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42-47
<성령의 공동체>
1. 오로지 경건생활에 힘쓴 공동체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으니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회개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니 성령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 성령의 공동체가 교회의 원형이 된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재창조된 성령의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누가는 그들이 말씀의 공동체에 접붙여진 이후에도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양육을 받으며 자라갔는지를 설명 한다.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기도만 힘쓴 것이 아니라, 힘쓰다의 헬라어 동사는 스스로 무엇에 헌신하다 뜻의 지속적이고 집착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이다.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힘쓰다가 원문에는 맨 앞에 쓰여서 가르침, 성도의 교제, 성찬,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이 힘쓰다에 걸려서 모두 연결이 된다.
마음에 찔려를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말발굽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고통이라는 뜻이 있다. 회개가 아픈 것이다. 그런 아픔이 오니까 원동력 있는 말씀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 싶어진다. 성령의 설교로 가르침 받는 것은 출발이 다르다. 가르침 받은 구조 속에 있는 것은 결국 몸이 기억한다. 어려서 큐티하고 말씀 암송하는 것들은 지금 보면 모두 필요한 것이었다. 한결같이 모두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초대교회가 순수성을 유지한 비결:가르침의 내용이 성령의 역사로 똑같았기 때문이다.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했는데 사도의는 복수이고 가르침은 단수이다 (원어에 의하면). 베드로의 설교로 예수님을 믿게 된 수천 명의 신도들에게 사도가 복수이니 12사도가 모두 가르쳤다는 것이고 가르침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사만 가르쳤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회개해야 하고,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근거가 되고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에 반응으로 회개가 울리는 곳이 존재했다.
구원의 문제,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배우고 가르치면 다른 인생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시간, 공간, 사람, 역사, 생사를 배운다. 그런데 진정한 배움이란 이런 문제에서 예수님의 시각으로 듣는 작업과 깨닫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모든 오고 가는 인생사 속에서). 잘 듣고 깨달으면 이 적용은 결과를 기뻐하면서 세상의 시각에서 유턴한다. 어떤 일이 와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듣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자 최고의 배움이다. 가르침이 십자가이면 그 교회는 굉장히 힘든 교회이다. 그러나 생명의 문은 좁은 일이고 사망의 길은 넓은 길이기에 힘들어도 이 가르침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적용: 우리는 가르침을 잘 받고 있는가?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2) 성도의 교제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성경 전체에서 강조되는 교회의 중요한 요소이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의 교제는 정신적인 교제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교제이기도 하다.
코이노니아 ampndash 사귀다의 의미로 번역 되었고 (고전6:14), 헌금의 의미 (롬15:26)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신적, 육적인 교제가 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정신적, 영적, 육적, 물질적인 교제가 서로 되었다. 가르침을 활발하게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말씀을 나누며 교제하는 것은 말씀을 삶에 적용해서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균형을 잘 잡아준다.
(3) 떡을 뗐다.
성찬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신 몸이고 보혈이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 마다 애찬을 겸한 성찬식을 했는데 공동체 형제들 가운데 가난한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주의 식탁교제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애찬, 성찬이었을 것이다.
(4) 오로지 기도하기 힘썼다.
원문에는 기도들 이라고 되어 있다. 개인기도, 공동기도가 모두 포함하고 있다. 기도하다의 동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고 감정이나 직감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적극적으로 굴복시키는 기도여야 한다.
적용: 사도의 가르침, 성도의 교제, 떡을 떼며 기도 중에서 무엇이 안 되고 무엇은 잘 되는가?
2. 경건생활을 지속적으로 힘쓰게 되면 기사와 표적의 공동체가 된다.
44절에 나오는 사람은 믿는 사람과 대조되는 믿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믿지 않은 사람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부흥과 기사와 표적들을 보면서 갖게 되는 영적인 어떤 두려움을 경험한다. 사람에게 정죄감과 두려움을 주신 참된 성령의 공동체는 영적 두려움이 전파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신령한 사건이 일어난다. 온갖 종류의 문제와 해결이 일어나면서 기사와 표적을 보게 된다. 영적 진리 말씀에 표적이 나타난다. 진짜 기사는 나의 현재 이유를 알고 내가 감사하니까 놀라서 기사가 되서 말씀을 붙들고 표적이 된다.
기사와 표적 중에서도 가장 큰 표적은 45절이다. 기사와 표적이 나오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서로 통하는 유무상통이 나오는 것을 보면 가르침, 교제, 기도 후에 나오는 적용 이라고 보여 진다. 3000명이 어떻게 다 모일 수 있었을 까? 가치관이 같으니 다 함께 모여 있는 것이 가능하다. 성령이 임함으로 가족이 되었다. 사랑, 믿음, 소망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가치관 말발굽이 나를 치는 이런 아픔 가운데 있으면 나눠 쓰는 것이 아깝지 않다. 말발굽 고통이 있으니 끊어지지 않고 목장 공동체를 하는 것이 기사와 표적이다.
적용: 우리의 성도 체휼은 어느 정도인가?
3.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이다.
46절)모이기를 힘쓰는 것과 떡을 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한다. 아무리 말씀을 가르침 받아도 모여야 하고 떡을 떼야하기 때문이다. 큰모임, 작은 모임이 저절로 잘 모여져서 초대교회의 원형을 보여준다. 실상 기뻐할 것이 없어도 예배가 기쁘니 애찬을 나누는 것이 즐겁다. 설레어서 가고 싶은 곳이 교회가 되었다. 설렘이 있다면 성령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을 경험하면 다시 살아나고,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서 이 땅에서 보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 비교할 대상이 없어졌다. 이것을 본 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세상에서 탈출 할 수 있다는 것이 완전하다고 볼 수 없지만, 한번 탈출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베드로가 성령의 선물을 받기 전에는 실수하고 세 번 부인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사도행전 에서는 베드로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부족해도 돌아가지 않는 비결이 한결같이 예배가 설레고 사모함이 넘치고, 목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가 되니까 예배가 설렘이 있다.
적용: 우리는 설렘으로 예배를 오는가? 습관적으로 오는가?
4. 날마다 구원을 더해가는 공동체 이다.
47절)내가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말씀에 가르침만 받고 교제, 성찬, 기도가 없으면 표적과 기사가 안 나타나고, 이런 유무상통이 일어날 수 없다. 생각, 마음, 습관, 언어...이런 인격들이 자라가기 시작한다. 결국 안 믿는 사람들이 빛을 따라서 오게 되고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신다. 칭송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적용을 하는 것은 성령의 선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
베드로도 스데반도 순교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전하는 자, 듣는 자, 죽는 자 에게 까지 골고루 역사하신다. 3000명을 더하게 하시는 것도, 순교, 핍박도 모두다 성령의 선물이다.
가르침 받아도 적용할 것이 없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자...듣기 별로 싫다. 찾는 이가 없는 좁은 길을 가야한다. 교회는 생명 걸고 이 길을 가도록 선포해야 한다. 초신자를 위한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가르침은 학력과 상관없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적용: 우리의 목장이 정체되어 있다면 원인은 무엇인가? 나와 공동체의 성장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기도제목>
신정화
1. 예배, 목장에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올 수 있도록
2.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가족들, 공동체에 잘 묻고 구하는 한주가 되도록
3. 온전한 신교제가 될 수 있기를
이소정
1. 진로의 인도하심
2. 신교제, 신결혼
3. 나 자신과 교회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박재인
1. 초등부 학생들과 풍성한 나눔
2. 환절기에 목장식구들의 체력과 건강지켜주시길
3. 애통하는 자가 되길(제가 누구보다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