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5 성령의 작별
사도행전 18:18-23
우리가 살면서 노력하지 않아도 느는 것들이 있는데요. 나이, 뱃살, 주름, 흰머리 등이죠. 또 작별도 점점 많이 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만난 모두와 작별을 하게 되겠죠. 여러분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작별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바울도 교회를 세우며 여러 도시를 다닐 때마다 작별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작별했다는 표현은 오늘 본문에만 두 번 나오는데요. 그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작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적인 작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성령의 작별을 했다는 것일 텐데요. 오늘은 성령의 작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1. 더 인내하며 머문 후 하는 것입니다. (18절)
성령의 문제로 주신 법정 사건을 통과한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일 후에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했다고 합니다. 머물다로 번역한 헬라어는 쉽지 않은 상황에 의지를 가지고 버티며 자기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이에요. 모든 것을 갖춘 데다 음란하기까지 한 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일이 바울에게 쉽지 않았겠죠. 게다가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했는데요. 유대인들이 모든 것 다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할 수 없는 게 사형 언도를 못하는 거예요. 로마 총독만 사형 집행할 수 있어요. 사형 언도를 내릴 수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바울을 고발한 것을 바울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죄가 됐자나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합니다. 바울은 이고니온에서도 루스드라에서, 그리고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아덴에서도 늘 쫓겨났자나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두를 모아 놓은 듯한 가장 악하고, 가장 음란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 가장 영적으로 어둡던 이곳에서 법정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바로 고린도를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거죠. 더 여러 날 머물렀어요. 충분한 기간을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해 충분한 시간인가요? 갓 태어난 고린도교회 성장을 위해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찰 때까지 최소한 법정 앞에서 모두에게 얻어 맞는 수모를 당한 회당장 소스데네가 교회로 들어와 구원받고 바울의 동역자로 양육될 수 있는 만큼 시간이 필요했겠죠. 전 지난주 그 소스데네만 생각하면 정말 참 우스워요. 그냥 유대인 위하겠다고 그렇게 고소했다가 아주 그냥 법정에서 두들겨 맞는 소스데네가 정말 참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소스데네를 양육해야 되는 거죠. 바울이. 그래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명의 자리에 딱 붙어서 디아트리보 해야 되죠? 비비고 닦고 문질렀다는 것입니다. 화내고 싶을 때 참고, 화내기 싫을 때도 참고, 말하고 싶을 때도 참고, 말하기 싫을 때도 참고 날마다 인내하며 전도하고 양육했습니다. 따라서 여러 날 머무는 일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정말 고개가 절레 절레 흔들어지는 그 사람 옆에 오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하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성령의 작별의 결론은 영혼 구원입니다. 아니 오죽했으면 나중에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겠어요.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머물 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렇게 나중에 편지를 통해서 자랑을 두고 단언할 수 있었겠죠? 그렇습니다. 바울이 날마다 인내해야만 했어요. 자기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머문 후에야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 귀환 길에 오르게 되는 거죠. 믿음의 자녀를 또 복음으로 낳은 아들, 딸 같은 성도들이 1년 6개월 동안 많이 생겼겠죠. 그런데 떠납니다. 떠나면 만남이 있어요. 바나바와 작별하고 혼자였던 바울 옆에 누가와 실라, 디모데를 만나게 하셨죠. 빌립보에서는 루디아를,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을, 고린도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떠나면 만나는 곳곳의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한 사람 정말 중요합니다. 일당 천만을 해서 그 힘든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함께 한 이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서 터전을 잡았는데 그걸 내려놓고 같이 떠나겠다고 해요.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면 신부로서 같이 동행하는 것처럼 아굴라 부부가 그렇게 신부가 되어 정말 그렇게 동행을 해주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떠날 때 아내가 반대해서 못 떠나는데 여기는 아내가 믿음이 더 좋아졋어요. 그래서 오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칭호가 바뀌어졌자나요. 그래서 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때문에 참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힘든 남편, 아내, 자녀와 부모가 감당이 안되십니까? 이 십자가를 잘 지고 인내하면 영적 진실성이 드러납니다. 이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되었을 때 성령의 작별을 하게 해주십니다.
[적용] 지금 당장이라도 작별하고 싶은 고린도 같은 사람은 누구고 여러 날 머물러야 할 인내의 상황은 무엇인가요?
