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
다윗이 인구개수를 하겠다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주시지 않았다. 결국 다윗처럼 나쁜 마음을 먹어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던지 교훈해주시던지 붙들어주시기 전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기도해야한다.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자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윗이 자책을 했다고 한다. 자책은 손이나 무기로 사람을 쳐서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이 그를 쳤다는 뜻이다. 이제는 간음과 쌀인의 죄를 범하고도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던 다윗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울은 여호와의 명을 두번찍이나 어기거나 불순종하는 죄를 저질렀지만 사울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사울은 이로인해 점점 교만해지고 완악하져서 죄악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자책을 죄책감으로 쓸 때도 있다. 자책과 죄책감은 다른 의미이다. 자책은 회개로 이어지는 것이고 죄책감은 책임감을 사람에게 느끼지만 회개가 아닌 후회로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적인 것이다. 자책에서 회개로 이어지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인데 다윗은 한 줄만에 인구조사가 큰 죄라고 했겠는가? 택자이기에 자신의 목적이 야망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인구조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합리화 하고 싶어도 인구조사의 목적이 불순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택자는 죄로 깨달았는데 택자로 사람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9개월 20일이 걸려서 자기죄를 깨달았는데 우리 남편은 30년이 지나도 죄를 깨닫지 못 하는데 택자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기다려요 하면 그 때가 언제인가 라고 하며 응답이 없다고 택자가 아닌거 같다고. 위로 받기보다는 부담스럽다고. 이런 질문이 끊임없이 있다. 택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택에 반응 하는 것도 택자라고 한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이 있는 것처럼 믿음에는 분량이 있어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도 있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도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숙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택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누가 깨닫고 안 깨닫고는 비교 대상은 아니다.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면 기뻐하기만 된다. 잘 분별해서 이야기 하길 바란다.
적용) 여러분은 택자라고 생각하는가? 자책하는가? 죄책감을 느끼는가?
9개월 20일이 지나서야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요압을 제촉해서 조사하라고 해 놓고 군사가 조사한거 이런조사를 신경쓰지 않겠다고 한다. 요압은 왜 이런걸 조사했냐고 속으로 얼마나 무시했겠는가? 밧세바와의 간음, 우리야의 살인, 압살롬의 반란의 뒤처리를 해준 요압은 또 다시 인구 조사를 지시하고 태도를 바꾸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왕으로서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의 마음에 신하로서 충성이 아니라 차차라리 내가 왕보다 백번낫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부하들도 요압편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구속사가 깨닫지 아니하면 같이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말 바꾸기를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나 구속사가 깨달아지지 아니하면 말 바꾸는 것 같다. 다윗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의 모습이다. 저의 유익이라기 보다는 구원때문에 이 일이 좋다고 생각하면 바꾸고 저녁에 다시 바꾼다. 최고의 리더가 자신이 말한 것을 반복하면 자존심으로 있는 남자가 그렇게 하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무시를 받을 것이다.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목사님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밑바닥을 경험해보지 않은 원칙은 누구를 위한 원칙인지 세상 사람들은 분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의 일이기 때문에 9개월 20일에 걸친 인구조사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께 큰 죄를 범했다고 태도를 바꾼다. 그렇게 구원의 일이 세상 사람에게 미련해 보인다. 다윗은 회개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구원의 일이 이렇다.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해 못 하기 때문에 욕하고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왕으로서 다윗에게 잘못된 일로 볼 수가 없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음의 종류가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에 다윗의 죄는 눈에 보이는 큰 죄가 아니다. 그런데 다윗은 통일 왕국의 큰 자리에 있고 특별한 고난도 없는데 잘못도 없어 보이는데 다윗은 죄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한 큰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자리에서 죄를 깨달았다는 것. 이것은 믿음의 정도가 엄청난 수준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다윗 정도 되면 하나님과 굉장히 친하니까 그 친한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실수한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용서가 안 되고 비참할 것 같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해보면 내가기껏 이런 것을 자랑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면서 깊은 슬픔에 빠졌을 것이다. 