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5
사도행전 16:25-34 성령의 죄수
성령의 죄수가 되어서 우리가 모두 여기 있습니다. We are All Here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죄인 됨을 알아야 합니다.
1. 성령의 죄수는 잘 듣습니다. 25-26
굳게 닫힌 감옥 문이 바울과 신라의 몸을 막고 있는 한밤중에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죄수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죄수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귀신들린 여종 고쳐주고 매맞고 창고에 갇히고 살점이 뜯겨져 나가도 같은 방에 죄수들이 듣는 데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이 기도하고 찬송해도 죄수들이 아니면 본질적으로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성가대 찬양과 기도를 들으며 컸어요. 학생 때 종교부장까지 하면서 반주하며 대표기도 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제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제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빌립보 감옥에는 육적 죄인들이 모여 있기에 낮아진 마음으로 듣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셋팅이에요. 우리가 간증을 해도 오픈할 수 있는 죄는 쉬어요. 그런데 말할 수 없는 오픈들이 많아요. 집집마다 유대인 같은 의인 식구들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오픈하지 못하는 얘기들이 있어요. 아덴같이 갖추어진 구원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수들이 바울의 말을 참 잘 들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신결혼 하라는 말은 죄인들의 공동체를 꾸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1)죄인들의 만남이 최고의 만남이에요. 그리고
2)죄인과 의인의 만남이 있겠죠? 이 만남은 힘들지만 용광로를 통해 소망을 이루어갈 확률이 그래도 이제 반쯤 넘겠죠? 그런데
3)의인들끼리 만나면 개구리가 처음에는 뜨듯한 비커에 기분 좋게 들어갔다가 물이 끓는지도 모르게 죽어가는 것처럼 행복을 부르짖다가 구원을 놓치니 최악의 만남입니다.
목사님의 부모님 부부가 이혼하고 서로 재혼을 했어요. 어머니는 재혼남이 잘해주고 사랑 표현도 많이 해주는 이 세상 의인인데 불신자였어요. 재혼해서 잘먹고 잘살아 행복해서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감사해야 할텐데 멀리했어요. 잘 살면서도 목사님 전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의 예전 행동을 기억하며 입만 열면 계속 비난을 했다네요. 아버지 목사님도 집사님과 재혼을 했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 힘든 것이 어디 가겠어요? 여전히 아버지 부부도 힘이 듭니다. 문제는 아들 목사가 양쪽 모두 안 통한다는 거에요. 이혼에 이어 재혼까지 기가 막히고 안 통해요. 세월지나 새어머니에게 한계점의 고난으로 구속사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이분이 예배를 꼬박꼬박 드리게 되었어요. 아들 목사가 네 분 부모 중에서 새어머니와 처음으로 통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씀으로 통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인과의 만남이잖아요. 목사를 해도 죄인임을 모르면 죄인 공동체가 되지 못해 가정을 파괴합니다. 율법이냐? 은혜냐? 강박이냐? 두려움이냐? 해도 가정을 지키면서 순서를 따져야지! 내 율법의 언어 명칭 법 하나 때문에 가정을 파괴하면 정말 율법으로 망하는 거에요.
한 목자님 나눔에, 아내가 얘들이 배달시켜 먹은 음식 포장 용기를 다시 씻어 넣어놓는다고 합니다. 쓰레기장에 버려놓은 것들부터 끝도 없이 집에 많이 있다고 합니다. 고학력자 집안이에요. 이것이 율법이에요? 생색이에요? 강박이에요? 정신병이에요? 하면서 나누었어요. 기가막혀도 남편의 은혜가 좀 더 크고 두 분 다 죄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결혼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죄수들의 만남이 이 세상에서는 감옥이잖아요. 죄수들은 감옥에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결혼은 감옥생활에서 시작하는 거죠. 같이 죄인이면 너도 죄인 나도 죄인 하면서 감옥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당하는 것이죠. 선한 것이 서로 없기에 과거 가지고 싸워도 나같은 죄인의 은혜로 돌아가는 태도가 서로 죄인들의 만남이에요.
