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7 성령의 돌보심
사도행전 15:12-18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서로 의논을 하셨겠죠? 그러면 의논대로 무엇을 하셨을까요? 역할대로 돌보셨겠죠.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돌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기를 원하죠.
14절에 돌보심의 뜻은 슬픔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하고 방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돌봄을 하고 잘 받는 사람은 정말 또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게 되어있어요. 목자들이 잘 돌보면 다음에 목자가 되었을 때 그분이 롤 모델이 되어서 잘 돌보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돌보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1.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12절)
우리 지난주 베드로의 형제 의식에 관한 장렬한 변론은 온 무리를 침묵에 빠뜨릴 정도로 확신있고 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어요. 조용해졌어요. 온 무리가 조용해지자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다시 발언할 기회를 주었어요. 바울과 바나바는 4절에서 처음 보고했을 때는 바리새인들이 막 벌떡 일어나서 비난을 했자나요. 그런데 이번 두번째 보고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딱 표적과 기사를 꼭 집어서 말했을까요?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은 너무나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눈높이에 맞춘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4장 48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물론 그들이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잘 믿는 것도 아니예요. 그런데 표적과 기사가 있으니까 그 정도라도 믿는 거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했어요. 우리도 짠하고 나타나는 기적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이 표적과 기사에 열광하겠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자나요. 그러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로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는 돌로 침을 당했고,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도 죽을 만큼 돌로 침을 당했지만 복음이 전해진 것,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을 놔두고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했던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도로 돌아서 굳게 세우고자 돌아보며 돌아온 선교 보고, 그것 자체가 표적과 기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진짜 표적인 것이죠. 그러니 지금 이제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진짜 영이 통하는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눈높이에 맞춰서 보고를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역할 분담은 성령의 조직 맞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이 정통 교리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요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공의회에서 조용한 거예요. 객관적 증인의 역할만 했어요. 나서지 않았어요. 그것은 이 공의회를 개최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주된 증인의 역할마저 바나바에게 양보했습니다. 오늘 지금 이 12절 보면 뭐가 보이나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바나바를 앞서 표기했자나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울은 예전에 교회를 잔멸하던 대상으로 기피 대상이었고, 이 바나바는 사도들의 발 앞에 밭을 팔아 두었던 정말 예루살렘 교회의 인기스타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칭하며 그때는 늘 바나바가 리더였어요. 그런데 선교 여행을 시작하고 보니까 구브로에서부터 바울의 탁월한 복음 실력이 저절로, 13장에 안디옥 교회가 시작돼서 파송을 했는데 얼마 안가서 13절에 바울이 리더가 됐어요.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라고 언급했는데 그러다 앉은뱅이 고친 루스드라에서는 그 사람들이 인물 좋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칭했죠. 그래서 거기 먼저 바나바가 나왔는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또 바나바가 앞서 나오는 거예요. 이걸 왜 언급하냐면 성경의 한 구절 한 글자에는 이렇게 숨결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다 큐티하는데 하나 하나 다 스토리가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연애편지 맞습니다. 정말 놀랍죠?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 모습인지 보이십니까?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자랑질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우리 자신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의 직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 속에서 주어진 역할이 바뀔 수도 있고 거기에 순종하는 게 중요해요. 창조주 주님도 이 땅에 와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역할을 맡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질서와 상황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안돼요.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 믿어야 의롭게 됩니다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 조심 조심 하는 것이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에요. 이것이 효과적인 최고의 성령의 돌보심 같아요. 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지 바울이 다른 사람을 똑같이 돌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눈높이의 절제를 할 수 있는 비결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령의 돌보심으로 나를 돌보면, 가정을 돌보고, 교회를 돌보고, 사회를 돌보고, 나라를 돌보는 것 같아요.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늘 밑지지만 뒤로는 남는 장사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한 해 동안 성령의 의논을 하면서 목장이나 여러 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고 돌보는 진정한 성령의 돌보심의 역사가 있으면 좋겠어요.
[적용] 가정이나 회사에서나 목장에서 눈치를 보십니까? 무시하십니까? 눈높이를 맞추십니까?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 때문입니까? 열등감 때문입니까?
