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7 사도행전15장12-18 (성령의돌보심)
1.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지난주 베드로의 형제 의식에 관한 장렬한 변론은 온 무리를 조용하게 할 정도로 확실할 변론이였습니다. 4절에 보고를 했을때는 바리새인이 벌떡 일어나서 방해를 할정도였는데 베드로가 변론한 후로는 조용해서 바울과 바나바과 표적과 기사를 말했다고 합니다. 콕 찝어서 표적을 말한 것은 연약한 유대인을 위한것이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라도 있으니 조금 믿었을 뿐인데, 유대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이방인보다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이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표적과 기사에 대한 걸로 보고를 했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이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수준에 맞춰 공회앞에서는 안했지만 아마도 사도들에게는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로 쫓겨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도 돌을맞고 그럼에도 복음이 전해진 것을 보고했을것입니다. 팔복의 관점으로 수준에 맞춰 균형있게 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일원론이기 때문에 사도들과는 통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철저히 객관적 증인의 역할만 했습니다. 바울은 공회를 주최한 유대인 지도자들이주인공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바나바에게 양보했습니다. 여기서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나바는 돈도 많고 성령도 넘치고 착하고 바울과 바나바로 칭하면 늘 바나바가 리더였습니다. 허나 바울의 탁월한 복음전함은 눈앞에서 열매가 보이니 중간부터 바울이 리더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박해했던 그런 사람이었기에 절제하고 바나바에게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지 구원 때문에, 아는거를 말하지 않는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모든 돌보심은 자랑질하다 망칩니다. 자식자랑 아내자랑 외모자랑 이딴 자랑하다 전부 다 망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바울처럼 절제를 해야하는것입니다.
상황속에서 주어진 역할이 바울과 바나바처럼 바뀔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는 늘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 질서와 상황은 상관이 없고 그 끝에는 늘 돈이 있습니다.
우리들교회 목장에서는 돈거래를 하지 말라합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얘기 싫어하지요? 하지만 이것도 상대의 눈높에에 맞춰서 해줘야 합니다. 수준따라서 언제 교회를왔나 처방은 들을 만한가 이런걸 보면서 잘 얘기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된다고 구원이 최고라는 말할수있는 열매가 주렁주렁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조심조심합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눈높에 맞추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울을 효과적으로 돌보셨기 때문에 절제 할 수있는것입니다. 바울이 잘나서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돌보시는 겁니다.
그런 성령의 돌보심으로 나를 돌보면 가정을 교회를 사회를 잘 돌볼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눈높이를 절제할 수 있는 비결은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것 참는게 얼마나 십자가인줄 압니까? 우린 고난보다도 자랑을 금하기가 더어렵습니다.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앞으로는 밑지는 거잖아요? 허나 뒤로는 구원에 남는 장사를 하게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진정한 돌보심의 역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사랑으로 돌봄을 받았기에 남을 돌볼수 있는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잘한 것은 제가 돌보지 못하니 딸 스스로 돌보게 한것이라 할수있습니다. 이것도 제 위주로 나누는 것입니다만.
목장에서 보면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랑같지 않게 자랑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나 진정한 성령의 돌보심은 죽어짐입니다.
*가정이나 회사에서 목장에서 눈치를 보십니까? 무시하십니까? 눈높이를 맞추십니까?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때문입니까?
2.하나님의 심방입니다.
1)야고보 심방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도 알거니와 했는데 야고보는 형제들아 내말을 들으라 합니다. 좀 윗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공의의 의장이니까 이런 것 필요한것같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어쩔수없는 선민의식을 애통히 여기면서 형제들아 했는데 야고보는 무슨죄가 있어서 형제의식을 가지고 애통하게 형제들아 라고 했을까요?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없이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다는것을 생각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누구도 위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딱 두 가지로 주님이 정리를 하셨는데 인간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악하고 음란해서 표적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고정관념의 최고봉은 유대인들입니다. 지독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방선교가 펴져나갈수가 없는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형제로써 야고보의 역할이 있는것입니다.
