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골로새서 1:1~2
“소명”
사무엘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신다.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예상되면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은 역설적이다. 고통과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해서 회피하면 그 교회는 성장이 어렵고 병이 들어서 성장이 멈춘 식물과 같다. 결국 우리 다윗 때문에 우리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다는 것이다. 눈물을 먹는다는 것은 흘리는 사람과 닦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하다. 우리들 교회가 성도수도 많아지고 교회도 커졌는데 이럴 때일수록 사역의 섬세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떤 말을 하길 원하실까? 내가 초심을 잃지는 않았는가? 개척 초기에 했던 골로새서를 펴보았다. 그때가 더 뜨겁지 않았나 생각했으나 감사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건 없고 사역의 지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것이 감사하다. 개척초기에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부르셨다. 그런데 지금은 각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들 공동체 전체에 기름을 부어주고 계신다. 여기까지 온 것은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때나 이때나 개인적으로는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무엘하가 끝나니까 난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곳에서 줄 곳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의 부르심 때문이라고 했다. 길을 알기에 내가 쉬고 싶다고 쉬고, 여기까지라고 제한 짓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포기 하지 않으시고 계속 기다리셨던 아버지의 부르심처럼 생애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이 미처 전해지지 못한 그 곳에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 교회를 부르신 이 소명에 응답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골로새서 설교를 다시 하려고 한다.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같은 쌍둥이서신이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 가정중수로 모인 조그만 교회였는데 금욕주의 천사숭배 등 우상숭배적인 요소, 거짓 가르침, 이단 사상 등이 침투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우리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초대 교회에 무슨 말씀이 있었겠는가? 우리들 교회도 그렇게 큐티큐티 하지마라 하는 것이다. 종교적 혼합 주의에 물들게 된 이 사실을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보고했다. 옥중 서신이다. 옥중에서도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 사람이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수많은 사설들이 난무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완전함과 탁월함이 있다. 고난이 해결되거나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와 우리들 교회에 주신 공동체적 소명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 소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뜻이 있으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개인에 대한 의도와 기대를 말한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그 하나님에 대한 소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소명은 부르심이라는 뜻이다. 소명은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부르는 과정이라고 한다.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것을 만들거나 존재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름표를 불러서 확인하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것에 창조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것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자기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 자기 백성이 되게 한 것 같이 신약에서도 제자들을 부르셨다. 소명에는 개별적인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부르시기도 한다. 개인도 소명이 있지만 우리들 교회 공동체도 가정 중수의 소명이 있다. 말씀 묵상으로 가정을 살려내는 소명을 주셨다.
바락이 용사였지만 본인의 영광은 제쳐두고 오직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철저히 2인자를 자처하며 드보라를 따른 것이 보인다. 그러나 결국 시스라를 죽인 것은 드보라가 아니라 야엘이었다. 그런데 믿음짱에는 드보라도, 야엘도 아니고 바락이 믿음짱에 올라가 있다. 왜일까? 그때나 이때나 여자가 리더쉽을 가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전쟁 없는 시대가 80년이나 가니 남자들이 전쟁력을 잃었고, 벼락같은 남편에게 훈련받은 드보라가 사사로 세워졌다. 능력이 있었던 바락이 겸손하게 2인자로 내려갔다. 그러나 믿음짱에 바락이 올라간 것을 보면 여성 리더보다는 남자리더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지금도 여자가 리더가 되기 힘든데 그때는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시절에 드보라를 세우려니까 바락이 그렇게 세워주지 않았으면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씀으로 이런 것이 해석되니 내 주제를 알게 되었다. 말씀이 늘 내 갈 길을 알려주신다. 바로 이 일이 우리들 교회의 소명이다. 남자들을 세우고, 가정을 세워야 한다. 우리들 교회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그냥 시대적으로 하나님이 잠깐 나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이나 나라나 이런 각자의 소명이 있다.
(적용)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힘들다면 하나님의 소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2. 소명에는 동역자가 있다.
진정한 소명이라면 형제라 부를 수 있는 동역자를 허락하신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아버지가 헬라인은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개처럼 무시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제자가 되기 어려웠지만 한결 같이 믿음을 성숙했기에 디모데가 형제로 부르심을 받는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가르칠 때, 이런 제자를 키울 수 있다. 늘 내힘으로 하면 생색밖에 날 수 없다. 굉장히 오랜 세월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피아노를 잘 가르쳤는데 내가 진정한 제자를 키워냈는가.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다. 그 많은 학생을 가르쳤어도 제자가 한 두 명 전화를 할까 말까이다. 전적으로 내 삶의 결론이다. 돈을 적게 받건 많이 받건 돈 받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것이 내 삶의 결론이다. 성경을 가르치는데 돈을 하나도 안 받고 가르치는데 너무 기뻤다. 이것이 소명이다. 자기의 재능과 소명은 다르다.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으로 양육했던 학생들은 잊지 않고 많이 찾아온다. 어떤 때는 나를 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린다. 집회를 가보면 가난 때문에, 부모와 불화 때문에, 곤고함을 갖고 말씀을 들으러 왔던 아이들은 살아나서 마주친다. 사실 내 고난이 얼마나 세면 피아노 선생을 내려놓을 수 있었겠는가. 충분히 적당히 살아도 되는데, 내가 소명을 찾기 전에 함께 놀던 부류는 절대로 디모데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이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세상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내려놓게 되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에 행복이 올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무엇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그냥 내가 원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은 다 불완전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지 않은 세상적 조건이나 스펙이 있는 사람과 함께 주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어느 정도 돈 있고, 학벌 있고, 부모가 믿는 집안이고, 그래야 믿음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수준까지 끌어올리셔서 우리를 쓰시는 것이 아니고,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내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나를 불러주셨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의 가치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형제와 동역자로 인정해주십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았듯이 지금 내 옆에서 가장 가까운데서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동역자가 된 것을 본다. 진짜 어디나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듯이, 이런 과정을 다 거치는 것이다. 교회 일을 함께 나누고 같이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대단한 스펙을 가졌던 사람이 친척 친구들 다 어디로 가고, 정말 예수님을 함께 모시는 사람은 내세울 것 없는 디모데..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떠나서 같은 것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지체가 생겼다는 것에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함께 기뻐하고 울고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나를 보면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 내가 가치관이 달라졌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나..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적용)소명의 자리에 함께할 동역자가 있나? 있다면 누구인가?