2. 자발적인 서원입니다. (18절)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겐그레아라는 곳에서 머리를 깎습니다. 우선 겐그레아가 어디냐 하면, 바로 고린도 항 밑에 겐그레아 항이 있습니다. 겐그레아는 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두 항구 중에 하나였기에 무역과 상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곳이었어요. 이곳에서 바울이 지금 머리를 깎았다고 하자나요. 한 사람 머리 깎는 일이 뭐가 이렇게 중요하다고,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아다시피 바울은 머리가 없자나요? 그 머리를 깎을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누가가 기록했을까? 성경에서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서원을 미완료로 계속해서 종료되는 시점까지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았는데, 이 서원, 바울의 바램, 바울의 원함, 이 서원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오늘 구약 성경 좀 살펴보면 민수기 6장 18절에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즉, 머리를 깎은 바울은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나실인들은 자신을 구별되게 하나님 앞에 바치고 서원이 종료될 때에 이렇게 오늘처럼 머리를 밀어요. 그리고 화목 제물 밑에 두게 됩니다. 이 서원이 종료되기 전까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시체를 만지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는 거예요. 시체는 죽음이고, 또 죄의 결과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 서원이 끝날 때 머리 깎고 그 머리카락을 불 태운다는 거죠. 여기서 보면 서원은 성별하다, 구별하다. 그런 뜻이 있는 거예요. 더 자세히 레위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제사의 종류가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5개예요. 조금 설명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으심의 번제, 부활의 소제, 대속의 속죄제, 속량의 속건제, 승천의 화목제를 상징합니다. 특히 레위기 7장 11절서부터 18절까지 보면 마지막 승천에 해당하는 화목제는 죄인들의 속제가 완료되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간에 화목이 성취되는 천국 잔치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거예요. 15절입니다.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이 화목제는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마음 속에서 자원하여 감사와 찬송이 터져나오는 예물이에요. 그게 화목제예요. 그러니까 이 화목제 안에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화목제의 하나인 그 서원이라는 건 죽어야 할 나를 위해 흠 없는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완성된 구원을 허락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인데요. 야곱처럼 무사히 돌아오게만 하시면 십일조를 하겠다., 입다 사사처럼 이기게만 해주면 처음 영접하러 나온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해서 딸을 제물로 드렸는데 이런 조건부 서원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완성된 사건이 감사해서, 지금 구원이 완성됐자나요. 그래서 자원해서 나를 드리는 것이 성경의 서원이에요. 어떤 사람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되어지는 것이자나요. 나는 없어요. 그래서 나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죠. 그 일이 바울에게도 그대로 일어났어요. 고린도 사역을 잘하게 해주시면 이런 조건부라기 보다 그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 자신이 구별되고, 성별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구원을 위한 서원을 드린 것이에요. 지금까지 자기게 한 게 아무것도 없자나요. 바울이. 그러니까 다시 한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감사로 자발적으로 서원을 드린거죠. 오늘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18장 초반에 이미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이 바울을 응원하셨어요. 고린도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게 무엇인지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을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무슨 서원을 했겠어요. 알았어요. 주님.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 제가 서원을 할 거에요. 내가 포도주를 가까이하지 않고, 더럽고 음란한 것들을 만지지도 않고, 머리를 깎지 않겠습니다. 거룩하게 살겠어요. 이렇게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드리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서원한 게 아닌데 법정의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바꿔주셨죠. 그런데 바울이 구원에 뜻을 두지 않고 문제 해결만 바랬다면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는 순간 아이고 살았다. 더는 못하겠다.하면서 고린도를 즉시 떠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열심히 다 하는 거 같아도 그냥 문제만 해결되면 아이고 18하면서 나는 더 못해먹겠다. 이러면서 떠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서원했자나요. 구별, 감사, 찬송, 구원을 생각했어요. 서원은 감사의 예물로 나를 드린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구별된 인생이에요.