2.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13-14절)
1) 야고보를 심방 하십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한 다음에 얘기치 못한 한 인물 야고보를 만납니다. 그리고 형제들아합니다. 베드로는 너희도 알거니와 그랬는데 야고보는 내 말을 들으라 합니다. 더 자신이 확 있는 거 같아요. 베드로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애통하며 외식하는 유대주의자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는데요. 야고보는 또 무슨 죄가 있어서 애통하며 형제의식을 가지고 형제들아라고 했을까요?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한 개인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것을 늘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그러나 사람은 대충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예요. 대게 인간이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의학자 프로이드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합니.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 하나 하나는 그 사람을 나타내 주는 바로미터라고 하죠. 그래서 범죄 심리학에서 사람을 연구하면 답이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국내의 혐오차별 문제를 깊게 연구하는 김지혜 교수가 쓴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로가 기막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상상을 불허하는 고정관념을 가진 거예요. 그러니 그 지독한 선민의식으로는 이 이방 선교가 퍼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식구인 동생이 역할을 해 주어야 했나 봐요.
그러면 야고보가 어떤 사람인가? 갈라디아 2장에 보면 기둥 같은 사람었다고 하자나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 유대인과 같이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요. 예수님 식구들이 왜 모두 안 믿었을까를 제가 참 생각을 많이 해 보았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인간이 100% 죄인이다 이거는 큐티의 아주 기본이거든요. 우선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사생아로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 돌로 쳐 죽어야 될 엄마하고 그 형을 보면서 살 때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저 형 때문에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했겠죠. 게다가 배움도 없고 목수인 예수 형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마가복음 3장 21절에. 그러니 형제들이 미친 형을 붙들러 다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33절에는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면서 35절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완전히 미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 알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집집마다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같습니다. 이 식구들은 예수님하고 사는 게 너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생전에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도 살아서 식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미쳤다는 말만 듣고 사셨어요. 그러나 그것이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좀처럼 식구들에게 조차도 인정받지 못했던 성자 예수님인데 효과적으로 성령님이 돌보신 거죠. 저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한 한마디로 식구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생각해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도 살았을 때 형제들이 잘 믿었으면 좋았겠으나 하나님의 경륜은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러니까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세요. 바로 이게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에요. 성자 하나님이 이렇게 점처럼 오셔서 결국 그 고난을 받아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셨고 이것을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보면서 지금 형제들이, 식구들이 미쳤다고 해도 슬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가정도 이랬는데 우리가 어떻게 목사 아들, 딸이 그러냐 그런 말 그렇게 함부로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도 미쳤다고 그랬는데 식구들이.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그럼 왜 여기서 야고보가 등장을 했나 이걸 생각해 봐야 되는데, 베드로가 대단한 변론을 해도 이 최후 판결은 수석 사도 베드로 가지고는 안되는 거예요. 이 때를 위해서 주님은 부활하시고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주님이 딱 콕 집어서 개인적으로 야고보를 찾아가시니까,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그냥 단번에 변했어요. 부활의 주님이 찾아가시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그러니까 심방도 때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로 밝혀지고 나서는 이제 예수님의 식구가 메시아의 식구자나요. 그러니까 로열 패밀리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를 심방하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거죠. 온 인류의 이방 선교를 위한 이 법적 판결을 위해서 야고보에게 이 역할을 맡기셨어요. 그러니까 야고보가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고 모든 것을 옆에서 보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이었어요. 유대인들이 그것을 부적처럼 여기기 때문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생 그것이 효력을 발휘했어요. 그만큼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때마다 무너지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 때는 야고보가 그렇게 쓰임을 받았어요. 이후의 세대는 여전히 베드로를 수제자로 칭하고 있어요. 그때 그때 맡겨지는 역할에 순종하면 이것이 정말 눈높이를 맞추는 거죠. 이렇게 야고보도 내가 지난 날을 생각할 때 너희와 형제가 될 수 없었는데 나도 너희들 하고 똑같이 예수님을 비난했다. 미쳤다고 그랬다. 그 얘기를 한 거예요. 주님이 만나 주셔서 심방 한 번 하시면 그 누구도 가능합니다. 야고보의 역할은 어떤 회의가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려면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의장격인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야고보가 이런 마음으로 나도 너희와 같았다. 형제들아 하니까 이해가 되시죠? 베드로도, 야고보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다들 이 세상에서 죄인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지금 이제 형제들아 이게 공감이 되는 거예요.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해 주시면 구원으로 연결되어서 이렇게 돌봄을 받고 돌보는 것들이 자연스러워지는 거예요. 성령의 돌보심이 나에게 느껴지면 나도 남을 돌보게 되어있거든요.
