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26.(주일) 열왕기하 20:14-21 「내가 사는 날」김양재 목사님
14.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15.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16.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17.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2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21.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하나님 아버지, 내가 사는 날 동안에 태평과 진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은 지난 10년을 한번 돌아보세요. 많이 변하셨나요, 그대로이신가요? 심리학자들이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은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동안도 많이 변할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별로 안 변할 것 같다”고 했답니다. 지금의 나를 거의 ‘완성형’처럼 여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실일까요? 아니죠. 착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이 무서워요. 지금 내 모습, 지금 내 삶이 마치 인생의 결론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믿음으로 하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히스기야도 그렇습니다. 많은 업적도 남겼고 죽을병도 넘겼어요.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합니까?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다 괜찮다”고 해요. 성군의 착각이에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착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사는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히스기야 마지막 기록을 보면서 함께 띵크해 보겠습니다.<내가 사는 날>첫째는,
1.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내 것만 보이려 합니다(14-15절).14절 15절이에요. 14.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_왕하 20:14-15지난주에 우리가 봤어요. 병 낫고 징표 주시고 예물도 받으니 덤으로 주어진 히스기야의 15년의 추가 시간에 첫 모습이 ‘보물 자랑’이었죠. 솔직히 세상에는 잘난 분들 많아요. 그런데 성공한 것을 자랑하려면 교회나 사회나 똑같은데 뭐 굳이 교회에 오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가 왜 이렇게 자랑을 했을까? 그 사람 입장에서 항상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구속사예요. 내가 죄를 봤다면 부자고 누구고, 학력이 있거나 없거나 항상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해요. 그래야지 우리가 싸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안 하니까 맨날 옳고 그름으로 정죄를 하잖아요.그래서 히스기야를 또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우리 구속사는 오지랖이 또 넓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렇게 자랑을 하는 데는 항상 그 속에 트라우마, 열등감이 있는 것 같아요.중근동의 강자인 앗수르는 아버지가 섬긴 나라예요. 그래서 앗수르 제사 양식까지 가지고 와서 성전에 두었던 아버지였죠.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유다의 산당들을 제거하고 놋뱀을 부수고 막 개혁을 했어요.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4년 동안 열심히 개혁하는 걸 보면서도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의 호세아 왕은 앗수르에 에워싸이면서도 마지막 망할 때 3년의 유예기간을 주셨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아서 함락당했어요. 여러분 회개가 이렇게 어려워요. 옆에서 아무리 히스기야가 개혁해도 회개를 안 해요.그런데 유다의 왕인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이 무서운 앗수르에 친앗수르 정책을 폈어요. 그죠? 무섭잖아요. 고대 근동의 강자니까. 그럼 이제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유능한 왕이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안전하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몰렉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가 잔인하다고 했지만, 여러분 폭군들이요 자기 자식은 끔찍이 끼고도는 것을 우리가 많이 보죠. 아하스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요즘 단종의 처절한 죽음을 다룬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수) 1,600만 명을 넘겼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는 권력을 위해서는 못 할 것이 없는 사람 아닙니까? 계유정난 조선 시대, 1453(단종 1)년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에서 우리가 보면 사람을 아주 많이도 죽였어요. 그런데 조선 왕들 가운데 아들 사랑은 아주 극진했던 왕으로 또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세조의 두 아들이 약했어요. 장자인 의경 세자도 빨리 죽고 예종도 약해서 1년 만에 사망을 했죠. 이제 우리가 구속사로 보면 ‘삶의 결론’이라고 얘기를 하겠지만은 그런 세조가 영원무궁한 자기 손자의 왕권의 안정까지 고민을 한 가족우상주의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권력의 결론이 ‘자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하스가 권력을 위해서 앗수르 몰렉 우상의 미신 때문에 또 다른 자식을 불에 지나가게 했어요. 죽였어요. 자식은 또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자식과 권력이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식과 권력은. 우리도 자식을 달달 볶는 이유가 결국 부모의 노후를 보장하고, 봉양하라는 것인데 이 권력을 가지면 거기까지 가지는 게 우리의 소망이에요. 그죠? 그런데 우상은 사랑이 아니잖아요.그러니까 히스기야가 아버지가 너무 잔인하게 하면서 자식을 또 죽이면서 또 자기를 또 너무나 위하는 것 같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으면서 ‘아, 이건 사랑이 아니다’ (깨달았을 것이에요.) 왜냐하면 믿음이 들어갔으니까. 예수를 아는 사람은 분별을 해요.그래서 이제 히스기야가 개혁의 기치를 들었어요. 그래서 드디어 강자인 저 앗수르 타도를 외쳤어요. 하나님께 개혁을 하면서. 대단한 거죠. 어떻게 이런 아들이 나왔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개혁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 무서운 앗수르에게 아람도 무너지고 북이스라엘도 무너진 거예요.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제 시시각각 앗수르의 공격이 유다를 향해 초읽기로 들어갔다고 생각된 후 그즈음에 병이 걸린 거예요. 통곡하고 병이 나았어요. 그런데 징표까지 줬었는데 보물까지 그득하니까 이제 ‘내가 일생의 트라우마인 이 앗수르를 이겨보겠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해그림자도 10도 물러갔는데 내가 마음먹으면!!!’ 