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0 성령의 의논
사도행전 15:5-11
예수님도 다들 의논했지만 빌라도 법정에서 일방적으로 사형으로 몰려서 십자가형을 당하셨죠. 세상에는 수많은 의논이 지금도 행해지죠. 그리고 이렇게 수준이 높을수록 억울한 의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더라고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억울한 거 풀어 달라는 옳고 그른 이런 의논보다는 그 기가 막힌 사건이 천하보다 귀한 구원이 되도록 성령의 의논을 해야 합니다.
1.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의논입니다. (5-6절)
지난주에 본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회중 앞에서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차별 받았던 베니게와 사마리아의 교회들은 크게 정말 메가로 기뻐했다고 했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크게 싫어했죠.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원어에 보면 부정 과거로 벌떡 일어났대요. 그래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들어볼 것도 없다며 바울의 선교 보고에 찬물을 끼얹졌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 내려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시도 없이 내려왔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를 받고자 올라왔는데 모교회의 회의에서는 할례만 아니라 모세의 법도 지켜야 한다고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아주 강경 기류가 내뿜어졌어요. 그래서 이 일어나가 원어에는 이 구절의 맨 첫 단어로 나와서 긴장감을 조성을 합니다. 이 유대인들도, 바리새파 중에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서 믿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 선교사들이 보고하는 놀라운 사역과 바리새파 신자들의 그럴듯한 주장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기막혔을까요? 그래서 6절에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답니다. 의논에도 죽이는 의논이 있고 살리는 의논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여서 의논할 수 있고 예루살렘 교회 사도와 장로들처럼 성도를 살리는 의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하늘의 언어를 쓰려니까 하늘가족 식구인 구원의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지 않으면 인내를 못해서 또 다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늘 의논을 해야 합니다.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을 대표하는 영적지도자인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맡깁니다. 물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도저히 결정할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뭘 했나요? 7절 앞에 보니까 많은 변론을 했다고 합니다. 앞서 2절에서 안디옥 교회에서도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을 벌였다고 했자나요. 그러니까 이제 같은 변론이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이 바리새파에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난거죠.
바울의 주장과 유대주의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할례주의자들의 생각이 사실 얼마나 잘못됐습니까? 그들의 편협한과 어리석음과 복음에 대한 몰이해를 보고 있으면 사실 울화통이 터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너무나 복음을 변질시키는 위험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파가 갈라졌자나요? 그런데 비난하는 분위기가 없는 거예요. 말을 제지하는 법도 없어요. 또 인격적 모욕을 주는 이도 없었어요. 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변론은 자기말로 이기려는 싸움이 아니라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상대와 진지하게 치열하게 의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말싸움과 달리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진리가 목적입니다.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면 사람을 살릴 수 없어요. 그러나 성령의 의논은 진리가 목적이므로 그 진리가 결국 사람을 살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걸리고 인내를 해야죠. 목적이 진리에 있으니 서로 잘 물을 뿐만 아니라 잘 듣습니다. 그러니까 결혼도 목적이 진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해야 돼요. 교회도 그런 사람끼리 모이면 너무나 잘 묻고 잘 듣는 거예요.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잘 들으려 했으니 많은 변론이 있었겠죠. 각자 자기 주장만 하고 듣지 않았다면 변론은 금세 끝났을 것입니다. 물론 답도 찾을 수 없었겠죠. 기분만 상했겠죠. 적어도 듣는 마음을 가졌기에 많은 변론을 거쳐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사람을 살리는 의논을 합니까? 사람을 죽이는 의논을 합니까? 직장과 가정과 목장에서 말이죠. 그리고 잘 듣습니까? 지시하고 명령합니까?
