가르치신다고 표현하였는데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주제별로 누가는 시간순으로 기록하였기에 오늘 본문의 제자는 열두사도를 중심으로 한 제자들로 보여집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수준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서도 서로 그들은 높은 자리에 앉겠다며 자리싸움을 합니다. 그러니 양육 처음은 안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르심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재능도 없고 양육도 되지 않았지만 주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답지는 않아도 제자임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떠나 주님을 따라갑니다. 오르막이니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말씀이 들리는 복인데 말씀이 들리려면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인기와 대접이 있는 무리가 더 편할텐데 예수님이 가시니 떠나야합니다. 무리가 좋아도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시끄러운 소리만 많습니다. 내가 편한 곳을 떠나 올라가는 것이 제자로서 내딛어야 하는 첫걸음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라야하고 스승의 말을 듣고 가야합니다. 그렇게 나온 제자들에게 주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이는 미완료 동사로 그만큼 계속 팔복의 말씀을 강조하셨다는 것이고 이것이 제자훈련의 핵심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구속사의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혁명적인 복의 개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제자훈련에 집중하신 것처럼 저도 교회가 생기고 제자훈련이 되니 놀랍습니다. 모여서 나누는 소그룹이 뭘 나누나 알고 싶었는데 이제 우리들교회가 제자들의 교회가 되어감을 느끼며 감격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는 신체적으로 가까이 접근한다는 의미인데, 이스라엘에 십계명이 전해질때 모세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에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문턱이 낮고 영육간에 친근한 복음을 예수님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배의 자리인 팔복산 현장 예배당에 올라와 예배하고 있습니까?
#팔복산에 올라오기를 방해하는 더 편하고 좋은 무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 수련회를 열 수 있는 곳을 찾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 해외아웃리치 3년만인데 기도 부탁드립니다.
* 목사님 나눔 - 남편에게 순종했으나 교회는 꼭 갔습니다. 2박 3일 여행을 가도 주일이면 꼭 교회를 갔습니다. 마침 주일에 비가 오니 교회 간다고 하니 데려다줬습니다. 그런데 계속 비가 오니 남편이 모두 데리고 교회를 왔습니다. 그래서 전부 헌금을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죄책감때문인지 뭐만 있으면 그렇게 때마다 헌금을 했습니다. 저는 반주를 자청헸었습니다. 그 모습에 철옹성같던 남편이 마지막 순간 영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에는 같이 노는 주일이 화목해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모습을 보며 내 배우자와 자녀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2. 가난한 자가 가는 곳입니다.
(3~11절) 팔복은 여덟까지 복이 아닙니다. 아홉 문장은 같은 구조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복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합니다. 시편과 같습니다. (마카리우스 = 바라크 = 아쉐레 = 복있는 사람)
예수님은 복에 대한 개념을 가장 먼저 던지십니다. 복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너희 가난한 자 라고 합니다. 복과 가난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 같습니다. 가득차야 할 복복 자가 어떻게 텅빈 가난과 같겠습니까. 그러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에 제자들의 머리와 마음에 지진이 납니다. 그 뒤를 이어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미래가 아닌 지금 이순간이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난의 복은 뒤에 이어지는 모든 복들을 풀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이미 이어진 구원, 51:49로 넘어갔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으로 나아갈때 팔복의 복이 복음서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팔복의 복은 이렇게 해야 천국을 간다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구원을 얻기 위해 달려나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헬라어로 페레스는 상대적 가난이고, 또 하나는 푸토코스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심령의 가난함 절대적 가난함을 뜻합니다. 수동태적 의미의 동사입니다. 자신이 가난해도 인정이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열등감으로 교만합니다. 그러니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져야지의 능동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밖에 바라볼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전적 빈곤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 겸손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통치받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 없이 겸손할 수 없습니다. 성품으로 겸손하면 하나님 못 믿습니다. 너무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이 100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의 겸손과 하나님을 아는 겸손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누추함을 보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으나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인생이 이미 제자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와 달랐습니다.
* 오늘이 큐페 마지막 집회입니다. 오늘을 잘 들어야 클로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자고 있네요? 근데 이해를 합니다. 자도 여기서 자세요.