그럼 야고보는 어떤사람인가? 야고보는 기둥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것만 보면 우리가 생각할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야고보가 자기 죄가 없었으면 선민의식이 기가 막힌 할례주의자들에게 형제들아 이렇게 했겠어요? 자신도 이 유대인들과 똑같은면이 있기에 형제들아 라고 한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식구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냥 사생아 인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예수님을 비난했을겁니다. 그리고 배움도 없는 목수형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는겁니다. 그런 형을 보며 사람들이 다 미쳤다하며 붙들라하고 그런 형을 야고보가 붙들러갔습니다. 환경이 미친 사람 취급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성령이 없으면 알아볼수가 없습니다.
그어떤 자녀 부모라도 형제라도 알아볼수가 없습니다. 이 식구들은 예수님 생전에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나고보니 경륜이고 성령님이 도우셔서 구원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날마다 예수님께 형이 한게 뭐있어? 형이란 인간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상처를 입고 사는줄 알아? 형이 메시아면 다야? 우리 쌀이나 들여나봐 초막절에도 왜 숨어서해? 드러나봐 라면서 예수님이 언제는 메시아라고 하고 언제는 나타날때가 아니라하니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는 거라고 봤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안 돌보는 이기주의자라고 예수님을 욕했을 것입니다. 다른 말도 아닌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로 예수님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괴롭힘 당하셨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이게 다 믿는다고 하면 행위로 판단하니 그렇습니다.
가족들이 배척하고 미쳤다 해도 그것에 묵묵히 순종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실 때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돌보십니다. 성령님이 돌보시면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식구들이 미쳤다해도 슬퍼하지 마세요. 성령님이 돌보시면 됩니다.
야고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잖아요 그럼 이런 야고보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최후판결은 수제자인 베드로 가지고도 안되는게 있었습니다. 이때를 위해서 야고보를 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후 부활하시고 야고보개인을 딱 찝어서 심방하니 야보고가 한번에 변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때에 맞춘 하나님의 심방. 한번만 찾아가도 변합니다.
온 인류의 이방선교를 위한 법적판결을 야고보에게 맡겼습니다. 예수님의 어릴적을 함께 살아온메시아의 식구인겁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합니까? 유대인들은 그것을 부적처럼 여기기 때문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니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동생인게 대단한겁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선민의식은 때마다 무너지기가 어려웠습니다.
야고보가 너희들과 똑같앴다 예수님을 안믿고 미쳤다 했다. 그런데 주님이 만나주셔서 심방 한번 하셔서 변했다 심방한방이면 사람은 변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야고보를 보면 어떤 회의가 생산적인 결론을 이루려면 구성원 모두에게 공증된 의장겪인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처럼 야고보도 자랑할것이 없었기에 다들 이 세상에서 죄인일뿐인 것을 인식했기에 형제들아가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 한번밖에 안나오는 예루살렘 회의가 중요한것은 바로 인런점때문입니다. 그냥 회의를 민주적으로 했기때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견을 다양하게 듣고 이래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는 것만 논하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되니까 보이는것으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 미쳤다고 하는거잖아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닌것입니다. 정인이 같은 아이가 수도 없이 많이 죽어졌습니다. 낳아놓으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인간적인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랑은 비교가 안됩니다. 야고보를 심방하셨어요.
2) 같은 사랑으로 이방인을 심방하십니다.
나처럼 이방인들도 심방 한번 하시니까 구원받았다. 이게 하나님의 돌보심이라고 정리를 합니다.
여기서 돌보심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방문하시고 베푸신다는 구원의 전문 용어입니다. 애굽에서 탄식하던 돌보셔서 찾아가신 하나님이시고 절망가운데서 구원해주시는 엄청난 기사와 표적으로 너무나 따듯한 주님의 심방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이 따듯한 돌보심의 심방으로 시작됩니다.
방문하다는 뜻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우리의 목장은 기본이 출석체크인것입니다. 가장 기본이 출석체크입니다. 출석을 하시면 그 목장에 하나님이 심방을 하십니다. 그렇게 출석을 하면 수많은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애굽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내가 갈곳은 믿음의 땅 가나안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돌보신다는 것은 바로 시공을 초월해서 구원의 심방이고 돌아보고 방문하신다는 심방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듯하게 느껴집니까? 귀찮습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 부담되세요? 마음에 안든다고 톡방에서 나간적은 없나요?
3.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돈으로 돌보고 가는 수고를 해도 결국 말씀과 일치해야 하는겁니다. 돈으로 아무리 도와도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리해도 아무것 안하느니만 못하고 돈으로 하지 않아도 말씀이 일치하면 됩니다.
