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8일, '성령의 구속사', 김양재 담임목사님 (행 13:14-23)
성령의 동행으로 알아야 할 것은 구속사이다. 이 때의 구속사는 지식으로만 아는 구속사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님이 임하셔서 깨달아지는 구속사이다. 날마다 말씀드리는 구속사이지만 여전히 모르는 사람은 안 들린다. 성령의 동행은 성령의 구속사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오늘은 성령의 구속사에 대해 알아보자
1. 준비된 자의 권할 말입니다.
14-16절
버가에서 요한의 문제로 고생한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다. 쉬지 않고 교회에 도착한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회당에 앉았다. 무조건 회당부터 찾은 바울의 열정을 보면 아프다고 쉴 수 없었던 것 같다. 유대인은 지금도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율법과 글을 읽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읽고 나서 누군가 잠시 그 말씀에 대해 말하는 기회를 준다. 형제들아 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것은 이것은 바울을 성경을 가르치는 자 정도로 본 것 같다.
권할 말은 권면 혹은 위로의 말이다. 이 둘을 좋아해서 설교해야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며 소망을 천국에 둘 수 있게 된다. 이런 말씀을 손짓하며 전했다고 한다. 아마도 회중이 웅성거렸던 것 같다. 손들어서 조용시켰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왜 웅성거렸을까? 병색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병색이라는 말을 안한 것은 마가요한이 상처받을 까봐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여튼 손짓 발짓 했다는 것은 자기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음 안식일이 오기까지 기다리려면 일주일을 또 기다려야 하지 때문이다.
회당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도 있었다. 이런 표현은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쓰였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회당에서는 정통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들이 같이 있는 것이다.
이들 보고 들으라 한다. 왜 그러는가? 이들에게 율법이 교리가 되어 구약의 하나님밖에 모르기에 그렇다. 바울도 회심 전에 거기밖에 몰랐다. 그래서 바울도 너무 경건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나 교회를 잔멸했다. 심지어 초대교회의 같은 편인 마가도 아픈 바울을 떠나면서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자신은 경건하다는 것이다. 교회를 잔멸하던 바울이 틀렸다고 하며 떠났다. 바울의 회심을 보고 듣고 알면서도 자기 일이 닥치니 안면몰수하고 떠났다. 이 모든 사람들을 바울이 너무 잘 안다.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도 준비되어 권할 말이 있는 인생이 되었다. 상처가 약재료가 되었다. 어떤 사람도 소화되어 해줄 말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의 설교는 간증이고 진리가 되어 그들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당장들은 율법이 교리가 되어 여전히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십일조 하라고 가르치기만 한다. 똑같은 이야기 하는 것 같으나 한쪽에서는 율법이 교리가 되고 한쪽에서는 진리가 된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해야 이것을 구별할 수 있다.
바울의 이 설교는 구속사적 핵심이고 이것은 2000년 동안 온 인류가 들어야 할 설교가 되었다. 항상 우리에게 올 한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하려고 설교한 것 아니다. 그러나 구약을 꿰고 있었기에 그들이 좋아하고 친근하게 여기고 긍지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로 시작했다. 왜냐하면 자기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다.
저도 경건하고 교양있어서 시댁교회에서는 한마디도 안하고 다녔기에 지금도 아무도 못 알아본다. 그러던 저도 정오의 빛처럼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이 저를 덤으로 살게 하셨기에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준비된 자로 간증하고 살리신 말씀을 전한다. 당해 보니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적용) 여러분에게 주어진 한번의 기회가 마지막이다 하고 전한 것이 있습니까? 회사에서나 친척가운데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습니까?
2. 구속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41절까지의 이 설교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울의 3대 설교 중 하나이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뤘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과 손으로 지은 성전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유대인의 죄를 지적했다. 사도바울은 우리 조상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유대인의 죄 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줄곧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며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했다. 근데 스데반의 설교 한번으로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 근데 바울에게는 역설적이게도 그 한번의 설교로 인해 평생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수 있게 해주셨기에 설교 한번이 천하를 바꿀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 설교로 전세계에 바울 복음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까짓 한번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달라졌다. 그러니 싫어해도 복음은 전해야 한다. 이것이 증거이다.
