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 '성령의 돌보심' (사도행전 15:12-18), 김양재 담임목사님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 구원 위해서 서로 의논 하셨을 것이다. 그러면 의논대로 무엇을 하셨을까? 역할대로 돌보셨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돌봄 받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길 원한다. 14절 돌보심의 뜻은 슬픔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하고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돌봄을 잘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돌보게 되어있다. 목자들이 목원을 잘 돌보면 다음에 목원이 목자가 되었을 때 그분이 롤모델이 되어 잘 돌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돌보심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1.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12절
지난 주 베드로의 형제의식에 관한 장렬한 변론은 온 무리를 침묵에 빠트릴 정도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었기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온 무리가 잠잠해지자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다시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4절에서 보고했을 때는 바리새인 중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할례 율법을 지켜야 함이 마땅하다 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번 두번째 보고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표적과 기사를 콕 찝어 말했을까?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에 그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그래서요 4:48절에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한다. 물론 그들이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잘 믿은 것도 아니다. 그나마 표적과 기사가 있으니 그정도라도 믿는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너무나 좋아했다. 율법 좋아한다고 하면서 표적과 기사는 이방인보다 더 좋아한다. 우리도 짠 하고 나타나는 기적이 너무나 좋다. 근데 유대인들이 기사와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나 진정한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로 보고 했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이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의 박해로 쫓겨났고 이고니온에서는 돌로 침을 당했고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도 죽을 만큼 돌로침을 당하고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오는 지름길을 놔두고 곳곳에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했던 루스드라 이고니아 비시디아 안디옥을 도로 돌아서 굳게 세우고자 다시 돌아보며 돌아온 선교 보고 그 자체가 표적과 기사가 아니었겠는가?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기에 바로 이것이 표적인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정말 영이 통하는 사도들에게는 팔복의 관점으로 균형 있게 눈높이에 맞춰 보고했으리라 생각한다. 일원론이기에 사도들과는 통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이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십자가는 지혜이고 타이밍이라고 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성령의 조직이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정통 교리에 가장 강력한 주창자요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바울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공회에서 철저히 객관적 증인의 역할만 했다. 나서지 않았다. 그것은 공의회를 개최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의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주된 증인의 역할마저 바나바에게 양보했다.
12절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되어있다. 바나바를 앞서 표기했다. 이것은 지나칠 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울은 예전의 교회를 잔멸한 대상으로 기피대상이었고, 바나바는 사도바울 앞에 그 발앞에 밭을 팔아 발 앞에 두었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인기스타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칭하며 늘 바나바가 리더가 되었다. 근데 선교여행 시작하고 보니 구브로에서부터 바울의 탁월한 복음전함으로 눈앞에서 열매가보이니 당장 13:13부터 바울로 리더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앉은뱅이 고친 루스드라에서는 그 사람들이 인물 좋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칭했다. 거기에 바나바가 먼저 나왔다. 근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나바가 앞서 나온다. 이렇게 성경이 한 구절 한 글자에는 스토리와 숨결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연애편지 맞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뜻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아는 것을 말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구원을 위해 자랑질을 하면 안된다. 모든 돌보심은 자랑질 하다가 망친다. 복음 스펙 외모 아이 남편 아내 자랑 하다가 전부 망치는 것이다. 그럴수록 바울처럼 절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 상황속에서 역할이 바뀔 수도 있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조주 주님도 이 땅에 와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복종하는 역할을 맡으셨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중요하기에 질서와 상황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순종이 안 된다. 우리가 항상 끝에 돈이 있다. 교회에서 돈거래 하지 말라고 목장 초원에서 늘 처방한다. 그런데 굉장히 듣기 싫은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근데 이것도 눈높이에 맞춰서 해주어야 한다. 저사람은 언제 왔나 양육은 받았나 처방은 들을만 한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하고 목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면 들어야 한다.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근데 자기가 살아봤어 하는 순간 돌보심이 멀리 가는 것이다.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 믿어야 의롭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열매가 있지만 입 꾹 다물고 조심조심한다. 이것이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 바울이 이렇게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잘나서 절제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똑같이 돌본다. 이렇게 눈높이의 절제를 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면 솔직을 내세워 할말 다 하고 그것은 팩트라고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 하며 앞으로 남고 뒤로는 구원에 대해 밑지게 된다. 그러한 성령의 돌보심으로 나를 돌보면 가정 교회 사회 나라를 돌볼 수 있다. 근데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십자가 짐 같은 썩어짐 죽어짐이다. 자랑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얼마나 십자가인줄 아는가? 인내 없이는 자랑을 금할 수 없다. 고난보다도 자랑을 금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앞으로는 밑지는 것이다. 그러나 뒤로는 구원에 남는 장사를 하게 된다. 이렇게 한해동안 성령의 의논을 하며 목장이나 여러곳에서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고 돌보는 진정한 성령의 돌보심의 역사가 있으면 좋겠다. 사랑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다.