서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전부 다 조건부 서원을 생각해요. 그런데 애들 입시 놓고 내가 기도를 해야 되고. 그러니까 그거는 안 믿는 사람의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고나서 생각을 해보니까 제가 입시나 건강 이런 것 때문에 서원을 해본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남편 가기 전에도 주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금식을 했는데요. 그게 서원이라면 서원인데요. 남편이 가고 저의 사역이 커지니까 너무 두려워서 이 사명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막 금식이 저절로 되더라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부인되어지는 것이자나요. 그러니까 자원해서 내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십자가 잘 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서원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마음으로 늘 서원을 하니까 작별을 해야 될 것을 때에 맞춰서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가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사람과 주의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우리는 각자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법이 되지 않으면 기뻐서 서원도 안 되고 또 이제 슬퍼서 작별도 힘들어요. 서원에 대한 걸 생각해보면 저희 어머니가 아들 주시면 주님께 드리겠다고 우리 둘째 언니를 백성의 아들이라고 서원했어요. 그래서 서원하셨는데 딸 주셨어요. 저는 아예 아들 이름으로 지어 놓고 기름을 붓는다.는 뜻의 이런 완전히 주님께 드리는. 그런데 두 딸이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저희 어머니도 그게 조건부 서원인가를 생각해봤을 때, 그건 다 아들을 낳으면 주님께 드린다.고 그랬기 때문에 어떤 기복적인 서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어머니의 서원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작별을 너무 많이 경험하게 하셨어요.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작별. 대학교 때 어머니와 작별을 했고, 결혼 후에 시아버님, 시어머님과 30대에 또 남편과, 또 교회 개척 직전에 친정 아버지와 작별을 하게 하셨어요. 젊은 나이에 네 분의 부모님과 남편을 작별을 했어요. 그래서 이게 어머니 서원 때문에 누구와도 갑자기 작별을 할 수 있다는 연습을 미리 하게 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늘 자신을 부인하게 해달라고 저절로 자발적인 영적 서원을 하며 가기 때문에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해도 나만, 아니 내가 예수 믿었는데, 내가 교회 반주했는데, 내가 4대째 모태 신앙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거보다는 항상 나는 특별하다, 나는 예수 잘 믿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하신 것 같아요. 남들 당하는 일 나도 겪었다고 생각을 하게 하신 것이 이 서원의 응답이 아닌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이지만 때마다 원칙을 이렇게 생각하게 한 것은 말씀 적용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수 없기 타협하고 싶죠. 그래도 큐티를 하는 게 연습이 됐어요. 습관이 됐어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거지만 사소한 원칙 하나를 지키려고 너무 골이 흔들리도록 고민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서 제대로 눈에 보이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날마다 큐티를 하려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말씀으로 THINK를 열심히 한 것만 가지고도 주님은 훗날에 너무나 엄청나게 다 크게 갚아서 돌려주신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거룩하게 살겠다고 막 서원을 하니까 받은 선물이 너무 크다는 거예요. 그럼 원칙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게 구별이에요. 거룩이에요. 팔복의 원리죠. 문자적으로 깐깐한 것이 원칙이 아니고요. 구원 때문에 오늘 손해 보아야 할 말씀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각종 목장에서 그 원칙 때문에 이거 어떻게 할까요? 말까요? 늘 나누자나요.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그런 적용 때문에 여기 나와서 대표 간증을 수도 없이 많이 하시고, 목장에서 간증이 울려 퍼지고. 그래서 너무나 우리들교회에 선물을 많이 주셔서 이렇게 간증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서원의 간증으로 응답, 응답 간증을 하는 거죠. 수 없는 응답이 이루어졌어요. 그 사소한 큐티 적용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쌓을 곳이 없는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또 우리들교회에 이렇게 주고 계시다고 생각을 해요.
[적용] 입시나 입사를 앞두고 조건부 서원을 합니까? 주의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나를 써달라고 인내하기 위해 서원하십니까?
