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6 성령의 기다림
사도행전 27:27-37
이제 해도 달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소망마저 끊긴 광풍 같은 사건들 속에서 지 지난주에는 '안심하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한주동안 우리는 모두 함께 너무나도 기막힌 아픔을 겪었습니다. 들리는 소식에 눈물만 날 뿐 아픔과 어두움은 여전히 내 주변을 뒤덮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섬에 반드시 걸릴 것은 알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아파하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돌아보면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시죠. 끝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기다리고 계시다고 생각을 해요. 내 인생에 광풍을 허락하면서까지 나를 기다리시는 이것이 바로 성령의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함께 이 성령의 기다림에 대해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1. 이리저리 쫓겨 가는 것입니다.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
-> 27절이에요.
지지난 주일에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바울이 외쳤지만 이렇게 한 섬에 빨리 걸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유라굴로 광풍의 기세는 태풍 정도가 아니었어요. 칠흑 같은 어둠만 계속되는 죽음의 광풍이었습니다. 솟구치는 거대한 파도가 순간 순간 솟구쳤다 내렸다,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그렇게 죽음의 시간을 보내는 열나흘째 되는 그날 밤 자정쯤. 여기서 자정은 밤 열두 시를 뜻하는 게 아니라 깊은 한 밤 중이라는 뜻이에요. 그 기다림의 시간은 대화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침 삼킬 틈도 없이 그냥 이리 저리 쫓겨다니는 시간이에요. 왜 이런 시간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까요?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내 모든 생각이 죽어지는 사건이 아직도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노를 저을 수도 닻을 내릴 수도 방향도 알 수 없는 시간을 통해서 철저히 내 자아가 죽어져야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말씀이 임합니다. 그래서 내 등 바로 뒤에서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 이리 저리 쫓겨다니며 열 나흘의 시간을 지나는 이 바로 이 시간이 성령의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초대 교부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 칼빈이나, 오늘이 종교개혁 기념 주일이거든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은 두 가지라고 하죠.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고,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데 핵심이 뭔가 하면, 내 자신에 대해서 100% 죄인임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100% 옳으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두 지식은 비례하는 거예요. 내가 100% 죄인임을 인식하는 거만큼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이 100% 옳으심을 인식하는 거 만큼 내 죄를 인식하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옳으심은, 하나님의 의를 죽을 수밖에 없는 100% 죄인인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그 모습을 보이시는 것은 바로 내 죄가 보이는 것이에요. 내 죄가 보여야 여기서부터 진정한 위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죄를 보지 못하면 인간의 위로는 너무나도 얄팍하죠. 그것을 못 보기에 내가 누추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광풍을 보내시는 거예요. 이 광풍에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참는 것은 이를 악무는 게 아니라 그 광풍 사태, 이 상황을 품는 거예요,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런데 내가 죽어야 내 죄가 보이고, 내 죄가 보여야 이 사건에서 내가 나를 예수로 낳고 다른 영적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성령님은 이렇게 기다리십니다. 한 부목자님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자기가 새 엄마한테 가서 눈치를 보면서 자랐는데 자기가 하도 집을 나가니까 아빠가 자기 보고 '엄마한테 가라.'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 나이가 그렇게 40이 넘도록 평생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커지다 보니까 나중에 어떤 생각 드냐하면 '저 사람이 늙으면 일을 못 할테나까 분명히 그쪽에서는 쫓겨나고 우리한테 올 텐데 그때 내가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이 모셔야겠다는 게 좋은 뜻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본인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박을 하고 진짜 죽고 싶으니까 미안하다고 얘기할 정도로, 그렇게 얘기할 정도로 진짜 진짜 괴롭히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일찍 돌아가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원망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형한테 가더라고요. 저는 제가 죽을 때까지 이 생각이 안 변할 줄 알았는데 우리들교회 와서 그 생각이 변하더라고요. 내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제가 교회에서 눈물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원망만 하던 아버지 때문이 제가 교회에 붙어 갈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아버지한테 오히려 제가 미안한 마음이 들고 미안하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조금이라도 교회를 왔다면 전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전도 주일을 괜히 하는 게 아니고 저렇게 40억 빚져서 죽으려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아버지 미워서 이를 악 무는 사람도 있고, 엄마 미워서 악 무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전도하셔야 하는 거예요. 적용해보세요.
