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성령의 강론
지난 한 주 가정에서, 직장에서 성령의 전략을 따르셨습니까? 자기 부인을 하셨습니까? 어느 목자님이 배터리가 방전되어 긴급출동을 불렀는데 약 20분을 차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소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여섯 살된 막내 딸과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목자님이 딸에게 이 다음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니까 딸의 대답이 영아부 선생님이 되고 싶어 그랬다는 것입니다. 목자님 부부가 영아부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님이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영아부 선생민은 주일에 하면 되는데 그럼 주중에 너는 무엇을 할 건데? 딸의 대답을 했습니다. 주중에는 밥해 줄거야, 그래서 목자님이 집요하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다음에 커서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딸의 대답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 빨래를 해주고 밤에는 책을 읽어 줄거야라고 했답니다. 딸의 대답이 특별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인간적 전략으로는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자님 부부가 가정과 교회에서 성령의 전략으로 잘 살아내는 모습을 딸이 입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서 아들 목사의 큐티 나눔입니다. 다섯 살 딸에게 아빠 엄마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딸은 돈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우리 딸이 굉장히 영적인 아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돈에 대해 별로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믿음을 닮고 싶은 사람은 무엇이냐고 또 물었더니 예수님, 아빠, 엄마, 할머니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아빠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 주어 감동이고 저도 감동입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날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 평범한 일상을 잘 사는 것이 자기 부인이고 성령의 전략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전략을 따라 자기의 관례를 지켜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3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강론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는데 오늘은 이 성령의 강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강론은
첫째, 성경으로 구속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전략에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성령의 강론입니다. 지난 주 뜻을 풀어 설명을 했습니다만 여전히 강론을 어려워 해서 이 부분이 중요하여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합니다. 2-3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3주간 유했는데 바울은 자기 전략이 없고 자발적인 자기 관례대로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자기 전략이라면 가는 곳곳 유대인의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회당에 들어갔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계속 핍박을 받으니까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겠다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이 없는 루스드라에서는 노방전도를 했는데 거기서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문화적으로 노방전도가 훨씬 쉬운 헬라 본토에 와 있습니다. 그것도 대도시인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이 뭔가 인간적인 전략대로 했다면 굳이 회당에 들어가지 않아도 전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관례를 지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거룩을 위한 관례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3주 동안 회당예배에 참석해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경에 대해서 강론을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설명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이론을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근거로, 성경을 교과서로 삼아 다른 어떤 내용에 대해서 강론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이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마치 역사 얘기 하듯이 전했다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했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음식을 식탁에 잘 차려 놓았듯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증언입니다. 그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물론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이 예수님을 가르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증언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여 잘 알려 주는 것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증언은 지금 회당에서 청중을 향해 강론하고 있는 설교자 바울 자신일 것입니다. 설교자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듯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설명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강론과 증언이 될 수 없습니다. 런 설명으로는 청중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설득했다기 보다 성경을 펼쳐 놓고 그저 아는 사실을 증명하면 됩니다. 이것이 구속사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얘기만 듣고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확실하게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3주만에 믿었다는 것은 오래 전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선물입니다. 부요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던 고린도교회는 1넌 6개월이나 있었어도 음행과 이단등 문제가 많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3주간만 머물렀는데 기복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이 복음에 반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지금 핍박을 받았기에 잘 들렸고 믿음이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혼자 본다는 것은 공산권이나 저처럼 시집에 묶여 아무데도 못간 사람들의 이야기 이지 우리는 혼자서 성경 보기가 어렵습니다. 반드시 지체를 허락하시고 스승을 허락하십니다. 스승이 누구였나, 내가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가는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구속사를 자신의 구속사로 증거를 제시해서 증언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임을 간증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구속사가 예수님이 죽어 주시고 살아나신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라고 날마다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강론입니다. 내 인생이 세속사에 있지 않고 구속사 안에 있음을, 구속사의 일부임을 깨닫고 간증을 하는 것이 성령의 강론입니다. 성경을 교과서 삼아서 예수님이 완성하여 지금 내게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고백하고 간증하고 증언하는 것이 바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초창기에 초대교회처럼 어렵고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데살로니가 교회들처럼 핍박당하던 시대였기에 그냥 어떤 목사님이든 은혜가 넘쳤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을 따로 모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시는 분마다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러느라고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게 하셨습니다. 강사가 풍년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자녀를 믿음으로 키워야 된다는 무지막지한 제 시절의 추억의 은혜의 간증 ampndash 8남매 자녀의 가족>
둘째, 따르는 딱풀 성도가 생깁니다.