바벨론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왜 다윗의 장막이라 했을까요? 다윗의 장막을 왜 세운다고 했을까요?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이잖아요. 유대인중에도 안 믿는 사람 많잖아요. 이 유대인의 남은자와 모든 이방인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고 장막을 세운다고 하는 것 입니다.
유대인이 주인공이 되서 만국으로 기업을 얻게 한다고 하는건데, 야곱은 영적으로 해석했습니다.영적으로 보면 이방인 중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될거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하나님이 항상 이 모든일을 현재적으로 하신다는 일입니다. 이방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예전부터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변론이나 야고보의 형제들아 하면서 한 말이나 이 모든것들이 말씀에서 일치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눈높이를 맞춰서 유대인들에게도 구약성경 아모스를 인용했으니까 만족시켰고 이방인에게도 헬라인 성경으로 했으니까 야고보가 인용을 한게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구원이라는 건 이렇게 조심조심해야 하는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위해 이렇게 호호 불어가면서 돌보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기가 돌보심을 받았으니까 유대인을 돌보고 이방인을 돌보고 하는것입니다. 이렇게해서 나에게까지 성경이 오는 것입니다. 돌보심이 나게에까지 오는겁니다.
우리는 표적과 기사를 몰라도 돌봄을 받아도 몰라도 성경과 일치를 받는게 중요합니다. 간증체험도 놀랍지만 성경과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바나바와 바울, 야고보가 바로 이 말을 한한 것이 이것을 야고보가 750년전 구약성경의 야모스와 연결 시킨거죠. 그것은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다. 이 말입니다. 성령의 돌보심은 말씀이고 그것은 결국 인내입니다.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나요? 온라인 예배 모니터에 열려있는 화면은 몇 개인가요?
지금은 모릅니다. 옳고 그름으로 보면 지금은 모릅니다. 믿음은 한치앞을 내다 보는건데, 십년후를 내다보는건데 말입니다.
구원 때문에 눈높으를 마치고 심방을 해야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심방을 하고 돌봐야합니다. 성령의 심방으로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장나눔-
하나목자언니
[기도제목]
1. 이번주 학원에서 일할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수업을 할수있길
2. 못 본 친구들이나 오지 않은 친구들에게 따듯한 전화심방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할수있길
[나눔]
*1번적용질문
나는 눈치를 잘 안보는 사람이고 자기 확신에 가득차있는 사람이라서 인정이 되지 않으면 굽히지 않은 편이다. 옳다고 생각되고 잘못이 인정되면 바로 인정하는데 그 숙임 또한 내가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참 눈높이로 안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느낀게 이번주에 학원에서 조언을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지적을 받고 울었는데 잘 달래주지 않았었다. 주위사람들은 원래 지적받으면 우는 아이라 나를 이해는 했지만, 그때 내가 예민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쌀쌀맞게 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학생이 울면 어떻게 하지 라면서 위기 의식을 가지는 선생님들도 있을텐데 나는 내가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위기 의식이 없다. 이런다고 잘리지도 않을거고, 잘려도 내가 알아서 잘할거니까 상관없어라고 생각해서 정말 애들 눈높이에 맞추지 않는 것이 내가 옳다는 방식대로 하는 구나 싶어서 오늘 말씀을 보며 다음부터는 아이들을 대할 때 내가 기분이 다운되어있으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번적용질문
목자모임도 토요일에 정말 쉬고 싶은 생각이 들고 막상 가면 마을도 좋고 잘 나누고 은혜를 받지만 가기 전까진 정말 싫기 때문에 사실 못오는 친구들이 너무나 이해간다.
*3번적용질문
동생이랑 같이 예배를 보면서 모니터를 여러개 켜두지 않는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고 집중해서 보지만 다른 일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시작전에는 아예 덮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진
[기도제목]
1. 아빠랑 대화할때 썩어짐과 죽어짐을 마음에 담고 관계회복을 위해 인내할수있길
2. 모태신앙인 친구가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앙적인 조언을 할 수있길
3. 구속사적인 큐티를 할 수 있길
[나눔]
바울이 증거할수 있는 표적이 있는데도 입을 닫고 있던걸 들으면서 자기가 솔직하다고 팩트라고 해서 남에게 내 얘기를 주장하게 되는거라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아빠를 대하는 내 모습이 생각났다.