[적용] 내 인생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던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 시간 속에 내 죄가 보였나요? 이를 악물고 원수 앞아야지, 그래서 돈 벌어야지, 공부를 잘해야지 그러십니까?
2. 묻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27 ....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 그러니까 열나흘째 되도록 광풍 가운데 무려 800km를 휩쓸려 갔어요. 부산까지 거리의 두 배죠. 아드리아 바다까지 왔대요. 지금 내 인생 가장 어두운 한 밤 중 같았는데 그 한 밤 중에 오히려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거예요. 아드리아 바다가 어딥니까? 바로 이탈리아 남부 바로 앞바다, 로마로 가는 그 코 앞에 도착을 한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놓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증거하면서 가는데, 바울은 이렇게 믿음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그냥 이리 저리 지금 쫓겨다니는 거예요. 그렇지만 바울 옆에 있었으니까 계속 말씀으로 양육을 지금 받으면서 가는데,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쫓겨다닌 줄 알았는데, 야, 목적지가 지금 코 앞에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28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 이 아주 노련한 사공들은 바람에 느껴지는 습도와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의 냄새를 통해서 드디어 육지가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물 속 깊이를 재어봤죠. 그래서 이렇게 한 길이에요. 남자 중지에서부터 이쪽 중지까지 한 1.8m가량인데, 처음 재어 보니까 스무 길 약 30m, 36m, 또 다시 조금 가다가 재어보니까 열 다섯길 27m인 거죠. 그러니까 이때 배에 탄 사람들이 무얼 느꼈을까요? 냄새만 맡다가 진짜 육지가 가까워졌는데 그때 드는 생각이 뭐욨을 거 같아요? 우리가 지난 주일에 맨 마지막 구절이 뭐였죠? 그렇게 내가 말을 해야 알아요? 한 섬에 걸리리라 했자나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멀리 멀리 이렇게 가면 안 돼요. 한 섬에 걸리리라 그러니까 듣든지 안 듣든지 말씀을 전해 놓으니까 '아, 한 섬에 걸리리라가 이거구나.' 그때는 모르지만 맨날 죽을 거 같아도 말씀은 계속 들려 놔야되는 거예요. 한 섬에 걸리리라 이 말씀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말씀이 내 삶 속에 성취되는 그 순간에 한 밤 중을 지나서 뭔가 구원의 소식이 들리는 바로 이 순간, 이때가 중요한 때자나요.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이인데, 바로 이때 뭔가 보인다고 '이루어졌어.' 급하게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이럴 때 일수록 먼저 측량을 해야되고, 여전히 바람이 거세자나요.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 닻은 줄로 매어서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갈고리가 달린 쇠덩어리예요. 평상시에는 보통 배 앞쪽인 이물에 닻을 내리는데 이때는 뒤쪽에 고물에 닻을 네 개나 내렸다는 것은 이렇게 가까워지면서 암초가 있을 경우에 뒤쪽이 안전하기 때문이에요. 아주 사공들의 노련한 지금 이제 처방인 거죠. 그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했어요. 국어사전에는 고대하다가 간절히 기다린다고 원어는 기도하다예요. 그러니까 뭔가 된 것 같은 이때 간절히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게 뭐죠? 하나님께 물어야 되고, 하나님께 묻는 게 뭐죠? 바로 묻고 기도를 해야 되는데 뭔가 육지가 보인다고 덜컥 계약을 하고, 뭔가 느껴지기에 주식에 투자를 하고, 구원이 코 앞에 왔다고 안심해서 예전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렇게 남자들이 돌진을 잘해요. 암초에 걸려서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고지가 코 앞인데 다 죽는 거예요. 그래서 배가 이제 지금, 암초가 있었죠. 배가 좌초되는 것이죠. 기다림의 끝이 오는 이때는 더 더욱 멈춰야 돼요. 다 내공이, 사업 잘하는 사람들은 뭐가 끝까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안심하지 않아요. 다 됐다고 '부어라, 마셔라.' 절대로. 마지막 해서 도장까지 찍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보이스피싱도 다 그래서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재고, 닻 네개를 내리고 이게 맞는지 돌다리를 두드리듯 묻고 또 묻고, 목장에 묻고, 지체에게 묻고, 섬기는 부서에 묻고 측량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기다림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THINK하고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육지가 가까웠을 때 그래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델이 필요한데 목장에 그런 모델들이 계시죠. 