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예상되면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교회 사역은 역설적이다. 고통과 어려움이 예상되어 사역을 회피하면 교회는 그 자체로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 교회는 병이 들어서 성장을 멈춘 식물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사무엘의 결론을 들었다. 결국 다윗 때문에 우리는 수 많은 눈물을 흘렸다.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해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서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다는 뜻이다. 눈물을 먹는다는 것은 눈물을 직접 흘리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에게도 유익하다. 이 사역은 예배 공동체인 교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들교회가 성도수도 많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이런 때 일수록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역의 섬세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무엘 상,하의 긴 대장정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기를 원하실까 묵상을 하였다. 목사님이 초심을 잃지는 않았는지 개척 초기에 전했던 골로세서를 다시 펴 보았다. 오히려 그 때가 뜨겁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감사하게도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굳이 찾는다면 사역의 지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것이 초기와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척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한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각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들 교회 전체에 공동체적 사명을 주시고 이에 응답하는지 아니면 내 자신, 가족, 우리 교회의 울타리 안 에서 안주하면서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이 든다. 지난 주 설교에서 목사님의 고백처럼 여기까지 온 것은 제 자신으로서는 은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늘 여기까지만 충분하다 생각이 들지만 사무엘이 끝나니까 그래 여기까지 난 할 일 다 했다 충분하다 나이도 먹을만 먹었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스긴이 쓰는 우리가 본향으로 갈 수 있는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 곳에서 줄곧 우리를 기다리셨던 아버지의 부르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길을 알기에 내가 쉬고 싶다고 쉬고 여기까지 제안 짓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기다리셨던 아버지의 부르심처럼 생애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이 미쳐 전해지지 못한 그 곳에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 교회를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골로세서 설교를 다시 하려고 한다. 골로세서는 에베소서와 같이 교회에 대하여 다른 쌍둥이 서신이다. 골로세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는 아니다. 가정을 중심으로 조그맣게 모인 교회였는데 금욕주의, 천사숭배등 우상주의적 요소와 거짓 가르침 음지주의등 이단 사상이 침투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우리도 흔들리는데 그 당시에 말씀이 있었겠는가? 초대 기독교인은 이단 때문에 전체가 서신서가 ‘이단을 주의하라’ 였다. 한 마디로 우리들교회도 외골수로 큐티, 큐티 하지말라고 외치고 하나만 보지 말고 예수에게도 다른 것이 있다고 이런 것이다. 종교적 혼합 주의에 물 들게 되었다. 개척자 에바브라는 이 사실을 옥 중에 갖혀있는 바울에게 보고하였고 바울은 옥중 서신을 통하여 옥중에서도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도록 가는 사람이 소명받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수 많은 사설들이 난무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완전함과 탁월하심이 있다. 고난이 해결되어서 아니면 고난이 오래 지속 되어서 신앙을 유지가하기 어려운 분들이 있는가?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이 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완전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야 하고 예수를 전해야 한다. 나와 우리들 교회에 주신 공동체적 소명에 대해서 생각 해 보자.
1. 하나님의 뜻이 있다
뜻이 있으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개인에 대한 의도와 기대를 말한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 소명이다. 임금이 신하에게 명령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 소명은 부르심으로 번역된다. 성경을 소명의 시각으로 본다면 메세지의 중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부르는 과정을 할 수 있다.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붙이는 것이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존재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저 이름표를 불러 확인하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것을 창조적으로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행위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그로 인해 자기 백성으로 재정하시고 창조하셨다. 소명이란 현재 우리의 모습및 행위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차 우리가 될 모습과 관련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 그 분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 처럼 신약에서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을 부르셨다. 부르실 때는 개인적인 소명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소명도 부여하신다. 개척 초기에 어떤 집사님 가정에 우리들 교회를 놓고 기도할 때에 보냄 받은 곳이 여긴가 거긴가 하면서 인도를 받고 오셨다. 감사하게도 섬기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시간에 축복하며 파송을 해주셨다. 그 때 개척교회에 파송을 해주셔서 감사한지 몰랐다. 그런 분들이 우리들 교회에 여러분 계셨다.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이다. 개인도 소명을 받아야 되지만 우리들 교회도 부르심 받은 곳이 어딘가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 곳이다. 