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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목장보고서 (김지용 00)- 참석자ABCD[형제의 날]오바댜 1:10-162016년 목사님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아내분이 목세를 한국으로 가자고 했다. 답은 그럴 시간과 돈이 있으면 공부를 좀 더 한다며 싫다고 했는데, 벌써 9년째 목세를 우리들교회 사역자로서 섬기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섬긴다고 하는데, 여러 봉사와 기도로 섬겨주신 성도분들이 이 증거이다. 멀리선 온 손님은 어떻게 보면 잘 섬기지만, 같이 살아가는 내 옆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식구가 감기만 좀 걸려도 한 마디로 날려보낸다. 약 먹었냐느니, 병원 갔다왔느니 한다. 백성이 끌려나가고 망하는 바벨론 군대가 오는 그 장면을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다. 열왕기하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날에 예루살렘 건너편에서 불타고 있는 것을 구경하는 이들이 에돔 족속이다.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이다. 평생을 한날 한시에 태어나서 같이 자란 가장 가깝지만 많은 사연과 역사와 감정, 애증이 쌓인 두 민족이다. 오바댜는 이 에돔 족속에게 말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유다가 네 형제라고 말을 한다. 에돔 입장에서는 너무 싫고 역사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유다가 네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그렇게 형제로 묶인 공동체이다. 가정, 교회도 그렇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에돔에게하는 말씀이기도,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형제의 날, 그 재앙의 날에 함께 무너져서 망하지 않고 살아나려면 붙들어야 하는게 있다. 그 세가지를 봐보자. 1. 나도 '원 오브 뎀' 입니다. (10) 하나님께서 에뎀의 죄를 한 단어로 축약하신다. 포학이라고 한다. 에돔이 막 잔인한 폭행을 한 일은 없다. 그냥 멀리서서 구경하고 기뻐했다. 그리고 기회가 되었을 때 성에 들어가서 재물 뺏고 형제인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넘겼다.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직접 칼을 휘둘리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포학이라고 묶어서 말씀하신다. 노아 때 세상이 다 홍수로 망한 이유는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라고 말씀하신다. 같은 단어이다. 형제가 재앙을 당한 그 순간에 멀리서 구경한 것부터가 홍수를 불러일으킨 죄와 같다는 것이다. 포학이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형제이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우리가 어려울 때 남이 오지 않는 것은 그러려니 하지만, 내 가족이 무시하는 일은 정말 잔인하게 당하는 일, 포학하게 느껴진다. (11) 그날 에돔은 멀리서 있었다. 이건 가시적인 거리가 아니라, 맞은 편을 말한다. 에돔이 그냥 건녀편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실존적 거리가 너무나도 멀리 있다는 것이다. 에돔이 유다를 보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멀다. 그리고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다고 하신다. 예루살렘을 다 무너뜨리고 죽이고 끌어낸 원수 바벨론과 같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구경만 한 에돔 사람을 향해 똑같다고 말씀하신다. 에돔도 변명할 말이 많다. 그 변명이 우리의 변명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적으로 한게 없다고 하고, 하나님이 하셔야할 일이라고 한다. 이런 에돔과 우리에 대해서 너도 그들중 하나와 같다고 하신다. 에돔이 아무것도 안한 것 같지만, 멀리서 섰다. 하나님은 우리가 했냐 안했냐 뿐만 아닌 우리의 마음, 태도도 보신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 포학을 행한 것 같지 않아도 내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보신다. 목장에서, 교회에서 한 지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입시, 취직, 이별, 건강, 이혼 등 을 듣는다. 그러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면서, 기도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을 찾아가서 그 고통을 함께하는 일은 저절로 되는게 아니다. 주일날 예배당 앞에서 마주쳐도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곤 한다. 우리는 그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본성적으로 편한 존재이다. 그걸 늘 거스르며 사명 때문에 내가 살아난 은혜로 가는 것이 적용이지, 생긴 그대로는 거리두는 것이 편하다. 그 고난에 놓인 형제는 이렇게 느낄 수 있다. (11) 나는 그냥 멀리 서있었을뿐이지만, 그 형제는 더 고통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무시함을 고백하신 성도분들이 계시다. 아버지의 병원에 가야지하다가 안가게되고 임종한 것, 친구가 암에 걸려 투병을 하고 있는데 찾아가지 않은 것 등 본의 아니게 우리는 어려움에 빠져있는 가족과 지체들에게 거리두기할 때가 많다. 