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모임>20200209
본문: 사도행전 7:29~37
제목: 성령의 소명
성령의 번성은 성령의 소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소명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나그네 인생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도행전 7장 29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출애굽기에서는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고 하지만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동족 애굽 사람을 죽인 것 같이 나를 죽이려느냐는 이 말 때문에 도주했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 이 말은 모세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을 것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믿는 사람들과의 분쟁이 가장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산헤드린 믿음의 원로들 들으라고 애굽의 바로보다는 믿는 동족의 말 한마디가 치명적이라고 한다. 어떤 공동체든 믿음이 가장 좋은 사람이 가장 잘못한 것이다. 예수님도 로마의 빌라도는 살려주려고 했지만 믿는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죽이려고 모인 것 아니겠는가? 베드로와 사도들도 마찬가지 아니였겠는가?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두려워 도주했지만 미디안 땅에서 원수갚으려고 재기의 칼날을 갈고 살면 되겠는가? 애굽의 바로가 양할아버지다. 그 할아버지를 저주하고 히브리 태생을 저주하면 다들 불쌍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게 이 세상의 논리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애굽의 왕자로 노예 하나 죽이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데 모세에게는 이렇게 살인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신의 한수다. 이것이 수준 높은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렇게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믿음이 좋을수록 비교할 대상이 없다. 그래서 외롭다. 다혈질의 그가 온유의 대명사로 불려질만큼 훈련되어질 필요가 있었다. 모세는 불의한 것을 참지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미디안에 가서도 미디안 제사장의 딸을 괴롭히는 미디안 목자들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물론 그 일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그 가족의 일원이 되어서 목동의 일을 하기도 했다. 모세는 그동안 갈고닦은 무술로 양 무리를 먹이고 이리를 쫓는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했다. 양치기를 하면서 나그네 되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다. 환경이 겸손해지니 왕자였던 것도 억울했던 것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이 별 인생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수가 있는가?? 모세가 살인자라서 저절로 죄인의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도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한 유다도 죄인의 심정으로 평생 살아졌을 것이다. 예수를 만나도 너무 죄가 대단해서, 요셉은 아무리 허벅지를 꼬집어도 죄인의 심정으로 살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모세가 살인자인데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인간의 위로가 어떤 것도 위로가 안 되는 그 때에 내 죄를 사해주실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네 죄를 사했노라, 정죄감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자유함은 가졌지만 살인자 주제에 양치기도 감사하구나 하면서 아들도 둘이나 낳았다는 것은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첫째 아들 게르솜의 이름, 내가 타국의 객이 되었다는 뜻, 둘째 아들 엘리에셀, 내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는 뜻인 것으로 보아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바로를 향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양치기가 천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나그네 인생임을 알 때 별 인생이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움의 원인이 바로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나그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왕자였다는 것을 잊게 하셨다. 처절하게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적으로는 살인자요 미디안족의 딸과 혼인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 내놓을 것이 없는 초라한 인생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세에게 상관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그네 인생임을 성령의 소명이고 축복이다. (적용) 여러분은 불신자와 신자의 말중에 어떤 것이 상처가 되는가? 나그네 인생임을 인정하고 광야 같은 오늘을 영원히 살 것처럼 잘 살고 있는가? (목사님 저서의 간증 이야기)
2. 40년이 차는 거룩을 경험해야 한다. 사도행전 7장 30~31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히브리 민족이 번성했다가 핍박을 받는 시간과 모세의 광야 생활 40년간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 간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계속 보고 계셨다. 두 번째 40년이 찼다. 모세가 동족을 돌아볼 생각이 났어도 40년간 왕자로 살았기에 40년간 양치기로 훈련받아야 했다. 모세의 영적 나이 40년이 된 때는 80 노인이다. 영적 나이가 차니까 부르신다. 시내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천사가 보였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항상 그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환경, 사람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다. 모세는 양치기하면서 가시나무를 많이 봤을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보던 가시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꺼지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적용해보면 모두가 포기한 내 옆의 환란 가운데서 불이 붙었다는 것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팔십이 된 모세에게도 가시나무같이 생명이 사라진 것 같지만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가시나무에 불이 붙듯이 너도 불이 붙었다, 꺼지지 않는다. 