말씀 묵상으로 가정을 살려내는 소명을 주졌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 우리 사사기 큐티를 했는데 4장에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40년 통치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바락이 용사였지만 본인의 영광은 제쳐두고 오직 이스라엘의 승리만을 위해서 드보라 밑에서 철저히 2인자를 자처하면서 드보라를 의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죽인 것은 드보라가 아니라 또 다른 여인 헤벨의 아내 야헬이었다. 그런데 신약에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 보니까 드보라도 아니고 야헬도 아닌 시스라를 죽이지도 못한 바락이 올라가 있다. 왜 일까? 이 때나 그 때나 여자가 리더쉽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 없는 태평시대가 그 때에 80년동안 지속되다가 이스라엘 남자들이 약해지고 야빈이 쳐 들어왔다. 철병거 900대를 가지고 20년동안 학대를 견디지 못 할 정도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자 사사 드보라를 세우셨다. 불 같은 성질을 가진 남편 랍비도섹의 훈련을 받은 드보라는 종려나무 밑에서 상담하다가 저절로 사사가 되었다. 군대 만명을 동원할 수 있고 능력자인 용사 바락이 철저하게 드보라를 사사라 세우고 거기에 순종했기에 성경에 그 이름이 올라간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그렇다. 6.25전쟁 시대를 지나 지금 태평시대가 이어지니 남자들은 약해지고 음란으로 도배를 하면서 이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여자들의 통곡소리가 진동하고 있다. 목사님도 시대가 이렇게 쓰임 받을 뿐이구나 깨달았다. 결코 남자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남자들을 세우시기 위해서 쓰는 것 같다. 구약에서도 여성 지도자는 드보라, 미리암. 훌다 아주 극소수이다. 목사님께서 목회 한다고 해서 여성들이 나가서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역할은 남편과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1차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담임 목사님을 세워주시는 목사님들은 우리들 교회든 아니든 모두 믿음 장에 올라가실 줄 믿는다. 그만큼 여성 리더쉽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기에 바락이 올라갔다고 본다. 우리들교회에 남성 여러분도 여성 리더쉽을 인정했기에 나중에 천국가면 목사님 보다 상이 더 클 것을 믿는다. 지금도 여성이 힘든데 그 당시에 숫자로 치지도 않으며 버려도 물건도 안 되는 시절에 드보라르 세우려니 정말 바락이 세워주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구나 생각이 든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드보라도, 야헬도 아닌 시스라를 죽이지도 못한 바락이 찬란하게 믿음 장에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큐티를 하면서 말씀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주제를 깨달으신다고 한다. 말씀이 늘 제 갈길을 알려주신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일이 우리들교회의 소명이다.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 뜻이 아니면 해서도 안 되고 뜻이면 어떤 일도 해야 된다.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나 이런 각자의 소명이 있다.
적용)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가 어디인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 부으심이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힘들다면 소명을 다시 생각해보라. 거의 구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2. 소명에는 동역자가 있다
진정한 소명이라면 형제라 부를 수 있는 동역자를 허락하신다. 디모데는 터키 남부 태생으로 배경이 좋지 못 했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기에는 출신이 문제가 되었다. 아버지가 헬라인 얼마나 이방인을 매우 무시하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제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루스트라도 내세울 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이런 디모데였는데 1차 전도여행 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한결같이 믿음이 성장하여 바울의 오른 팔 역할을 하게 된다. 아들로 시작된 디모데가 형제로 불림을 받는다.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가르칠 때 이런 믿음의 걸물을 키워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늘 내 힘으로 하면 생색밖에 날 것이 없다.
고등학교를 시작해서 목회하기 전까지 대학에 출강을 했기에 오랜 세월 피아노를 가르쳤다. 피아노를 잘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제자를 키워냈는가 생각해보면 별로 자신이 없다. 다 여자제자들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많은 학생을 가르쳤어도 스승의 날에 한, 두번 전화를 할까 말까 한다. 제 삶의 결론이라고 본다. 돈을 적게 받건 많이 받건 돈을 받고 가르쳤기 때문에 결론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돈을 받지 않아도 기쁜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하나도 안 받아도 하루종일 떠들어도 기뻤다. 이것이 소명이다. 자기
자기의 재능과 소명은 다르다. 은사라고 할 수 있지만 진짜 은사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봐야 자기의 소명이 나타나는 것 같다.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으로 양육했던 학생들은 찾아오는 학생도 있지만 찾아오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잊지않고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다. 어떤 때는 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고 마치 엄마를 본듯하게 대한다. 집회를 가보면 가난때문에 부모와 불화 때문에 공고함을 받고 말씀을 들으러 왔던 아이들은 저보다 지금 더 훌륭한 적용을 하면서 말씀을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을 종종 만난다. 우리 교회의 일꾼으로 소명으로 여기고 교회와 저를 섬기는 제자들도 있다. 그 아이들이 같이 늙어가며 우리 동역자,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로 섬기고 있는 모습에 감사할 따름이다. 제 고난이 얼마나 셌으면 피아노 선생을 내려놓을 수 있었겠는가? 돈이나 잘 받고 편안하게 잘 살다가 갈 수 있었다. 이것은 특별히 부모님과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 학교에 나갈 수 있었기에 교회도 알맞게 나가서 성대가 반주도 하면 알맞게 다들 칭송할테고 충분히 그러고 살아도 되는데 소명을 찾기 전에 함께 놀던 부류는 절대로 디모데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그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세상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내려 놓게 하셨다.
