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3, '성령의 구원', 김양재 담임목사님 (행 15:1-5)
2021년 우리에게 화두로 주어지는 주제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는 다르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의와 희락과 화평이다. 이것을 누리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그런데 성령님이 이것을 효과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누릴 자가 없다. 오늘은 성령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1.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1절
왜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칠까?
여기는 안디옥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1년간 가르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교회이다. 그래서 아가보 선지자가 흉년의 예언을 해도 잘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까지 한 건강한 교회이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를 비우고 1차 선교 전도를 다녀온 사이에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빠졌다. 그들은 24절에 보면 야고보 사도가 보낸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5절에 보면 유대로부터 내려온 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였다가 개종한 사람들로 보인다. 그래서 개종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대의 전통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유포하는 것이다.
근데 초신자가 많은 안디옥 교회는 율법을 꿰고 있는 그들이 위대해 보인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디옥 이후에 갈라디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도회에서 시키지도 가결되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에게 전도해서 엄청나게 부흥했다는 소문을 듣고 500km나 되는 길을 달려왔다. 한달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 긴 여정이다. 굉장한 열심이다. 이것이 무슨 열심일까? 자기들의 자랑인 율법을 가르칠 대상을 만난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똑같이 다 안다. 그러니 새로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자기 열심이 맞다. 열심히인 사람이 믿기 힘든 것 같다. 그들의 특징은 공개적이지 않고 음성적이다. 그래서 피해가 컸다. 바울은 이들을 갈라디아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로 지칭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며 한번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부지런하고 열성적으로 가르치니 안디옥 교회 중 구원이 흔들린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한편 신학적으로 사도 시대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성취가 신학교회의 태동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신학은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과도기에 있었다. 근데 본래 유대인 출신들로만 구성된 초기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아직 이스라엘 선민사상과 구약 율법 조항에 얽매여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안디옥 교회도 이방인이 쏟아져 오니, 선민의식이 누구보다 하늘을 찌르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의 유입이 교회의 순수성과 윤리적 기준을 저해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도 맞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자신들은 이처럼 수고해서 율법을 지키며 할례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속 문화를 마음껏 누리다 회심한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동일한 구원을 받으면 너무 손해 아닌가 했던 것이다.
다들 실컷 죄짓다가 회개하고 천국 가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많다. 근데 그렇게 되는건 정말 어렵다. 누구는 경건하게 살아도 구원을 못 받고 누구는 죄만 짓다 구원 받으면 너무 속상하다.
한 기독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눈살 찌푸릴 행동을 하니 그 반의 어머니들이 다같이 그 아이를 내보내라고, 여기는 수준 있고 예수 믿는 착한 아이만 있어야 한다고, 우리 아이들이 그 아이를 보고 배우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다. 선민의식이 대단하다. 끼리끼리이다. 마찬가지로 큐티인에 솔직한 세대별 간증을 보고 아이들이 닮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큐티인 쓰는 것을 어려워한다 사람도 보았다. 정말 눈 가리고 아웅이다.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친 주동자이고 교회를 잔멸했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이 맞겠냐고 하는 것과같다. 교인들은 초신자라서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것 밖에 모르는데, 죄라고는 모르는 경건한 사람이 성경을 외우며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쓰며 경건하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너무 멋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안디옥 교회는 구레네 시몬, 종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멋있는 사람이 오니 헷갈리는 것이다. 교회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복음에 넘어가지 않겠는가? 안디옥 교인들도 영접기도 다 따라하고 바울 복음에 은혜 받았던 사람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를 세상사람들은 지금도 잘 모른다.
예루살렘 교회도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는 그 전통이 대단하다. 근데 처음 교회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들으니 대단한 것이다. 그 사람이 가르쳐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한 전통이 너무 중요하니 이 사람들이 할례를 주장한다. 그 아픈 것을 겪어야 이 조직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할례가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근데 이 사람들이 할례를 안 한다고 한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방인이라서 모른다. 근데 유대교에 있었으면서 기독교가 된 이 사람들은 자기들도 할례를 안할 수 있나 싶고 이상하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용납 안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떠나니 할례는 해야 한다고 대시 생각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팔복의 길이 굉장히 좁은길이다. 오뚜기가 금세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합리화를 시킨다.