동역자가 생기면 지경이 넓어지고 힘을 얻어서 골로새 같은 교회로 나가게 된다.
3. 소명에는 차별이 없다.
한사람에게 차별 없는 사람이 공동체적으로 차별 없는 그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다. 신실한 그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는 터키 서남쪽 계곡에 위치한 에베소에서는 떨어진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비옥한 곳이었다. 그런데 가공할 만한 지진이 골로새 지방을 덮쳤다고 한다. 졸지에 골로새 교회는 3류 도시로 전락을 했다. 힘들어지면 이단이 판을 친다. 내 힘든 환경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기복이나 이단으로 간다. 현실을 직면하기 싫어한다. 씀씀이를 줄이고 명예를 잃기가 싫고 직면하기 싫어서 그래도 내가 누군데 이 세상에서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상한 이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은 절대로 이단에 가지 않는다. 다 욕심 때문에 가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는 지진으로 3류 교회가 되었지만 힘들었기 때문에 학대가 많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소명이 있다면 디모데 같은 사람, 골로새 교회 같은 사람을 찾아가서 차별 없이 전해야 한다. 남에게 갈 것도 없이 당장 내 자녀를 차별한다. 며느리도 사위도 내 자식인데 이런 식으로 차별하고 교육을 시킨다. 이게 죄인지도 모르고 차별한다. 내가 사위를 징계했는데 나도 차별해서 징계했을까. 우리 자녀 중에 가장 인재이고 가장 건강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치리를 했다. 가족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기구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사람사이에 모든 인위적인 구별은 하나님 안에서 녹아 없어져야 한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그런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아무래도 가족의 모습과 유사하다. 비록 화를 내고 욕설이 난무할 때도 있지만 가족이란 내가 가면 받아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명에는 힘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적용)내가 찾아가야 할 영육 간에 힘든 골로새 교회는 누구인가?
4. 소명에는 은혜와 평강이 따라온다.
은혜는 헬라식 인사고 평강은 히브리식 인사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소수여도 선민의식이 너무 강해서 항상 히브리식인사만 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로마가 강성한 시기였다. 영적으로 최고 교만한 사람과 육적으로 최고 교만한 사람이 불이 붙은 시대에 바울 사도가 부르심 받았기에 이 둘을 다 인정해야 했기에 헬라식과 히브리식 인사를 둘 다 인정했다. 이렇게 서로의 문화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우리들 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몰려오고 있는 이 시절에 바로 처방해서 상처받았단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지적할 때, 사랑 없는 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들 교회 청소년부는 고난 받는 아이들이 많아서 설교 중에 욕도 하신다. 어렸을 때부터 와서 10년이 되었으니 이제 양육을 받고 좋은 모범생이 자라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무조건 고난만 외치는 시대는 지났다. 옳고 그름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비본질은 다 포기를 하고 포용하면서 전해야 한다. 서로서로 문화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질적이 아닌 것은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복음을 전할 때나 중요하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를 빌어주며 나라의 문화, 가정의 문화, 개인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지혜롭게 포용할 때, 이런 소명을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치다가 본질적인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 숭배를 하는 것은 절대로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치리에 대해 궁금해 한다. 우리들 교회는 치리가 살아있는 교회이다. 보통은 치리를 당하면 교회를 떠나는데, 우리들 교회는 한명도 떠나지 않았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원칙을 지키려고 무조건 노력하면서 오니까 그것이 감사하게도 성도들에게 사랑으로 느껴져서 교회를 떠나는 분이 없어서 감사하다.
(적용)비본질 때문에 본질을 포기하는가? 본질 때문에 비본질을 포기하는가?
2)모든 것을 하되,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도, 믿음의 동역자도, 은혜와 평강도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 빼면 이야기가 안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항상 자기 생각 자기 관점으로 한다. 다 자시 세계관, 자기 가치관을 최고로 여긴다. 복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분별을 잘 해야 하는지 모른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이런 교육을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 중심으로 양육 받으면 최고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양육을 통해서 한 사람이 소명을 받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적용)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하고 있는가?

<기도제목>
유진:
1. 나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도록
2. 관계에서 두려움이 없어지도록
3. 남자친구를 위해서 (소명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유정:
1.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신 자리(지금 학교)에서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제자를 키우도록)
2.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는 믿음의 동역자(베필)가 될 수 있도록
3. 영육간의 힘든 골로새 교회(동료 선생님, 왕따학생)에 찾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동료 선생님의 따님상이 구원의 사건이 되도록)
4. 남자를 세워주는 여성리더가 되도록(2인자 자처하기)
5.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 끊어내고(관계정리, 카톡차단)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만남을 할 수 있도록 모든 만남을 지켜주시길
태경:
1. 신교제, 신결혼을 분별 잘 할 수 있도록
2. 앨범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3. 생활예배 잘 드리도록(듣는 큐티에서 쓰는 큐티가 잘 되도록)
4. 회사에서 일할 때 지혜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