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에 만들어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는 노래는 북한에서도 다 같이 부르는 민족의 노래 입니다. 통일을 서로가 간절히 원하는데, 통일에 대한 원함의 목적과 방향이 다른다. 나만 사는 통일을 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는 죽고 나만 사는 원함이 너무나 많다. 우리의 원함은 성령으로 품어야 최고의 소원이 될것이다.
성령의 원함이란?
1.참되고 온전한 말을 해야 합니다.
24절
이 같이는 나는 니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에 순종하여 변화시킨 간증을 바울이 하는데, 그를 듣고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 한다. 바울은 굴하지 않고, 증언을 한다.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의 말을 끊은 것이다.
미쳤도다로 번역된 말은 미치다, 헛소리를 하다는 동사의 현재형인데, 베스도가 바울의 현재 상태를 정신 이상의 상태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스도가 예수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와 바울이 얘기를 나눴다는걸 정신이 나간거로 인지한 것이다.
바울이 본인이 보기에는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유대인의 분란을 일으키기에 미쳤다고 본것이다.
많은 학문, 방대한 구약성경의 박식함으로 니가 실성했다고 한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베스도가 깊은 인상을 받은건 분명하다.
바울은 당대의 석학의 제자이다. 예수도 요한복음에 보면 미쳤도다 한다. 저도 주님을 만나고 전도를 하니, 광적으로 믿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베스도는 청문회를 열었는데, 바울이 저렇게 얘기하니 왕 앞에서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거 같아 부끄러운 것입니다.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첫째로 자기 상식으로는 부활이 미련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미쳤다는 말에 바울은 이렇게 대답 합니다.
25절
각하라는 말은 극존칭 칭호입니다. 미친 사람은 이렇게 말을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비굴해 보이는데, 이게 비굴한게 아닙니다. 구원때문에 해야 하는 말을 분별 해야 합니다.
미쳤다는 말에 반박하는것도 아니고,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종과 증인으로 서있다는 사명이 있으니 인정할 때와 부인 할때를 분별 합니다.
미친것이 아니라, 헛된말의 반대인 참되고 온전한 말을 선포하는 것이라는걸 분명히 합니다. 진리에 대해 온전한 정신으로 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부활의 경험은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진짜 입니다. 그리고 이를 온전한 정신으로 만났기에 바울은 뚜렷이 기억 합니다. 허다한 증인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부활은 미친사람의 소리가 아니고, 참되고 온전한 소리입니다.
바울의 1,2,3 차 전도여행을 통해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모금을 모아 흉년 걸린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한다고 갑니다. 그리고 가서 계속해서 같은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합니다. 아무도 안믿습니다. 13장부터 선교를 나가 19장까지 7장 또한 70여곳을 전도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20장부터 26장까지 복음을 전할때는 아무도 안믿는 얘기를 또 하고 또하며 7장을 지나게 하십니다.
마지막에 박해받고 옥에 갇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교는 으쌰으쌰 하는 것으로만 되는게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다녀야만 하는게 선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해받고 갇혀있는 순간에도 바울은 끝없이 복음을 전하고 끝없는 반대를 경험합니다.
이렇게 안되는 것을 경험하며 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을 좀더 깊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7장의 찬란한 선교의 시간 보다 7장의 갇힌 이 시간이 바울을 전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게 하였을 거라 생각한다. 바울은 로마로 잡혀갈 때 까지 13개의 서신을 쓴다.
자신이 높아 진것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이 안보이는 것이다. 약함과 죄됨과 추함을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하는 것이 간증이다. 참되고 온전한 말은 이런 간증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는 맞습니다. 하는 순종의 말이다.