그런데 한쪽은 죄인이고 한쪽은 의인이면 죄인쪽에서 너무 많이 기다려야 합니다. 감옥에까지 와서도 내가 죄가 없다고 부르짖는 죄수가 많다고 해요. 교회는 다니니까 죄인이라며 기도는 하는데 결혼하고 보니 나는 죄 없다고 합니다. 전부 속았다고 합니다. 서로 가치관이 너무 다르기에 영적 전쟁이 치열합니다. 그래서 옥에 가두고 발에 채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빌립보 감옥에서 영적 죄인인 바울과 신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니 육적인 의인이 아니고 문자적으로 낮아진 진짜 죄수들이 들었다는거에요. 지금!!! 왜 듣겠어요? 갇혀있으니까! 듣죠!!!! 식구도 망하고 갇혀 있을 때는 기도와 찬송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환경이 겸손한 것만 겸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우리의 영적 죄인들이 성도잖아요 영적 죄인들은 감옥에 갇혀서 죄를 모르는 진짜 죄인들에게 기도와 찬송을 들려줘야 하는 사명이 있어요. 가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릴 때가 오지만,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내가 왜 참아 하고 다 뛰쳐 나가는 거에요. 그래서 가정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알려주는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이것은 옳고 그름으로 지킬 수가 없는 거에요. 망해도 외도를 해도 병들어도 같이 감옥에 있어야 하는 것이 죄인들에게 주신 은혜겠죠. 그러나 은혜가 아니고 율법으로 지키면 더 무서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살아도 성도는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성도는 늘 힘들어요. 이 땅은 사단의 나라이기에 하나님 나라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사단은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 나라는 점점 커지고 그래서 끝까지 전쟁을 치르고 가야 하기에 성도는 늘 힘들어요. 그래서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기도와 찬송을 하는데 아버지를 부르짖으면 난 하나님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내게서 죄수의 모습이 보이는 그것이 죄인의 은혜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망할 때가 말씀이 들릴 때라고 기뻐하는 것이에요. 감옥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어요. 감옥에서 가장 잘 사는 것은 기도와 찬송하는 것밖에 없는데 힘들다고 탈옥을 하면 기도와 찬송을 들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죠. 감옥에서 천상의 찬송을 듣게 되면 이때가 구원의 때인데 성도는 구원을 위해서 옥중 찬송을 늘 해야하는 것이에요. 가정이라는 감옥 안에서 찬송을 들어야 하는데 탈옥을 하면 안된다는 거에요.
생각해보면 남편과 통했던 적이 없어요. 우린 장로님 딸과 장로님 아들이 결혼했잖아요. 입으로는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자칭 죄인인데 무늬만 죄인이고 속은 서로 의인의 만남으로 시작했습니다. 의인과의 만남이 최악의 만남이잖아요. 그래서 지옥 갈뻔 했는데 감사하게도 우리 남편의 음주가 전공이었어요. 술주사가 큰 고난이에요. 술마시는 것보다 술주사가 무서운거에요. 저에게 두려움이라는 약점이 있죠. 두려움 때문에 남편의 주사를 받고 떨었어요. 이혼과 자살하지 않은 것은 믿음보다 영육 두려움 때문이에요. 사단의 백성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옮겨 가는 지나는 과정에서 쓰셔야 하기에 전쟁이 치열했어요. 다시 생각해도 제 힘이 아니었습니다. 술주사라는 것은 종합적인 박해에 해당되요. 때마다 죽고 싶고 수치스러우니 무슨 힘으로 참겠습니까? 매도 맞았다고 하는데 제가 매 맞을 이유가 뭐가 있나요? 술을 마시니 그런 일이 일어나는거죠. 절절매면서 사는 것과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술주사를 들으면서 계속 기도하고 찬송했죠. 우리는 사명이 있다고 했잖아요. 옥중에서 찬송해야 하는 내가 죄인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그런 기막힌 깨달음이 오더라구요. 이 세상은 사단에 속한 나라에요.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데 별일이 없겠어요. 