제가 예전에 입덧으로 힘든 딸에게 돌봐주지는 않고 예민한 애가 힘들다던데 했다. 사실 입덧이 셀수록 아이가 건강하다고 한다. 제가 말을 이렇게 해주었다면 오죽 좋은가? 근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 주의 은혜 일세가 맞는 것이다. 돌봄이 꽝이다. 그러나 한가지 잘한 것은 제가 돌보지 못하니 큐티 시켜서 자신이 자신을 돌보도록 한 것이라고나 할까. 이말도 제 위주로 하는 말이다. 그러니 목장에서 나눌 때 듣긴 들었는데 이상하게 들었는데 기분이 나쁜 말이 있다. 자랑같지 않게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들을떄는 모른다.
적용) 가정이나 회사 목장에서 눈치를 보십니까? 무시하십니까? 눈높이를 맞추십니까?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 때문입니까? 열등감 때문에 비굴해서 맞춥니까?
2.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두 심방이 있다.
1) 야고보를 심방하십니다.
13절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한 다음에 예기치 못하게 야고보를 만난다. 베드로는 너희도 알거니와 했는데 야고보는 내 말을 들으라 한다. 야고보는 공회 의장이니 이런것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외식에 대해 애통하면서 외식하는 유대주의자들 보고 너와 나는 같다고 형제들이라고 했다. 야고보는 또 무슨 죄와 수치가 있어서 애통하며 형제의식을 가지고 형제들이라고 했을까?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한 개인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것을 늘 생각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도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인간은 주님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정의하셨다. 그래서 표적을 좋아한다고 한다. 악하고 음란해서 표적을 좋아한다. 그런데 다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나 사람 속을 대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전적으로 악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다. 대개 인간이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게 되어있다.
정신의학자 프로이드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나타내주는 바로미터라고 한다. 그래서 범죄심리학에서 사람을 연구하면 딱 맞는 답이 나온다고 한다.
국내의 혐오차별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 에서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고 한다. 인간이 이렇게 악하다. 그러니 사람들은 서로가 기막힌 고정관념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 하나 잘못했다고 죄지었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정죄하는 것이다. 안 변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 고정관념의 최고봉은 유대인들이다. 지독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방선교가 퍼져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때 예수님의 식구인 동생이 이 역할을 해주어야 했던 것 같다.
그러면 야고보가 어떤 사람인가? 갈 2장에 보면 기둥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믿기 전에는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7:5에 정확히 나온다. 예수님의 식구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다. 예수님 식구들이 왜 안믿었을까? 우리는 그 입장을 생각해본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당연히 사생아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돌로 쳐죽일 엄마와 형을 보면서 살 때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형 때문에 하며 이 수치심으로 예수님을 비난 정죄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게다가 배움도 없고 목수인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니 막 3:21에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식구니까 할 수 없이 미친 형을 붙들러 다녔다. 근데 붙들러 가니 누가 내 어머니고 동생이냐 했고 누구든지 내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어머니라고 했다. 말이 안되는 것이다. 미친 사람 취급하게 되어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예수님을 그 어떤 배우자 자녀라도 알아볼 수 있는 비결은 없다. 집집마다 말씀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다 똑같다. 이 식구들은 예수님과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님도 살아서 식구들을 어쩔 수 없었다. 미쳤다는 말만 듣고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너무 힘드니 성령이 효과적으로 도우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이 어떤 말을 들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동생이 무어라 했겠는가? 형이 한 것이 무엇이 있냐고 조용히 살게 해달라고, 제발 형도 집에서 부모님이나 잘 돌보라고, 형 때문에 상처 입고 산다고, 형이 메시야면 다냐고 했을 것이다. 근데 초막절에는 그 일을 하려면 왜 숨어서 하냐고, 세상에 나타내라고 하며 기복적인 것을 바랬다. 덕 좀 보자고 하는 것이다. 근데 예수님은 언제는 메시야라고 하고 언제는 나타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위선자 이기주의자 같지 않은가? 별 소리 다 들었던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 때문에 식구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싫어하고 무시하고 상처의 주범으로 생각했을지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예수님도 살았을 때 형제들이 잘 믿었으면 좋았겠으나 하나님의 경륜은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조차도 때에 순종하셔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식구들끼리 너무도 잘 지냈다면 인류가 구원받도록 지경이 넓어지기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히5:8-9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 순종을 배웠다고 하신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수님이 고난을 우리 앞에 받아주셔서 그가 성자 하나님의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 점처럼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실 때 성령이 효과적으로 돌보신 것이다. 성령이 돌보시면 끝까지 승리할 수 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며 아무리 형제들 식구들이 다 미쳤다고 해도 슬퍼하지 마시길 바란다.