특히 아빠가 신학대학을 갔다와서 신앙이 아니라 신학으로 성경을 보다보니 대화가 잘 안되는게 있는데(예를들어 십일조) 아빠랑 똑같이 싸울게 아닌데, 그걸 참아야 했는데 못 참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것도 팩트로 얘기하지 말고 내가 참고, 논리정연하게 성령의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했으면 아빠가 받아들이기에 아랫사람이 투정부린다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을 거 같다 (아빠는 나를 자식이 아니라 아랫사람으로 대하는데 그걸 나는 싫어한다)
아빠가 꼭 우리들교회의 공동체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내가 교회목장에 등록하고 예배보고 커뮤니티에 속하는 걸 보면서 뭔가 놀란 것 같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있는거 같았다. 30년동안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았는데, 사실 엄마가 40일 작정기도를 하셨는데 20일째 내가 교회에 등록했고 이제는 나를 보며 아빠가 반응을 보이니 참 신기하다.
-목자언니 : 지금 말씀을 보면서 예진이가 그렇게 느낀걸로 너무 잘한 것 같고, 너무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도 아빠와 얘기를 하게 된다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빠와 얘기하면 좋을 것 같다.
아빠가 물론 지금은 교회에 대해 불신하시고 교회의 말씀을 신학으로만 보시고, 불신하시지만 부부목장와서 듣고 보다보면 우리들교회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수있고 이렇게 예진이가 증거한다면 언젠간 신앙이 회복되실 날이 오리라 믿는다.
경아
[기도제목]
1. 코로나 검사 결과가 가족 구원의 사건이 되길
2. 논문을 준비하는 상황에 눌리기보다 하나님을 묵상하며 마무리하는 한 주 되길
아름별
[기도제목]
1. 배우자에 대해서 기도로 준비하길, 그리고 믿음을 주시길기.
2. 하나님과 대화가 계속 유지 되서, 주님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수있길.
3. 직장동료와 가족과 친구들과 목장맴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길.
[나눔]
*회사에서 일하는 거 어떤지?
나쁘지 않다, 회사자체는 잘되고 있고, 만족하고 현장에 있을때보다 집에 있으니까 태평해지는것 같다. 근데 그게 편안하지는 않다. 지난 5년동안 이직을 4번했는데, 어떻게 하면 성장할까 좋은 포지션에 있을까? 마음대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어딜까를 항상 추구해서 노력했던 결과이다.
그래서 지금은 불평할게 별로 없지만 이게 나의 한계가 아닌데 뭘 해야 할까?라고 맴도는게 있는것같다.
저번주 교제하던 관계가 절단이 되니까 나의 가치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고, 자꾸 창업을 해야하나? 프리로 뭔가를 해야하나? 어느 방식으로든 나를 되찾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데 고민하다 보니 내가 하나님이 없어서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뭔가를 해야할 것 같았구나, 하나님안에서 안정을 찾는게 중요하겠구나란 생각을 깨달았고 그 후 안정을 찾았다.
직장면에서는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나? 어느부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나? 하나님이 주신 나의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나?를 고민하게 된다. 직장면에서 내 영역을 넓히면서 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고 현재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어서 숙제이고 기도제목이다.
-목자언니 : 뉴욕에서 혼자 치열하게 사는게 있을텐데 부모님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님이 케어 해주시고 시간도 많아지니 생각이 많아지는건 당연한 것 같다. 갑자기 얻어진 평화에 지금 현재 적응기인것같다. 나는 예전에 상담했을때 들었던 말이 사람이 항상 긴장해서 살수가 없다고 들었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 시간을 최대한 누렸으면 좋겠다. 뉴욕으로 돌아가면 또 치열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이걸 누리는데 집중하자.
-아름별 : 맞다. 기도의 힘을 믿고 편안하게 있겠고 기도하면서 내려놓게 된 게 있다.
-목자언니: 내가 왜 그럴까 고민하는게 너무 좋은 것 같다. 그런 고민을 안했으면 내가 왜이러는지도 모르고 불안했을텐데 고민을 했기에 결국 이렇게 깨달아진 것 같아 너무 잘한것같다.