천주교에서도 망자를 위한 미사, 연옥설 등을 어려서부터 들었기에 이상하지 않다. 구원에 있어 신인협력설을 가르치니 맞다고 생각한다. 행위구원으로 자연히 흘러간다. 구원에 인간의 노력이 들어간다. 그래서 매 주일 미사를 드려도 천국의 확신을 물어보면 다들 천국 갈 자신이 없다고 하며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안디옥 교인도 우리도 구원받았냐 하면 그렇다 한다. 그러나 진짜 확신 있냐고 하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가겠냐고 한다. 영접기도 다 따라했는데 왜 그러겠는가? 오뚜기처럼 돌아온다.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행위가 따라주지 않는다. 교회를 나와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 가나, 내가 돈도 남자도 여자도 좋아하는데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다가 노력해서 천국가야죠, 차차 갈수 있는 거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안디옥 교인들은 믿는다. 근데 확신이 흔들린다. 근데 그에 비해 유대인들은 믿음은 없으나 확신이 충천하다. 이를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르침 받을 때는 확실한 것 같았는데 배운 연도가 너무 짧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는 이방인들만 많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흔들렸다. 그래서 우리도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봐야겠다 싶었다. 우리들 성도들도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자가 많은데 흔들리는 분은 없는가? 여러분이 가르쳐야 하는데 도리어 가르침 받고 있는 이단 같은 사람이 없는가? 유대인 같은 사람이 없는가? 성령으로 분명 시작했는데 육체로 마치려는 분 없는가?
사람은 기복이 본능이다. 그래서 유대교도 아브라함의 구속사로 시작했는데 시기마다 변질되는 것이다. 1차 전도하고 왔던 갈라디아 교회도 바울이 떠나자마자 이단에 빠졌다. 요란케 하는 다른 복음에 빠졌다. 왜냐하면 사람은 작심삼일이다. 자꾸 흘러떠내려간다. 근데 이것이 계속 좁은 길로 가라고 하는데 지겹다. 근데 유대인처럼 와서 할례만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 그 할례 하나 왜 못받겠는가? 그러면 합격 성공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 빠진다. 요란케 하는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이 좁은 길이지만 진짜다.
적용)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결혼과 교제도 안되고 직장에서도 잘 되는 것 없는데도 헛것이라 말하는데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나?
평생 천주교 다니셨던 내외분께 복음제시를 한 이야기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이 생기면
2. 말이 아닌 삶의 변론을 해야 합니다.
2절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인본적인 가르침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다툼이란 맞서 일어나 대항하는 것이고 변론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양보할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정체성을 흔드는 문제였다. 근데 예루살렘교회도 아니고 안디옥 교회에서도 할례를 찬성하는 파와 반대파로 파당과 분쟁이 일어났다. 적지 않은 다툼이라는 것은 수적으로도 기간적으로도 오래 지속되었고 정도에 있어서도 격렬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맨 끝에는 항상 돈이 있다고 했다. 맨 끝에는 폭동과 비슷한 소요가 일어났다.
바울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1차 전도여행 후 쉬어야 하는데 이것이 왠 날벼락인가 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며 이 길이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한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후에 갈라디아서를 썼다고 한다. 그 때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는 예수로 인해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다. 천사가 와서 증거할지라도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강력하게 썼다. 왜냐면 이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에도 갔기 때문이다. 이단들이 부흥하는 교회면 500km도 마다하고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들을 찾아가서 전도하는데, 이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도해놓으면 거기가서 훼방을 놓고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고 했다. 이단이 하려는 것과 똑같다. 교회도 그런 곳이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첫 종교회의가 열린 것이다.
복음을 위해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근데 개인이 와서 떠들면 안믿을텐데, 진짜도 아니지만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했다고 하니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500km를 가서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안디옥교회를 포함한 모든 지역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로써 특별한 권위를 가졌다. 그 첫번째 교회이자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양육해준 그 대단한 사도들과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 지위는 안디옥교회가 아무리 성장하고 이방선교를 많이 한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가르칠 때 그 권위를 거스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근데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빌립보서에서도 보면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고, 사도행전에 보면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하고,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수제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여러 동족 중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해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하며 인본적인 율법 준수에서 그야말로 원탑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한 것이다. 예전에 딱 이생각으로 교회를 핍박하여 스데반을 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말로 논쟁했다는 그 말은 없다. 왜냐하면 바리새적 가치관에 대한 바울의 변화된 태도 자체가 너무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때 구원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로 하는 논쟁은 대부분 온전한 결론을 낼 수 없다. 진영논리도 결론을 낼 수 없다. 한쪽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러니 인류가 수천년 동안 붙들고 씨름하던 많은 철학적 문제들-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결정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논쟁은 보잘것이 없다. 사람의 말에서 답을 구하니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늘 방황한다. 방황을 멈추게 할 답은 말이 아닌 변화된 삶이다. 말로 가르치기만 해서는 설득하지 못한다.