17절
압축된 설교이다. 하나님이 택하셨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는 전혀 제3자의 영향 받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셨음을 뜻한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받을만한 아무 조건이 없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리 조상 중 우상을 섬기던 우상쟁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아들 중 연약한 이삭을 택하시고 그 아들 중에서는 거짓말하고 사기꾼인 야곱을 택하셨다. 그것이 구속사이다. 이들을 택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부르셨다.
가나안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사 지으려면 바알에게 빌어야 하는 것이 가나안의 법칙이다. 전부터 제사를 지내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다면서 성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거기는 포도주가 있고 성관계가 있다. 근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당연히 바알신을 섬기게 된다. 한번 해보니 너무 몸에 익어서 중독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가나안 문화에서 결국 가나안 신이 돈 신이기 때문에 끊을 자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팔려가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셨다.
근데 애굽도 나일강의 비옥함과 세계 강대국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거기서도 고센땅에 모여살게 하셨다. 왜냐하면 육축하는 이스라엘을 소를 마음대로 부린다. 근데 애굽의 신이 소라서 이스라엘이 마구 다룰 수 없다. 그러니 가증히 여기게 하셨다. 상종도 못할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 하셔서 400년간 아주 큰 백성을 이루게 하셨다.
처음에 떠날때는 250년만에 70명 밖에 안된 백성들이 애굽의 400년 동안에는 200만명이 되었다. 엄청난 번성을 이루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거기가 너무 이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차별 받고 살아도 살다보니 애굽이 너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굽의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전 왕조에서는 요셉을 알아서 우대 해 주었으나 왕조가 바뀌니 같이 미워했다. 그래서 떠나라고 했다. 근데 안 떠나니 학대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만 나가게 해달라고 했다. 학대가 많음으로 부르짖어서 구원자 모세를 보내주셔서 출애굽 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이 큰 권능이 하나님의 높은 팔이다. 하나님의 높은 팔로 인도해 내셨다 하는데, 이것을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용)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전적인 택함도 믿고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잘나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다.
3. 끝이 없는 하나님의 참으심입니다.
18절
높은 팔로 인도해냈어도 40년광야에서 수없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배반했다. 죽어야 마땅한 인생인데도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셨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것 때문이라고 한다. 약속 때문에 소행을 참으셨다. 참으셨다는 말에는 돌보셨다는 말도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면서 어머니가 자녀를 품에 안듯 그렇게 소행을 참으시고 인도하셨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다.
19절
하나님이 가나안 일곱 족속, 그 강한 족속을 멸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따르면 그들의 죄악이 가나안 땅에 가득 찼기 때문이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누구를 망하게 하는 것은 말아야 한다. 가나안도 너무 못돼지만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450년간 참았다. 하나님이 기다리셔서 물리쳐 주셨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세상에 옳고 그름이 어딨는가. 예수 믿고 안믿는 그 차이 밖에 없다.
모든 동사는 하나님이 주어가 된다. 애굽에서 가나안을 차지하기까지 애굽의 400년 광야 40년 여호수아 정복전쟁 10년 해서 딱 450년이다. 450년 기다려야 성령의 구속사가 깨달아진다. 설교듣는 사람 중에서는 450년 초입이나 끝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구속사는 오늘 나에게 임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오늘 하루를 잘 살면 구속사이고 450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450년을 기다리는 태도이다. 오직 오늘을 잘 살면 된다. 내일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잘 살면 된다. 기쁘고 즐겁게 용서하며 오늘을 잘 살면 450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신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정복전쟁 후 제비뽑아서 나눴다. 제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제비도 하나님이 뽑으셨다. 그 뜻이 너무 놀랍다. 출애굽할때도 열 가지 재앙을 내렸으나 바로가 안 듣다가 마지막에 장자를 칠 때 장자만 정확하게 쳤다.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보냈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신 지파가 가장 성전에 가까이 있었다. 성전 옆 예루살렘 옆에 유다와 베냐민이 있다. 이것을 봤을 때 제비를 뽑아도 하나님 믿는 사람은 성전 가까이 뽑히게 하니 이사상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고 친한 것이다. 어떤 복 보다 최고의 복이다. 성령의 구속사를 깨달은 자만 깨닫는 복이다.