4절 회당 예배로 모인 사람들 중 다수는 유대인입니다. 경건한 여인이 여럿 모인다고 해도 유대인 보다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은 대부분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귀부인들로 거의 헬라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거의 회당을 차지 하지만 유대인은 극소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들이 고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4절에 고난을 받고, 또 신약에 한 번 나오는 따르나가 나옵니다. 이것은 제비를 뽑아서 몫을 정해 주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수동태 부정과거 직설법으로 신적 수동태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해 바울과 실라의 몫으로 할당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핍박받아 떠난 바울과 실라에게 이렇게 딱풀 같은 성도가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촌로이고 초라한 바울과 실라가 매력이 있으나까 딱풀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보이는 영의 시각이 이방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강론이 올바르니까 성령의 따르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속사적인 강론으로 권함을 받은 사람은 가치관이 변합니다. 삶의 목적이 변하니까 방향도 바뀝니다. 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위해 하는 것이고 이기고 또 이기려는 삶에서 회개하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 전략을 따르는 삶에서 성령의 전략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딱풀 성도의 특징인데 단지 뒤에서 따라 가는 사람과 한 편이 되어 따라가는 사람의 차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십자가 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편이 되어서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안 질수 없습니다. 한 편이 된다는 것은 승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승리까지 가기 위한 모든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함께 나누는 것이 딱풀 성도이며 한 편인 것입니다. 똑같은 귀부인이라고 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의 유력자들과 경건한 귀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선동을 당하여 바울을 박해하여 쫓아냈습니다. 겉모습으로는 모릅니다. 그 귀부인들은 호강만 경건한 모습의 귀부인들이었을 것이고 데살로니가의 귀부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유력한 지도자들의 귀부인이라고 그 귀자를 원어로 그런 뜻으로 썼습니다. 그런 진정 귀부인들로 그곳이 데살로니가이니까 굉장한 도시입니다. 여기서 이 귀부인들이 왜 복음을 따랐을까 생각을 해 보면 그곳은 대단한 도시라서 남편들이 타락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그 귀부인들이 인생이 허무하고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헬라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여성들의 권리가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간섭없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시기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딱풀 성도가 또 있습니다. 9절 바울의 구속사적 강론을 듣고 주님을 따르게 된 사람 중에 야손이 있는데 그 집을 선교사들에게 숙소로 제공했고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기 야손의 집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고용한 불량배들에 의해서 야손과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바울 대신에 법정에 끌려가서 감옥에 갇힐 뻔 합니다. 선동당한 시민들이 일으킨 소동을 다 받아냅니다. 그리고 큰 금액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겨우 풀려납니다. 만일 야손이 바울과 한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바울 때문에 바울 대신 고난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강론에 감화되어서 바울과 실라, 나아가 예수님과 한 편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여기고 기꺼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속사적 말씀으로 권함을 받으면 이렇게 한편이 되어 성령의 강론이 나를 쳐서 복종시키니까 주님을 따라 갑니다. 말씀이 들리니까 순종을 하게 되고 엄청난 적용, 영과 육의 적용을 자발적으로 자기 관례가 되어서 합니다.
