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5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9) 이성관 목사님 (안산 시민교회 담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삶을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인생의 궤도를 이탈할 때가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궤도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다. 궤도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중간 궤도 수정 없이 방향성을 잊은 표류하는 우주선과 같다. 이렇게 궤도를 벗어난 삶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다. 인생의 참된 목적을 잃은 채 이리저리 헤매고 방황할 때가 많이 있다.
방향을 정교하게 재조정하는 작업이 이 중간 궤도 수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중간 궤도 수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 그 궤도를 찾아가는 재조정이 필요하다. 영적인 삶을 회복하고 삶의 방향성을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특별히 베드로의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인생이 어떻게 재조정되었는지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다.
베드로는 인생의 궤도를 순탄하게 진행했던 으뜸의 제자였다. 흔들림 없는 방향의 나침판이 있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메시야고 예수님이셨다. 그 분 옆에 있을때는 그의 인생 또한 잘 안착되어 속도감 있게 갔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또 예수님과 동행하면 궤도를 이탈하고 벗어나는 일을 상상조차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앙과 믿음의 근본이 되었던 예수님과의 관계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기대와 다른 궤도를 가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본래 궤도의 방향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뜻이 달랐다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신앙의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베드로의 이탈의 원인을 살펴보면 자신이 살펴보고 있는 마음의 창과 렌즈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 한계와 제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자신의 렌즈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예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다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인생의 궤도에서 벗어난 베드로는 비극적 결과를 맞이한다. 내면의 세계가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을 넘어 자신이 지켜야 할 거룩한 내면의 원래의 모습이 사라지고 처음의 열정도 다 소멸된다. 한때 담대함의 믿음이 소심한 위축되는 불신으로 바뀌어지고 예수님에 대한 강한 사랑의 열정도 이제 뒤로 슬그머니 뒤로 도망치는, 무기력해 보이는 무책임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일을 통해 베드로의 인생의 궤도 이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믿음의 궤도를 이탈한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씻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죄책감이다. 한때 주님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날 때마다 더불어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자신의 절망과 후회가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 아무리 떨치려 해도 잊으려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잔상이 가득하다. 이것이 더 큰 좌절과 실패의 굴레로 빠져들게 한다. 이 상태에는 가슴 깊은 곳에서 해결할 수 없는 쓴뿌리들이 자주 나오게 된다. 건강한 자아를 해치고 건강한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미국 유학시절 청년사역을 했다.
이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이 아이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냐면 이들의 음란 게임중독 마약중독 같은 것이다. 근데 더 큰 문제는 주중에는 그렇게 살아도 주일에는 나와서 리더로 살아야 하고 찬양인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자신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 해결할 수 없는 견고한 진과 쓴 뿌리들이 있었다. 불쑥 혈기가 나오고 너나 잘하세요 한다. 건강한 자아나 건강한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실패의 잔상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아시는가? 은혜의 흔적이 있던 사람이 그 인생의 실패의 사건으로 자신 스스로를 깊은 절망과 죄책감의 웅덩이의 수렁으로 끌어갈 때가 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동굴에 들어가고 내가 만든 감옥에 살 때가 많이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나올 길이 없다. 헤어나오지 못한다. 보통 이런 상황에 빠져들면 예배에 앉아있지만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내 마음과 감정이 이미 사라져 없어진다. 이런 상황에 빠져들면 예수님의 이야기 말씀을 듣지만 더이상 나랑 상관없다 여겨지고 내 인생을 세상에 놓아버린다. 막 사는 것이다. 그 안의 죄는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것을 향해 일어날 힘 조차 없고 나아가 하나님께 회개하지도 못하는 또다른 죄책감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거룩한 성도로 사는 것, 거룩한 도전조차도 버거워서 그 자리를 회피하고 만다.
오늘 요 21:3의 베드로에게도 실패자의 모습이 역력하게 보여진다.