인간이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한 삶을 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쳐두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행복을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산이라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봐야 아는데 우리가 너무나 불 완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인간으로 만들어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불 완전한 내가 원하는 것은 다 불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지 않은 세상적 조건이 있는 스펙이나 함께 주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학벌, 믿음의 집안이어야 하고 어느정도 돈도 있으면 좋고 영적인 수준이 비슷하고 효과적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의 수준에 까지 끌어올려서 동역자로 부르시지 않으셨다. 그 일들을 알게되기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고 부르짖는 내 인생의 밑바닥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나를 이끌어 주셨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의 가치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로 형제와 동역자로 인정해주신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았듯이 목사님 또한 지나고 보니까 가시적으로 인생의 반을 넘은 이 때에 어릴 때 부터 큐티를 했지만 옆에서 가장 가깝게 섬기는 사역자들을 보면 힘들고 정말 너무나 어려운 환경을 거친 분들이 동역자가 된 것을 본다. 결론은 이런 것이구나하면서 진짜 어디에서나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듯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 요즘에는 앉으나 서나 교회를 생각하게 되니까 교회 이야기를 같이 기쁘게 나누고 슬퍼하면서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바울은 다소시 출신에 가말리엘 문화생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력한 집안에 대단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대단했던 사람이 친척, 친구들 다 어디로 갔고 끝까지 그와 함께 예수님을 부르짖었던 사람은 내세울 것 없는 디모데, 천막 만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목을 내어 놓겠다고 했었다. 목사님 태생은 도저히 그럴 수 없고 학력과 경력과 알량한 지식이지만 모든 것을 떠나서 같은 것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웃고 울 수 있는 지체가 생긴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갖추고 서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을 수 많은 사역을 하면 깨닫게 된다.
적용) 소명의 자리에 함께할 동역자가 있는가?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소명을 받고 디모데같은 동역자가 생기면 지경이 넓어지고 힘을 얻어서 2절 말씀처럼 골로새 같은 교회를 나가게 된다.
3. 소명에는 차별이 없다
한 사람에게 차별이 없는 사람이 골로새 교회 같이 공동체적으로 차별 없는 그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터키 서남쪽 리쿠스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에베소에서는 160 km 떨어진 브리기아 지방이 있었다. 비옥하고 경관이 좋은 곳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19km 떨어져 있었고 히에라블리는 21km가 떨어진 그런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 도시가 같이 성장하였다. 교회 역사학자에 의하면 ad60~61년에 가공할만한 지진이 골로세 지방을 덮쳤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히에라블리로 이주를 하고 졸지에 골로새 도시는 3류 도시로 떨어졌다고 한다. 보통 힘들어 지면 신흥 이단들이 판을 친다. 내 힘든 환경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대부분 기복이나 이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현실을 직면하기가 싫어한다. 씀씀이를 줄이고 열심히 사는 것 너무나 싫어한다. 나의 명예를 잃기 싫고, 직면하기 싫어서 그래도 내가 누군데 이 세상에서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단을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은 절대로 이단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단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간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부유한 도시였던 라오디게아 히에라 블리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계시록에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를 토해내리라고 하였다. 당시에도 책망을 들었다. 하지만 골로세 교회는 지진으로 갑자기 3류 도시가 되었지만 힘들었기 떄문에 학대가 많아서 부르짖어서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어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성경에세서 언급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소명이 있다면 디모데 같은 성도 골로세 같은 교회를 찾아가서 차별없이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남에게까지 갈 필요가 있는가. 당장 내 자녀부터 차별을 한다. 가족이란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간 기구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건강한 사람, 불편한 사람,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사람 사이의 모든 인위적인 구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녹아 없어져야 한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그런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끈이 우리를 묶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아무래도 가족의 모습과 유사하다. 비록 화를 내기도 하고 때려 주기도 하고 욕설이 난무할 때도 있지만 가족이란 내가 가면 받아주지 않을 수 없는 곳이 아니겠는가?
적용) 내가 찾아가야할 영육간에 힘든 소명의 대상, 골로새 교회는 누구인가?