모세를 40년간이나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가 이제 찾아오신 것이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를 불붙은 떨기나무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기도 하시지만 꺼지지 않는 불이기도 한 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고 은혜의 복음으로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셔서 구원해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40년의 훈련이 끝나고 달라진 것은 기적을 보고 놀라서 나는 기적의 주인공이다 이러지 않고 놀랍게 여겨서 알아보려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게 무슨 일이지하고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난번 25절에는 자신은 왕자의 권위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과 일이 능해서. (목사님 이야기)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는 성공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세가지로 표현했는데 1) 사람들은 내 성공을 과대평가하고 있어, 2) 내 성공은 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 때문이야, 3) 내가 이룬 성공은 하나도 대단한게 아니야 그런다고 한다. 보통은 요만큼 성공하면 요만큼 과장하고 다 내가 했어 한다. 내가 다 전도했어 한다. 우리가 그런다. 기적을 보면 내가 이것을 봤다고 사람들한테 떠들텐데 모세가 달라졌다. 기적의 주인공이지만 외치지 않고 이게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려고 주님께 가까이 간 것이 달라진 것이다. 거기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한 가지 적용하면 그 다음날 큐티하면 또 한 가지 깨닫게 하신다. 적용해야 깨닫게 하신다. 순종해야 한 가지 깨닫게 하신다. 사도행전 7장 32절,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무슨 음성을 들었는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고 그 대단한 조상과 모세를 비교하면서 너에게도 같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한다. 대단한 믿음의 선진들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야 하시면 말이 안된다. 예를 들어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야 하면 제가 발바닥도 못 따라가는데,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될까봐 두려워,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한다. 여러분들 목사님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 목사님같이 살까봐 싫어 이런 사람들이 많다.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계속 약속하시고 약속에의해서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은 가나안 땅을 영원한 업으로 주시겠다, 그런데 매장지 하나밖에 못 얻었다, 그런데 약속이 하나님의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겠다는 소명을 너에게 주시겠다, 이런 것으로 네 조상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놀라서 기적을 보고 가까이 갔더니 하나님이 이런 음성을 주신 것이다. 말씀이 들린 것이다. 말씀이 들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애통하면서 안타깝게 여기고 구원으로 이끌려는 마음이 드는 게 바로 소명이 임하는 것이다. 말씀이 들리니까 이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말씀이 들리는 것은 소명이 임하는 것이다. (목사님 이야기) 사도행전 7장 33절,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여기는 거룩한 곳이라고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거룩한 곳인데 하나님이 찾는 모세가 지금 여기 있다. 모세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바로 그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이다. 예배 보려고 성전에만 가지 말고 여기가 예배당이니까, 거룩한 곳이니까 너 신발 벗어,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다. 선택하신 종을 부르시기 위해 이방 땅, 미디안 땅에 임하셔서 그곳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이다. 스데반은 약속의 땅이나 예루살렘 성전만이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내가 성전인 것이고 주님이 내안에 내안에 주님이 우리안에 계시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항상 신발을 벗고 서야할 거룩한 성전임을 알아야 한다. 그 어디나 하나님이 미치지 못할 곳은 하나도 없다. 내가 번성과 학대가 다같이 거룩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구원자를 주셔야 가능하고 구원받게 되면 한 사람의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성령의 번성이라면 바로 그 마음이 거룩한 마음이고 성령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모세에게 이런 소명의 마음이 들 때가 되었다. 한 사람을 도와주다가 살인자로 몰렸는데 그때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도와주기까지 모세는 밑바닥 인생, 낮은 자리에 갔어야 하는 것이 거룩의 훈련이다. 내가 정말 주님을 영접한 그 마음으로 돕는 것과 그냥 돕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가 돕는 연습을 해야 되지만 모세가 애굽의 왕자도 아니면서 히브리 민족으로 노예로 살지 않았다. 왕자로 아닌 것엔 피해 의식이 있고 히브리 노예에게는 우월감이 동시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예로 막상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 같은 삶을 40년 살아야 한다. 노예로 살아봐야 되는 것이다. (목사님 이야기) 애굽의 왕자가 미디안의 양치기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이런 자를 하나님이 찾아가신다.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부르신다.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밥하고 자고 일하고 이런 평범한 일을 잘하는 자를 찾아가시고 부르신다. 세상적으로도 평범한 삶을 잘 사는 사람은 그래도 당분간은 승리한다. (목사님 이야기) 내가 애굽의 왕자다 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소명의 첫걸음이다. 사장이다 부장이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소명이고 지금 있는 그 자리가 거룩의 자리고 소명의 자리다. 그러면 가시나무 떨기가 계속 불타고 꺼지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이 있는 어떤 곳도 적용하면 거룩한 곳이 된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였다. 이때 배웠던 인내는 나중에 백성을 이끌면서 백성의 원망과 불평을 참아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달인이 되어야 한다. 청소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광야에서 모든 두려움과 밑바닥 인생을 익히지 않았다면 출애굽의 광야 40년간 그들을 인도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선민주의를 지금 계속 깨뜨리는 변증을 스데반이 하고 있다. (적용) 여러분은 가시나무 같은 곳에서 지금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고 있는가? 바라다 보고만 있는가?
