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은혜로(행15:1-11)
우리는 여전히 제자로서 양육되고 성화돼 가야 한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많은 거 깨닫고
믿음 있는 내가 왜 여전히 양육 받아야 할까?
1. 여전히 율법과 행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절)
안디옥교회 안에서 구원에 관한 문제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유대로부터 온 사람이 할례 받지 아니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하는 말로 인해 논쟁을 벌인다.
이 정도는 살아야 구원받지 않겠나 하는 행위의 증표없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와 율법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행위와 은혜를 얘기할 때
너무나도 순서가 중요하다.
행위와 은혜의 미묘한 관계를 2가지로 얘기하자면
첫째, 행위는 은혜 다음이어야 한다.
중독이 끊어지면 큐티를 하면 부지런하면 뭔가 행위가 변화되면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으면 구원 얻는다고 행위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는 구원의 뒤에 따라온다.
요한복음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처럼 행위는 열매다.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의 은혜 경험하지 않고 행위만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정말 무서운 거다.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다.
행위와 구원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죄만 생각한다.
은혜의 구원 생각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떠난 모든 것이 죄였음을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곧 바로 육체의 율법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주 예수의 은혜를 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짓는 공장일 수밖에 없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배우자의 구원 위해 못할 것이 없다.
예수를 사모하는 거,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구원을 받으면 할례 받은 자의 삶을 소망하게 된다.
둘째, 율법은 인과응보를 말한다.
할례 받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무엇을 안 하면 저주 받는다는 기복신앙이지만 세상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준만큼 돌려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율법은 인과관계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만
인간의 논리와 합리성은 은혜를 설명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고 들지만 은혜는 절대로 이기지 않고 죽어지므로 승리한다.
적용)
*타인의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의 행위의 문제가 고쳐지기만을 바라고 있나요? 아니면 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길 바라고 있나요?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생색과 기복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인 것을 자랑합니까?
그것이 율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2. 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5절)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사도와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 다시 말해 인간이 행한 율법에 관한 일이 아닌 은혜에 관한 일을 말한다.
모든 공동체가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의 일을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믿는 우리에게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는 거다.
1절에 어떤 사람들은 할례 받지 않으면 이었다면 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주제가는 마땅하니라 이다.
율법과 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옳고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것을 따지느라 공동체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기뻐하지 못하는 거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타이밍이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과 바나바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함께 들으며 기뻐하는 순간이었다.
옳고 그른 것이 명확히 존재해야 한다.
그 옳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다.
그 옳음의 기준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값없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은 것이다.
바울(스데반 죽임), 베드로(예수님 세번 부인), 야곱(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 판), 유다(며느리와 동침),
마땅하지 않는 자들 통해서 마땅한 일을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이제 옳고 그름은 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무엇이 옳으냐 물으시면 예수가 옳다는 것이다.
적용)
*나는 공동체의 기쁨에 기꺼이 참여합니까?
그렇지 못 하다면 왜 그러십니까?
*지금도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마땅한지 아닌지를 내 기준과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은혜로 얻는 구원만이 옳은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여전히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까닭은
3. 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6-11절)
-사도와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러 모였는데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옆에서 목격하고 제자가 되었던 이들이 여전히 이 구원의 문제에 확신이 없는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되었다함이 없이 계속해서 거룩을 향해 구원과 양육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다.
베드로가 가장 눈에 띄는데 갈라디아2장11절에 베드로가 바울에게 구원을 잘못 이해했다고 책망을 들었는데 베드로가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베드로가 바울을 변론한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거 알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전한 핵심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어 증언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구원에 차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같이 다른 이들의 마음도 깨끗게 하심을 믿는 것이다.
차별이 없음은 관계 회복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됐다.
차별 없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오늘 본문은 4번이나 형제들아한다.
베드로가 형제들아 부를 때 베드로의 그 차별 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차별 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차별하고 무시하는 그 한 사람, 내가 너무나 무시가 되는 이방인 같다고 여기는 그 한 사람,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적용)
*내가 차별하고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회복하고 싶지 않고 손 내밀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 보다 나은 것 같습니까?
내가 그 한 사람 차별하고 있다고 인정하십니까?
<기도제목>
은지
-은혜가 먼저가 되어 불안함이 물러갈 수 잇도록
-건강 지켜주시길
해련
-은혜를 먼저 사모하고 구하는 마음 주시길
-결혼예배 큐티하며 기도로 준비하길
-스트레스지수가 높게 나왔는데 스트레스관리 잘 할 수있길
인화
- 사람에게 의지 하지 않고 자존감 찾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 혼란스러울때 세상기준보다 하나님 기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큐티하고 기도하게 해주세요
서영
-이번주 양식조리사 시험준비 잘하고
-세상적인 음란을 즐기지 않고 하나님 찾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