사단이 일제히 달려들면 성령이 나를 효과적으로 도우시니 오늘 죽을 것 같은데 살아내고 또 죽을 것 같은데 살아내게 하셨어요. 세상의 기쁨을 조금씩 내려놓게 하셨어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사단의 나라의 기쁨보다 조금씩 커진거죠. 그리고 힘드니까 하나님 나라의 언어인 기도와 찬송이 나오더라구요. 신기하게 남편이 주사를 부릴수록 내 죄가 보였어요. 사단에 속해 있던 저에게 선한 것이 뭐가 있겠어요. 저는 날마다 내가 선하다가 주제가였는데 그건 성령이 하시는 일인데 저의 욕심 거짓 포장 야먕 차별 생색 생각지 못한 죄악들이 드러나니까 남편의 술주사와 비교가 안되는 저의 내적인 교만에 죄를 보게 하셨어요. 제가 마음이 착해서 참은 것이 아니고 저의 악함이 보이니까 그의 주사를 받아내게 되었죠. 결혼의 감옥에 가두고 발을 채웠다고 불편과 인권을 부르짖어야 마땅 하지만 저의 더러운 가증스런 죄를 보게 해준 것이 감사해서 제가 우리 어머니 놓고도 회개했다고 했잖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저의 죄가 또아리를 틀고 있더라구요. 성령의 죄수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의인들은 자기 죄를 못 봐요. 착한 사람이 제일 전도하기 어렵거든요. 저는 그것이 두려움 이라는 것도 몰랐죠. 그러니까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생명을 내놓고 기도했습니다. 말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에요. 성령의 죄수가 맞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한 끝은 응답이 있었어요. 그날이 갑자기 옵니다. 사건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어떻게 움직여서 구원의 길을 내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옥에서 잘 기다리면서 바울같이 자기 죄를 더 보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가 아니고 내가 옥에 있는 것은 스데반 죽인 내 삶 결론이다 라는 것을 실라하고 나누면서 기다렸더니 갑자기 옥터가 움직이고 다 열리고 벗어지게 된 것입니다. 영적 시각이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가치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갑자기 어느 날 이런 기적이 많이 일어난다고 간증하시잖아요. 갑자기 자유함이 생기니까 그것이 옥이 아니고 옥에 잘 붙어 있으니까 갑자기 온 남편의 죽음이 큰 지진 같은 사건이었지만 죽음을 깨트리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노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이 되게 하셨어요. 참는 것도 기적이지만 이 세상에 제일 무서워하는 죽음의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니까 이것이 다 기적 아니겠습니까?
죄인과 의인의 만남이 그랬지만 둘 다 의인이면 최악의 만남입니다. 의인들은 기도와 찬송이 들리지 않아요. 육이 질그릇이 아니고 금 그릇이기에 깨어지지가 않습니다. 남녀 둘 다 의인인 금 그릇이기 때문에 영원히 안 깨어져서 안 들리다가 하루살이의 행복을 불안하게 맞보며 영원한 심판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 산책을 하다가 개미가 죽은 지렁이를 개미집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어요. 돌아와 보니 작은 개미들이 지렁이를 개미집까지 순식간에 옮겨 놓았어요. 열심히 돈을 모으는데 제가 한번 밟으면 끝이죠. 개미는 이런 세계가 있음을 모르죠. 언제 죽을지 모르고 부지런히 의롭게 살죠. 세상 의인들의 삶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나중에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의인들은 유대인처럼 감옥을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원망과 불평 속에 있거나 범털이라고 대우를 받으려 하지만 하늘에서 보면 하루살이나 개미의 행복 아니겠습니까? 여러 환경이 다르겠지만 결국 죄수가 아닌 자들의 공동체는 사건 하나 터지면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다 뛰쳐나가고 탈옥하고 찬송할 수가 없어요. 죽음 앞에서 별 인생이 없어요!
Q. 내 인생에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나요? 뛰쳐나갔나요? 여러분의 결혼생활 죄인들의 만남인가요? 죄인과 의인의 만남인가요? 의인들의 만남인가요? 청년들은, 죄인과의 만남을 기다리나요? 의인과의 만남을 기다리나요?