셋째, 시기하여 소동하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바울의 강론을 듣고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다(행28:24)고 써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렇게 고난이 있고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사람입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서 믿지 않습니다. 5-8절 시기하여로 번역된 이 단어는 항쟁하다, 겨루다, 열정적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기도 열광적인 사람이 합니다. 유대인이 시기와 같은 심리적인 역반응을 보인 것 뿐만아니라 광적으로 흥분이 되어서 바울일행에 대항했다는 사실이 이 단어의 의미 가운데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시기나 질투나 경쟁심의 뿌리는 다 똑같습니다. 시기는 내 것이라 여기는 대상에 대한 욕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멋진 연예인에 열광하는 것에 질투하지 않습니다. 내 아내, 내 남편이 그러면 질투합니다. 내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동료가 인정을 받을 때 더 많이 질투를 합니다.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매우 치사한 방법을 씁니다. 저자의 불량배들을 매수해서 시민들을 선동합니다. 악한데는 한계가 없습니다. 공익광고를 한답시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반역자들이 이곳에 왔다 이렇게 떠들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한 야손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면서 바울을 잡을려고 합니다. 바울을 놓치자 그 집에 있던 야손과 성도들을 잡아 가지고 황제의 명을 거역한 자로, 반역자로 몰아서 온 도시에 소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이샤외에 다른 임금이 있다고 주장을 하니까 예수님도 그런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가이샤외에는 자기에게는 임금이 없는데 다른 임금이 있다고 그러니까 시민들이 그 한 마디에 크게 소동을 합니다. 반역을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자기들의 안전과 번영이 위험해 지기 때문에 시기에는 소동이 따릅니다. 3절에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하면 소동이 자기 속에 집집마다 나라마다 전공이 됩니다. 열광적으로 따릅니다. 소동하게 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봅니다. 도대체 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 구속사적인 강론을 듣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들었습니다. 바울이 너무나 초라한 늙은이이니까 설교해 보라고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들으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시기하여 돌로 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모릅니다. 그런데 내 편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바울을 따르자 시기심 때문에 더 이상 들리지도 않고 진도가 안나갑니다. 오히려 말씀에 증인을 박해하고 그 증인을 따르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리고 교회가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고 고발을 합니다. 정작 어지럽히는 것은 자신들입니다. 교회가 가이샤를 거역 한다고 비난하는데 정작 자신들이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주님께서 구속사적인 강론을 통해 화평의 복음. 샬롬의 복음을 전해 주시는데 화평은커녕 소동만 일으킵니다. 구약에도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데.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괴롭히고 훼방꾼 노릇을 하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의 간계는 바울이 생명을 내놓고 기도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믿지 않는 자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을 동족입니다. 친척 동족같은 부부입니다. 이런 가족을 유대인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성경을 사람을 살리는 구속의 일로 전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구속사로 성경을 꿰고 곳곳에서 강론을 하는데 유대인의 대표인 바나바와 베드로에게 외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과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니까 피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나바와 베드로에게 외식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바나바와 베드로는 그 일로 굉장히 기분이 나빴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칭찬만 받은 그들입니다. 그 후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1:20) 하며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 바울에게 한 얘기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을 읽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그 뜻까지 풀겠습니까? 1차 선교여행때도 돌로 맞고 쫓겨난 사람은 바울이지 바나바는 돌로 맞았다는 소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바나바가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유대인들이 힘들게 한다고 하는데 믿는 부모 배우자 믿는 목장식구가 나를 얼마든지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니까 최고로 힘들게 합니다. 먼데 집사나 이웃집 여자가 나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눈만 뜨면 바라다 보이는 그녀와 그 남자과 부모형제 자식들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사람이 예수까지 믿습니다. 눌립니다. 굉장한 직분을 가졌다고 하니까 더 힘이 듭니다. 이 유대인들은 어찌합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이 설교를 잘해서 성도들이 따라갈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 편인 성도가 그쪽으로 따라 가니까 시기가 생겼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 한테 어떤 반응이 나올지에 대해서 나도 내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이런 겸손함으로 나가야 하는데. 행위구원은 예수님 믿는 사람이 어떻게 ampmdash될 수가 있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아플 수가 있어. 어떻게 암에 걸리냐. 그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죄의 문제를 모르니까 아프고 떨어지면 건강하고 붙은 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된 사람들은 안 된 사람들 앞에 가서 간증을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똑같이 교회에 다니고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도 회당장들도 모두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데 물과 기름입니다. 바울이 언제 자기 목회를 한다고 했습니까? 복음을 전할 마음은 있지만 늘 순회전도자로 떠납니다. 그 떠날 수 밖에 없는 바울의 마음은 영혼구원에 대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도리어 가든지 전하기만 하면 빕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아오니까. 어쩔 수 없이 영혼구원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묵상하고 나갔는데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가 나누는 구속사라는 그 자체가 고품격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유대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울이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으로 형제골육의 구원을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애통이 됩니다. 옆에 식구들이 안믿는데 내가 화를 낼 일인가요, 혈기를 부릴 일인가요? 예수님도 고향 식구 바리새인들 한테 독사의 자식들아 화있을진저라고 했는데 이해가 되면서도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으로 그 말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했지만 자기 같은 살인자도 구원받았는데 이 유대인과 회당장들이 어찌 구원되지 않겠는가 이런 애끓는 마음으로 성령의 강론을 했고 우리가 그렇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길로 놓는 사람은 감정적인 은혜도 있습니다. 안된 것 같아도 된 것이 많습니다. 진짜 안돌아 올 사람들이 많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강론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같이 소동케 하는 성도들은 반드시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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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강론
본문: 행17:2-9
1. 성경으로 구속사를 증언하는것입니다.