하나님은 저의 연약함을 끊임없이 보게 하십니다. 남편이 가고, 그때는 성령 충만 했지만, 성경을 바온 저는 내가 연약함을 아니, 오늘은 충만하지만 내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무너지더라도 붙들어 달라고 날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저의 근본에 대해 믿을 수 없었기에 하루하루 하는 것이 날마다 감사하고, 날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가기전 13년 동안 갇힌것도, 가고 난 30여년 동안 모두 제힘으로 한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두려운가? 생각을 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9장에 남들은 인도한 후에 자기가 버림 받을까 두렵다고 했는데, 고린도 전서를 갇혀 있을 때 쓴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도후 자기가 버림 받을 까 두려운게 보이는 것입니다.
저도 자신이 없는데, 자신이 없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게 하니,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속에 있는 죄를 직면하게 하셨고, 그래서 조심하다보니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갇혀 있다 보니 책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모두 주안에 갇힌자 되어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때문에 미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거기까지 하면서 막은 적이 있습니까?
-참되고 온전한 말인 약함의 조인 간증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2.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스도가 이해를 못하니 아그립바에게 말합니다.
26절
이말은 베스도에게 계속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구약을 모르는 천부장 들에게 말할 때는 답답했는데, 구약을 아는 베스도에게 전하게 되니 담대히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높일 수 없습니다. 참되고 온전한 말은 하나님을 높이는 말입니다. 나를 높이는 말이야 말로 미치고, 헛된 말 입니다.
세상은 나의 약함을 말하면 무시하고 찌질합니다. 초라해 보이는 바울을 무시 하니,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초라해 보이니 마음껏 무시 합니다.
교회를 와도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미쳤다고 무시 못합니다. 하지만 초라한 노인을 보고 미쳤다고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7장 동안 세계적인 최고의 복음 전도자 바울이 설교를 해도, 이 교회를 모두 다니는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저는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부활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굉장히 멋있고, 맞는 말을 한거 같다. 하지만 그 이후, 환생, 부활은 모른다고 기독교 이니 겉으로는 받아 들이지만, 사실은 낫씽이라고 말한다. 하면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삶이 절실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활은 낫씽이라고 한것이다. 그러니 분별하기 더 어렵다. 이런분도 부활은 낫씽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믿겠는가? 존경하는 분이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하신 것이다. 참 안타깝다.
이러니 바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 다 예수를 안믿는 것이다.
이제 아그립바에게 묻는다.
27절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묻는다. 유대의 왕이자 대제사장 임명자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총 책임자인 아그립바는 믿는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바울의 간증, 예수에 대한 것도 믿는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게 되니,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랬더니 바울이 바로 믿으시는 줄 믿는다고 아그립바를 돕는 것이다. 지혜롭게 돕지만, 또 곧 믿기를 촉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벨릭스도 들었다. 그런데 양심에 찔린다고한다. 아그립바도 마찬가지다.
7장 동안 바울도 할 수 없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전저긍로 하나님께 속함을 보여 주신다.
28절
아그립바는 바울의 간증을 듣고 당황했다 생각든다. 다 맞는 말만 한다. 아그립바도 인생이 고난이다.
왕의 자리라는 곳이 쉽게 영접하고 반응 하기 어려운 위치이다. 이것이 아그립바의 걸림돌이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대답안하고 논점을 바꿔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냐고 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는 무시가 되는 예수쟁이 였다.
아그립바의 이 말은 바울 너의 설득에 상관없이 너처럼 예수쟁이가 될 마음이 없다고 벽을 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를 믿으면 왕의 자리, 재산, 권세 다 뺏기는 것이다. 결국 유대인의 왕이면서 유대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다 돈과 권세가 앞에 있으면 눈치를 보는 것이다.
제일 윗자리에 있으니 더 그렇다. 속으로 설득이 됐다 해도 복음을 받아 들일 때, 걸림돌이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지금 당장 내가 걸리는 게 많은 것이다 .그래서 복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사실 바울은 유대지역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 앞에서 심문을 받는 상황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자기 변호를 해야 한다. 자신의 무죄를 적극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의 변론은 계속해서 자기 간증이다. 간증을 찌질하게 보시는데, 이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 정점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아그립바나 베스도가 보기에는 이게 너무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바울의 간증이 바울의 무죄를 증명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를 알면서 계속 간증 하는 것이다.