2. 형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7절)
이제 많은 변론이 끝난 후에 베드로가 비로소 일어나 자기 말을 합니다. 6세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일어나 말하되 했는데 여러분도 이렇게 성령으로 일어나는 게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일어나 처음 한 말이 형제들아. 어떻게 이렇게 싸우면서 형제들아 그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바리새인들도 바울도 모두 주님이 피 값을 치르시고 죽어 주신 형제들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나쁠 수도 있고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가 또 구속사를 생각해 보는 거예요. 베드로는 워낙 훌륭하고 수석 사도라서 잘 듣고 그래서 훌륭한 걸 도출해냈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 같지 못하자나요? 그러면 베드로가 믿음이 워낙 훌륭해서 이렇게 형제들아 그러고 얘기를 했겠습니까? 우리가 사도행전 읽어 왔자나요? 얼마전에 12장 읽었어요. 옥에 갇혔는데 간절히 기도한 성도들이 베드로가 막상 나왔다고 하니까 미쳤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감옥문은 열렸는데 교회문이 안 열렸어요. 그러니까 이 때 촛대를 옮기실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13장에 안디옥 교회가 나오고 여기에 바울의 체험과 구속사의 믿음 시대로 촛대를 옮기십니다. 한 번 촛대가 옮겨지면 참 그 사역은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후로 베드로가 사라졌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2장에서 안디옥에 잠깐 나타났습니다. 이 때가 언젠가 하면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 바로 예루살렘 총회 전후로 봅니다. 그래서 11절부터 14절까지 보면, 바울이 막 그냥 지금 호통을 치는, 베드로를 야단쳤어요. 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오자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였고, 그로인하여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 게다가 바나바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한 데 대하여 책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고넬료 사건을 겪은 베드로가 여전히 율법과 할례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고 두려워하여서 외식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생각보다 너무 깊었어요.
자 안디옥에서는 잘 가르쳤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 루스드라, 더베, 이고니온, 이 교회들은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자 마자 이단에 빠졌어요. 그래서 통렬하게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1절, 3절). 총회 이전이든지 이후든지 베드로가 외식한 것은 그러므로 바울에게로 촛불을 옮길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훌륭한 것은 이 때의 사건을 권위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이 책망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제자 맞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최후의 장렬한 변론을 하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베드로가 꺼낸 첫마디가 형제들아 이 얘기는 내가 너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별 인생이 없다. 나에게도 고정관념이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고넬료가 이방인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았는데도 여전히 유대인 앞에서 이방인과 밥 먹다가 두려워서 도망갔다는 것이예요. 여기서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가 미완료로 그 당시에 계속 반복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들이 지금 할례, 율법 외치는데 나도 당신들하고 똑같았다. 나도 그랬다. 이렇게 베드로가 지금 간증하면서 형제들아 나도 그랬다. 어쨌든 이렇게 회개는 했어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것이 실수도 너무 잦으면 촛불을 옮기실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은 너희도 알거니와, 내가 알거니와가 아니예요. 베드로가 수석사도로서 내가 변론을 다 들어봤더니 내가 결론을 좀 내리겠어. 이래도 누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을 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아요. 주 안에서 형제인 지체들, 서로 논쟁하고 있는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며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 사실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호소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너희가 알고 있는 사실이 뭔가요? 베드로를 선택해서 제일 먼저 이방인에게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이죠. 바로 로마군의 백부장 고넬료의 일을 말합니다. 그건 뭔가요? 같은 환상을 세번이나 반복하시면서 짐승을 내려오게 해서 먹으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못 먹습니다. 먹으라, 아니요, 먹으라, 아니요. 그러니까 부정한데 그걸 어떻게 먹냐? 그래서 베드로를 이렇게 고넬료의 집에 보내신 일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할례자들, 즉 유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성도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어떻게 사도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나요? 그러면서 비난을 했죠. 그때 베드로는 그 있었던 일, 모든 일을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을 해서 성령의 설득으로 이해를 시켜야만 했습니다. 고넬료의 한 가정이 성도가 된 것으로도 이렇게 거부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인데 자기들보다 훨씬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교회로 들어왔다고 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율법과 할례를 주장했을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가 지금 일반 성도도 아니고 사도와 장로들인데도 여전히 율법을 앞세우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베드로는 믿음이 약한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과거 고넬료 사건 때 이미 받아들인 이방인의 구원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한 게 얼마나 능력인지 몰라요. 의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옳고 당신을 틀렸다 뭐 그런 일이, 선악과 먹고 죄가 들어와서 인간들이 하는 일이 맨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예요. 그런 마음으로 아무리 의논해도 살리는 답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도 당신과 같았다., 나 당신하고 똑같아. 그러면서 간증을 하며 주 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성령의 의논이 돼서 구원으로 인도되는 거예요.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 몫이라면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어떤 범죄자도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죠. 베드로도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죄인이고, 바울도 스데반을 죽인 죄인이고 이런 얘기를 하면서 늘 형제 의식을 가질 때 의논이 되는 거예요. 맞아요. 우리는 모두 이 지구상 어떤 사람도 한 형제인 거예요. 우리는 다 같이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형제인 거예요.