4. 소명에는 은혜와 평강이 따라온다
1)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를 바울 사도가 잘 쓰는데 은혜는 카리스라는 헬라어로 헬라식 인사고 평강은 샬롬이라고 히브리식 인사다. 히브리 사람은 소수 민족이어도 선민 의식이 너무 강해서 히브리어만 사용했다. 하지만 이 서신이 쓰여 질 때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팍스 로마나 시대로 성경도 헬라어로 쓰여졌다. 영적으로 최고 교만한 사람과 육적으로 최고 교만한 사람이 불이 붙은 시대에 바울 사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두 문화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울 서신서에는 항상 은혜와 평강이라는 헬라식, 히브리식 인사가 둘 다 들어있다. 이렇게 서로의 문화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우리 교회성전이 지어지고 많은 성도들이 몰려오고 있는 와중에 기존에 힘든 시절을 보냈던 분들이 새로운 분들에게 바로 처방을 해서 상처받았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관계에서 직분을 가진 자라는 이유로 바로 처방할 때 사랑없는 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점점 오고 있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우리들 교회 청소년 부는 아무래도 고난 많은 아이들이 있다. 담당 목사님께서 이 아이들의 눈 높이에 맞춰주기 위해서 아이들이 쓰는 험한 말도 설교 중에 종종 하신다. 우리는 술 먹고 담배피는 죄인들이여 다 내게 오라하는 분위기가 있기에 그 아이들이 많이 살아난다. 어렸을 때 부터 와서 10년이 되었으니 양육을 받고 우리들교회 안에서 좋은 모범생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다. 무조건 고난만을 외치는 시대가 지난 것이다. 히브리식과 헬라식을 골고루 문화를 인정해야 하는데 판교 좋은 것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오면 핸드폰만 본다고 예배드리러 온 아이들은 못 드리겠다고 나가기도 한다고 한다. 힘든 겪은 분들은 아이들이 고난이 없어서 그런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맞추지 못 하는 것을 일축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 절대 아닌데 이것도 저것도 사도바울처럼 다 비 본질은 포기를 하고 혹은 포용을 하면서 전해야 한다. 초대 기독교에도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싸웠다. 서로 문화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은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복음을 전할 때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은혜를 빌어주며 나라, 가정, 개인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지혜롭게 포용할 때 구원의 소명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가르치다가 본질적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많은 분들이 치리에 대해서 궁금해 하였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과 치리 이것이 교회의 구성의 3요소이다. 우리들 교회는 세례를 많이 베푼다. 성찬은 항상 마음이 있다. 요즘 교회에 없는 가장 특별한 것은 치리가 있다는 것이다. 치리를 하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요즘의 형태이다. 우리들 교회는 청년들도, 평신도들도, 사역자들도 차별 없이 치를 하였다. 평신도는 돈 문제, 여자 문제가 있으면 치리를 하였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가자라는 방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교인들끼리 돈을 빌려주거나 빌릴 때 치리를 하였다. 여자문제를 늘 오픈하는 문제지만 리더쉽이 된 이후에 오픈을 할 때에는 치리를 하였다. 사역자는 수준이 더 높아서 도덕적, 윤리적 문제는 걸리지 않지만 우리들 교회의 예배와 복음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때에 치리를 했다. 겉으로 들어나는 실수보다도 진심으로 성도들에게 관심이 없고 사랑하지 않고 말 실수를 한다던지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치리를 하였다. 모두가 치리라고 표현을 하면서 권증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하셨다. 그렇게 해 왔는데 공개적으로 이승민 목사님이 처음인 것 같다. 자기 열심이 많았다고 고백한 이승민 목사님이 공개적으로 한 것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동안 치리받은 모든 분들이 거의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 교회는 그것이 다른 교회의 치리와 수위가 다른 수위라고 생각한다. 그럼 치리의 내용이 뭔가. 몇 가지 직임을 내려 놓고 감봉을 하고 설교를 잠시 쉬고 자숙하는 것이다. 그것이 큰 것 보다는 치리라는 표현만 들어도 그것 자체로 기함을 해서 훈련이 되는 것 같다. 교회를 신뢰하기에 치리를 다들 감사함으로 받는 것 같다. 골로세서의 교회를 다시 읽으면서 10년이 넘는 동안 정말 본질을 회손하지 않으려고 울며 애통하며 왔다. 그래서 이단들이 들어왔다가도 일곱 길로 도망 가는 줄을 믿는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큐티를 통해서 정말 원칙을 지키려고 무조건 노력하다 보니까 정말 그것이 감사하게도 사랑으로 느껴져서 치리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않으셔서 감사하다
적용) 본질 때문에 비 본질을 포기 혹은 허용하는가? 비 본질 때문에 본질을 포기 하는가?
2) 모든 것을 하되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전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오늘의 결론이다. 우리가 말을 해도 어디를 가도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빼면 이야기가 안 된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평가할 때 자기 생각대로 한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경제학자는 돈의 관점에서, 심리학자는 심리적 관점에서 다들 자기 세계관, 가치관을 최고로 여기고 간다. 교회도 자유주의, 해방신앙이 있다. 복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분별을 잘 해야 하는지 모른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별히 어렸을 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들 교회가 엄큐, 어큐, 청큐가 장년 큐티인과 같은 본문으로 나오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양육 받는 최고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양육을 통해서 한 사람의 소명을 받게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용)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