믿음이 좋다기보다 같이 겸손하게 THINK해 줄 수 있는 지체들인데요.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런 거를 물어봐야 돼요. 자, 지나고 보니까 저도 이렇게 잘나서가 아니라 큐티를 했기 때문에, 저희 남편 간 지가 35년이 넘었는데 제가 뭘 그때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큐티를 했기 때문에 사역을 시작할 때 물길을 재고 또 재고 물으며 시작한 것이더라고요. 14일의 시집살이 기간을 지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내놓고 기도한 구원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이제 남편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저는 이제 돌진을 해야 되는 거예요. 구원 때문에 생명을 내놨자나요. 앞으로 '와, 나는 이제 길이, 문이 열렸어.' 구원의 문이 막 열렸어요. 구원이라는 명목하에 가정을 버려두고 사역을 했다면 우리들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암초에 걸렸을 거예요. 그러니까 큐티선교회도 13년이 지난 후에 생겨졌고, 신학을 해도 아무도 안 써주니까 할 수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데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도 목사 안수를 받는 것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제가 이렇게 큐티 모임을 해서 많이 모이니까 이거를 바람 핀 남자도 와서 들어야 되자나요. 나만 참으면 안되자나요. 그러니까 '남자 큐티 모임을 해달라.'고 그렇게 요청을 했지만 제가 50이 되기까지 남자 큐티 모임을 안 했죠. 대신 남편이 갈 때 새 차를, 큰 차를 사놓고 갔는데 차는 또 남편 대신 있어야 겠더라고요. 왜냐하면 모든 남자들이 날 데려다 줄 거 아니예요. 그래서 그건 남편이에요. 그런데 또 젊은 그때, 35년 전에 젊은 여자가 이 큰 차는 타고 다닐 수가 없어서, 그래서 제가 그떄 남편이 가자마자 교인 보고 차를 좀 팔아달라 그러니까 저한테 '죽은 사람 차니까 반 값인 거는 알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그때 상처받기 보다는 '교인간에 거래는 절대로 하지 않아야 되는 거구나.' 그렇다가 또 진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그렇죠? 즉시 소형차인, 그때 새로 나왔던 그 르망으로 온갖 옵션을 다 달아가지고 자동차 회사에, 반값이라니까, 그냥 바꿔달라고 해서, 나온지 3달 된 차인데 그냥 바꿔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물길을 재며 늘 THINK를 했습니다. 제가 구원과 전도라는 육지가 보여서 이 남자 모임을 시작했다면 암초에 걸려 우리들교회는 지금 없었다고 생각을 해요. 디모데전서 5장에 보면 참 과부는 60이 돼야 한다고 하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 구제하며 이것이 과부의 길이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본문 같자나요. 그런데 지나고나서 전 별 인생이 없고, 과부의 인생을 잘 사는 것이 가장 제 주제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졌지만 앞으로 큰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지금 보면 사명이 남아있는데요. 그때 가장 큰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아침마다 제가 눈을 뜨면 제가 30대 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였어요. 사실 얼마나 위험했습니까?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뻔 했죠. 그것이 하루 하루가 늘 새로워입니다. 정말 구원이 다가올수록 뭔가 된 거 같은 이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목회를 하려고 한 게 아니자나요. 남편이 가고 나서 13년 후에, 50이 되서 신학을 했으니까 물길을 재고, 닻을 내리고,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말씀, 그날 읽은 것 만큼만 또 이제 적용을 하면 항상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지니까 오늘도 들은 말씀, 기억나는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한마디로 말하면 '큐티하고 목장가라.' 이 얘기를 이렇게 어렵게 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도 안 들려서 잠이 너무 오면 그냥 '큐티하고 공동체 가라.' 이것만 기대하시고 나머지는 주무시면 되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게 하는데 자는 사람은 그 누구예요? 바로 내 앞에서. 자,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육지가 보인다고 묻지 않고 급하게 결정하며 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구원인가요, 돈인가요, 결혼인가요?