고난받은 형제의 맞은 편에 서있는 에돔은 다름 아닌 우리이다. 우리는 이 원오브뎀을 인정하기가 힘들다. 부모님에게 혼나본 적도 없는 목사님은 혼남을 넘어서 치리로 콘서트까지 나가셨다. 차례차례로 오다가 마지막에 오면 자기 잘못이 아닌 책임자로서 치리받는다고 말했다. 책임자지만 책임이 없는 이 행동을 우리는 바보라고 부른다. 책임자는 맞지만 내 책임인 아니라는게 말이 안된다. 같은 자리에 있음에도 마음으로는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말을 한다. 바로 이때 담임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저 사람도 치리받았으니까 치리받았으니 여기에 앉아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자격이 안되어서 못왔다고 했다. 그제서야 그들 중 하나임이 인정되고, 치리 받은 것이 있으니 자격이 되어서 섬길 수가 있다는게 깨달아졌다. 거리두기하던 것이 오히려 섬길 수 있는 사역의 자리가 된 것이다. 너무 싫지만, 원오브뎀임을 고백한다. 내가 같은 취급을 받았을 때 너무 싫은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저도 원오브뎀입니다하고 고백해야한다. 이번주에 엮이기 싫은 인생들이 있다. 교회에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주에는 오바댜말씀에 의지하여 저도 원오브뎀이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적용: 최근 가족이나 목장 식구의 어려움을 알고도 모른 체한 일은? 그 사람 곁에 가면 내가 무엇을 손해볼 것 같았나? 나는 누구와 같은 죄인이라고 인정하기가 가장 싫습니까?2. 그래도 내 형제입니다.(12) 형제의 날은 잔칫날이 아니다. 재앙을 당하는, 고난을 당하는 아주 슬픈 날이다. 그 날 방관할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방관은 마음이 실린 바라봄이다. 보면서 속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방관하다보니 내 기쁨이 더 커지는 것이다. 기뻐하다보면 앞에서는 말 못해도 친한 친구 앞에 가서 신나서 떠든다. 에돔이 망하는 유다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지 이렇게 드러내 주시는 것이다. 손은 안가도, 발은 안가도 마음은 그 형제의 고난 앞에서 향해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3) 이제 발이 성문에 들어가고, 재물이 닿는다. 모든 것의 끝에는 결국 돈이다. 형제가 망한 그 상황에 돈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다. 제일 무거운 말은 뒤에 있다. 내 백성이라고 하신다. 유다는 자기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 있다. 그걸 보며 에돔은 고소해하고 있고, 기고만장해서 잘난척해서 평가를 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유다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은 죄 때문에 심판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에돔이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열왕기하 설교에서도 성전이 불타고, 모든 기구들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성전을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신다. 망해가고 있어도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신다. 백성은 늘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변한다. 많은 경우에 원망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행위로 맡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구속의 은혜로 이끌어가신다. 망한 것 같아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신다. 아무리 밉고 같이하기 싫어도 여전히 내 형제라고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다. (14) 멀리서 있던 사람이 성안에 들어와서 그 길목에 선다. 목숨 하나를 건지려고 도망가는 형제를 잡아서 바벨론에게 넘긴다는 것이다. 방관은 가담하는 것의 반대말이 아닌, 가담의 첫 걸음이 방관인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아는데 무슨 네가 교회를 다니냐고 한다. 집에서나 잘하라고 한다. 네 삶이나 잘 살라고 한다.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던진 한 말이 유다를 막은 에돔같은 일일수도 있는 것이다. 피난처를 찾아 도피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의 말 한마디가 돌아오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보다 내 상처가 더 크기 때문에, 그리고 날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이 돌아옴으로 내가 해야하는 수고와 상처가 더 크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말을 뒤집어보자. 에돔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방관하지 말라는 것은 그 자리로 달려가란 것이다. 형제가 재앙을 당하는 그 자리로 달려가란 말씀이다. 그들의 슬픔과 아픔 속에서 들어가서 도우란 것이고, 막지 말란 말은 그들의 손을 잡아서 이끌고 가란 것이다. 그리고 넘기지 말란 말은 그들의 악함과 약함을 품으라는 말이다. 그 자리가 바로 형제의 자리인 것이다. 어떤 성도님의 언니가 이혼 위기란다. 하소연을 할 때마다 언니가 선택한 것이라고 옳은 소리만 했다고 한다. 