3. 세상으로 보내신다. 사도행전 7장 34절,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애굽 세상에서 말과 일이 능했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받은 이유는 다시 애굽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쓰임받는 인생이 되려면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 성도끼리 좋아서 세상을 안 나가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성도끼리 좋아서 전도도 안하고 있으면 흘러 떠내려 간다. 교회가 정체가 되어 누가 오는 것도 싫다고 한다. 갖은 문제가 생긴다. 교회는 부흥이 되어야 하고 흩어져야 한다. 물론 세상이 우리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죄와 사망에 빠진 인류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것처럼 모세는 애굽의 압제에서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던 사람이다. 예수님도 모세도 다 영접하지 않았다. 자기 백성이 예수님도 영접하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중국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분명히 내려오셨을 것인데 내가 너를 그곳으로 보내리라 하신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곳곳에서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믿는자여 어이할꼬, 가슴이 많이 무너지고 아프고, 이렇게 나라 걱정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도행전 7장 35~37절,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더니 미디안의 광야 학교를 졸업하니까 인정한다. 제가 아무리 히브리어 헬라어 박사를 했어도 광야 학교 졸업하지 않았다면 여러분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각자 지금 고난의 학교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소명을 주시려고 베풀어주신 신의한수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고난의 자리가 신의 한수라는 것이다. 모세가 양치기하면서 완전히 깨졌다. 깨어져야 보배가 보인다. 왕궁에서 배운 모든 것이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깨어짐이 필요했다. 금그릇으로는 못 섬긴다. 모세의 모든 것이 벗겨지고 예수님만 보이기까지 깨어지고 깨어지고 또 깨어지게 하셨다. 왕자였던 모세와 팔십 초라한 늙은이 모세를 생각해보라. 깨어지고 깨어진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다. 모세가 예수를 예표하는 자라는 사실을 문자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속량하는 자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속량이라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대신 값을 치루고 우리를 사주시고 죽어지셔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자신도 전에는 관리와 재판장으로 생각했다, 백성들이 누가 세웠느냐 모세가 자기도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이제는 이 사람 이 모세가 되어서 속량자로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모세도 이 때가 있고 저 때가 있다. 그 때가 있고 이 때가 있다. 하나님이 세우시니까 속량하게 하시려고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셨다. 모세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고 계속 말한다. 주님이 속량하게 하셨고 미디안 땅에 보내시고, 모세도 받은 훈련 다 받고 하나님이 옮기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곳곳의 환경들이 신의 한수로 하나님이 인도해가시는 여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도무지 늙은 80 노인 어디에 쓸까 했는데 120살이 될 때까지 앞으로도 40년을 더 섬기게 하셨다. 나이도 아니고 학벌도 아니고 다 아닌 것 같다. 요셉을 배척한 형제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요셉을 높이 세우셨던 하나님이 모세를 배척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세우셨다. 예수님도 배척당하셨지만 하나님이 그를 세워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스데반은 지금 공회에 모여 자기 변론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인정하는 모세가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면서 그의 백성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말하므로 공생애 3년여 동안 모세를 능가하는 여러 가지 각종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보냄받은 구속자였다라는 사실을 계속 밝히고 있다. 성경은 늘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 모세의 인생에서 이스라엘 출애굽 과정과 직접 관련된 이 마지막 40년은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간 기간이다. 모세가 자기가 다 힘이 빠지고 하나님의 능력만이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철저히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오직 구속하신 주님만 계시는 기간이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는 인도자요 중보자로 자기 민족을 자유에게로 인도한 소명자였다. 즉 세상에서 부르심 받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의 소명이다. 애굽의 학문이 40년, 40년 밑바닥 인생을 살고 40년은 완전히 사람과 하나님을 중계해주는 중보자로서 자기의 생각이 다 없어지고 참 훈련이 중요한 것 같다. (적용) 여러분은 성령의 소명으로 지금 어느 세상으로 보냄을 받고 있는가? 직장인가? 가정인가? 자녀인가? 건강인가? 물질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던지 바로 거기가 바로 나를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하는 신의 한수, 내 환경은 신의 한수. 기분이 나쁜가? (간증)
(말씀 요약) 성령의 소명은 나그네 인생임을 인정해야 한다. 40년이 차는 거룩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으로 보내신다. 그러니까 성령의 소명은 언제나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운 것을 아는 것이 성령의 소명받고 세상으로 보냄받는 비결이 되는 것이다.