저는 정인이 엄마의 부모님 가정이 다 목사님 가정이라고 하는데, 예수님 가정도 이랬는데 어떻게 목사 아들딸이 다 그러냐 하며 함부로 하면 안되는 것 같다. 우리가 목사 자녀라고 해서 전부 다 믿음이 좋고 신실해야 한다는 법이 어딨는가? 아플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오직 악하고 음란한 것 밖에 없다. 사람에게 그래서 자꾸 점수를 주면 안된다. 예수 믿기 전 사람이 악하다 착하다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우리는 선한 것이 1도 없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 근데 안믿는 사람도 그런데 믿는 사람도 그러면 안된다.
그럼 베드로가 왜 야고보를 심방했을까 생각해본다. 베드로가 그 대단한 변론을 해도 최후 판결은 수석사도로도 안되는 것이었다. 어부 베드로 가지고는 안되는 것이 있는데 이때를 위해 최후 판결을 야고보가 했다. 최후 판결이 너무 중요했고 여기에 의장으로 이 판결을 해야 하기에 주님이 부활하시고 야고보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셨다. 그랬더니 이때가 하나님의 심방이 되어 야고보가 단번에 변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이다. 심방도 때가 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밝혀지고 나서는 예수님의 식구가 메시아의 식구이기에 로얄패밀리가 되었다. 로얄패밀리로 할 일이 있어서 야고보를 심방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온 인류에 이방 선교를 위한 법적 판결을 야고보에게 맡기셨다. 야고보가 주님을 만나고 나니 예수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고 모든 것을 옆에서 보았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환상이고 특권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베드로가 따라갈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그것을 부적처럼 여기기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기에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것이 효력을 발휘했다. 그만큼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떄마다 무너지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야고보가 그렇게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의 세대는 여전히 베드로를 수제자로 칭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같이 다닌 사람은 동생이 아니라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 맡겨진 역할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눈높이에 늘 맞추는 것이다.
이렇게 야고보도 지난날을 생각해 볼 때 너희와 형제가 될 수 없었다고, 너희와 같이 똑같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미쳤다고 했다고 하면서 형제들아 라고 했다. 주님이 만나주시고 심방하시면 그 누구도 변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역할은 어떤 회의가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의장격인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야고보가 이런 마음으로 너희와 같았다고 형제들아 라고 했다. 베드로도 야고보도 자랑할 것이 없었다. 다들 이세상에서 죄인일 뿐이었다는 것을 인식했기에 바로 형제들아가 공감이 되는 것이다.
지난주 목장 나눔 이야기
성어거스틴도 인육을 먹었던 지존파도 믿기전에는 개차반인 인생이었다. 고재봉은 일가족을 도끼로 살해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 예수믿고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고 천국갔다. 인간의 악에는 한계가 없다. 근데 믿기만 하면 달라진다. 근데 우리가 저 하늘에서 볼 때 자동차 하나가 점처럼 보이는데 거기서 잘났다 못났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교회는 옳고그름으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옳고 그름이 많다.
