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1:17-29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을 율법의 이름으로 죽인다. 세상은 이겼다고 축배를 들겠지만 이것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 보이시기에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는 이세벨이 아니라 아합이라고 한다. 악을 행해도 여호와께서 아합을 보시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여호와 앞에서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아합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신다.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1.여호와의 말씀으로 심판을 경고해야 한다.
20절에 여호와 보시기에 라는 표현을 썼는데 선악의 절대 기준이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이다.여호와 앞에서 행한 악은 무엇인가? 1차적으로 우선 죽여야 하는 벤하닷을 그릇된 긍휼로 살려줬다. 세상은 그릇된 긍휼을 못 알아 듣는다. 그리고 나봇을 죽임으로써 여호와께서 금하신 악을 행하였다.
선악의 개념은 무엇인가?
나는 틀리지 않았다가 가장 큰 죄이다. 내가 옳고 남은 틀리다. 결국 모든 것이 분열되고 이 모두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세벨의 특징은 악하고 음란한 것이다. 악하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잘 살게 되면 음란으로 가는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의 의미'에서 '여호와'는 누구신가?
'I am who I am' 스스로 계신 자이다. 여호와는 율법 자체이다. 노력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찾아 오셔야 하는데 (진리의 성령님이기 때문에) 여기서 아합과 이세벨을 통해 율법이 악행을 행하는 도구로 사용 된다. 권세자가 유익을 행하려 하면 법은 오히려 악행을 행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런 율법 말고 성경이 나를 읽고 지나가야 한다.
우리는 왜 나봇은 어이없이 죽고 아합과 이세벨은 기뻐하는지 일상생활에 들어가면 또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열왕기상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일어나는 악인의 형통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지만 이들은 듣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바벨론을 형통케 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봇처럼 앞날이 보장된 왕의 제안을 거절하는 적용 때문에 이스라엘을 남은자 되게 하셨다. 이러한 나봇 때문에 이스라엘을 바로 잡을 엘리야를 또 보내신다. 나봇의 적용으로 아합을 심판하실 때가 된 것이다. 나봇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울 정도로 악한 아합과 이세벨을 지적하는 일을 누가 할 수 있는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사람이 아니라 이 백성을 위해 엘리야에게 말씀이 임하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말씀이 임한 것은 혼, 영, 골수를 쪼개기에 악을 심판 하신다. 하나님이 깨달아 지는 것이기에 엄청난 사명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이 가는 것이기에 악을 심판할 수 있다.수많은 곳에 말씀으로 갔을 때 나는 할 수 없었지만 말씀이 살아서 악을 찔러 쪼개니 이 찔림을 받고 이혼을 안 하는 등 역사를 경험케 하셨다. 나는 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구속하신 주님께서만 내 속에 계셨기에 주어진 여호와 말씀에 순종하여 이세상의 멸망을 선포하는 임무를 수행을 하게 되었다. 여호와 말씀이 임하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합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해야 하는데 자신의 직분을 떠나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였고, 이런 아합을 만나러 가라고 하신다. 절대 권력을 향하는 아합왕을 대적하여 만나라는 것이다. 대적의 영으로 나가야 한다.
적용: 지금 말씀으로 경고하며 대적의 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죽이다의 원어는 산산 조각으로 죽이다 의 뜻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재산까지 빼앗는다. 이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영원히 목마르기 때문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는 채소밭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 이 세상이 영원히 목말라서 그렇다. 부자가 아니라도 갖고 싶은 것을 꼭 가져야 하는 자기중심성 인격장애는 꼭 고쳐야 한다. 재산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기업을 빼앗는 자체는 약속의 땅에서 끊어지게 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심판의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용: 죽이고 빼앗고 싶을 정도로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부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렇게 차지해서 그대로 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2.선지자를 대적자라고 생각하니까 심판을 받는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라고 한다. 말씀이 안 들리니까 엘리야의 행동이 바알을 진노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 나가면서 괴로운 일이 생길 때, 교회 나가는 우리보고 대적자라고 하는 것이다. 아합이 능동적으로 죄를 범하여 불안한 마음이 있는데 엘리야에게 대적자라고 난리를 한다.
적용: 우리는 누구의 대적자인가? 아합의 대적자 엘리야인가? 엘리야를 괴롭게 하는 아합인가?
3.아내에게 충동되어 심판하신다.
아합이 죄의 종이 된 이유가 아내 이세벨이 충동했기 때문이다. 아합은 충동 되었고 이세벨은 유혹하였다 (모두 능동이다). 이는 두 사람 모두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혹에 충동되는 이유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들은 예수가 없으면 욕심이 있어서 다 참는다. 그런데 상식이 없어서 다들 속았다고 한다. 아합은 부드럽고 유약하면서 두려움도 많고 하는 짓이 어린아
이 같다. 그런데 그 안에욕심이 많다. 하지만 자신이 왕이고이것을 믿음으로 포장해야 하니까, 이 욕심을 위해 악역역할을 해준 부인이 있다.
아합은 이세벨을 만나면 안 된다. 우리 인생도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만나서 이런 악을 행하는 것이다. 어떤 만남은 기업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는 만남이 있다. 모두가 자기 유익에 충동되었다. '결국 난 당신 만나서 불행해, 고통스러워...' 이게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불행해 지는 사람이 있어도 안되고 나 자신도 남을 불행하게 하면 안 된다. 아합과 엘리야 만남에서도 정작 괴로운 사람은 엘리야인데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데) 아합은 오히려 괴롭다고, 엘리야가 대적자라고 난리이다. 성도들의 믿음은 인내에 있다. 인간의 목적은 행동과 불행에만 잣대를 두니 엘리야를 볼 때 마다 대적자라고 한다.
적용: 나는 상대방 때문에 고통인가? 불행? 행복한가?
4.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금식을 하는 것은 죄 때문에 강력 한 자기 부인의 표현이다. 풀이 죽어 다니는 것은 '천천히 행보했다' 라는 뜻이다. 앉으나 서나 회개를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 모두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이세벨이 그렇게 죄를 졌는데 이세벨은 기대할 게 없고 믿는 아합의 욕심을 보시고 아합을 계속 보시는 것이다. 드디어 회개가 나온다. 예수 안에서 관심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불가능 하다. 죄인이 돌아오자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적용: 내가 죄가 많아도 회개를 하는 것이 어떠한가?
<기도제목>
이소정
1.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2.진로의 인도하심
3.치과치료 잘 받을 수 있도록
신정화
1.가족구원
2.말씀을 통해 내 죄가 보이고 들릴 수 있도록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박재인
1.초등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섬기도록
2.투고한 논문 좋은 소식 있기를
3.동생이 열악한 해외 출장이 잦은데 몸과 마음 건강하게 이겨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