3. 사람의 청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19-21절)
오늘 떠나고 작별하고 굉장히 많습니다. 겐그레아에서 배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아시아의 관문이자 주도인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겐그레아에서 저기 지중해서 거쳐서 예루살렘 가기 전에 가이사랴 전에 에베소, 아시아의 주도, 도착을 합니다. 2차 전도 여행의 원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기억하시나요? 더베와 두스드라와 이고니온 등 갈라디아 남부의 교회들을 심방한 바울이 마지막에 어디로 가고자 했죠? 바로 아시아의 주도 에베소였어요. 기억나시죠? 마지막에 드로아 해변가에서 한밤중에 환상으로 아시아로 그렇게 가고자 하는 거를 막으셨어요. 성령이. 그 아시아가 바로 에베소입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로 가기 전 끝판왕이라 볼 수 있는데요. 마게도냐 땅의 수도 데살로니가, 또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보다 더 넘사벽이 그 에베소예요. 얼마나 힘든 곳인가 하면 성령께서 어린 디모데를 배려해서 막을 정도로 거기가 힘든 곳이에요.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 여신, 그 신전이 아데미 신전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테미스 신전인데 이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지금도 그게 세계 7대 불가사의니가 그때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처럼 우상의 세력이 강한 도시가 에베소예요. 그런데 이런 에베소를 굳이 들리지 않아도 돼요. 지금 예루살렘 갈 길이 바쁘거든요. 절기도 지켜야 되고 그래서 시간이 바쁜데 굳이 안 들려도 되는 에베소를 들렸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후 쉬지 않고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말은 성령의 강론 설교를 할 때 그 강론했다와 같은 의미인데, 성경을 이렇게 펴서 구속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거예요. 구속사로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들었자나요. 저는 바울을 생각해 봤어요.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사형 언도를 할 만큼 그렇게 지겨워하는데 맨날 나는 유대인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 그래놓고도 계속 유대인 회당에 꼭 들리는 거예요. 이것이 자발적인 서원 아니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 숨쉬기예요. 여러분들은 숨쉬기예요, 일이에요? 그래서 자꾸 뭘 하면 목사님 좀 쉬라.고 그러는데, 글쎄 말이에요. 저는 그냥 이렇게 와서 설교하고 이게 참 숨쉬기 같아요. 그래서 준비하는 것들이 물론 저한테 너무나 어렵지만 그래도 이게 너무 습관이 된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붙터 이렇게 살다 보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자님들도 사역자님들도 다 숨쉬기인지 일인지. 그러니까 또 전합니다. 고린도에서 불법이 아니라고 바울이 비난받지 않게 됐자나요. 그런데 도리어 서원하고 율법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바울은, 이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듯이 바울은 그냥 그 당시에 유대와 이방을 다 생각하면서 자기로써 할 수 있는 다 하는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는 거예요. 구원 때문에 못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장 에베소의 회당에서 변론을 할 때 거부감이 없었을 것 같아요. 나실인의 서원을 딱 하고 머리 깎고 왔자나요. 즉 머리를 깎은 것이 내 헌신의 끝이라고 종결하면서 내 서원 끝이 아니라 여기에 와서도 강론하면서도 또 자발적인 서원으로 하나님 에베소도 앞으로 일하셔야 돼요. 에베소도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는 본인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지만, 그 에베소 또 돌아오자나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놓는 거죠. 비중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론을 하니까 구속사로 전하니까 이전과 달리 여러 사람들이 더 오래 있기를 간청하는 거에요. 고린도, 에베소하고 비슷하자나요. 화려하고 음란하고. 거기서 1년 6개월 동안 연습을 많이해서 그런지 에베소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한 것 같아요. 하지만 바울이 오래 있으라 그러는데 거절합니다. 전에는 성령께서 허락지 않았는데 이때는 바울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 뜻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때 시제가 능동태 미래예요. 막연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지가 담겨진,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이런 각오와 의지가 담겨진 아주 강력한 표현이에요. 그래서 옛날 같았으면 어땠습니까? 성령께서 계속 막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성령이 막아도 막아도 계속 아시아로 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성령의 서원을 한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동안 자신의 실패와 두려움 속에 연약함과 두려움의 한계 가운데에서도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됨을 보게 되니까 자신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조금씩 앞에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곳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앞에, 그 각오와 서원과 의지 앞에 하나님 뜻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놓을 만큼 에베소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바램과 서원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예요. 빨리 작별하고 싶었던 고린도에서는 더 여러 날 머물렀지만 처음부터 오고 싶었던 에베소에서는 더 오래 있기를 청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작별합니다. 단호하게요.