17년이 지난 지금 한때 율법주의에 미쳐서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이제 교회를 위해 율법주의에 맞서 변론하고 있는 그 변화된 모습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변화가 도대체 가능하게 했을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 전환점이 되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이어진 배척과 무시, 광야의 훈련, 시기와 배신을 겪을 때 마다 구원의 확신을 보여주며 삶으로 변론이 되어가며 점점 성령의 완수를 해가는 바울이 된 것이다. 그 환란가운데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니 옛사람의 가치관을 조금씩 더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오픈하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는가? 그건 아니다. 자기 믿음만큼 보인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통해 옛사람의 가치관을 조금씩 버리게 될 때 환란이 주제가 되고 말씀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의 스승이 되어 성령의 변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고난과 광야를 깨달을 수도, 인본적인 가치관을 깨달을 수도 없으니 모든 사건에 맞서 변론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기 죄를 철저히 깨닫고 거기서 돌이켜야 각자 사로잡혀있는 바리새적인 가치관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이 올 때마다 사건을 묵상하니 두려운데, 아까 간증해 주신 것 처럼 딸의 사건에서 사건만 묵상하니 딸이 도리어 말씀을 묵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론이 치열했다.
이 오랜 변론을 듣고 있던 안디옥의 제자들이 어떻게 했는가? 바울과 바나바가 자기들의 지도자이니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을 거부할 수 있지 않는가? 근데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로 편가르기로 하지 않고 윗질서인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묻기로 결정한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외적인 규모나 재정으로 판단했다면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를 이미 넘어섰다. 하지만 안디옥교회는 외적인 조건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맡긴다. 바울과 바나바가 잘 들은 것 처럼 안디옥의 성도들은 잘 들은 것이다. 지도자가 잘 들으면 성도들이 잘 묻는다. 흥왕하는 말씀으로 양육 받은 결과이다.
바울 복음은 전세계가 인정하는 복음이지만 바울과 바나바도 자기주장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안디옥 교회를 떠났다. 그러니 거기 담임목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변화된 삶으로 변론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삶의 변론으로 나타나야 한다.
저도 맨 처음에 큐티 하는데 사람들이 변했다. 근데 다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근데 이것이 말로 변론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와서 이혼 안하고 자살 안하고 부도나도 기쁘게 다녔다. 근데 큐티 안하면 도로 다 돌아갔다. 그래서 제가 아무도 안되면 큐티모임 끝내야겠다 생각했는데 계속 살아나는 사람이 오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삶으로 구원의 변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여러 성도여러분들의 삶으로 변론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도 변론되어야 할 줄 믿는다.
적용) 가정 회사 사회에서 내 변론은 말의 변론인가 변화된 삶의 변론인가? 인본적인 가치관에 맞출 수 있기 위해 내가 당해야 할, 당하고 있는 배척과 무시 광야의 훈련 시기와 배신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삶의 변론에 꼭 필요한 일들이다. 내가 왜 이걸 당하나가 아니라 거기서 성령의 구원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구원은 구원의 확신으로 삶의 변론을 하게 되면
3.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허락하십니다.
3절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가는 길에 두로 시돈 베니게 사마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들렀다. 근데 베니게는 예부터 세속적 대표문화중심지이고 사마리아는 앗수르와의 혼혈로 이방보다 더 무시한 곳이다. 그 무시받았던 지역에 스데반 사건 때 흩어져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여기를 바울과 바나바가 가면서 1차선교여행때 보고했더니 모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왜 그런가? 스스로 이방인처럼 차별 받고 그 처지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 은혜를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함께 크게 기뻐한 이 성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얼마나 크게 기뻐했는지 원어에 사용된 단어는 영어의 100만에 해당하는 어원이 되는 단어였다. 백만송이 장미인 것이다.
저는 구원 때문에 함께 애통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지체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고 이런 목장이 우리의 구원공동체임을 믿는다. 별 인생 별 기쁨도 없다. 새해가 되어 목장이 새롭게 시작되는데 코로나로 슬픈 상황에서도 목장에 큰 기쁨을 얻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아무리 말씀 들어도 공동체가 없으니 믿음이 안 생기고 구원이 안 생긴다. 근데 혼자서 주일예배 아무리 들어도 깨지지 않는다. 목장이 잘나서가 아니라 목장에 묻고자 하는 태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다. 다 이상한 사람만 모였는데 물어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겠는가? 그 물어보는 한 사람 때문에 목장이 살아나는 것이다. 공동체 없는 믿음은 헛깨비이다.
적용) 구원의 증언을 들을 때 크게 기쁩니까?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판단합니까?