한 엄마가 천사같은 아이가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성병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엄마는 아이를 낳고 사라졌다. 이 아이는 고아원에서 너무나 예쁘게 자랐고 건강해졌다고 한다. 근데 이 엄마보고 어떻게 아이를 낳고 사라질 수 있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엄마가 자기도 성병에 걸렸으면 묻지도 않고 낙태하지 않았겠는가? 근데 어떻게 열달동안 배아파 하며 낳아줄 수 있을까 싶어 고마웠다. 아이를 낳아서 때리기도 하고 뱃속에서 죽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생명을 낳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다. 결혼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믿음이 없으니 이런 모든 것들을 듣기도 싫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좋은 것인데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을 다 논한다.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을 논하면 안된다.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쳤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 아니다. 근데 이해가 안되니 보이는 것으로 메시야를 미쳤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가만히 끊고자 해서 낙태할 뻔 했다. 끊었으면 그 당시 여자는 돌에 맞아 죽는다. 그러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논하면 이 땅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고 그 보이는 행동으로 전부 정죄하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뱃속에 정인이 처럼 예쁜 아이가 수도 없이 많이 죽어갔고 또 앞으로도 죽어갈 예정이다. 낳아놓으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들교회도 생후 2개월 때 버려진 집사님이 고아원에서 돌고 돌아 우리들교회로 왔다. 그리고 인간승리 표적과 기사로 서울법대를 들어가고 졸업했다. 근데 그분이 얼마나 상처가 많겠는가? 고아원 갔는데 너무 똑똑하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사회에 대해 적개심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저는 그분이 주님 만나면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다 했는데 그분이 육이 무너지니 드디어 그분이 주님을 만났다. 결국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근데 그 엄마가 못키우겠다고 안낳았으면 어쩔뻔 했겠는가?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다. 하나님이 심방 한번 해주시면 구원으로 연결되어 돌봄 받고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근데 성령의 돌보심을 못 받으면 이 모든 사람의 돌봄을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가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고아의 마음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 그러나 믿음이 없을떄의 이야기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인간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가 안된다. 야고보를 이렇게 하나님이 심방하셨다. 같은 사랑으로 이방인을 심방하신다.
2) 이방인을 심방하신다.
14절
베드로도 야고보도 그렇지만 절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방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방 한 번 해 주시니 구원받았다고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돌보신 것이라고 야고보가 한마디로 정리한다. 여기서 돌보셨다는 것을 원어를 히브리어로 보면 파카드 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고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그 구원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이다.
저의 간증 룻 1:1에도 여호와께서 모압 땅에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에 같은 단어를 썼다. 창 21에도 경수가 끊긴 사라를 돌보셔서 이삭을 낳게 하셨고, 출 4장에서 탄식하던 백성을 찾아가셔서 흑암 중에 백성을 돌아보사 할 때 다 똑같은 단어가 쓰였다. 절망에서 구속사의 계보를 위해 사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주시는 엄청난 표적과 기사로 따뜻한 심방으로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다 이다. 표적과 기사는 따뜻한 심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아프고 힘들 때 돌보셨다는 뜻의 단어 에피스케토마이 이다. 이 말의 기본 의미는 그런지 아닌지 살펴보다 이다. 출석체크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이 있으니 살펴보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 함께 있는 것이므로 방문하다는 뜻이다. 교회의 심방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목장은 기본이 믿음이 아니라 출석체크다. 이것이 돌아보시는 것 방문하시는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 보는 것이다. 목자 초원 평원 출석체크하는 것이다. 잃은 양 한마디를 찾듯이 출석체크해야 한다. 그렇게 출석하시면 그 목장에 하나님이 심방해주신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출석하면 수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밖에 없다. 구속사적인 구원을 해주신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한 사건을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방문하신 일의 시작으로 해석해주고 있다. 그래서 최고의 돌봄은 하나님의 심방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구원을 위한 돌봄이다.
창 59:25
내 자녀가 지금은 안 믿어도, 내가 죽은 뒤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방문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요셉이 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라가는 데 400년이 걸렸다. 그러니 돌보심이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구원의 심방이고 약속의 심방이다. 그래서 돌보고 권고하시고 방문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돌보심의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불임에서 홍해바다에서 흉년에서 우리를 심방하신다. 그래서 돌봄은 심방이다. 야고보도 이방인도 하나님이 심방 한번 하시면 기둥 같은 사람이 될 줄 믿는다. 올해는 심방하는 해로 적용하면 좋겠다.
SG목장 원거리 심방
사람이 나이 많으나 적으나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의 심방이 되어 돌봄이 되어 구원으로 연결된다. 심방 받아들이는 집도 가는 집도 차로 운전하신 집도 다 기적이다.
적용)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뜻하게 느껴집니까? 귀찮습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 부담되세요? 마음에 안든다고 톡방에서 나간 적은 없나요?
3.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15절
그러나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우리를 심방하시는 것에 일치해야 한다.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아니함만 못하다. 베드로의 간증과 바울과 바나바의 말이나 선지자의 말씀이 다 똑같이 일치한다. 우리가 아무리 돌본다고 하고 찾아가고 심방한다 해도 최종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아무리 도와줘도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꽝이고 아무리 욕을 해도 말씀과 일치하면 돌보심인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성경을 인정해도 삶에서는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삶과 행함이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일치하는가?