인본적인 사람들의 특징이 때를 모른다는 것인데요. 갈 때와 올 때, 있을 때와 갈 때. 이걸 알려면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이에요. 타이밍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경고할 때는 칭찬을 하고, 칭찬할 때는 경고를 하고. 그러니까 굉장히 스마트해 보여도 대형 사고가 터지는 거예요. 그럼 이걸 어떻게 분별하냐고요? 가장 쉽게 구원보다 이익이 목적이면 분별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잘못 판단할 때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세요. 그런데 나의 유익이 목적이면 절대로 분별이 안됩니다. 물어볼게요. 힘든 배우자는 작별해야 될 대상인가요? 더 오래 머물러야 할 사람인가요? 더 오래 머물러야 할 사람이요.라고 대답하셨어요. 제가 들었어요. 왜요? 말씀의 원칙이니까요.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반면 중독은 당장이라도 작별해야 될 대상이에요. 한 시간이라도 더 머물러서는 안돼죠. 왜요? 역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혼이든 중독이든 구원과 정반대로 가는 것이자나요. 그런데 내 이익이나 쾌락이 기준이 되면 힘든 배우자는 당장 작별해야 될 사람이고, 중독은 조금 더 머물러도 좋은 대상이죠. 이 중독도 물질 중독, 행위 중독이 있다 그랬어요. 아치볼드 하트가 그랬다 그랬죠. 제가 O.S.T.에서 한 번 강의를 했었어요. 그런데 물질 중독은 약물, 알코올 중독인데 그 물질 중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행위 중독, 게임, 성행위, 쇼핑 같은. 이건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데 훨씬 무섭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쇼핑할 때 황홀한 그 쾌락을 버리지 못한다는 거예요. 또 이생의 자랑, 학벌, 외모, 집안. 이 자랑의 열병을 끊어낼 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행위 중독이라고 해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이라고 하면 여기에 나를 포함시키는 것이 구속사인데, 예를 들어서 중독인 집안 식구들이 중독자는 저 사람인데 나는 드러나는 잘못이 없는데 내가 왜 죄인이야.라고 따지면 정말 구원의 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죠? 날마다 이렇게 정말 하루도 안 빠지고 얘기를 하는데도 여러분들이 모르더라고요.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여 알게 돼요. 혼자 따로 묵상하라고 성경 주지 않으셨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지체들과 함께 묵상하라고 공동체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라고 말씀을 주셨어요.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위에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것이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중독을 내 힘으로 못 끊어요. 작별 못해요. 그런데 그 중독자 센터에서도 나는 중독자입니다. 이거를 인정하고 공포할라 그러자나요. 나는 알코올 중독자예요., 나는 쇼핑 중독자예요. 공동체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거, 이게 중독 작별의 지름길이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뜻인데, 결국 중독은 공동체가 없이는 끊어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목장에 오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 중독자를 끊어내려면 본인도 가족도 서로가 인내를 해야 되는데 무슨 힘으로 인내를 하겠어요. 공동체에서 서로가 자기는 중독자라고 고백하는 그곳에서, 그것도 말씀을 통해서 죄를 보는. 말씀을 통해서.
[적용]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반대로 작용한 때는 언제입니까?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성령의 작별이 되어 지켜야 할 가정이나 끊어내야 할 중독은 무엇입니까? 게임, 성행위, 쇼핑입니까? 좋은 일은 하나님이 원하실 거야하며 사람들이 요청한다고 행하는 것이 있나요?
4. 제자를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2-23절)
이제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떠난 바울은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에베소에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저 위에, 맨 처음에 파송했던 안디옥까지 가게 되는 여정이에요. 이게 바로 2차, 그 다음에 갈라디아, 부르기아 3차 전도 여행까지 올라가게 되는 거죠.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거기서 올라가 교회 안부를 물었다고 해요. 예루살렘 교회 올라갈 때 위로 올라갔다고 그래요. 우리가 늘 서울은 올라갔다고 그래요. 아무리 저 함경도에도 서울을 내려갔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것처럼 지금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공회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성령의 의논으로 결정한 내용을 지역 교회에 알리고자 했고 그 모든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 가야 되고 절기도 지켜야 돼요. 이렇게 바울은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가서 지도자들을 만난 후에 비로소 자신의 사역 본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올라갑니다. 그 육지와 바다로 이동한 거리를 대충 계산해도 한 4500km 정도 되고요. 시간도 3년 이상 걸린 긴 여행이었어요. 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여정이죠. 그럼 이제 와가지고 좀 푹 쉬고싶지 않겠어요? 그런데 안디옥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얼마 있다가 떠났다고 해요. 왜 어디로 떠났습니까? 