말씀을 듣다보니 언니가 자기의 인생과 선택에 대해서 너무 후회되는 모습을 보며 자기의 모습도 돌아봤다고 한다. 공감은 커녕 바람만 넣었던, 언니가 책임지라고 말하던 모습이 오히려 이혼을 부추긴 것 같은 죄악이 깨달아져서 후회된다고 했다. 그때는 말씀으로 잘 공감해주고 가정을 지키게 하겠다고 목장에서 약속을 나누어주셨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맞는 말 때문에 더 깊은 절망과 외로움에 갇혀져 버렸다. 이제 그 곁에서 말씀으로 위로하겠다는 것이 형제의 자리인 것이다. 망하는 형제인 유다하면 생각이 난다. 요셉이 아닌 유다다. 우린 다 요셉인 줄 알고 요셉으로 이름도 짓지만, 예수님의 계보에 올라간 것은 회개의 기도를 한 유다이다. 요셉 족속을 대표해서 생각해보면, 목사님은 모든 채색옷을 입고 있지만 특별대우라고는 조금도 생각 안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잘나고 공부도 잘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꿈이 위대한 목사였다. 당연히 받아야할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요셉 족속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다보니 요셉이 아닌 유다란 말씀에 아멘이 나오지 않았다. 사역자로 섬김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아닌 유다라고 하는 말에 안나오는 이유는 사고도 안쳤음에도 사고뭉치 유다를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지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계보는 그렇다쳐도 된다. 사실 필요없다 그거. 내가 잘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요셉족속에게 속상한 것은 유다와 비교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족속의 가장 큰 특징이 비교당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요셉이 아니고 유다란 말에 아멘이 잘 안나오는 분들이 있다. 동족이다. 이 말씀에 그래도 아멘이 조금 되는 분들은 목사님이 정죄되지만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조금 놀았다고 그가 나보다 옳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다. 그리고 본성속에 우리는 내가 옳다는 마음이 장착되어있다. 내 삶이 너무 싫고 힘들어서 살기 싫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하던 때가 있다. 내 인생 망했다고 생각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이 있다. 그런 상황에도 가장 중요한 건 '나'이다. 그렇기에 절망스럽고 속상하다. 겉으로는 요셉이 아닐 수 있지만, 속으로는 다 요셉인 것이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자동으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으로 다 요셉족속이란 증거이다. 이런 우리들이 결혼을 하면, 목사님은 아내에게 사모가 아닌 아내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며 멋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뜻은 내 생각이 옳으니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란 말이었다. 그러니 결혼 첫날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위대한 목사되겠다는 사람이 아내 한사람조차 실망시켰다. 이혼 이야기가 나오면서 절망되며 목사도 못하고 이혼도 당하고 폐인처럼 살면서, 답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신학 박사 논문쓰던 그 컴퓨터로 어떻게 편하게 죽는지 찾는, 성실함에 대한 결론이 그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이 본문에 에돔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을 하면 변명을 하며 자꾸 피해나가려고하는 습관이 베어있던 것이다. 이런 요셉족속은 아무리 멀쩡해보여도 사실 소망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결론은 옆 사람 다 죽이고 자신도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히브리서에서 주님은 형제라고 말하기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우리는 다 들었으니 소망이 없고, 저런 인간이 설교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저 사람에게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스스로조차도 부끄러워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심을 믿기를 바란다. 주님이 우리같은 인생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는 부끄럼을 잘 당하고, 비교도 잘 당하고, 공동체에서 잘못 지적할 때 변명하지 않고 잘 듣겠다고 고백해야한다. 비교 당하기 싫은 그 한 사람,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면서 결단으로 고백해야한다. 그 사람도 내 형제이다. 적용: 나는 누구에게 네가 그때 어땠는지 다 안다며 돌아올 길을 막고 있나? 내가 가족에게 자주하는 맞는 말은? 내 형제인 그 사람에게 이번 주 먼저 건넬 말은?3. 없어질 나를 살리십니다. (15) 셋째 고백은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 본문인 15절은 살리는 말씀이 아닌 보라는 말씀이다. 날이란 단어가 10번이 나왔지만 모두 형제의 날을 가르킨다. 하지만 15절에 나온 날은 여호와가 만국을 벌하실 날이다. 