무엇이든지 아시타비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하면 집이고 교회고 나라고 살리는 의논이 되지를 않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모두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형제 의식이 얼마나 있습니까?
3. 하나님이 답이십니다. (8-11절)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변론이나 논쟁의 답은 증인이나 증거로 결정이 되자나요? 그러니까 법정에서 증인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따라서 베드로도 여기서 증인을 제시하는데요. 그 증인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증언하셨다는 거예요. 여기서 부정 과거를 써서 이거는 기정 사실이라는 거죠.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하셨는데, 자 그러면 무엇을 증언하셨다고 합니까? 이방인도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거예요.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셨다는 것이죠.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올라와 보고한 내용에 대해 우리가 지금 왈가왈부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증언을 하셨습니까?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어요. 고넬료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죠. 11장에 나오죠? 오순절 성령강림과 똑 같은 일이 이방인의 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할례파든 바리새파든 율법주의자든 그들의 이론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성령의 증거로 하나님이 증언하신 일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증언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이방인과 율법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얘기하죠.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그러자나요. 사람의 속 마음을 보시기에 겉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는 것이, 겸손한 척, 믿음 있는 척 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요구하는 바리새파 형제들은 겉으로는 의롭게 보입니다. 전통과 민족을 사랑하는 막 애국자 같아요. 종교적으로는 더 거룩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준수가 인간이 능히 질 수 있는 멍에인 거예요.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는 수치나 고난이 아니라 특권이나 자랑이었어요. 육법전서 보듯이 성경을 좔좔좔좔 외우는 거예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기 확신이 충만합니다. 신명기 6장도 율법을 미간에, 문설주에 다 그거 다 해놓고 나는 이제 모든 걸 할 수 있다 인생의 답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교회를 다니지만 굳이 답을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어요. 그러나 바울이나 베드로는 인간이 스스로 절대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니 그들은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로 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해요. 자기 안에 답이 있을 수 없음을 봅니다. 주제 파악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답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다가 얼마나 불신앙의 말인 것을 아시겠죠? 물론 주 안에서는 주님이 하시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여러분들이 분별을 잘 못하더라고요.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알라고 주시는 거예요.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주시고 성경을 주시고 그걸 지키기 위한 613가지 율법이 또 있자나요. 일간은 절대 그거 못 지켜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너희도 못 지키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9장 25절, 26절을 보면,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치 못하면 할례를 받거나 안 받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도 못 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만 지키면 니가 구원받는다 이런 얘가 뭐가 있을까요? 씻을 수 없는 죄를 졌어요. 사람들에게 나서기도 싫어요. 그 사람을 용서하기도 싫어요. 그런데 생각만 하면 상처가 올라와요. 쓴뿌리가 올라와요. 그런데 절대로 용서는 못하겠어요. 이럴 때 금식만 하면, 할례만 받으면 내 죄와 상관없이 너 혼자 구원받는다. 이거 얼마나 매력 있습니까? 상처와 쓴뿌리를 다 귀신이라고 그러고 귀신만 내쫓으면 된다고 하고 그러니까, 너무 열심히 그것도 그러니까 결국은 에고인 거죠. 이기적인 거죠. 나를 위한 것이죠. 그러니까 그 열심이, 이단의 열심이 진짜 무섭습니다. 