서울대를 입학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갔다고 했는데 기껏 자랑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하나님은 가장 큰 벌을 내리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가는 길이 아닌 좁은 길이다. 자기 부분에서 끊임없이 적용해야 할 것이 끊임없이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절대치의 수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하고 자꾸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 이것만 보면 해석이 안 된다. 그 전부터 삶을 알아야 이해가 도니다. 전도사님께서 양육을 받으면서 준비 없이 한번 듣고도 외워서 하는 것이 은사라고 할 수 있지만 일주일을 준비해서 양육을 하지만 잘 못하는 분도 있다. 하지만 비교의 대상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다를 뿐이다. 각자 적용이 다르고 회개의 내용도 다른 것이다. 은사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게 다르다. 보통 사람은 나하고 친한 사이가 아니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그 사람이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용서하기기 쉽다. 나하고 너무 친하면 요만큼 한것도 죄가 된다. 친하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다윗과 너무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하나님께서는 이럴 것이냐 평생 나와 함께 있음에도 전국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냐 하는 마음이 드시는 것이다.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다윗과 하나님은 아시는 것이다. 다윗이 너무 죄에 대해서 민감해졌다. 이것을 다윗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수에 있는 것이 아닌데 개수를 했다. 우리는 항상 상대방의 보이는 모습을 넘어서 구속사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구속사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마지막까지 다윗에게 있는 모습을 들어내신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도 아닌 자신과의 싸움 유혹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돈 많고 잘 생긴 남편들이 시간과 이러한 여러가지 여유가 있으면 유혹에 넘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있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택한 백성은 그 자리에서도 회개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기쁨이 없다. 내가 기쁨이 없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쁜 일을 해야 한다. 기쁜 일에는 반드시 수고와 고난이 동반된다. 고난을 겪고나면 내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은사를 발견된다. 예수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은사가 발견되지 않는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목표를 위해 격동시키고 목표를 이루면 기쁨이 없게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소유 하는 것 말고는 무엇을 가져도 기쁜 일이 없다. 내적인 성전이 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소명에서 아무리 기쁨을 누린다고 해도 우리는 일에 치이고 직장동료들에게 짜증을 내고 권태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일을 불필요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구조들과 싸워야 한다. 힘든 것과 비참한 것은 다르다. 자신의 일이 언제나 재밌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쁘게 일 할 수 있다. 그런 기쁨은 내가 나의 본질에 부합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 기쁘게 찾아온다.
적용) 심히 미련하게 자랑하고자 하는 세상 기념비가 있는가?
2. 징벌을 잘 받겠다는 것이다.
긴 밤을 자책하고 지세우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역대상에는 없는 아침에 일어났다고 한다. 밤 잠 못 자고 회개를 했다면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리를 복귀해야 한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속한 교회, 가정, 회사를 구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충고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을 본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해줄 선지자가 죽을 때까지 있었다. 그에게는 선견자의 말씀이 들리기에 있는 것이다. 다윗은 때마다 사무엘이 있고 밧세바 사건 때는 나단이 있고 인구 조사 때는 갓이 있다. 밧세바 사건 때에는 나단 선지자가 외서 경고함으로 회개를 했는데 인구조사 때는 선지자 갓이 오기 전에 회개를 하였다. 이게 달라진 모습이다.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때 올바르게 이야기 해줄 목자가 있고 목사가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하지만 올바른 지도자가 올바른 이야기를 하니 우리가 너무나 듣기가 싫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니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지만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실 완전함이 아니라 항상 충성됨이고 정직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혜의 말씀을 타이밍에 맞게 이야기해야 한다. 아무리 진리라도 맞지 않게 전하면 원수가 된다. 그리고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즉시 인정하는 것이다. 선교자 갓이 와서 이야기하면 즉시 인정하는 것이다. 즉시 인정하는 사람이 리더의 첫번째 자질을 가지는 사람이다.
이제 회개를 하니 죄를 사해줘야 하겠는데 너를 위하여 징벌을 택하라고 하신다. 이 전에 주어진 압살롬의 반란과 3년 기근에서는 하나님이 뭘 택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앙을 택하라고 한다. 다윗의 마지막에는 전부 다 택할수도 없는 끔찍한 재앙을 3개나 주고 택하라고 하신다. 회개 후에 응답이 이렇게 끔찍한 일로 왔다. 형벌도 회개가 있은 후에는 축복임을 알게 되는데 회개가 있기 전에는 재앙이 끝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매를 맞아서 죄가 해결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온 몸이 아플 때 어떤 아픈 치료를 해서라도 그 몸은 나아질 수 없지만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그대로 쌓여 있다. 이 땅에서 매 맞고 천국에 간다면 부도가 나도 감사한 것이다.