이것이 여러분들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바로미터이다. 내가 공동체에서 어떤 마음으로 간증을 듣고 목장 모임을 사모하는가 아닌가 이다.
그래서 결론은
4. 구원의 결론은 인내입니다.
4절
3절에서 베니게와 사마리아 성도들이 너무 기뻐했는데 4절에 와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바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셔서 이 전도를 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랬더니
5절
이단 같은 사람 외에 예루살렘 본 교회에서 온 사람이 일어나서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얼마나 마음이 녹았겠는가? 예루살렘교회는 모교회지만 구원받고 나서는 계속 적대적이고 발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17년이 지나고 이방선교의 공을 혁혁히 세우고 갔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인 모 교회였다. 구원의 열매가 있으니 예루살렘교회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한다. 그러니 이 길, 구원의 길이 힘든 길이다. 여러분도 같이 힘든 길을 가셔야 한다.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너무 짧다. 별 인생이 없다.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다. 루스드라에서도 돌로 칠 때 툭툭 털고 일어났듯이 이곳에서도 바울은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의 스데반 사건은 일생을 따라다니며 바울을 겸손케 했다.
바울처럼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공동체의 힘으로 계속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격을 인내하며 받아내며 설득해야 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길이다. 구원 때문에 참아야 할 일이 계속되는 것이 2020년의 결론이다. 성령의 구원의 결론은 인내이다. 확신을 가지고 삶의 변론을 할 때 힘든데도 기뻐하는 공동체를 주셔서 참게 해주시는 것이다. 좋은 남편 좋은 자식 이런 것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다.
적용) 영육간에 인내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87세 석학 이어령 교수님은 췌장암 겪으며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그런데 딱 하나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눈물이다. 코로나라는 주술에서 벗어날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 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대한민국만 해도 적폐청산으로 전염병 남북 문제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으나 독재를 이기는 것은 주먹이 아니라 보자기였듯이 우리에게는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절실하다. 눈물 없는 자유와 평등이 인류의 문명을 초토화 시켰다고 본다. 오늘의 재앙을 끝내는 길, 몸과 더불어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한 방울이다. 지식인들이 외치는 백마디 말이 트로트 한곡이 주는 위로를 당하지 못한다. 무대 위 가수의 노래를 듣고 우는 객석의 청중을 보고 시청자들이 다시 운다. 그만큼 요즘 트로트 한곡이 주는 위로가 대단하다.
그러나 타인을 위한 눈물을 어찌 악하고 음란한 인간이 흘릴 수 있겠는가? 이 눈물은 구원 때문에 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 흘린 사람은 바울처럼 광야가 많은 사람이다. 자신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아니까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바울에게도 공동체가 있듯이 함께하는 삶이다. 이런 구원을 위한 구원의 눈물을 흘리는 2021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적용) 여러분은 구원 때문에 우십니까 자기 연민 때문에 우십니까?
눈물도 이타적인 눈물이 있고 이기적인 눈물이 있다. 이기적이라도 눈물 흘리다가 이타적이 될 수 있으니 올해는 모든 성도들이 눈물 한방울의 은혜를 사모했으면 좋겠다.
말씀맺음
성령의 구원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말로 할 수 없다. 믿어야 이해되는 것이지 이해되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도 삶의 변론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론으로 해야한다. 진실은 통하니 진실한 변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주실 수 밖에 없다. 나는 구원받았고 성경 아는데 공동체가 없는 것은 가짜이다. 하나님이 왜 공동체를 주셨겠는가? 구원을 검증하고 구원이 자라가고 견인되라고 하는 것이다. 좋은 공동체 나쁜 공동체 없다. 구원받은 사람은 거기를 전염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상한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 알게 해 주시기에 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공동체 없이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결론은 인내이다.
[기도제목]
* 이지현
1. 말로 끝나는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지루하고 귀찮은 일상을 반복함으로 구원을 보일 수 있도록
2. 구원을 함께 기뻐하고 서로 묻기를 자처하는 우리 목장이 되도록
3. 새해 건강을 사명으로 놓고 가도록
* 김교희
1. 엄마와 동생에게 말이 아닌 삶으로 변론하고 인내하도록
2. 생활예배 잘 드리기
3. 새로운 업무 잘 시작하고 시간의 경계를 잘 지킬 수 있도록
4. 다시 올라오는 허무와 우울함 잘 들여다보고 하나님께 내놓고 가도록
* 류가영
1. 1월 6일 청주에서 서울 이사를 했는데, 영육간 강건에 힘 주시기를
2.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처럼, 전출한 직장과 새 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도해주시기를
3. 21년 새해기도제목 잘 중수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