그 열심히 모든 구원을 삼켜버려요. 그래서 특징이 원칙을 안 지킵니다. 그리고 내 병만 낫는다면 물불을 안 가리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얘기를 유대인들하고 아무리 변론을 벌여도 정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이 열광하면서 몰려드는 거예요. 이단일수록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는 거예요. 교주를 위해 무거운 멍에를 당연하다는 듯 다 짊어집니다. 이단도 병고침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메시아가 났어요. 그러니까 막 자살테러도 합니다.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멍에를 질 때에 부적같이 종교적 효험이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이 무서운 몸에 할례를 하면 거기에 부적 효과가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종교 심리는 부패해 있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적이에요.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인간이 영적이라는 것이 완전히 잘못된 종교의 거짓으로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다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큐티도 좋지만 남을 죽이는 열심이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도 좋지만 남을 죽이는 열심이 되면 안 되는 거죠. 살리는 의논이 되야 되는 거죠. 끊임없이 말씀을 보면서 인내를 해야 되는데 이걸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것이 거짓의 영이자나요. 유대교가 그러했고, 또 중세의 타락한 로마 카톨릭이 그랬어요. 오늘날 이단들이 그러합니다. 교회에도 이런 거짓들이 들어와 있어요.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지 말아야 하는데 인간이 100%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리 오뚝이를 눕혀 놔도 다시 제자리로 딱 돌아와서 가는 게 기복인 거예요. 본능이 기복이기 때문에, 나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러나 눌려 있어요. 참 자유가 없는 거예요. 참 복음은 참 자유를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인 거예요. 그럼 그럴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평강이냐 좁은 길에, 아니 어떻게 바울이 돌에 맞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무슨 평강이 있겠어요? 그러나 그거보다 한 가지 더 좋은 기쁨을 주세요. 하나 더 좋은 거 있어서 그 길을 가는 거예요.
(11절) 이게 교회의 신앙 고백인 거예요.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습니다. 말로는 쉬운 것 같은데 이것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일이 참 잘 되지 않아요.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기 모습이 보이기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번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다 나눠보라고 했지만 입으로만 확신이 있다고 하는 분도 많이 계실 거예요. 그러나 참 이게 쉽지 않았어요. 인생의 여러 고난을 통하여 처절한 회개로 돌이켜야 하나님만이 답이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모든 게 잘 먹고 잘 사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답이겠어요. 내가 답인 것이지. 그러니까 이 땅은 모든 환경을 세팅해서 하나님이 답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최고의 환경인 거예요. 여러분들의 아픔과 가난과 질병을 주님이 모르겠어요? 거기에서 하나 더 기쁜 기쁨 그 병의 나음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줄 믿노라 이런 신앙 고백이 되셔야, 그러니까 이게 안되니까 목장에서 성령의 의논을 올해 일년 내내 또 하셔야 되는 거죠. 혼자서는 안되는 거예요.
[적용] 가정에서 내 말이 답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생의 답이심이 얼마나 인정이 되십니까? 집에서 답이다하는 사람은 아빠입니까? 엄마입니까? 자녀입니까? 부모입니까?
기도제목
보련
날씨의 영향을 받는데 하루를 따뜻하고 건강하게 잘 살도록
직장 원서 잘 넣도록
생활예배 잘 드리기
상담 잘 다녀오고 약 잘 챙겨 먹기
아버지와 병원 가서 검진 받도록
지화
돌반성 난청 치료 받고 예배와 목장 나눔이 전처럼 들릴 수 있도록
가족들 구원 위해 나의 예배가 회복 되도록
다인
재택근무 하면서 큐티하는 시간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합니다. 우선순위를 잘 지키도록
가족 영육 구원 위해
예선
상담 잘 다녀오고 성령의 의논으로 잘 나누기
폭설에 갇힌 이후 불안이 올라오는데 기도하기
생활예배 잘 드리기
회사에서 성령의 수행원 하도록
현경
나의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성령의 의논하며 갈 수 있는 용기 주시도록
아픈 마음에 성령님 오셔서 위로 하시고 전인격적인 예수님 만나도록
은우
하나님이 답인 것 알고 진행하는 프로젝트 보호 받고 잘 마무리 되도록
붙여 주신 지체들 형제의 사랑으로 기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