-복음이 나에게는 미련한 말입니까? 걸림돌 입니까?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싶어도 우리는 담대하지 않으면, 집안에서도 목장에서도 나누지 못합니다.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담대해야 나눕니다.
이번 추석에 한 부목자님이 온가족이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3번이나 바람을 핀 남편 트라우마가 있는 재수씨가 지금도 바름을 피는 시아버지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 아버지는 무시했다는 혈기를 냈고, 재수씨에게 분이난 어머니는 이를 첫째 며느리와 비교해서 구박을 했고, 아버지가 분을 낼때는 거꾸로 재수씨 편을 드니 분위기가 험악할 대로 험악해진 상황에서 부목자님이 저녁상을 엎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그자리에서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며 자신이 혈기부리고 부모님을 무시한 죄를 고백하며 그날 큐티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과 증인의 모습을 보여주니 다 너무 비교하고 욕하고 혈기내고 그랬는데, 다들 해어질때, 다음 추석에도 여행을 가자고 했다 한다.
너무 감사한 마음이 올라오면서 틈틈이 큐티한게 신의 한수 였다는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더 담대히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고 다짐하게된 여행이었다고 한다.
큐티가 정말 참되고, 온전한말 맞다.
큐티를 하니, 그날 말씀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지 못하면 못하는 것인데, 큐티를 하면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29절
나와 같이 되기를 이라는 말을 나처럼으로 줄였습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가? 자기처럼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기 때문입니다.
원한다는게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원함은 말짱 꽝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제대로된 원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바울의 나처럼 되라는 말이 교만해 보일 수 있습니다. 나처럼 되라고 할수 있나요? 이말은 바울을 모델로 삼아 나처럼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말을 못하는가? 전자동으로 내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셉이 나같이 살라고 하면 그럴만 해 하지만, 유다가 나처럼 살라고 하면 응?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동침을 했는데, 어떻게 자기처럼 살라고해?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그런데 요셉과 유다중 누가 더 하나님의 나라를 잘 봤는가? 유다이다. 누가 하나님의 용서를 처절히 구했겠는가? 유다가 구했을 것이다. 며느리와 동침해서 난 아들이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된 것이다.
큐티의 꽃은 적용이기에 유다가 며느리가 나보다 옳도다 한것이다. 당시에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조롱을 받았겠는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즉 나처럼 되라는 말은 나의 행위와 적용으로 나처럼 되라는게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격이 나쁘든, 못 됐든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나처럼 되라는 건 모델이 아닌 것이다. 엄청난 하늘 나라를 보았기에 거기 누구도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것이다.
다이아몬드를 공짜로 얻어서 다이아몬드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는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이다.
행위로 생각을 하기에 맨날 옳고그름으로 정죄를 하고 하는것이다.
아그립바 일당도 유대인도 다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들 나처럼 되라고 하니, 웃기고 있네 하는 것이다.
바울의 나처럼 되라는 말은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내가 믿은게 기적이다. 내가 받은 생명이 너무 감사해서 나처럼 되라는 것이지 내가 의롭고 좋은 일 많이해서 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다.
더나아가 바울은 나와같이 되길 하나님께 원한다에서 그치지 않고, 결박된거 외에라고 한다. 즉 바울이 고난받고 하는건 내가 다 가져 갈테니 복음을 듣고 믿으라고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고난없이 잘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비교를 한다. 우리가 마땅히 지었어야 할 십자가를 주님이 지어 주셨기에 우리는 아무런 결박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었다. 이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 알면 내 곁이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구원에 대한 원함이 생기면 나처럼 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 새끼가 잘 나서 보는게 아니다. 내 새끼니까 그냥 날마다 처다보는 것이다. 일로써 보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이다. 내가 부족하고 형편없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다 듣고 모든 변론이 다 끝난다
30~32절
상소만 안했어도 석방 했을 텐데, 상소해서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원하는게 석방하는거이었다면 바울이 가이샤에게 상소한거에 대해 하지말 걸 했을 것이다.