적용)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가장 최고인 복임이 믿어지십니까? 아직도 돈 명예 외모 자녀의 복이 최고라고 믿어집니까?
참아야 할 일은 계속 있다.
20절
사사시대 역사를 단 한마디로 요약했다. 구약시대의 사사는 재판장이고 전쟁때는 군대장관이 되어 사법 입법 행정을 다 총괄하는 일을 했다. 그런 사사시대가 여호수아 사후부터 사무엘까지 약 350년간 지속되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마지막 사사이자 최초의 선지자가 된다. 이 때 사무엘을 넣은 것은 사무엘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의 시선으로 보고 쓴 것이다.
사사기 시대에 가도 하나님이 택하시고 멸하시고 인도하셨는데, 여전히 범죄 징계 회개 징계 회개 재범죄가 계속되었다. 하나님이 정말 소행을 참으셔야 했다. 12명의 사사의 면면을 다 보면 약할 때 강함 주시네 의 모델들이었다. 하나님이 왕이시면 그 사람이 아무리 연약해도 지키신다.
그때는 왕이 없음으로 다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는 그런 형편없는 시절이니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 사사들은 진짜 찌질하다. 옷니엘은 이방인이고 에훗은 왼손잡이, 삼갈은 농부, 드보라는 여자, 기드온은 보기에도 작은자, 야엘은 아들이 30명이라는 말 밖에 없고, 압도는 노예, 입다는 기생의 아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들릴라에게 넘어가 머리를 뽑혔다. 이런 형편없는 사람들이 계속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11:1
적국의 왕 나하스가 쳐들어왔다. 암몬자손이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족속인데도 나하스가 멋있어보였는지 우리를 다스려달라고 한다. 도리어 나하스가 조롱하며 거절했다.
21절
사울에게 기름부었다. 사람들이 사울은 베냐민 지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근데 나하스를 사울이 무찔렸다. 그들은 모세때부터 이어져 온 신정을 거부하고 열방에 사람을 세우는 왕을 구했는데, 거기에 왕이 될 만한 사람이 맞아 떨어졌다 생각한 것이다.
창6: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믿는 것이 지루해졌다. 사울이 나하스 같이 그를 물리쳤으니 왕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왕을 구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유익 때문에 왕을 구했다. 바울도 요한이 떠났을 때 배신감을 느꼈지만 하나님도 기가 막히셨을 것 같다.
호13:11
떼 부리는 기도에 응답하셨다. 사사시대에는 아무리 흠있어 보여도 다시 회복시켜주셨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 근데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사람의 왕을 구하는 백성의 소행을 얼마나 참으셨겠는가? 썩을 속이 없어 못 썩어질 지경이다.
결국 그들이 구하여 얻은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고 464년간 이어온 왕정은 마지막 시드기야가 두눈이 뽑힌 채 결박되어 바벨론에 끌려가서 종말을 고했다.
시 106:15
사도바울이 베냐민 지파인 것을 자기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도 유대인으로 초대왕 사울 처럼 교회를 잔멸했기에 간증한다는 것이다. 사울왕은 왕이 되고 회개하지 않고 권력을 자기를 위해 쓰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해 자살해서 죽었다. 사도바울이 구속사의 정점에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한다. 이렇게 사울은 언급한 것은 구속사적 설교에서 바울밖에 없다. 구속사를 스데반 설교에서 읽었고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도 읽었다. 최고의 구속사 설교에서 아무도 안 다룬 사울 왕을 다뤘다. 본인이 사울의 베냐민 지파였기에 더 현실감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감을 일으켰을 것이다. 내가 바로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근데 사울을 폐하셨다.
22절
주시기도 세우시기도 폐하시기도 하신 전부다 하나님이 하신다. 폐하시고는 직역하면 옮기신 후에 라는 뜻이다. 어떤 왕 하나가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베냐민에서 유다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떤 죄 때문에 그를 옮기시고 폐하셨을까?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어디에 있나?