3. 끊어 떼어 버려야 합니다.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 인간의 죄성이 또 나타나죠. 죽을 때까지 죄성이 나타날 거예요. 이 대단한, 노련한 사공들이 글쎄 자신들만 살기 위해서 닻을 내리는 체하면서 슬그머니 거룻배를 바다에 내리는 거예요. 사공들은 프로자나요.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돈을 내고 탔자나요, 이게 완전히 자격이 있어 승객들은. 그러니까 왜 사공들 보고 '배에 탔냐?'고 아무도 안 그래. 그 사람들 돈 안내도 '왜 돈 안내고 탔냐?'고 안 그러자나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제 암초가 반드시 걸릴 거 같은 거야, 안 걸릴 수도 있는데. 그런데 육지가 가까왔어. 그러면 암초에 걸리는 순간 살 소망이 없다고 느끼는 거예요. 다 죽는 거예요. 시간이 없는데 '그럼 어짜피 죽는데 나라도 좀 살자. 우리 요 몇 명 사공이라도 살자.' 이러면서 이제 자기들이 움직일 수 있는 거룻배 그거를 내려놓고 살겠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거룻배로 도망쳐 버렸다면, 만약세 암초에 걸렸을때 거룻배가 없으니까 승객들은 배에서 다 죽어야 되자나요. 그러니까 이게 100분지 99도 아니고, 사실 50대 50인 이런 거에 자기네들은 다 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전문가들이 생각한 게 이거 밖에 안 되는 거죠. 돈 받고 항해하는 이 사공들이 직업 윤리가 없는 거예요. 극한 상황에 달하면 인간이 자기밖에 몰라요. 직업 윤리보다 큰 것이 구속사적인 복음이에요. 직업 윤리, 전문가를 넘어서 진짜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어야 되겠지만요. 그러니까 여기서 닻을 내리는 체, 체하고는 겉 꾸밈인 거죠. 외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닻을 내리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러니까 닻을 내리면 내렸지 척하면서가 남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척하는 거죠. 지금 자기 살길만 찾고 있는 거죠. 뭔가 공동체를 위하는 척하고 믿음이 있는 척하지만 내 살길만 위하는 거예요. '다 너를 위한 거야.' 말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고, 자녀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에요. 구원을 길로 놓지 않고 가는 모든 길은 이타적인 것 같지만 100% 이기적인 거예요. 그래서 나도 속고 남도 속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 닻을 내리는 척하지만 욕심과 돈이 내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역을 위하는 체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고, 야근인 체하면서 바람을 피고, 구원 때문인 체하면서 불신 교제를 하고, 자녀를 위하는 체하며 이혼을 합니다. 이혼은 결코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니예요. 엄마와 아빠는 반드시 둘 다 자녀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인 거에요. 이것이 질서이고 하나님의 섭리인 거예요. 내 엄마, 아빠는 정신병자라도 좋고, 감옥을 갔다 와도 좋고, 마약중독자라도 내 엄마, 아빠하고 아무리 잘해주는 새 엄마, 아빠 비교가 안되는 거예요. 다 내 엄마, 아빠를 찾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진짜 호적을 지킨 게 최고의 혼수이고 예단이라는 말은 아주 진리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부재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엄마와 아빠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안 가르치니까 우리들교회도 정말 대단한 학식이 있는 부부들이 다 바람피고 애들이 비행청소년 될 뻔했는데 와서 말씀을 들으니까 이걸 이렇게 오픈을 하고 다 새사람이 됐자나요. 이혼을 하고 나서도 자녀에게 '너희가 아빠에게 가서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자녀를 위하는 체하지만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고, 자유롭게 나만 살고 싶은 욕심이 또 그 속에 있어요. 아니면 또 내가 내 아이를 그냥 위하는 체하면서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자 절대로 안 보여죠. 나만 끼고 돌아. 그게 모두 위하는 체하면서 자기의 욕심이고, 집착이고 이럴 수가 있다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속지 않아요. 그래서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또 속지 않는 이 바울은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합니다.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 31절.