야고보는 16-18절에서 아모스 19:11-12를 인용하며 이야기 한다.
16-17절
바벨론 포로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 근데 이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을 사람은 다윗의후손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퇴락한 성을 다시 지을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이 왜 무너진 다윗의 성을 다시 짓는다고 했을까?
17절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이다. 구속사에 메시야를 통해 택함 받은 유대의 남은자와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장막을 일으키시겠다고 했다. 근데 아모스와 야고보는 논점이 좀 다르다. 아모스 9:11-12에서는 유대인들이 저주받아 마땅한 에돔의 남은자들까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으로 기업을 얻게 한다고 했다. 왜 에돔을 썼을까? 에돔은 안믿는 사람의 대표이다. 저주받아 마땅한 에돔의 남은 자 원수까지도 내 이름으로 일컫는 왕국으로 기업을 얻게하신다고 되어있다. 근데 야고보는 그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될 것을 말하는 구약의 70인역 헬라어 역본을 인용했다. 아모스는 유대인 중심 야고보는 이방인 중심으로 하다보니 같은 성경이지만 헬라어 역본을 썼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를 세운 목적이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윗시대보다 훨씬 많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고 있는 것이 퇴락한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예언이고, 지금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이방선교이고 이것이 말씀의 일치라는 것이다. 바나바 바울 베드로가 한 말과 아모스 선지자가 한 말이 똑같다는 것이다. 다 시대를 다르게 하지만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주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이 주를 찾게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밝히신다.
18절
아모스는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야고보는 주의 말씀이라고 썼다. 주의 말씀이라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다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 하나님이 항상 이 모든 일을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12장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때 허다한 잡족이 섞여나왔다고 했다. 그냥 잡족이 아니라 허다한 잡족이라고 했다. 이는 이방인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예전부터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똑같이 합하고 일치하고 말씀에서 일치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남북 이스라엘이 너무 죄를 많이 지어 망하고 흩어졌다. 유대인들이 지중해 연안으로 다 흩어졌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모국어를 다 잊었다. 그러니 구약성경인 히브리어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근데 그 지중해 연안을 로마가 로마가 제패하고 나서 헬라어라는 공용어가 생겼다. 그래서 그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역이다. 70인역은 이방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이었다. 야고보는 이 아보스를 70인역으로 인용했다. 이것이 바로 야보고가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도 구약성경 아모스를 인용했기에 예언이 이루어졌다 하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헬라어 성경을 쓴 것이다. 아모스에는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헬라어 성경에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 같지만 앞으로는 유대인 시대에서 다 흩어져 나가야 하니 그렇다.
우리가 정말 표적과 기사를 보고 돌보아주고 돌봄을 받아도 중요한 것은 성경대로 이다. 성경대로 일치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돌봄은 다 꽝이다.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돌봄과 나눔은 다 이단인 것이다. 우리의 간증 체험도 놀랍지만 성경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 바나바 바울 야고보가 바로 이 말을 한 것이고 야고보가 이 말을 아모스 성경과 연관시킨 것이다. 성령의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이고 인내이다.
적용)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나요? 온라인 예배 때 모니터에 열려있는 화면은 몇 개 인가요?
모든 것의 결론은 말씀이다. 성령의 돌봄심의 결론도 말씀이다. 말씀의 결론은 인내이다. 매일 같은 결론이다.
공동체 나눔 - 부목사님 부모님의 새어머니 이야기
말씀 맺음
성령의 돌보심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 자는 것이다. 죽어지고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것이다. 구원 떄문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으면 하나님이 심방해준다. 그러면 야고보 같이 그렇게 예수님을 괴롭힌 사람도, 할례도 모르던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심방해 주시면 성령의 바운더리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가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표적과 기사를 봤어도 말씀으로 최종 결론을 내야 합니다.
[기도제목]
* 이지현 기도제목
1. 무능해보이고 무시되는 일상의 평범함을 무시하지말고 스스로 인정해주고 하나님의 심방으로 귀하게 여기도록
2. 목원들 눈높이로 주님이 심방해주시고, 알맞게 돌볼 수 있는 지혜주시도록
3. 꾸준한 생활습관의 생활예배로 말씀과 일치되는 삶 살 수 있도록
*김교희 기도제목
1. 엄마 동생에게 눈높이 맞추는 마음으로 강요하지 않도록, 엄마에게 하나님의 심방이 임해서 목장가시게 되도록
2. 생활예배 잘 드리기
3. 이타적인 마음으로 업무하도록
4. 유투브 게임 절제하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