이제 두 차례 전도 여행 때 세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심방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렇게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22절과 23절에 2차, 3차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우리의 복음 전도가 대단하게 뭐가 끝맺고 이러는 게 아니고 하루 하루가 그냥 2차고 3차고. 왜냐하면 바울의 복음 전도는 숨쉬기니까. 그래서 2차 때와 마찬가지로 교회들을 심방하여 제자들을 굳건하게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3차를 또 시작을 하게 된거죠. 바울이 오랜 기간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각종 고난과 핍박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바울은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 믿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지 절절히 깨달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와 성정이 같죠. 바울도 스데반을 죽였던 사람이자나요. 그래서 인간의 강함이 아닌 성령의 견고함이 답임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이 늘 흔들리고 방황하는 각 교회 제자들을 향한 형제 의식이 아주 더 강하게 일어났을 것이에요. 이런 흔들림을 멈추게 할 추가 오직 주님의 말씀임을 알기에 그 말씀으로 그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또 다시 작별을 하고 양육의 3차 여행을 떠나는 것이죠. 따라서 바울의 작별은 힘든 일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거나 숨기 위한 떠남이 아니예요. 바울의 작별은 믿음이 흔들리는 지체를 굳건하게 하러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떠남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작별이에요. 인간의 작별은 끝남과 마지막이자나요. 하지만 성령의 작별은 새로운 사명의 시작과 처음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이기적 관심의 한계에서 떠나는 작별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작별은 아까도 말했지만 자기 사랑을 가득한 이 세대를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있으면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당하면 다 거기서 떠나고 헤어지고 피하고 끝냅니다. 이기심만 가득한 인간의 작별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것이 다 깨지고 해체됩니다. 가정도 예외가 아니죠. 인권이 우상이 되니까 결혼이 하나님께서 짝 지어 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의 인권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지켜야 되니까 이혼을 부추깁니다. 그럼 결국 이 땅에 무엇이 남겠어요? 결혼이 깨지고, 가정이 해체되고, 자녀가 버려지는데. 그래서 남은 인권이 뭡니까? 다 깨졌는데 인권이 왕 노릇해서 남은 게 뭐냐고요. 헤어지고, 자녀들 다 버려지고, 그래서 알코올 중독으로 남았습니까? 이게 다 허상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작별을 멈추고 성령의 작별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구조 안으로,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야 돼요. 혼자 있으면 이기적인 작별을 할 수밖에 없어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자나요. 같이 모여서 나는 정말 이혼자다. 이혼하고 싶었다. 우리 애들 다 망가졌다. 이런 얘기 좀 들어야 돼요. 그래야 이게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는 거고 또 굳건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내가 굳건하게 되고, 혼자서는 안 돼요. 주님의 몸인 교회에, 목장에,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말씀을 서로 듣고 THINK하고 생각해보는 훈련을 하셔야 진정한 성령의 작별이 될 줄 믿습니다.
[적용] 나를 굳건하게 세워준 지체들이 있습니까? 지체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한 수고를 기뻐합니까? 아까워합니까? 멈추지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할 구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현경
나 때문에 수고하는 목장식구들 위해서 기도하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데 천국백성 자존감으로 회복되도록
공부의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과 전도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도록
자동차 운전면허 공부하는 것에 지혜와 용기 주시도록
예선
수요일날 상담 선생님 만나는데 위로 받고 올 수 있도록
더 여러 날 머물러야 할 인내의 시간 중에 있는데 연민과 아픔과 깊은 고독에서 작별하고 이 시간들 말씀과 함께 통과할 수 있도록
저의 연약함을 굳건하게 세워지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목장에 잘 붙어 가도록
집에서 공기, 바람 잘 할 수 있도록
공유 오피스를 알아보고 있는데 집 외에 다른 곳들은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잠시 머물 수 있는 사무실 잘 찾을 수 있도록
크리스틴
약 처방할 수 있는 상담 선생님 속히 찾고 알맞은 치료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회사와 환경에서 잘 머물 수 있도록
친구의 소천이 성령의 작별이 되게 하시고,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남겨진 유가족들 위로 받을 수 있도록
하루하루 말씀으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보련
말씀으로 하루만 잘 보내도록
약을 잘 먹고 회사에 기쁘게 출근할 수 있도록
부모님과 동생의 구원위해서
은우
성령의 작별 통해서 성령의 만남 잘 할 수 있도록
진행하는 전시 프로젝트 내가 할 수 없다는 것 알고 주님께 묻고 기도하면서 갈 수 있도록
받은 돈이 투명하게 쓰이고 붙여준 지체들의 구원위해서 중보 할 수 있도록
가고서는 길 만나는 사람들 분별할 수 있는 말씀과 지혜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