3절에서 지금 이 베드로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가? 힘차보이는가? 주를 위한 사명감이 투철해 보이는가? 고기를 잡는 일에 몰두하는 그 모습이 어떤가? 뭔가 역동하는 모습이 아니다. 어깨는 쳐져있고 의욕상실도 있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겨우 고기잡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옛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예전보다 못한 삶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래도 어부의 일이라서 자신의 일에 밤새도록 수고하는 열심은 있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만난 예수님, 그 말씀 때문에 그것이 자신 삶에 개입되는 순간 실패의 모습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주 했던 어부의 일 조차 흥미가 없다. 물고기를 잡는데도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 일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그 생각만 난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추억들, 은혜 받았던 생각 감동 감격들.. 그런 생각이 날수록 자기 삶의 현장이 보인다. 그 실패하고 무너진 삶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베드로의 생각은 복잡하다. 심정도 어렵다.
사실 베드로는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었다. 사람을 낚는 영혼을 낚는 어부로 불러주셨다. 그러나 인생의 궤도에서 이탈하니 그 베드로에게 남은 것은 죄책감과 실패의 잔상을 지니고 다시 고기를 잡아도 잡는 것 같지 않는, 만족하지도 못하고 공허하고 힘들어하는 베드로의 무너진 모습이다.
이런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인가? 이성친구인가? 물질인가? 학력인가? 아니다. 인생의 흐트러진 궤도의 중간 수정이 필요하다. 인생을 다시 재조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본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쫓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영적인 회복일 수도 있고 치유의 삶일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다시 이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드로에게 이런 필요가 절실 할 때 그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예수님께서 그때에 찾아오신다. 실패의 잔상을 가지고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무너지고 깨진 그 순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자리라면, 오늘 예배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시기를 축복한다. 그 때에 찾아오신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때에, 힘을 낼 수도 없고 의지를 낼 수도 없는 그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지만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을 그 때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새로운 장면이 오늘의 장면이다.요 21장에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기가막히게 찾아오신다. 눅 5장에서 처음 부르셨던 게네사렛 호숫가에 부르시는 그 장면으로 찾아오신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은
요 21장에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상황이 비슷하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했던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던 그 순간, 그리고 지금 실패하고 무너진 그곳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렇게 하니 고기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기쁨으로 그물이 찢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던 처음의 감격, 그러나 그 감격조차도 무겁게 다가오는 그 순간에,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는 그 장면을 회상 시켜 주시는 것이다.
게네사렛 호숫가의 그 만남, 그 장면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면 그래도 살아낼 수 있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더 힘들어진 그의 삶 속에 다시 나타나 주시는 것이다. 물 위를 걸었던 그 장면도 기억나게 하신다.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에,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가는 그 기적 속에, 이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그 모습이 크로스오버되어 일어난다. 물 위를 걸었던 그 믿음 기적 은혜를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이시다.
오늘 그 장면 속의 예수님께서 그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있었다. 은혜의 흔적인 그 물고기를 다 나눠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있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인생의 궤도가 잘 갔을 때 고백했던 베드로의 고백이다.
'주여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자기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늘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앞서 말했다. 그러나 지금 실패한 베드로에게는 이것에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없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좀처럼 쉽지 않다. 들떴을 때의 대답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실패할 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내 현장의 상태의 삶을 보니 내 영혼의 상태와 죄의 실상을 보았다. 은혜의 기억은 있지만 실패한 자신의 삶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에 더 매여있기 때문에 이것을 고백하기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예수님께서 물어보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찌 할 바를 몰라하는 이 베드로는 주저하며 대답한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자기 자신의 확신에 찬 대답이었을까? 자신만만한 예전의 대답이었을까? 여전히 실패의 잔상 속의 죄책감 가운데 빠져있는 고백이다. 베드로는 이제는 철저히 자신의 죄 됨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겸손해지고 싶어 겸손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보니 내가 철저히 죄인인 것을 철저히 깨달아져서 겸손 외에는 보일 것이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은혜만을 구하는 고백이다. 당신이 아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다 압니다. 라고 한다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자기의 삶을 바라보면 적극적일 수가 없다.