2. 성령의 죄수는 잘 묻습니다. 27-29
옥터가 열렸는데 자다 깬 사람은 열린 문을 인정하기가 싫어요. 자기 실수 인정하기 싫어요. 이것이 실수했다고 해도 멸망의 사건이 아니고 구원의 사건인데 드러나는 수치와 가난 때문에 자신을 직면하기가 힘듭니다. 우리의 열린 오픈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몰라요. 우리에게는 옥터가 열렸는데 간수에게는 죽을 일이 생긴 것이에요. 성도들이 간증하지만 식구 중에는 간증이 가문의 수치라고 말하는 식구들이 많아요. 똑같이 감옥에 있어도 질그릇의 낮은 입장의 죄수는 기도와 찬송을 듣고 메어진 것이 풀리지만 조금 높은 놋그릇 간수는 감시는 했지만 벽 하나 사이로 기도와 찬송을 듣지 않고 잤죠. 우리 집들도 벽 하나 사이로 평생 안 듣는 부모, 자녀, 식구들이 너무 많아요. 옥문이 열려도 기쁨에 동참하기는커녕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죄인과 의인의 만남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가 안됩니다. 믿음의 결혼이 중요해요. 당장 눈앞에 지진과 열린 문만 보고 할 수 있는 것이 자결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이 전혀 안 보입니다. 자결은 100% 죄인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의인인데 억울해서 자결하는거에요. 길은 예수밖에 없는데 자꾸 다른 길이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것이 죽는 길이라고 해요. 지진의 사건은 바울의 결박을 풀어줄 뿐 아니라 자고 있던 간수도 깨우는 사건이에요. 바울의 목적은 자유하게 함이지 옥을 나가는 것이 아닌 거에요. 나를 자유하게 하셨다면 그 자유로 스스로 갇힌 자가 되어서 사건을 해석하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자결하려는 그 한사람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여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이죠. 자유를 부르짖다가 자유를 반납했어요. 누구를 위해서 반납했습니까? 바울을 가두고 지킨 바로 간수의 구원을 위해서 자유를 반납했어요. 놀라운 기적이에요. 세상에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적용을 길로 놓아야 성령의 죄수인 것 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고 마음이 열리니까 옥문이 열렸는데 진짜 죄수들이 은혜를 받고 한 사람도 안 나갔다는거에요. 너무 놀랍지 않아요? 간수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네들을 채찍질하던 간수의 구원을 위해서 바울뿐만 아니라 그 죄수들이 아무도 안 나갔어요. 아무도 안 움직인 것은 성령의 찬송을 한 바울사도의 결론이죠. 하나님의 인정하심이에요.
저야말로 얼마나 자유를 원했고 나가기를 소원했습니까? 제가 자발적으로 갇혀 있게 된 것이야말로 기적아니겠습니까? 그때도 죄인이라서 주사를 들었지만 자유가 되었는데 말씀대로 나를 하나님 나라로 점점 양이 커지고 있으니까 생각지 못한 사명이 주어지더라구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간수는 고통을 물을 수 있는 공동체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아냐구요? 지금 간수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부하들이 있잖아요. 죄수들이 달아난 사건에 대해서 같이 의논하고 조치를 취하여야 정상적인 것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서 다 뒤집어 쓰고 자결하려고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 묻지도 말하지도 않고 혼자 속으로 삭히고 혼자 해결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아주 본인은 의롭고 외로운 사람의 전형이죠. 삶의 무게를 홀로 다 지려고 했고 결국 그 의인의 끝은 자살뿐이 없는거에요.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어도 실라와 둘이 있어도 죄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안이 되어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니까 옥문이 열려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잖아요. 제가 갇혀 있었어도 죄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나가지 못해도 물을 공동체가 있었어요. 전도한 사람도 다 내가 물을 공동체에요. 그런데 의인들은 이 세상 최고의 권력을 쥐고도 만나는 사람들이 사단에 속한 이해타산적이기 때문에 삶의 낭떠러지에서 한 사람도 물을 사람이 없어요. 구원해 줄 사람이 없어요. 우리는 그것을 이 시대에 너무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왜 필요한지 아시겠죠? 복음은 전해야 하는거에요.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해요. 청년들이 소망이잖아요.