2) 이방인을 심방 하십니다.
베드로도 그렇고 야고보 나도 그렇지만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하시니까 구원받았다 이 뜻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돌보신 것이라고 한 마디로 야고보가 정리합니다. 여기서 돌보셨다는 단어의 원형 헬라 에피스켑토마이는 히브리어로는 파카드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너무 중요한 단어라서 제가 좀 알려 드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고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이 구원을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바로 이 파카드예요. 저의 간증 룻기 1장 6절에도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 같은 단어를 썼어요. 또 창세기 21장에도 경수가 끊긴 사라를 돌보셔서 이삭을 낳게 하셨고, 또 출애굽에도 4장에 애굽에서 탄식하던 백성을 돌보셨어요. 찾아가셨어요. 흑암 중에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어요. 다 같은 단어예요. 절망에서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해 주시면 그냥 구원해 주시는 이 엄청난 표적과 기사자나요. 그런데 이 돌아보신다는 너무 따뜻한 주님의 돌보심의 심방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죠. 아프고 힘들 때 돌보셨다는 에피스켑토마이와 히브리어 파카드라고 그랬자나요. 그러니까 이 에피스켑토마이의 기본 의미는 ~인지 아닌지, 있는지 없는지 살펴 보다예요. 쉽게 말해서 출석 체크가 기본 뜻인데요. 이거는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의 표현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살펴보는 것이고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서 함께 있는 것이므로 방문하다의 뜻으로 이 교회의 심방이 지금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목장은 기본이 출석 체크인 거예요. 그리고 방문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장에 출석하시고 출석 체크하시는 것, 이게 목장의 큰 의미예요. 그러면 그 목장에 하나님이 심방 하십니다. 늘 출석만 해도 여러분을 심방 하십니다. 수많은 문제가 해결되요. 구속사적인 구원을 해 주십니다.
즉 야고보는 베드료가 고넬료 집을 방문한 사건을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방문하신 일의 시작으로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돌봄이에요. 창세기 50장 25절에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내 자녀가 지금은 안 믿어도 내가 죽은 뒤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방문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요셉이 지금 유언을 했어요. 창세기 마지막에. 그리고 올라가는데 400년 걸렸어요. 그러니까 돌보신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구원의 심방이고, 약속의 심방이고, 그래서 권고하고, 돌아보고, 방문하셨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부림에서, 홍해 바다에서, 흉년에서 우리를 심방하십니다. 그래서 돌봄은 심방이에요. 야고보도 이방인도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하시면 기둥 같은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올해에는 여러분들이 심방 계획을 많이 잡으시기 바랍니다.
[적용]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뜻하게 느껴집니까? 귀찮습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 부담되세요? 마음에 안 든다고 톡방에서 나간 적은 없나요?
3.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15-18절)
하지만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우리를 심방하는 것에 일치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간증과 바울과 바나바의 말이나, 즉 선지자의 말씀이 다 일치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해도, 찾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이 심방 하신다고 해도 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하는 가예요. 내가 아무리 도와줘도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꽝이에요. 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오케이 에요. 말씀이 잣대가 되야 돼요. 이론적으로 내가 성경을 인정해도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그거는 또 일치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일치했는가? 그래서 16절서부터 18절까지를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하면서 그거를 얘기합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데 다시 지을 사람은 다윗의 후손 예수님인거죠. 그래서 예수님만이 이 퇴락한 성을 다 지을 수 있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했을까요?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통하여서 선택된 유대의 남은 자와 또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셨죠.