자신의 실패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너무 잘 알기에, 자기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알기에 이 사랑의 고백 앞에 드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고백 안에는 철저히 자신의 연약함이 있지만 주님이 내 인생에 필요하다는 고백이다. 주님 내가 당신이 필요하다는 고백이다. 당신의 사랑이 있어야 내가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고, 당신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철저히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세번째 질문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더 진지하게 근심하며 대답한다. 근심은 과연 내가 이 고백을 해도 될까, 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대로 내가 은혜대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가운데 이야기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뭔가 성공할 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고백조차도 의심이 들고 연약한 것을 알 때 하는 것이다. 주님이 다 아신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철저히 주님을 바라보는 고백이다. 실패된 인생이 있기 때문에, 삶의 어려움이 있기에 더욱더 주님을 붙잡으려는 고백이다. 내 사랑 고백 조차 당신 손에 있습니다. 내 삶조차도 내 실패의 잔상도 당신 안에 있다고 주님 손에 모든 것이 있다는 고백이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덮어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이 사랑의 고백조차도 내게 있지 아니하고 주님에게 있음을 시몬 베드로가 디베랴 호숫가에서 다시 고백한다. 이 베드로의 고백이 인생의 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말씀과 주님이 찾아오셔서 다시 세워주신다.
이 베드로 이야기를 왜 하는지 들려드리겠다. 이 모습이 제 모습이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목회자 자녀로 꽤나 반듯한 삶을 살았다. 누구보다 학창시절 때부터 기도했고, 학창시절부터 사춘기 없이 교회안에서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학생회 회장 청년부 회장 하며 누구보다 신앙심이 투철했고 투철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학부도 신학 대학원도 신학 유학도 신학 했다. 누구보다 속도가 빨랐다. 그래서 35살에 천명 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았다. 그런데 그 교회가 저희 아버지께서 개척한 교회이다. 세습목사이다.
저희 아버지 설명을 잠깐 하면, 워낙 스마트한 영성의 소유자이다. 간증이 너무 많으셨다. 옥한음 목사님 같은 분이셨다. 폐결핵 앓으셔서 한쪽 폐가 없으시고 반쪽 폐로 고아로 자라시다가 12년간 동굴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갔다가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신유 은사 받고 내려와서 목회를 했는데 총신대 수석 졸업이었다.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목회도 너무 잘하셨다.
그 교회에 저희 교인들은 아버지가 불렀다고 오해하지만, 제가 기도할 때 그 시민교회로 가라고 말씀하셔서 2주만에 결정하고 짐 다 싸고 캘리포니아 박사 포기하고 시민교회로 갔다. 그런데 와 보니 저에게 결론이 나는 것은 세습목사였다. 저 때문에 상한 사람 불편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우는 것 밖에 하는 것이 없었다. 원형탈모도 생겼다. 새벽기도 끝나고 비행기가 교회 위를 지나갈 때면 줄이라도 걸어서 다시 미국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었다. 주신 사명이 너무 무거웠다. 잘 하려고 노력했다. 실수하면 안되는 줄 알았다. 꼭 성공해야 한다 반듯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목회를 생존적으로 했다. 내 열심과 노력을 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때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소천하셨다. 제 나이 38이었다. 그 큰 교회를 감당해야 하니 교회에 큰 흔들림이 있었다. 저는 어금니를 깨물고 그 강단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저는 슬픔도 표현하지 못했다. 어금니 깨물면서 괜찮은 척 했는데 그때 공황장애가 왔다.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무거운 짐이지만 당연히 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3년쯤 지나서 척수에 염증의 손상이 와서 오른쪽 반신마비가 왔다. 지금은 운동감각은 회복이 되었지만 말초신경의 감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며 철야하며 그 현장을 버텼다. 그러다 제작년에 몸이 피곤해서 병원에 쉬러 갔는데 간경화가 왔다. 최선을 다했는데 깊은 절망 불편 원망의 웅덩이가 깊어졌고, 내가 만든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작년에 몸이 안좋아서 양해를 구하고 5개월간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목회의 모든 의지도 상실되었다. 인생의 궤도가 많이 멀어졌다. 실력이 없으면 실력을 위해 준비했고 내가 부족하면 더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화장실 청소 쓰레기 청소 하며 누구보다 더 열심히 했다. 근데 제 인생의 결론이 고난이고 아픔이고 병이었다. 그래서 큰 낙담이 왔다. 너무 마음속의 불평원망의 감옥 안에 갇혀지내게 되었다.
