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 주 예수의 은혜로 ampndash 행 15:1~11
- 심한섭 목사님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구원에는 이미 받은 구원인 칭의가 있고 앞으로 삶에서 이루어나가야 할 구원인 성화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성화를 위한 양육이 필요함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여전히 양육을 받아야 할까요?
1. 여전히 율법과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절) 안디옥교회 안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바울과 다른 유대인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에 따른 할례의 유무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의 내용이 중심이 되었고 할례는 구원의 행위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별된 삶을 살라고 주신 선한 삶을 안내하는 규범입니다. 그러나 죄인 된 우리는 선한 규범인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행위에서 구원을 찾고자 합니다.
행위와 은혜의 미묘한 관계를 살펴보면,
1) 행위와 은혜를 이해할 때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는 은혜 다음이어야 합니다.
- 나와 아내는 성격이 반대인데 나는 강박이 있는 율법주의자이고 아내는 매사에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강박으로 혈기쟁이가 되어 따지기 시작하면 두려움쟁이인 아내는 울보로 변신한다. 이런 강박을 해결해 주는 것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이 깨달아졌다.
- 우리는 매일 할례를 받고 큐티를 열심히 하고 중독을 끊어내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기고 삽니다. 그러나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구원의 문제에서는 행위는 은혜 다음에 따라오는 것으로 순서가 중요합니다. 행위가 바뀌기에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은혜를 받았기에 행위가 변하게 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목숨 내놓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2) 율법은인과응보를 이야기 합니다.
무엇을 하면 무엇을 받는다는 give & take를 우리는 기복이라 하고 세상은 합리적인 논리라 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내가 준 만큼만 받는다면 하나님의 구원도 은혜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율법과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이기고 이기려는 마음입니다. 율법은 논리를 가지고 이기려 하지만 은혜는 내가 죽어짐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2. 우리가 기쁨 중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5절)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로 향하면서 베니게와 사마리아 사람이 믿게 되는 하나님의 행하신 은혜의 기쁨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누는 중에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바리새파 사람처럼 옳고 그름으로 율법의 행위를 따지며 율법과 행위를 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나도 율법주의자란 소리를 들었고 담임목사님은 나에게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하셨다. 양육을 받아도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 이렇게 나의 모습을 공동체에서 지적해주는 것이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있어야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은 내가 아닌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의 행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야곱, 유다, 다윗의 행위는 옳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는 옳습니다. 옳음의 대답은 예수님입니다.
3. 우리가 끊임없이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6~11절)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구원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모였는데 이것은 이들이 구원의 문제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구원의 문제를 책망하는 바울의 편에 서서 바울을 변론하였습니다. 구원에는 차별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책망하는 바울의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차별은 철저하게 분리하여 의심하고 판단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며 스스로 분리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7~9절) 베드로는 구원의 핵심을 설명하면서 율법을 통해, 사람을 통해 된 일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즉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깨끗케 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우리 힘으로 된 일이 없는데 우리는 차별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순간이 위험한 순간입니다. 내가 아프다고 인정하는 그때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차별이 없음은 관계의 회복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나은 것이 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깨끗케 하셨음을 알게 될 때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네 번이나 형제들아 하고 반복하는 것이 차별이 없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11절) 우리가 차별하고 무시하는 이방인과 같은 그 한 사람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말씀 후 나눔>
언주언니 : 차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 깨달아진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생각과 판단은 회사 내의 저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도현 : 이번 주 금요일에 미국으로 출국함, 동생이 아픈 와중에 먼저 출국하게 되어 걱정이 된다.
시은 : 관계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다.
효정 : 논리적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어서 너무 힘이 든다.
승현 : 친구들과 함께 예배했던 고등학생, 대학생 때가 떠올랐다.
<기도제목>
언주언니 : 회사 직원들을 구원의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일과 삶이 분리가 잘 안되는데 거기서 나올 수 있도록
시은 : 매일 큐티하기, 책 읽기
승현 : 큐티를 하면서 율법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더 생각하길, 박사님이 떠나시기 전까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현 : 할아버지 건강 회복 위해서, 출국 준비 잘 할 수 있도록(13일 금 저녁 8시 비행기)
효정 : 우울한 감정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엄마에게 경계 잘 지키고 지혜 주시길
지원 : 9월에 학원에 취업하게 됐는데 남은 한달 부족한 부분 잘 준비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