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30 사도행전 22:1-8 (성령의 말함)
1. 내 자랑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입니다
첫마디가 나는 입니다. 바울은 이론과 감동적인 일화에서 시작하는것이 아닌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삼위하나님의 사역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인데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성령의 말함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다섯가지로 얘기하는데 첫째는 나는 유대인이라 말하며 여러분과 똑같다고 얘기합니다. 둘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태생적으로 교육의 도시 다소출신이기에 오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셋째는 예루살렘성에서 자라고 성장했다는 것은 유대인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넷째는 가말리엘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에는 따라올자가 없다는것입니다. 다섯째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육으로 모든 것을 갖췄으나 여러분 모두와 마찬가지로 똑같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에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믿기전에는 모든것을 갖췄고 너희들도 그렇게 갖춘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것이다, 라고 말하는것입니다.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의 얘기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함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를 주장하는것이 아니라 너희들과 똑같다고 출발합니다.
그럼 자랑과 성령의 말함이 다른것은 무엇입니까? 청중에 대한 태도로 달라집니다. 자랑하는 자는 내 얘기를 들어주는 자로 대하지만 성령의 말함을 하는자는 나와 상대를 똑같은 죄인으로 보고 얘기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말, 이야기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모습 자랑이던 연약함이던 있는 모습그대로 인정하고 그 모습을 내가 대표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죄인이기에 똑같습니다.
인간은 자전적교만이 있기 때문에 늘 자기 자랑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죄가 안보이는 사람은 자랑으로 흘러가기 쉽기때문에 내 간증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확인해야하고 이타적인 마음을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헌데 이 자랑도 없이 욕하는 자들이 더 무섭습니다. 바울의 얘기를 들으며 욕하는 자는 성령이 없으면 자랑이라 하기 때문에 바울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그 목적을 보는것이 중요합니다.
-적용 : 내 간증을 듣는 사람을 박수쳐주는 관객처럼 대합니까? 나와 같은 죄인인 우리로 대합니까? 간증을 하면서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것은 무엇입니까?
2. 내 죄가 내 고난보다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이 다섯가지 자기소개로 우리임을 고백한 바울은 그뒤에 자신의 죄를 밝힙니다. 사울은 자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전부 외우고 있기때문에, 자기 구원은 자기가 하는것이다, 자신은 흠이 없기때문에 스데반의 설교가 하나도 안들려서 살기가 등등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울에게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행위로 천국갈수 없어요 한다면 얼마나 소름이 끼치겠습니까? 그러니 살기가 등등했겠지요, 예수라면 치를 떨었겠지요? 당시 사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믿었기에 이것이 죄라 여기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스펙을 가진 사울의 열심은 사람을 죽이는 열심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결박당하고 환난당하면서 옥에 갇힌 이 억울한 고난을 바울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죄를 보기때문에 신세계를 보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었을 당시 선한 일인줄 알고 했던 모든일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선한 남녀를 결박하며 옥에 넘긴 죄임을 인정합니다.
내가 당한 고난만 강조하는 것도 내 자랑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말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도끝도 없이 죄만 얘기하는것도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내 죄를 얘기해야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것은 내 죄때문임을 인정하는것.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인생의 결론이라고 하는것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보라고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허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 예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없이 살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형상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랄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수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나를 죄에서 돌이키게 잡아오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이고 발입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는 손이고 때려서 깨우고 잡아오시는 손입니다. 회개하여 살아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이 오면 내 죄를 돌이켜 죄악의 크기를 깨달은 만큼 성령의 말함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느낄수있는것입니다.
-적용 : 예전에 죄인줄 몰랐는데 이젠 큰 죄임을 깨닫게 된 일은 무엇입니까?
나눔할때 늘 나의 고난만 나눕니까? 그로인한 죄도 나눕니까?
내 고난보다 내 죄가 더 크다고 몇 프로 생각합니까?
3. 엎드러져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정쯤이라 시간을 처음으로 밝힙니다. 어두운데서 빛가운데 가면 눈이 부시지만 이스라엘의 정오는 너무 환합니다. 헌데 이 빛보다 광채이신 예수님을 보니 눈이 머는것입니다. 이 빛이 하늘로 둘러 비추면은 나에게 무슨 상황을 말할까요?
이러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기세등등했던 바울이 어떤것도 못하는 상황,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그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땅에 엎드러집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이 처음 들리는 것입니다. 그냥 홀연히 비추는 꼼짝못하는 상황에서 땅에 엎드려져 들으니 사운드가 아니라 소리로 들리는 것이고, 사울아 사울아 나를 어찌 박해하는 것이냐 라며 나의 죄목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목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가로막혀 그제야 엎드러져 들으니 성령의 말함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일이 예수님을 박해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들으면서 내 생각이 내 가증이 땅에 엎드러짐을 통해 내 입을 통해 성령의 말함이 되는것입니다. 복음도 땅에 엎드러져야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엎드러져 자기만 들었던 주님의 보이스 목소리를 모두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르실때는 사명을 주실때 부르시는데 바울이 행위로 공로로 구원받은게 아니지 않습니까?
구약성서를 줄줄 외던 바울은 한번도 주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엎드러지니 주여라고 나옵니다. 그럼 왜 바울에게 나사렛예수라고 소개하실까요? 유대인에겐 나사렛하면 저주와 멸시와 천대가 생각나는데, 이 말은 너가 저주 멸시 천대받는 이방을 너가 바꿔라 하는것입니다.
내가 꼼짝달삭못하고 엎드려지면 나사렛예수가 귓가에 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엎드려지는 것이 죄인됨을 인정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나사렛예수를 듣지 못했다면 바울이 이토록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렛예수를 안다는건 구속사를 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엎드려지는 사건속에서 나에게 들리는 말씀이 있어야 성령의 말을 할수있습니다.
-적용 : 빛에 둘러쌓여 앞으로도 뒤로도 갈수 없는상황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선채 나를 구원해줄 환경만 바라봅니까?
엎드러져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말씀이 들립니까? 그래서 성령의 말을 합니까?
기도제목
A
1. 연휴지나고 원장님과 얘기할때 성령의 말함으로 지혜롭게 얘기할수 있도록
2. 이직한다면 좋은 환경에서 일할수 있도록
윤아
1. 결혼준비 과정속에서 더 지혜롭고 구하면서 가야될거같은데, 양가부모님이 결혼식장에 함께 들어갈 때 까지 잘 깨어있을 수 있도록
2. 목자모임 잘 나갈수있도록, 잘 물으면서 갈수있도록
다님
1. 불면증과 통증으로 인해 결박된 이 환경에서 하나님 말씀보며 하루하루 잘 살아낼수있길, 잠 재워주시길
2. 이번 겨울수련회에 전참 할수있도록 체력주시길
3. 동생이 공동체에 잘 정착할수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