감옥 가운데 살다보니 가정이 온전했겠는가?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가족을 데리고 한달 정도 섬으로 들어갔다. 너무 힘들면 생각도 안되고 회복할 의지도 없다. 누가 힘내라고 하면 그 사람 죽이고 싶다. 이것은 혈기가 아니라 실존의 이야기이다. 너무 힘들면 그 이야기하는 사람이 너무 싫다. 죽기를 간구하는 엘리야 같은 마음이 제 안에 있다. 그러면 시야가 좁아지고 철저히 자기 중심성이 살아난다.
그 섬에서 파도가 많이 치는 날이 있었다. 방파제 끝에 섰다. 선 이유는 한가지였다. 너울 성 파도가 와서 저를 휩쓸어가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제가 드라마틱하게 간증하려고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자살하면 지옥 가니까 하나님 영광을 가리니 그냥 파도가 와서 나를 끌고가면 좋겠다 했다. 너무 괴로울 때는 처자식도 안보인다. 이 땅에 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그런 생각이 들며 회피하고 싶은 그 순간 속에 로뎀나무 앞에서 엘리아가 죽기를 간구한 것이 내가 알지도 못한 채 내가 얼마나 설교했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기를 간구한 것이 이거였구나 했다. 이 끝없는 싸움 속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방법을 몰랐다. 그때 그 옆에 등대가 있었다. 그 등대의 빛이 돌았다. 그때 성령님의 강력한 메세지가 왔다. 제 상황을 보라고 하셨다. 꼬라지를 보라고 하셨다. 제 모습을 보니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죽기를 간구하는 모습이었다. 낙담해 쓰러져있는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위에 있는데 너는 빛이 아니라고, 왜 빛이 되려 했느냐고 하셨다. 제가 서 있는 곳은 칠흙 같은 어둠이었고 파도를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궤도가 이탈되었다. 그 이탈의 원인이 무엇인가? 내 열심 내 확신 내 성공 내 야망 이것을 붙잡고 버티다가 결국은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고난 앞에 무너졌는데 내 자신의 꼬라지를 보게 된 것이다. 죄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왕노릇 하려 했구나 내가 바벨탑을 쌓고 있었구나 내가 잘못된 생각으로 목회 하려 했구나. 그때 깨달았다. 하나님만이 빛이시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저희 집에서 제 아내의 지인으로부터 저희 집에 큐티인 정기구독으로 전달받았다. 마음이 낙담될 때 하나님을 말씀을 볼 수 있을까? 없다. 저도 그래서 쇼파 위 책상에 있는 큐티책을 대수롭지 않게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씀보다는 묵상 간증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묵상간증을 보니 당황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실명을 걸고 어떻게 이런 철저한 죄 고백을 할 수 있을까 했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보다가 저의 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씀을 보니 제가 유학시절 때 10년 신학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되지 않는 신앙이 있었다. 특별히 목회자 자녀로 반듯하게 살면서 체면 의 공로 속에서 자랐던 제가 다중인격이었다. 집 교회 학교에서 달랐다.