그런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니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같은 자는 가난이 선인줄 알고 왜 향유를 가난한 자를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향유를 그렇게 쓰냐며 비합리적이라며 합니다. 사람들이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는 그 속에 사탄이 임재합니다.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은 예수님이 구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평가를 해댑니다. 유다같은 사람들은 늘 행위구원을 외치는 것입니다. 팔복은 행위구원이 아닙니다. 팔복의 가난이 솔로몬보다 다윗에게서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유다의 후손이자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닌 유다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계속 구속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가난에 절망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소유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51:49로 넘어 왔는데 이제 홍해바다를 건넜는데, 건너고 나서 51에서 100까지 가야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너무나 주님을 사랑하는데 내가 그 기준이 못미치는 것에 절망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왜 나는 욕심이 많지, 안되는 것이 많지 하며 옛날과는 다른 고민을 하니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이혼을 하고 싶은데 이혼하지 말아야함을 아는 그 가난함, 애통함과 탄식함이 축복이자 팔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주눅이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무 사랑하니 기쁘기도 하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먼 당신처럼 경외하니까 이름도 못부르는 주눅이 들어야 합니다. 너무 거룩하시기에 주눅이 듭니다. 우리는 대단한 부자 앞에서도 주눅이 들고, 예쁜 연예인 앞에서도 주눅이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너무 가난한 상태, 내가 얼마나 그런가를 알아야 하는데 아무리 팔복의 설교를 해도 여러분은 가난을 너무 좋아하지 않고 나를 가난해질수밖에 없게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런 기도제목이 없어지는게 우리의 기도제목이라 이겁니다. 내가 가난해질수 밖에 없는 환경이 바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가 가난하게 되라고 온 그 환경이 정말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땅에서 가지더라도 엄청난 천국이 내것이니 가난한 것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이 축복이고 가난이 축복 맞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겸손할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할 수 없습니다.
* 청년부 출신 결혼한 집사님 - 이혼하고 싶은 마음을 목장이 아니라 네이버에 올렸음.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합니까? 그냥 가난합니까? 부자입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합니까?
#여러분이 가난해서 하나님이 쩔쩔매시면서 설명하시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3. 애통한 자가 돼야 합니다.
(4절) 우리가 다 애통을 착각합니다. 제가 강당에서 울면 과부가 되어서 슬픈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승이 좋지 저승이 좋겠지 하며 여자는 남편이 있어야 한다며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평생 있습니다. 애통은 슬픈 장면에 의해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은 때
- 다윗: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겠다하며 슬피 울었음.
- 군대장관: 왕을 반역한 자인 압살롬을 위해서는 울고 왕을 위해 충성한 자는 미워하냐고 함.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했습니다. 마음을 훔쳐가 백성들이 압살롬에게 넘어갑니다. 요압은 다윗의 심복이니 압살롬에게 안가고 죽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좋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돈가지고도, 자리가지고도 안되는 가난이 옵니다. 하나님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죽이기는 못하겠고 살려두면 나라가 망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가난해져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군대장관은 사랑이 없어 왜 아들의 죽음에만 슬퍼하냐고 합니다.
청년부 수련회도 너무 좋았다는 사람이 있고, 억지로 온 사람은 두번다시 안간다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슬픕니다. 늘 말이 이렇게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복이 있는지 없는지는 애통이 있는지 없는지로 알 수 있습니다. 애통이 아니라 원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냥 원통합니다. 내가 가난해서 암걸렸다, 내가 저놈때문에 누구때문에 하며 원통합니다. 원통의 눈물이 나면 병이 낫는 것이 목적이 되기에 끔찍한 지옥을 살게 됩니다. 이때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사람의 위로를 바라기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애통은 인간적인 슬픔이 아니라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누가 애통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애통이 되냐, 바로 죄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냐고 묻는 이유는 당신이 죄인임을 아냐고 묻는 것입니다. 내가 도덕설교를 하지 않으니 들리지가 않고 똑똑한 사람은 비판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청년부 수련회에서 들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그 병 낫기만을 원하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설교하러가니 아무도 따라가지 않고 흩어집니다. 여전히 자신의 고통에만 갇혀 원통하기만 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모든 식구를 예수를 믿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안되는 형제 자매 때문에 갈수록 그와 똑같은 내 모습을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남편의 그 모습, 엄마의 그 모습이 싫은데 엄마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싫습니다. 