삼상 9장부터 보면, 결국 그들이 구하여 왕으로 세운 초대왕 사울은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크고 베냐민 지파 중 가장 작다고 하며 겸양을 보인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 부었는데 짐에 숨을 만큼 겸손해 보였다. 성품이다. 구속사를 모르기에 기름 부었기에 성품으로 사양했다. 성품으로 사양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사람이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 100프로 죄인이라 환경이 변하면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나라적으로도 그는 유다지파가 아니다. 창세기 49장에 왕의 규는 유다지파에서 난다고 야곱이 예언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사울의 외모에 반해 베냐민 지파에서 왕을 세워서 40년간 고생했다. 그래서 원칙이 항상 중요하다. 왕은 유다지파여야 했다. 사울도 알았다. 자기는 베냐민이라서 안된다는걸 알았다. 근데 백성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니 원칙을 바꾸었다. 백성들도 사울이 마음에 드니 원칙을 바꾼다. 이렇게 원칙을 바꾸면 안된다. 무시하던 어떤 사사들보다도 못한 그 찌질한 사울을 잘생겼다고 원칙을 어겨가며 뽑은 것이다. 사사들은 부족하나 성령을 의지했기에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왕인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늘 인간을 의지하니 원칙을 바꾸는 것이다.
그럼 원칙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원칙을 지켜야 사람의 원칙을 지킨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사울은 예배 중독자였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도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기 전에 제사를 다 지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다. 아말렉 전투에서 이기고 탈취물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좋은 것을 가져왔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왜 그랬냐고 하니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좋은 것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니 삼상 15장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다.
똑 같은 선지자가 있어도 사울은 선지자의 말이 안들린다. 그래서 늘 예배는 드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이것이 예수가 없는 것이다. 사울이 맨 처음에는 성품으로 겸양하다 왕이 되었는데, 사울이 잘나가다 보니 왕이 된 후에 달라졌다. 사울은 보이는 예배도 잘 드리고 전쟁도 잘 하고 사생활도 깨끗해서 첩도 없다. 완벽하다. 이러던 사울이 어디에서 성품의 본색이 드러났을까?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고 온 길에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다. 이 한마디에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갔다. 우리 중에도 어떤 한마디로 평생에 악신이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시기질투로 온 몸과 마음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하여 인생을 허비했다. 심지어 삼천명의 병력을 데리고 와서 다윗을 죽이고자 했다. 자기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남녀와의 사랑보다 진한 사랑을 하며 다윗을 분별하며 인정했는데, 사울은 왕세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항상 원칙이 중요하다. 근데 자기가 유다지파가 아니었다. 자기는 유다지파가 아니라서 근본적인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근데 어린 다윗이 너무 실력이 있었다. 이 다윗이 바로 유다지파였다. 그러니 날마다 불안했다.
가장 중요한 명령을 어긴 열등감은 악신이 들어가기에 마땅했다. 부족해도 못나도 못나도 원칙을 지키면 주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있다. 마음에 든다고 외모만 보고 불신결혼 하면 이런 일이 올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일이 있다. 우리들 교회도 그런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사소한 원칙을 지켰기에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집 나라 모두 이 사소한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
대상 13: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사울의 죄목은 여호와께 묻지 않는 것이었다. 여호와께 묻지 않는 사람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한다고 했다. 사울은 종교의 민주화를 이루어 사무엘에게도 신접한 여자에게도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 종교의 민주화는 안좋은 것이다. 바로 그것을 다원주의, 인권이라고 한다.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유대인의 회당에서도 늘 성경읽고 찬송하고 낭독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교리가 되어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리만 되고 진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의 죄목이 여호와께 묻지 않는다고 정확히 말하신다. 그렇게 잘한 것이 많지만 여호와께 묻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 비해 다윗은 늘 하나님께 물었다. 그래서 다윗 옆에는 세계적인 선지자 사무엘 갓 나단 선지자가 있었다. 동시대를 살았는데 사울에게는 그것이 안보인다. 그리고 본인도 여호와께 물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가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니 라고 하신 것은 귀한 보물을 발견한 것 처럼 하나님이 다윗이라는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최고의 선지자 사무엘에게도 안보였다. 그래서 이새집에 가서 장자 먼저 봤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속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지도 앞서지도 않는다.