(목장모임)
설교를 들으며 내가 40년이 차는 거룩을 잘 경험하고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삶을 잘살기보다 하루빨리 성공하고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제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교회와 목장에 잘 붙어가며 팔복의 가치관으로 바뀌고 성장해가기를 소망해봅니다. 돌아오는 주일까지 목장을 쉴텐데 목장 식구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기도제목)
기연: 1. 나그네 인생임을 인정하고 지금을 영원처럼 잘 살아내도록
2. 목장이 쉬는 요즘 풀어지지 않고 목장 식구들 모두 영육간에 강건해지도록
3. 말씀으로 교제 인도함받도록
4. 남동생이 교회로 돌아오도록
승종: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족간의 화평을 예수 믿는 내가 잘 종노릇하여 지킬 수 있게
2. 엄마의 육체적 건강 회복과 심리적 안정, 그리고 영적인 성숙을 위해
3.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직장으로 잘 인도함 받도록
상윤: 1. 하나님과 많이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데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배부터 바로 서는 내가 될수 있고 말씀 볼 수 있게 해주세요.
3. 내 욕심 혈기 중독 등등 아직 끊어내지 못하는 나의 죄를 보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4. 가족의 건강과 구원을 바랍니다.
5. 목자님의 신결혼을 소망합니다.
6. 계약기간 간절히 지켜주세요.
형석: 1. 어머님의 무릎건강이 회복될 수 있도록
2. 고모님의 영육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3. 여자친구 탓보다는 내 탓할 수 있도록
4. 인정되지 않는 죄 볼 수 있도록
5. 이 모든 바람 위해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호준: 1. 엄마 수술 회복치료 잘 할 수 있도록
2. 논문작업 빨리 시작할 수 있기를
3. 입사 전에 다른 업무 무리없이 잘 진행되도록
4. 주위 사람들 인간관계 잘 유지하도록
경태: 1. 여자친구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수시로 기도할 수 있길
2. 교제 말씀으로 인도함 받도록
3. 영육간에 건강하도록
4. 회사 업무에 지혜를 주시도록
호진: 1.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구조 속에 있도록(주일예배, 목장예배 등)
2. 큐티할 때,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이 들리는 은혜를 내려주시도록
3. 왼쪽 손과 팔의 근력이 향상되고 조심하도록
4. 머리 속이 맑아지며 적성 검사 잘 준비하고 운동 꾸준히 할 수 있도록
5. 재취업 준비중인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말씀으로 인도함받고 잘 적응하며 계속 다닐 수 있도록
6. 아버지께서 건강하시고 구원 받으시도록, 형의 건강과 구원, 형의 신교제와 신결혼, 어머니께서 발을 다치시고 제작년 어깨 수술 받으셨는데 건강하시고 믿음이 견고해지시도록
7. 아버지와 형의 마음 속에 남겨진 믿음의 씨앗과 어머니의 믿음을 바라보며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도록, 손과 발이 가는 적용으로 섬길 수 있도록
8. 신교제와 신결혼을 위해 잘 준비되도록(신앙, 경제력, 성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