근데 그 모습이 나한테도 있고 똑같습니다. 정죄하다 내 모습을 직면하면 애통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이로소이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애통을 가르쳐주는 최고의 공로자가 나를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깨어지지 않으면 이걸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끈질긴 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야곱의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공격하신 것은 죄성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평생 나의 원수를 나의 형 에서와 외삼촌 라반을 원수로 여깁니다. 야곱의 끈기와 노력으로 야곱은 이때까지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문제를 제거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에서를 없애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 자신이 야곱의 원수가 되어 야곱의 자아를 깨뜨리십니다. 진짜 내 원수는 내 안에 있는 죄성, 타락된 본성, 교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 정도는 가볍게 부러뜨리실 수 있습니다. 진짜 내 원수는 내 안의 나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날이 샐때까지 씨름하십니다. 야곱이 계속 했다기보다 야곱의 죄성이 끈질김을 보여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수련회를 가서 기도를 많이 해도 내가 깨지지 않으면 승진하게 해주세요 교제하게 해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내 죄성을 두고 씨름하며 그 기도제목을 얻어내야 합니다. 날이 새서 하나님이 가신다고 하십니다. 날이 밝으면 하나님을 보고 야곱을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환도뼈를 치십니다. 위골이 되며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뜬금없는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하십니다. 이는 히브리사람에게는 본성을 나타냅니다. 이에 야곱이 야곱입니다 합니다. 드디어 저는 사기꾼에 돈 좋아하고 형 에서의 발목을 잡는자 모사꾼 야곱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고백하니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그때 이름을 주십니다. 끈질기게 하나님 붙들고 내 죄성을 봐야 합니다. 드디어 야곱이 직면했습니다. 에서와 라반이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저사람과 못산다 하면 그 사람이 나와 같기 때문입니다. 손해보고는 살지 못하는 야곱이 그래서 에서와 라반을 원수처럼 여깁니다. 여러분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입만 열면 저인간 못살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꼭 그 사람과 같습니다. 똑같아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기적인 이 세상에서 내 이기적인 죄성을 보라고 이기적인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이기적인 사람때문에 못살아 외치면 내가 똑같이 이기적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팔복의 가치관입니다. 혁명적인 개혁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악함은 나의 악함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니 사건이 해결됩니다. 그렇지 않고 맨날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하면 이세상과 같습니다. 나를 애통하게 하는 사람때문에 애통하면 파라칼레오 성령의 안아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로해주십니다. 자기 죄로 애통하는 사람들, 51쪽에 선 사람은 초등학생이어도 이 설교가 들립니다.
손목사님은 중학생때 바위틈에 깔리고 나서야 말씀이 들렸다고 했는데 청년부에도 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장에 가서 해석을 받아야 합니다.
* 토마스 왓슨 - 복음의 애통함의 첫번째 조건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상처가 난 사람과 같아 의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회복이 됩니다. 이게 얼마나 영적 진리인지 모릅니다. 내게 들린 말씀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공동체에 고백한다면 함께 애통하고 참된 위로를 성령께서 파라칼레오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정신과 의사라고 다 믿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죄때문에 눌린다고 하니 정신과 의사는 교회가지 말라고 합니다. 가서 약처방을 받고 상담은 교회와서 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애통합니까? 소중한 것을 상실하여 애통합니까? 나 자신때문에 절망하여 애통합니까?
#공동체 안에서 위로를 받기만 합니까? 위로를 전하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가난하고 애통할 일이 많습니다. 오면서도 싸우고 나가면서도 싸우고 밤에 자다가도 싸우고 저녁먹으며 싸울텐데 싸워도 우리가 이길 비결은 예배에서 총알을 장전했기 때문입니다. 또 수요일에 장전, 목장에서 장전해야 합니다. 팔복산에 꼭 오시기를 바랍니다.
[나눔] 안식, 김지명, 송현
안식 - 이번 수련회가 정말 내 가난함이 절절히 드러나는 수련회였음. 간증으로 큰 표적도 구하고, 조별 나눔도 너무 좋았는데 마지막에 공황발작까지 오는 사건으로 제대로 가난함이 드러났음. 그러나 진짜 이적은 내가 그 상황이 즉시 해석이되니까 한 순간도 불평하지않고 감사했다는 사실. 그것이 내게는 가장 큰 표적이었음. 공황장애는 불안한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나의 가족우상때문에 높아진 불안도가 원인이라 가족과의 분리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 그러나 이제 가족탓이 안되고 내 문제로 여겨지니 감사했음
김지명 - 깊은 관계였던 여사친과의 문제. 그 친구의 화법이 상당히 거슬리고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듦. 곧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더이상 잘 만나지 않게 될 사이인데 고민이 됨. 그 친구의 가난함이 너무 보이기만하고 나도 상처받은 적도 있어 괘씸하기도하고 여러복잡한 마음으로 한 번 말해주고싶음.
송현 - 여동생으로 인해 마음이 그렇고 가족으로부터 마음이 상해있음. 부모님의 어쩔수 없는 편애와 그래서 나도 힘들었어 하는 말이 상처가 됨. 그 가난함이 너무 싫고 미운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