그러면 다윗이 죄가 없는가? 다윗이 무죄했다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다윗이 백배 악하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다. 간음 거짓말 살인이 이어지는 죄를 막 지었다. 그럼에도 그가 죄를 깨달았을 때는 철저히 회개했고 또 그가 왕이었어도 자기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는자였기에 모든 왕들의 기준이 다윗이 되었다. 착해도 악해도 다윗이 기준이 되었다.
적용) 여러분은 찌질한 사사가 좋습니까 준수한 사울 왕이 좋습니까? 아직도 성품을 믿음보다 더 위에 둡니까?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큐티하며 공동체에 묻습니까? 정말 듣기싫은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4. 약속대로 예수님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23절
지금까지의 바울이 우리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사람을 이야기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구속사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소위 다윗언약이라 불리는 삼하7:8-16에 기록된 내용은 다윗이 성전을 지어드린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내가 너를 위해 지어준다고 하시며 영육간의 솔로몬이 보이는 성전을 짓게 하시고 다윗의 후손 예수님의 영적 성전을 짓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사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시고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일곱족속을 참으시고 사사를 주시고 다윗을 세우신 것은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구주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구속사가 계속 잘난 사람을 세운 것이 아니라 흠도 탈도 많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세웠다. 인간이 너무 잘난척을 하니 잘난 사람을 세워봤더니 사울처럼 폐하는 일이 왔다.
바울이 사울을 예로 든 것이 정말 기가 막히다 생각한다. 사울 집안이 바로 우리집안이다, 내가 왕손이다, 근데 내가 예수를 죽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구속사가 이렇게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 예수를 믿어야 구속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죄는 예수를 안 믿는 것이다. 다윗처럼 간음하고 살인했어도 죄는 예수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을 수없이 배반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계획이기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약속을 지켜오신 것이다.
우상쟁이 아브라함 살인자 모세 형편없는 사사들 간음자 사사들 다윗을 통해 끈질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끊임 없이 해도 안되기에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맞는 자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닫고 사명을 인식하는 자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사명 때문에 와서 사명대로 살다가 사명대로 가는 것이 가장 최고의 인생이다. 인생이 길지 않다. 구속사를 날마다 외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아도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의 성령의 구속사를 가장 쉽게 설명하면 예수 안 믿으면 지옥이라는 것이다. 믿으면 천국이라는 것이다. 근데 어찌 안 전하겠는가? 사울처럼 잘생기고 똑똑하고 왕이라도 악신 들린 사람이 많다. 전 세계가 점점 똑똑하고 학문이 많아져 가니 악신 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하나님은 없다고 한다. 인류가 그렇게 간다. 그런데 아주 유치하게 들려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나중에 들으면 생각나기에 전해야 한다. 지금은 나를 미워해도 그렇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마침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믿을 수 있다. 바울이 그래서 자기 간증하는 것이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어디 가서 툭 치면 안타깝게 자기 간증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분한가? 사울 같으면 분하다. 사울이 어떤 사람인가? 잘났고 죄가 없고 의인이다.
적용) 죄는 바람 핀 것이 아니고 살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 믿는 것이다.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이 기분 나쁩니까? 그러면 전도대회를 위해 오늘 전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설교를 하다 보니 바울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갔다.
말씀맺음
성령의 구속사는 준비된 자의 권할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잘난 것이 없다. 그래서 끝이 없는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우리를 택해가시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대로 예수님을 세우셨다. 자기 아들을 죽여서 세우셨다. 이것이 결국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니면 안 믿어진다.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다.
[기도제목]
* 이지현
1. 주님이 택하셔서 세워주심을 믿고, 부와 명예의 번성의 자리가 아닌 지금의 자리를 잘 지키도록
2. 돈 버는 내 능력을 의지하려 말고 주님께 부르짖으며 구하는 믿음이 생기도록
3. 복음을 전할 그 한사람을 잘 찾아가 전할 수 있도록
* 김교희
1. 회사에서 주어진 일 잘 마무리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마무리가 너무 안돼요..
2.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
3. 엄마 목장정착, 동생 구원
4. 팀장과의 면담, 한해 평가, 근무지 이동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잘 무장하며 맞이할 수 있도록
5. 신교제 신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