[적용]
- 성경의 이야기를 남 이야기로 읽습니까, 내 이야기로 읽습니까?
-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할 내 구속사의 간증은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2. 따르는 딱풀 성도가 생깁니다.
[적용]
- 여러분은 공동체와 한편이 되어 주님을 따르고 있는 딱풀 성도입니까? 요리조리 피해가는 미꾸라지 성도입입니까? (1부 공동체를 밀어내는 나 홀로 성도입니까?)
3. 시기하여 소동하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적용]
- 시기나 질투, 경쟁심 등의 뿌리는 똑같은데 그 중의 무엇으로 소동하나요?
-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시기를 하나? 어떻게 아프냐?고 얼마나 자주 말합니까? 이것이 행위 구원이라는 것이 인정됩니까?
2021.5.9
pm 8:00 목장
참여자- 박은샘, 박나은, 최수빈
은샘
회사나 공동체에서 질서에 순종하는게 힘든 부분인 것 같다
순종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보니 받아드리고 넘어가는것이 힘든 것 같다.
나은
제안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다.내가 생각했을때 동생한테 뺏기는 것이 뭘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엄마아빠에대한 관심과 인정인 것 같다. 동생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 가졌다고 생각이 드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피해의식으로 부모님이 동생과 나를 다르게 대하시는 것 같으면 폭주를 하는 것 같다.
이번주도 한바탕 폭발했다. 저랑 17년을 같이 옆집에서 사는 언니랑 친하지 않지만, 동생이랑은 잘 지낸다.
서로 경쟁구도가 되니, 함께 있어도 편하지가 않았다.
제 안에 있는 자존감이 없다보니, 나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들에대한 인정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다.
학교 다닐때에도 나를 잘 챙겨주는 교수님이 더 잘 챙겨주는 친구들을 보면 혼자 질투가 나기도 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모든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라고 했다.
수빈
오늘 말씀에서 유대인이 바울에게 가졌던 시기 질투 경쟁심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세상에 있는 친구들한테는 시기와 질투가 안나지만,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가장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것 같다.
나보다 더 스펙, 학벌, 외모가 있고 인정과 관심을 받는 사람들에게 분노에 가까운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다.
이런 시기심이 신앙생활에 많은 방해가 된다는 것 같다. 그래서 빨리 이런 마음을 청산하고 싶다느 생각을 했다.
원래 경쟁심이 많은 성격인 것 같기도 하다.
:
바라는 가치와 나의 고유한 것을 발견해 나아가면서 시기질투는 줄어드는 것 같다.
시기질투는 할 수 있지만 그런부분은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느냐는 어떤 방향 선택을 하는 것은 내가 하느냐에 따라 있는 것 같다.
-수빈
1. 알바하는데 체력과 멘탈 붙잡아주세요
2. 양육 10주차 끝까지 잘 마칠수 있도록
3. 내안의 시기심 질투 경쟁심 사라질 수 있도록
나은
1. 말씀보며 내 죄 잘 보고 갈 수 있도록
2. NCLEX 남은 서류 진행 순탄히 이루어지도록
3. 목장, 양육, 소년부에 잘 붙어가도록
은샘
1. 말씀붙잡고 가는 한 주 되도록
2. 공부와 일 병행할 때 지혜주시도록
3. 목장, 양육, 마을에 잘 붙어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