'너희가 너희만 살자고 이렇게 한다면' 뭐라고 합니까?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해요. '이 배에서 나간다면 이 배를 타고 나간 사공들도, 또 남은 너희들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제외한 모두를 뜻하는 말이에요. 나만 살고자하는 그런 행동으로 육지가 보인다고 뭔가 위하는 체하면서 나만 살고자 하는 그 결정으로 떠나간 너도, 남아있는 나도 모두가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바울의 강력한 경고로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본문에 끊다, 떼다, 버리다 그냥 거룻줄을 끊었다 그래도 되는데 세 가지 동사를 그냥 아주 강조해서, 이게 세 사지 동사가 연결된 거예요. 끊다, 떼다, 버리다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사공들이 타고 가려는 거를 군인들이 끊었자나요, 먼저 날카로운 칼을 들어서. 그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이거를 그냥 칼로 쫙 끊어냅다. 그리고 그 바람과 파도가 거센 상황 속에서도 이제 칼 내려놓고 끊어진 줄을 또 떼어내요. 그리고 완전히 떼어내어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 속에 그걸 던져버렸다는 거예요. 끊어 떼어 버렸어요. 이것이 바로 구원을 위한 적용입니다. 합리적인 이유는 누구에게나 있어요. 광풍이 불어서, 흉년이 들어서, 남편이 먼저 바람 피워서, 아내가 바람 피워서, 아내가 밥을 못해서, 미워서, 정이 안 들어서 뭐 이랬다, 그랬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것 같은 광풍이 불어도, 그래서 여러 가지 합리화를 시키면서 나만 살고자 이렇게 떠나서는 안되는 거예요. 내게 속한 공동체, 하나님깨서 허락한 이 가정, 이 배를 떠나서는 거예요. 나만 살고자하는 길이 있다면, 이 허락한 가정을 버려두고 나의 행복을 찾아 떠난 길을 있다면 그 갈을 날카로운 말씀의 검으로 끊어내야 되는 거예요. 아내보다 훨씬 매력적인 여자의 품을 끊어내야 되는 거예요. 남편보다 훨씬 나를 잘 이해해주는 그 남자를 이 날카로운, 무딘 칼로 하면 안 끊어지니까, 날카로운 말쓰의 검으로 끊어내야 되고, 광풍 속에서도 아직도 끊어지지 않는 은밀히 나만 알고 있는 그 줄을 두 손으로 떼어내고, 결코 찾을 수 없는 바다 속으로 던져야 합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바다 속으로 멀리 멀리 던져야 해요. 이것이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엄중히 경고해서 명령합니다. 31절의 이르되는 그러니까 그저 말하다가 아니예요. 명령하다예요. 구원의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죄수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명령하겠어요. 그런데 이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이게 '죽는다.'가 아니라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너 이혼하면 죽는 게 아니고 구원을 얻지 못해. 이 땅과 하나님 나라에서 다 구원을 얻지 못해. 이 땅에서만 멸망이 아니야.' 아직 날이 밝지 않았어요. 한 밤 중을 지나고 있는 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끊고 떼어내고 버리는 것이 바로 성령의 기다림 속에 할 일인 줄 믿습니다. 그럼 이제 그렇죠. 신결혼을 위해 불신 남자의 재산을 끊었더니 아쉽기는 하자나요. '그 재산 가지고 선교하면 오죽이나 좋아.' 거룻배도 있었으면 나중에 육지에 오를 때 요긴하자나요. 그러나 때가 중요해요. 오늘 지금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게 중요해요. '나중에 달라질 거야.' 이때 적용할 일은 아니예요. 저보고 우리 남편 가니까 어떤 부자하고 결혼을 하래요. 그런데 불신이래요. 그런데 '그 불신자 안된다.' 그랬더니 '아니, 김집사가 전도 못 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어.' 이래요. '그 돈 가지고 선교하면 되자나.' 그래요. 그런데 제가 이 남편 하나 전도하려고 일생을 지금 바쳤는데, 그러니까 제가 믿음은 없어도 그런 거는 그냥 단칼에 거절할 수 있는 믿음, 그 당시라도 그 믿음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변화된다.' 이때 적용할 일은 아닌 거죠. 이렇게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피니까 책임자가 되는 백부장도 보지 못하는 사공들의 이기적인 도망가고자 함을 바울만 보자나요. 자신의 일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일도 피해버리는 사람들의 자세와 너무나 달라요. 저는 그냥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오늘 말씀으로 여러분들한테 정말 해석을 드리고자 해요. 그냥 귀가 있으면 다 들어 주시길 바래요. 정말 위로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죠. 적용이에요.