Q. 여러분은 간수 공동체인가요? 바울 공동체인가요? 부부라도 간수 공동체라 자살을 생각하는 부부나 공동체가 허다합니다.
3. 성령의 죄수는 잘 듣고 잘 물으면 저절로 우리가 됩니다. We are all here. 28-34
자결하려는 순간 큰 지진이 옥터를 움직인 것처럼 바울의 큰 소리가 간수를 움직였어요. 마음이 움직인 간수는 몸을 움직여 깊은 옥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다. We are all here. 죄수들이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오늘의 주제는 기도와 찬송이 아니라 죄수들이에요. 성령의 죄수들이 되어 구원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죠. 간수는 떨며 지금까지 짊어진 삶의 모든 무게를 내려놓는 것처럼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바울공동체의 위력이에요. 죄수 바울과 실라에게 극존칭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또 한 명 성령의 죄수인 간수에게 구원에 관해 물어볼 지체를 주십니다. 내 인생이 지금 막혀있는 것 같아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는 인생 최대의 질문도 거침없이 물어볼 수 있는 목장이 있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구원을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런 목장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목장을 향해 뛰어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림을 경험하는 비결이에요. 바울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질문에 대답합니다. 성령의 죄수는 서로서로 인생 최고의 질문과 답을 얻어냅니다. 구원을 모르던 간수는 인생의 절망에 빠져서 칼로 자결을 하려고 했는데 I am Here, God is Here, 이것이 We are all here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죠. 평소 무시하고 듣지 않았던 바울 공동체이지만 각종 죄수들이 듣는 모습을 보았잖아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중요합니다. 목장에서 듣기 싫은 다른 사람들의 매 맞고 옥에 갇혀서 찬송 부르는 얘기 듣기도 싫다가 사건이 생기니까 듣기 싫어했던 모든 사람들이 We are all here 하잖아요.
사도행전의 딱 한 번 나오는 큰 기쁨이 빌립보 간수의 집에 허락이 되었어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한 공동체인 우리가 저절로 되어 관계가 열리고 집이 열려 성령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됩니다. 공동체에서 다른 지체를 섬길 때 특별히 주시는 큰 기쁨이 있는데, 우리가 다른 지체를 섬길 때마다 가장 큰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는 거에요. 섬김을 받는 자는 물론 섬기는 자도 다 함께 예수님 때문에 기쁨의 근원인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크게 기뻐하는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죄수 공동체는 우리가 되어서 모든 것이 열리고 벗어지고 움직이게 되는 성령의 열림이 따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장이 We are all here 목장이 되는 줄 믿습니다.
Q. 여러분의 목장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목장입니까? 여러분은 공동체에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인데 왜 옥에서 매를 맞을 수 있느냐고? 이거는 팩트야! 진실이야! 하면서 그들을 고발하기 위해서 묻습니까? 인생 최고의 질문과 답인 구원을 위해 묻습니까? 여러분은 섬김이 큰 기쁨입니까? 성공이 큰 기쁨입니까?
기도제목
은우
개미 집 같은 전시로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말씀에 묻고 선한 사업으로 진행 되도록
친절한 공기 구원의 바람 되어서 일상을 말씀에 잘 살 수 있도록
붙여 주신 지체들 위해서 중보 하도록
지향
준비하는 이 시간이 고난이 아니라 축복임을 믿고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도록
우상에 메여 종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되어 자유할 수 있도록
큐티하면서 휴식 잘 보낼 수 있도록
예선
수련회 때 받은 은혜 생각하며 가정과 직장에서 허락하신 자리를 지키도록
집에서 공기 바람 할 수 있도록
지체들 위해 기도하도록
보련
겸손하며 낮아지는 적용할 수 있도록
한 주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수련회에서 받은 은혜 계속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현경
잘 듣고 잘 물으며 수고하는 목장식구들 위해 기도하도록
하나님께 붙잡혀 말씀으로 하루만 살도록
치과진료 잘 받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