제 아내와 제가 만난 지 3일만에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저는 남자가 아니면, 핸디캡이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고 작정했다. 신혼여행 다 다녀오니 100일이 되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기로 작정해서 결혼했다. 사랑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저 사람의 상황이 바뀌더라도 결혼은 작정이라 생각하고 했다. 그런데 예쁘게 자란 아내와 개척교회 자녀로 자란 제가 잘 안맞았다. 제가 사모가 되려면, 사모는 이런 말을 많이 했다. 가정에 문제는 많이 일어나는데 이야기 할 곳은 없고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한국에 먼저 들어갈 일이 있었다. 공항에서 첫 아이를 데리고 저를 향해 울었다. 잘해주지도 않는 나를 위해서 운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4시간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못디게 했는데 왜 나를 위해서 우는가 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현관문 열린 채 하루가 지났다. 다중인격인 제 모습 속에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찾지 못하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목사가 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내 모습을 보여내는 것도 하면 안된다 생각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죽여달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죽이셨다.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기도하게 하셨는데 제 죄의 실상을 드러내게 하셨다. 완악하고 교만하고 음란하고 잘못된 것이 많은지 보여주셨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했다. 기도할 수 있는 제목이 아니었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하면서 부들부들 떨며 회개가 터져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즉시 치유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치유는 회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덮는다고 덮여지지 않는다.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그 곳에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때 큐티인을 보면서 실패하고 망가진 저에게 게네사렛 호숫가의 장면이 떠오르게 하셨다. 그 말씀을 통해 그때 베풀어주셨던 은혜, 자신만만 해서 자기 확신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는 무너진 상황 속에서 그때를 회상시키셔서 그 일을 감당케 하시는 것이다.
그 때 병원에 입원해서 큐티책을 보는데 잘못한 것이 없는데 회개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억울해서 큐티책을 던졌다. 그런데 그러니 더 아팠다. 그러면 큐티책 다시 가져오고, 죄를 들여다보고, 눈물로 회개하고.. 그래서 그 말씀 때문에 그 말씀을 봄으로써 제 삶의 인생의 궤도가 수정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 속에서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이다.
저는 목욕탕 큐티 세미나가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들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도 잘 모른다. THINK양육도 지난 주에 처음 받았다. 우리들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세워주신 이유 중 하나는, 이 큐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말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매일마다 말씀 앞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의 궤도가 어긋난다는 말씀이다. 말씀 외에는 회복할 다른 방법이 없다. 저도 사람들을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길이 더 공허하고 넋두리 하소연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제 마음에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말씀 보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 앞에 서 있는 단독자가 되길 원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이 좋은 것을 시민교회 교인들에게 다 나눠주고 싶었다. 전교인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큐티책을 980권을 구매했다. 지금도 저희 교회는 2년째 전교인 큐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제 목회의 성공의 비전이 아니다. 제가 큰 교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제 삶에서 죽고 싶을 그 때에 이 말씀 없었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붙잡았던 그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의 백성들이 보아야 한다, 반드시 이 말씀 때문에 살아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다시 실패의 잔상과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이 절박한 소원이 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저는 그 사명을 가지고 오늘 여기에 왔다. 말씀을 잘 전하고 못 전하고는 제 역량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순간에 주시는 것은 내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능력이 있고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저도 살아났던 것 처럼, 제 힘으로 살아가다가 무너진 그 곳에서, 아내도 모르고 자식도 모르고 때로는 교회 공동체도 모르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저를 살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 말씀 앞에 엎드려 깨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제가 죽는 날, 죽는 그 날에 제 옆에 큐티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큐티 본문이 제 인생을 향한 주님의 평가이고 결론이 될 것이다. 책망하는 말씀이어도 가슴에 안고 내 생에 마지막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도 회개할 것이다.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말씀이 있으면 회개하고 붙잡고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붙잡을 것은 이 말씀밖에는 없다.