즐거워하던 에돔에게 이제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날 내가 행한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하신다. 하나님이 확인하시는 말씀이 아닌, 작정하시고 이루실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악한 인간을 향해서 네가 행한대로 받을 것이란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될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을 그 마음대로 품었던 에돔에게 그대로 돌려주신다. 네가 형제를 판단한 그 말이 네 머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신다. (16) 마시는 것, 에돔은 형제가 망하는 날 여호와의 성산에서 그것을 마셨다. 기쁨으로 형제의 멸망을 보면서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다. 그 기쁨의 술이 그대로 그들에게 심판의 잔으로 돌아간단 것이다. 마시고 삼켜서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데, 완전한 절멸을 의미한다. 이게 형제의 고난에서 멀리 서있던 우리의 모습과 실상이다. 누구라도 심판의 잔을 받는 것이다. 주일마다 이렇게 나오는 우리도 예외가 없다. 인생은 누구나 진노의 잔을 들고 돌아가는게 기본값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면 그 잔을 들고 있는 자는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예수님은 십자가 드시기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한다. 이 잔, 내가 받아야할 심판의 잔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주셨다. 주님께서 행하셨던대로 받으시려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야하나, 우리의 죄 때문에 받으셨다. 에돔은 한몫잡으려고 성으로 들어가지만, 예수님은 성 밖으로 나와서 대신 받아주셨다. 우리는 행한대로 받으면 정말 사라질 인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와있다. 이게 기적이다. 내가 마셔야할 그 잔을 주님께서 대신 마셔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까? 형제의 날에 그 형제 곁에 서야한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시며 우리의 잔을 대신 마셔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거리두기하시는 것이 아닌 같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룩하신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에 우리도 형제 곁으로 나아가야한다. 우리의 가족과, 친구, 이웃을 향해 말이다. 교회에도 아직 은혜를 모르는 지체들이 있다. 우리 또한 그 지체옆에 서주어야한다. 마지막으로 고백할 것은 없어질 나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있을까? 매주 예배를 드리고 목장에 가서 기도하고 힘들어한다. 우리는 어느덧 받은 은혜는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받을 인정, 돈, 명예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내가 옳다는 dna 때문에 생색이 올라온다. 힘든 것에 갇혀서 살아난 것을 기억 못하고 내 어려움을 부르짖으며 불평 속에 메말라가는 우리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가 늘, 날 살아냈던, 살려내셨던 은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사건을 주신다. 고난이 올 때 힘들지만 힘들어만 하지말고, 내가 또 은혜를 잊어버렸구나, 살려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갇혀있지말고 살아내야겠다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번주에 살려주신 그 은혜를 기억해내기를 바란다. 적용: 내가 남에게 했던 맞는 말 중 돌려받으면 가장 두려운 말은? 그 잔을 주님이 받아주셨음에도 나는 아직 누구에게 행한대로 받으라고 하나? 형제의 날에 붙들어야할 것은 나도 그들 중 하나이고, 그래도 내 형제이고, 없어질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 형제는 내가 힘든 사람일뿐만 아닌, 깊게 보자면 내 자신이다. 내 옆에 힘든 사람보다 더 힘들고 불쌍한 것은 내 자신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변덕스러운 나지만 변함없이 나를 형제로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변함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뿐이다. 우리가 붙잡아야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 뿐이라고 기도해야한다. - 한주간 어떻게 살았는지A: 시험공부만 거의 했음. B: 시험끝나고 본가왔는데 아버지가 응급실에 가심. 다행히 수술 잘 되셨음. C: 시험 대체과제가 많은데, 남는 시간 과제 많이 하고 공부도 해야하는데 많이 못함. D: 스카가서 공부만 함. - 기도제목A: 시험 다음주가 마무리인데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검사 결과를 생각하면서 너무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B: 아버지 건강 지켜주실 수 있도록, 이번에 술 아예 끊으실 수 있도록. 토익시험 얼마 안남았는데 목표했던 점수 도달할 수 있도록. C: 시험 마무리 잘할수 있도록, 허리 아픈거 지켜주시도록. D: 수능날까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