세상은 결국이 중요하다. 전 아이들에게 열심히 큐티를 시켰지만 대학에 계속 떨어져서 재수 삼수를 했다. 후회가 없다. 결정하기 전까지는 너무 씽크를 많이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하루 말씀 붙들고 사는게 성령의 원함을 입는 최고의 비결이다. 그러다 보면 환경에서 역사를 하는 것이다. 그럴때 비록 실수를 해도 성령의 원함이기에 보혜사 성령이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구원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것이다. 우리의 거룩을 위해 잠시 결박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데서 빨리 석방 받길 바라는 것은 성령의 원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생각대로 행복만 원해서는 거룩해 질 수 없다. 치우친 내 원함을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주파수를 맞추고 행복이 아닌 거룩을 원하는 성령의 원함을 가져야 합니다.
-나처럼 되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행위입니까? 은혜입니까?
-가죽에게 생색내고 있는 내 결받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지? 라며 내세우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구원받기를 하나님께 원하고 있는 내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공동체 나눔
장애인인 빛나가 괜찮아 졌고, 취직도 했는데, 엄마가 폭행을 한다고 고발을 해서 조사관들이 온 것이다. 그 조사에서 빛나가 말한게 다 맞다고 인정을 했다 한다. 큐티대로 엄마의 권을 쓰지 않았다고 고발당한 사람이 저여서 감사한다고 한다.
그랬더니 조사관들이 고생하셨다고 막 울었다고 한다.
제 자식이고 장애인을 낳은 제가 죄인이고, 엄마가 거짓을 하면 빛나가 말을 하라고 했다. 큐티를 한다하니 큐티가 모냐고 묻는다. 말을 해주니 말씀대로 산다고 한다.
잘 마무리가 되었는데, 1년동안 모니터링을 한다고 한다.
빛나 어머니가 빛나에게 갇혀 있지만 불쌍한 분이 아니다.
요즘 옛날 조선시대 처럼 당파 싸움이 너무나 치열하다. 우리의 소원이 구원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피로 이렇게 잘 살게 되었는데, 그 공로를 잊고 개독교라고 한다. 남북 이스라엘이 어떻게 통일이 되는가? 둘다 망하니까 통일이 되었다 한다. 아마 우리 남북한도 다 망하면 분명히 어딜가도 우리는 형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 안된다.
여기도 그렇다. 진영, 지역...우리가 지금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큐티를 해야 한다. 큐티의 꽃은 적용이다. 그런데 다들 신령한 일만 한다. 적용을 해야 한다.
이나라를 위해 찬송부르고 기도하는게 다 신령한 일이 아님을 안다. 적용을 해야 한다. 성령의 원함을 가져야 한다.
다 통일이 되려면 원함이 같아야 한다. 목적이 같아야 한다.
기도제목
형주 - 양교 잘 받기, 친목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길
성도 - 양육 잘 받기, 경제적으로 열어주시길
영주 - 직장 미팅 잘되길, 여친 목장 참여, 믿음으로 교제 하길
세진 - 진로의 인도하심, 분별 잘하길, 양육자로 잘 섬길 수 있길
혜국 - 요즘 분별이 잘 안되는데 분별의 힘을 주시도록, 양육자로 섬기게 됐는데 잘 섬길 수 있길
두성 - 양육 잘 따라 갈 수 있길, 아버지와 관계 회복 자신을 내려놓고 소통 할 수 있기를
재신 - 양육 잘 받길, 교제 문제를 잘 분별 할 수 있도록
설봉 - 금주 큐티 잘 하길, 믿음의 기초 잘 쌓을 수 있도록
주영 - 포트폴리오 잘 마무리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