그런데 아모스하고 야고보는 논점이 좀 달라요. 언어가 몇 개 좀 다릅니다. 아모스 9장11-12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저주받아 마땅한 에돔의 남은 자들까지, 에돔은 약속의 민족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자나요. 즉, 불구대천의 원수까지도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신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야고보는 그 본문을 좀 영적으로 해석해서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될 것을 말하는 70인역 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본을 인정해서 그 구약 히브리 성경이 아니고 이 헬라어 성경을 인용했어요. 인류의 남은자, 즉,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얘기는 다윗 시대보다 훨씬 많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있는 것이
이 퇴락한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예언이고, 지금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이방 선교고 이것이 말씀의 일치라는 것이죠.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아모스는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야고보는 주의 말씀이라고 썼어요. 주의 말씀이라는, 이 주께서 말씀하신다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 하나님이 항상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미예요. 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리라는 거예요. 아모스는 지금 이 시대부터 한 750년 전의 이야기자나요. 그 아모스 얘기나 바울과 바나바 얘기나 다 똑같다는 거죠. 현재에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진리라는 거죠.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37-38절에 수많은 잡족이 섞여 나왔다고 그랬는데, 이것이 바로 그 예전부터 이방인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죠.
좀 어렵죠. 다시 제가 쉽게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남과 북이 망했어요. 북이스라엘은 BC 722, 남유다는 BC 586년에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졌자나요. 그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지중해 연안으로 다 흩어졌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갈수록 다 모국어를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각자 자기 지방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데 그러다보니까 히브리어 성경을 모르는 거예요. 그랬는데 그 지중해 연안을 로마가 제패하고 나서 헬라어라는 공용어가 생겼어요. 그래서 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읽게 하고자 한 것이 70인역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방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라는 거죠. 그런데 야고보는 바로 이 아모스를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이 70인역을 인용을 했는데 바로 이것이 야고보가 눈높이를 맞춘 거라는 거죠. 유대인들에게도 구약 성경 아모스를 인용했기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 얘기를 말하는 거고, 이방인들에게는 그 헬라어 성경을 써가지고. 아모스에는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 헬라어 성경에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전부 다 이루어진다, 비슷한 얘기 같지만 앞으로 유대인 시대에서 다 흩어져서 나가야 될 거니까. 우리가 정말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돌보아줘도 돌봄을 받아도 중요한 거는 성경대로 인 거예요. 그 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돌봄 다 꽝이에요. 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지 않는 나의 열심은 이단인 거예요. 우리의 간증, 체험 다 놀랍지만 성경대로. 그러니까 베드로, 바나바와 바울, 야고보가 바로 이 말을 한 것이고 이것을 야고보가 아모스와 연결시켰다는 거예요.
[적용]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나요? 온라인 예배 때 모니터에 열려 있는 화면이 몇 개 인가요?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입니다. 성령의 돌보심의 결론도 말씀입니다. 말씀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맨날 같은 결론이에요.
기도제목
다인
회사가는 것이 힘든데 성령의 수행원 하라고 인도하신 곳에서 전신갑주 입고 하루만 잘 살도록
사람에 대해 묵상하지 않고 나의 인생의 경영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도록
새로운 곳에 이력서 넣었는데 나의 가고 서는 길 주님 보다 앞서지 않고 말씀에 물어볼 수 있는 용기와 위로 주시도록
보련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살도록
새로운 곳에 이력서 넣었는데 붙회떨감 할 수 있도록
약을 먹어도 여전히 머리에 아픔이 있는데 성령님이 영육에 방문하시고 돌아봐 주셔서 깨끗하게 나을 수 있도록
물질이 없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어서 힘든 것을 알고 물질을 벌었을 때 주님 주신 물질인 줄 알고 십일조 할 수 있도록
예선
회사에서 사건이 많은데 요동 하지 않고 하루만 잘 살도록
큐티 기도회 잘 참석하도록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
지난 폭설 때 5시간 갇혀 있던 이후 전처럼 두려운 마음이 오는데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주셔서 보호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도록
현경
약한 나를 보기 보다 강한 주님 바라보며 하루를 살 수 있도록
말씀 볼때마다 위로 받고 참 평강 받도록
구부러진 마음의 토레스 산맥을 성령님과 함께 건너서 직장으로 보내주신 목적이 예수님 십자가 구원인 것 알고 가도록
은우
전시를 할 때마다 영육이 많이 힘든데 이 모든 것이 나의 욕심으로 온 것임을 알고 영육의 성전이 온전할 수 있게 말씀으로 매일 기도하도록
붙여준 지체를 보석으로 알고 그들의 이름 불러가며 기도하도록
이번주에 6일간 촬영이 있는데 나의 할 수 없음을 알고 기도로 도움을 구하도록
모든 사고로부터 보호 받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