[적용] 내가 끊고 떼어내고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혹, 동정, 연민, 사치, 이혼, 불신, 여자, 남자 등
4. 축사하고 떼어먹는 예배가 비결입니다.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 이 배에 탄 숫자가 처음 나옵니다, 276명. 나 한 사람의 적용으로 내 가족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끊고 떼어내고 버리는 적용으로 276명 전원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아직 날이 밝아오지 않았어요. 기다리는 이 기다림의 시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요. 33절부터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는 거예요. '너희가 먹지 못하고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먹으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풍랑이 어찌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까? 예언의 은사, 직통 계시 받아서 그렇습니까? 바울은 상식을 넘어서지 않아요.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자나요. 그러니까 아무리 멀미가 심해도 이제는 힘을 내서 먹어야 육지에 갈 수 있자나요. 힘을 낼 수가 없으면 헤엄도 못 치니까 나중에 암초가 뭐 이렇게 부딪혀도 못 올라가니까 마지막 힘을 내서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야 배에서 내릴 수가 있다는 거예요. 바울이 먼저 본을 보이고 먹습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거는 딱딱한 빵을 씹어 먹는 음식 먹는 거라기 보다는 누군가 함께 음식을 먹는 이런 슈내스티오라는 단어인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목장에서 함께 밥을 먹는 거는 얼마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예요. 이 목장에서 다른 말씀보다도 같이 음식을 먹는 걸로 그냥 모두가 건강해지는 거예요, 영육간에 안심하고. 다 눈물을 흘리면서 된장찌개를 먹었다고.
35절에.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이게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 또 최후의 만찬에서, 또 그 제자들 모아놓고 하신 이런 장면들이 생각나죠. 즉, 날이 잘기 전에 배 안에서 지금 성찬식의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밖에는 여전히 광풍이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날이 밝지 않아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성찬식인 거 모르지만 바울이 성찬식으로 하나님께 축사하니까 그거 다 봤자나요. 2천년 동안, 성찬식의 그걸로 우리에게 지금 이네 내려오는 거죠. 광풍 속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내일은 나아지겠지.'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런 기다림이 아니예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다려야 하는데 그 적극적인 기다림의 끝에는 예배가 있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기다림이에요. 저는 그냥 35년 전에 우리 남편이 간 게 가장 큰 사건인 줄 알았는데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 성경이 미리 다 예언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종말론적인 인생을 살아봤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래서 이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최고의 비결과 가치는 바로 예배인 거예요, 예배. 이 예배가 바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표현이며 성령의 기다림인 거예요. 그래서 결론은 성령의 기다림, 잘 기다리기 위해서 예배, 결론이 예배인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여러분들이 예배가 회복되면 잘 기다려요. 어떤 상황에서도 기다리는 최고의 비결이 예배인 줄 믿습니다. 예배가 개인 예배, 공예바, 이제 공동체 예배 많자나요. 뭐 큐티 예배, 목장 예배, 이 예배인 거예요, 예배. 눈물로 먹어야 할 떡을 안심하고 받아먹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또 생각해봤어요. 안심하지 않으면 다 체하지 않았을까요? 지도자가 참 중요해요. 구원은 디테일이에요. 여러분, 소화가 잘 돼야지 힘 내자나요. 먹었는데 위 경련나고, 설사하고 이러면 어떻게 해. 이거 중요하자나요. 안심하고 먹는 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안심하고.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만 우리였던 그 우리 속에 주님이 축사를 하시고 우리가 기도를 하므로 진정한 우리가 된 276명의 열매가 생겼어요.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 구원되는데 저도 이 늘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죠. 그 힘든 여러분의 상황과 아픔이 그대로 전달이 돼요. 제가 모두를 감당하지 못해도 항상 하루에 하나씩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있어요. '나 한 사람쯤이야.'하시겠지만 그래도 그 한 사람 기억하고 아파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같이 276명 속에 속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죄수였지만 2천년 교회사에 바울과 같이 배에 탄 구원받은 사람으로 지금 기억되지 않습니까? 거기 백부장, 선장, 선주가 무슨 상관이에요. 