*2번적용질문
지난주 뉴욕에 돌아가는것에 대해 걱정이 많다고 했을때 기도해보라 했는데 나는 그부분에 대해서 기도해볼 생각은 안 해봤는데 기도했더니 응답처럼 보스가 말이 없었고 4월에 돌아가도 될 것 같아서 현재는 좋다. 뉴욕과의 시차 때문에 밤낮이 바뀌었지만 목장하는 시간이 자고 있는 시간은 아니어서 다행인것같다. 목장이 일주일내내 너무너무 기대되는건 아니지만 와있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3번적용질문
오늘 예배는 핸드폰으로 봤습니다. 중간중간 움직이는게 있습니다.
다님
[기도제목]
1. 중등부아이들을 사랑으로 바라볼수있길, 아이들을 향해 감사함을 회복할수있길
2. 동생을 향한, 주위 지체들을 향해 형제의식으로 내 옳고그름의 눈높이가 아닌 구원의 눈높이로 맞출수있길
3. 지금의 가로막힌 환경에서 인내하며 말씀으로 잘 살아낼수있길. 한주간 성경의 돌보심으로 살아낼수있길
[나눔]
*1번적용질문
눈높이에 맞춰주는 척하면서 상대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하지만 그 기준이 구원이 아닌 내가 해준다. 맞춰준다의 교만이 많다.
*2번적용질문
코로나전에는 교회에 나가서 아침부터 중등부봉사를 하고 예배를 보고 목장을 하면 피곤하긴 했어도 그날 받은 은혜와 그 힘으로 수요예배나 주일까지 살아내면서 지금보다는 더 버텼는데 현재는 현장예배도 없고 중등부도 줌으로 하고 집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게으름과 나태함이 여전히 너무 많고 무기력함이 올라오고 목장해도 하루이틀이면 무너지기도 하면서 정말 잘 살아내기가 정말 힘든 것 같다. 그나마 목장이 있으니 버티는게 있어서 주일에 목장하는게 소중하다.
*3번적용질문
이번주에 맡고 있는 중등부친구중에 한 명이 집근처에 살아서 밖에서 만났던 일을 다시 생각했다. 이 친구는 정말 말이 없고 소심하고 친구관계에서상처도 있는 친구라서 가기 전에 단단히 큐티로 무장해야지 하며 기도로 구했고, 그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살려주셨는가 그저 전달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만 하면 되는구나를 깨닫고 나갔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모태신앙으로 예배보고 큐티하는건 자연스럽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고 그때 만난 후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아 그 후 결국 내 의가 많아서 안됐나고민했는데, 오늘 말씀을 들으며그 후에 고민한것조차 아 정말 내 의로움으로 내 영광을 위해 내 자랑을 위했다는것이인정이된다.
표적과 기사만 보는 유대인처럼 그것만 옳다 여기고 큰 변화가 아니면 열매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내 안의 욕심이고 그런 표적이 하나님이 해주시는 인정이라고 여기며 상대에 대한 구원보다 그저 일로써 바라보는 내 안의 죄가 너무 크다는 것이 깨달아진다.
정말 말씀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번의 심방이 성령의 심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인정이 된다.
-예진 : 저는 사실 중학교때 교회선생님 전화도 씹고, 만나자는 말에도 그냥 무시했기 때문에 중등부 친구가 그 자리에 나왔다는게 대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안나올수도 있는거고 요즘 춥고 코로나인데도 나온게 감사한 것 같습니다.
-목자언니 : 기본 자기 자신이 열심낸다는 것을 알면 계속 스스로 죽이는 열심인지 의인지 체크하기 때문에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해 못하는걸 억지로 이해하는 척하는 것보다 그렇게 말해준게 잘 한 것 같고 나중에 또 기회되면 내가 아직은 이런 면이 부족하고 주위에 비슷한 사람이 없어서 잘 이해는 안 가지만 그런 너를 좋아하고 이해해보도록 소통하자고 표현해봐도 좋을것같다. 그리고 중등부가 물론 너무 힘들지만 그 덕에 더욱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는 것이 은혜같다.
오늘 목장식구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들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것, 나와주는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어버렸던것이 깨달아진다. 앞으로 아이들이 고등학교 전까지 3년동안 사랑으로 보며 감사함을 회복할 수 있길 두고 기도해야 할 것 같다. 정말 목장에 나누길 잘했고 목장에서 내가 들어야 할 말을 들은 것 같고 위로도 너무 많이 받아서 너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