사람은 믿음의 동역자이다. 믿음의 형제자매이다. 저는 오늘이 마지막 설교와 같다 여기며 왔다. 근데 김양재목사님의 뒷모습을 볼 때 마다, 그 눈물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고 싶어서 몸부림쳐서 이 말씀을 안보면 안되니까, 이 말씀이 없으면 그 날 살 수가 없으니까, 이 말씀이 없으면 내 고난의 사건을 해석할 수 없으니까, 이 말씀 없으면 늘 우리가 마귀에게 지고 사니까, 후회 밖에 없고 실패의 잔상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늘 디베랴의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시몬의 아들 요한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은 사랑함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말씀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는 사람은 그의 말씀을 보게 된다.
여기까지는 제가 준비된 간증이다.
오늘 아침에 제 아내와 오며 큐티 말씀을 나누었다. 야곱의 모든 가정이 애굽으로 내려 갈 때에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말씀이다. 저희 가족들이 세계 각지에서 이 방송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지금 많이 힘들어 보인다. 저도 우리들교회에서 말씀을 나누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세우신 가장 큰 것은 가족구원이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너무 신실하시고 정확하시다, 오늘 우리들교회에서 허세가 생길까봐 아니라고, 오늘 주신 말씀이 실재가 되는 것은 나다, 그 날의 말씀이 삶에 실제로 녹아내린다는 것을 전해라. 내 말씀은 살아있다. 원동력이 있다고, 그 누구도 살릴 수 있다고, 그것만 전하면 그것이 다 된 것이다.
여러분들이 축복받은 주의 백성인 줄 믿는다. 이 교회 안에 있는 것,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열방에있는, 민족에 있는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보고 살아간다. 이것을 함께 꿈꾸고 기도하고 실천하고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면 회개하고,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감격이 되면 나누고, 그럴 때 믿는 무리가 많아지고 말씀이 흥왕케 되는 이 구원의 역사 구속사의 역사가 흘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고 말씀을 통해 이루어가실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이 생수 같은 말씀 앞에 서게 해 달라고 힘써 전하고 한사람의 큐티인을 통해 제가 변했을 때 공동체가 변한 것 처럼 마음껏 전하십시오.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래서 우리는 일어나 어디든지 어린 양을 먹이고 우리 천국에서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기도제목]
보련
1. 중요한 일을 할 때 내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 되시길
2. 말씀 보며 하루살 수있도록
3. 서류결과 나올 때까지 인내하는 시간 기를 수 있도록
크리스틴
1. 큐티 할 때 말씀이 깨달아 질 수 있도록
2. 마음을 지켜서 매일의 할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3. 차 고치는거 땜에 차를 6/8일날 맡기는데 고치는 기간 동안 잘 고쳐질 수 있기를. 렌탈받는 차 나에게 필요한 차를 받을 수 있기를.
4. 상처에 숨어서 내 죄를 보지 못하지 않기를.
은선
1. 진로 말씀으로 분명하게 인도함 받기를, 아직 들을 마음이 되지 않아서 내 수준에 맞게 말씀해주시기를
2. 진로, 공부, 세상 성공과 관련된 모든 욕심이 결핍과 궤도이탈, 그리고 내가 왕 되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됨을 깨닫고 매일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죽어지고 회개할 수 있기를
3. 학위논문 디펜스 6/10일이고, 내일 랩미팅이에서 예비 발표하고 피드백 듣기로 했는데 잘 듣고, 겸손하게 답변 잘 할 수 있기를
교희
1. 말씀과 공동체에 잘 물어가며 궤도에 머무르도록 (가족과 죄책감 그 외)
2. 엄마와의 경계 잘 세우고 혈기 부리지 않도록
3. 큐티 기도 예배 생활 충실하도록
은우
1. 나는 빛이 아니고 주님이 빛이신 것 알고, 매일 말씀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고센땅의 큰 은총과 기쁨 누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