다른 재앙도 있으면 좋겠지만 고르기가 너무나 어려운 재앙들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나 치명적인 것이다. 인구조사가 가진 것을 조금 자랑하려고 했으나 너무나 큰 죄악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지 모른다. 이럴 때 너무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이라고 생각이 세속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1절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했다고 시작을 한다. 다윗이 인구조사 때문에만 이런 형벌을 주시면 너무나 무서운 분인데, 그래서 성경을 문맥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백성을 쳤을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압살롬을 쫓아갔을 때에 다 죽었어야 한다. 사울 왕을 세울 때에 다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치시고자 했기 때문에 전염병으로 죽으나 기근으로 죽으나 어떤 것으로 죽으나 치시기로 했다면 마찬가지인 것이다. 경, 중을 따질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치시기로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드디어 다윗이 정신을 차렸다.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는 것은 왜냐하면 그의 긍휼이 크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하나님이신데, 이 재앙으로 내가 사람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끝 없이 읽으면서 기복을 버리지 못 한다. 늘 하나님은 너무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인본주의이다. 기근은 주변 나라에서 도움 받을 수 있다. 원수 나라가 쫓아와서 쫓기는 것은 전에도 그랬듯이 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에도 도움을 청할 수 있다. 3일간의전염병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3가지를 택하라고 하면 3가지 재앙을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하고 하나님께 묻을 것이다(금식기도 등). 믿거나 안 믿거나 다 원한다. 고난 없이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십자가 없이 영광을 얻겠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음에도 모두가 이렇게 해석을 하기에 기복으로 기도하고 기복으로 응답을 받는다.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사람의 방법과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다윗의 온전한 신뢰의 표현이다. 어떤 것을 주셔도 잘 당하겠다는 순종의 결단이다. 전염병으로 3일만에 7만명이 죽는 것과 7년의 기근과 거기서 얼마나 죽을지 어떻게 다윗이 알겠는가? 다윗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긍휼은 창자가 끊어지는 그런 아픔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정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아픔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기도를 한 것이다. 다윗은 이것도 저것도 오직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긍휼이 풍성하신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손에 빠지겠다고 한다. 기도를 드렸더니 알아서 3번째 전염병을 주셨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내 죄의 대가를 잘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피해 달라고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묶이면 잘 묶여 있겠다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큐티를 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자신도 죽을 수 있겠지만 징벌을 잘 받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제일 좋은 것을 주셨다. 죄 짓고 하나님께 등 돌리는 자가 많지만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은 생명에 이르지만 회개를 모른 사람은 필경 멸망에 이르게 된다. 다윗으로 인해 다윗의 회개로 재앙이 끝날 수 있다. 이렇게 믿음의 한 사람이 중요하다.
적용) 이렇게 재앙이 왔을 때 학연, 지연, 인연을 찾아서 사람의 길을 찾는가? 잠잠히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을 기다리겠는가?
이에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셨다. 이에는 무엇인가? 다윗의 기도로 회개로 전염병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기도를 했더니 7만명이 죽은 것이다.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이 이럴 수가 있다. 응답받는 구조에 사는 사람은 7만명이 죽어도 해석을 할 수 있다. 전염병은 다른 두가지 징벌에 비해서 그나마 사람의 개입이 없이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은 맞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윗이 전염병을 택하셔서 전염병을 내리셨겠는가? 그러면 다윗이 아무 것도 택하지 못 하겠다고 기도만 하면 징벌을 안 내리셨겠는가? 그만큼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미워서 주시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사랑하는지만 보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결국 3일동안 7만명이 죽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다윗의 인구조사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징계였지만 다윗의 인구조사 범죄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선택해서 죽었다고 얼마나 원망을 할 것이다.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이 죄책감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태평할 때 지은 죄를 엄하게 물으신다. 기도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다. 에굽을 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의 강팍은 다윗의 격동케 하심과 같은 단어이다.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을 하나님이 잠시 허용하였다. 그럼에도 다윗도 그렇지만 나도 죄를 지을 때에 누군가를 통해서 회개케 하시는 것을 기도하라. 결국 이 사건으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내신다. 다윗에게는 성전 건축의 준비가 되는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건마다 하나님이 쓰신다.
적용) 기도로 재앙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단 번에 이루어진 구원이지만 내가 이루어갈 구원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기도해야 한다. 노아도 다윗도 실수투성이다. 악하고 음란한 인생인데 어떻게 예수 믿었다고 잘 되고 완벽한 이야기만 할 수 있겠는가? 너도 나도 별 볼일 없는데, 내 속에 하나님이 있으셔서 별 볼일 있어졌다. 별 볼일의 원천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집중적인 고난을 허락하셔서 이스라엘의 죄, 다윗의 죄가 큰 것을 알게 하시고 징계를 하셨다. 백성이 다윗을 배반하였고 하나님이 다윗을 건져주셨다. 하지만 그 백성은 하지만 사랑해야할 백성이다. 나를 배반해도 미워하면 안 된다. 백성이 다윗의 거룩을 위해서 수고했기 때문에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아게 하시려고 다윗의 죄로 백성을 심판하고 다윗이 아무 말도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머리가 좋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고 믿기만 하면 된다. 그날 그날 큐티를 하면 인도함을 주신다. 사람은 믿을 대상도 아니지만 미움의 대상이 아니다. 끝까지 사랑의 대상이다. 내 죄와 연약함을 볼 때 그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 늘 죄송한데 말씀을 보면서 회개의 내용과 사랑의 내용이 점점 달라져가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