죄수들과 똑같은 한 영혼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바울의 말은 이 땅에서 희망이 없어야 들리는 걸 보니 제가 너무 슬픈 거예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애통이 돼요. 환난 당하고 빚진 자는 오자마자 제 말씀이 들리지만 항상 부요하고 갖춘 자는 이렇게 말씀이 안 들리자나요. 누구를 만나거나 제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전하게 되는데요. 그 말을 받아들이면 기쁘고 안 들리면 제가 너무 슬프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데, 내가 사명이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쁘겠습니까? 안 들리는 사람 투성인데요. 이혼하지 말라고 그러면 그렇게 이혼하고, 주식하지 말라고 그러면 그렇게 주식을 하고, 맨 하지 말라는 거 하고 있는데 얼마나 제가 슬프겠어요, 진짜. 애통이 되죠.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슬픈 거 자체를 모르시죠. 그런데 제가 잘나서가 아니고 형편없죠. 형편없어서 마음이 아파요. 그래도 제가 늘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정말 한결같이 있어요. 전자동으로 튀어나와요. 누구를 만나든지 '큐티하세요. 책 사세요. 책을 사. 꿀이 뚝뚝 떨어지는 큐티인을 사세요.' 이것이 제 40년간의 노래예요. '맛이 갔네, 완전히. 책 장사로.' 제가 책 장사예요, 책 장사.' 정말 그냥 30년간을 매일성경 맨날 사라고. 날마다 바울이 잔멸자, 박해자였기 때문에 죄수의 신분을 기쁘게 감당하고 가는 거예요. 제가 바벨론 그발 강가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하늘이 열려서 제 죄를 보게 됐자나요. 저는 그냥 제 죄를 보기 전에는, 나는 이거 다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갇혀 있으니까 남편 미워하지, 갇혀 있으니까 나도 나가서 남들하고 정말 딴 남자도 만나고 싶지. 그러니까 내가 딴 사람 정죄할 수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갇혀 있어서 못했어요. 그걸 제가 알게 됐자나요. 내가 똑같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거를 제가 알게 됐자나요. 그 죄를 제가 뼈저리게 지금 알게 되니까, 이 죄수의 신분을 기쁘게 감당하고 가니까 제가 항상 의인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서 있기 때문에 이게 이제 가능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자기가 죄인인 걸 아는 거만큼 하나님이 옳으신 거를 인정하게 되니까. 적용을 해보세요.
[적용] 광풍이 불어 예배를 떠났나요? 광풍이 불어 더욱 예배에 나아오고 있나요?
말씀 맺어요. 성령의 기다림은 이리 저리 쫓겨가는 거예요. 쫓겨간다고 '하나님이 나를 잊었나.'가 아니라 이 광풍 속에서 묻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아직도 끊고 떼어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바다 속에 버려서 영원히 찾지 못하게 끊고 떼고 버려야 될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축사하고 떼어 먹는 예배가 비결이라는 거자나요. 저는 그냥 우리 이태원, 우리 모든 유가족 여러분들이 잘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인간의 위로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고 예배가 회복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여기서 옳고 그름으로 니 탓, 내 탓하는 게 아니라 오늘 진짜 성령의 기다림,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 휘틀리가 마지막 승객 한 명까지 다 배에서 탈출하는 것을 돕고 자기가 죽었자나요. 우리 모두 사실은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이 마약 자매의 엄마가 다들 '이 가정은 무슨 죄가 있어서 저렇게 광풍을 지나고 있나.'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생명 낳는 적용을 했고 성령의 기다림으로 반드시 한 섬에 걸려서 이제 앞으로 기적 같은 간증을 하기 바랍니다. 어머니이자 외할머니도 힘내세요. 손주 보느라 힘들고, 딸 보느라고 힘든데 천국에서 씻겨 주실 눈물이 정말 많으실 것 같아요. 정말 그 할머니 잘 드시고 힘 내시고, 또 우리 애기 엄마도 잘 먹고 힘내고, 정말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이때 딱 맞는 거 같아요.
목장 모임
미혜, 연수, 예선
기도제목
미혜
일상에서 지칠 때 피난처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그 이름 부르며 그 분이 주신 위로로 주어진 삶을 살 수 있기를
회사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안전히 지켜 주시기를
부모님의 건강과 아빠 영혼구원, 엄마의 영육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우리 목장 식구들 버겁고, 지치고, 때론 무료한 일상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민희
그래도 코로나 많이 안 아프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후유증이 없도록
하나님이 없어지신 것 같은 느낌이다는데 예배가 회복되길
밝은 마음을 잃지 않기를
예선
여러 가지로 이리 저리 쫓겨가는 것 같이 정신이 없고 사건이 오면 놀라는 게 먼저인데 나를 위한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기억하며 목장에 자세히 묻고 기도 받고 기도하며 붙어가도록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내가 끊어 떼어 버려야 할 것들을 보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번제로 올려드릴 수 있도록
목장 식구들 건강 지켜 주시고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축사하고 떼어 먹는 목장 예배 함께 나누며 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