할 거예요. 앗수르를 이겨보겠다고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보려고 바벨론에게 보물 자랑을 하게 된 거예요.그러나 여러분,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안 믿기는 마찬가지인 거예요. 먼 지방 바벨론은 나와 상관이 없을 듯하나 역시 안 믿는 그들은 나중에 유다를 아주 괴롭히죠. 바벨론에게 패망해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때 15년 추가 인생의 시작점에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닌 거예요.그러니까 우리가 이거예요. ‘일본이라는 원수만 제할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있죠. 그러니까 그냥 이 앗수르를 물리쳐야 해서. 예를 들면 나를 너무 괴롭히고 있는 안 믿는 영수를 죽이겠다고 또 다른 안 믿는 철수와 짝짜꿍이 되어서 영수를 이겨보겠다는 거죠. 이것은 믿는 사람으로서는 하면 안 되는 일이에요. 지금은 선해 보여도 사실 철수는 더 악한데요. 그러니까 이 철수와 한편 먹으려고 자기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지금 침을 튀겨가면서 철수에게 자랑을 하는 거예요 히스기야처럼. 학교에서 서로서로 자랑하면서 끼리끼리 왕따를 시키는 것도 똑같아요. 힘센 친구에게 비굴하게 복종하는 것이 너무 자존심 상해서 친구와 동맹 맺어가지고 저 힘센 친구를 타도하려고 하는 거죠. 어려서부터 악하니까 이렇게 우리나라에도 왕따가 만연해 있고. 아주 이 세상은 지금 약육강식의 시대로 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기도하는 성군이 히스기야가 이러니 우리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데요.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18장 6-7절이에요. 이거 히스기야 얘기기에요.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_왕하 18:6-7예, 작년에 설교한 건데요. 유다가 앗수르를 배반해도 그것이 모세의 계명을 지킨 것이기 때문에 이건 형통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나라로 이렇게 여러분 문자적으로 뭘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앗수르는 지금 사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을 막 죽이고 하는 이 앗수르를 배반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모세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에! 앗수르를 그냥 배반한 게 아니라, 이 모세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형통했는데 근데 북이스라엘이 지금 망했잖아요. 망했는데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도 앗수르가 아니고 18장 12절에서. 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_왕하 18:12그러니까 유다는 말씀을 따랐기 형통했고 그 북이스라엘은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패망했다는 거예요. 성경을 자세히 보니까 망한 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어요. 말씀 때문이라고, 앗수르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망한 이유는 ‘너 때문에, 나 때문에, 사장 때문에, 나라 때문에’가 아니라 ‘말씀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망하는 거예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나라가 망할 지경이에요. 누구한테 손가락질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무서운 앗수르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그래서 이럴 때 질문해 주고 양육해 주는 이사야가 필요해요.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와 교제한 것이 축복 중에 축복이었죠. 그러니까 이렇게 자랑을 하니까 이사야가 딱 와 가지고 히스기야한테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어요? 어디서 왔어요? 무엇을 보고 갔습니까?” 물어요. 이건 안부를 묻는 질문이 아니죠. 우리가 우리 입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은혜의 질문이에요. 몰라서 물은 게 아니고 입으로 자기 실상을 말하게 하려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어요. 그들은 내 궁에 있는 걸 다 봤어요. 내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게 없어요” 대답해요. 히스기야는 한 번도 주저하지도 않아요. 숨기지도 않아요. 아주 자랑스러운 것 같아요. 성군이 이래요.--;; ‘내 궁’, ‘내 창고’를 강조하고 “다! 하나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고 그러니까요. 먼 데 있는 바벨론이 자기를 알아주니까 좋고, 예물을 주니까 기쁘고, 또 보물 자랑을 받아주니까 신이 났어요. 이런 사람하고 한편 먹는다니까. 성경을 읽는 게 얼마나 이게 똑똑해지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가 큐티도 그렇고 목장도 그렇고 “요즘 어떠세요?”, “무슨 생각하세요?”, “큐티 하세요?”, “말씀이 잘 들리세요?” 이게 다 자기 실상을 드러내는 질문이잖아요. 이 질문 하나로 히스기야는 죄를 대번에 경고받죠. 때로는 기분이 나쁘지만 이런 질문이 은혜예요. 그래서 말씀과 공동체가 정말 형편없는 것 같아도 이렇게 자기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막 ‘내가 사는 날’만 붙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 공동체예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자꾸 딴 데 가려는 나를 말씀 앞으로, 기도하는 자리로 인도해 주는 거예요. 생각해 보게 하는 거예요. 한 번씩 목장에서 말씀을 들으면 와서 띵크를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다루실 때가 많아요. 아담에게도 그러셨죠. 선악과를 먹고 숨었는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물으셨죠.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라 “네 입으로 네 상태를 좀 말해봐. 네가 어디 있어? 너 요새 누구 만나? 너 지금 어디 있다 왔어?” 이게 굉장한 영적인 질문이죠. 우리가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결국 ‘내 것’만 보이려 해요. 히스기야가 그래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잘살면 된다.’ 그러면 내 것만 보이려고 해요. 하나님이 보신 내 눈물보다 내가 사는 날이 내 평안으로 가득 차면...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병이 나았잖아요. 보물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내 평안으로 가득 차면 내가 보이고 싶은 내 보물이 더 커 보여요. 아이들 학벌도, 재산도, 집도 더 커 보여. 내 차도... 계속 자랑을 하고 싶은 거예요. ▪ 적용 질문Q. 누가 꼭 물어봐 주었으면 하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Q. 반대로, 누가 물을까 봐 두려운 질문은 무엇입니까?Q. 여러분이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 그 속의 열등감,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Q. ‘망하고 흥하고’가 말씀 때문이라는 것이 100%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이 ‘붙고, 떨어지고’ 이게 다 말씀 때문이라는 거예요. ‘모세의 말씀을 따르고 vs. 안 따르고’ 이게 100%라는 거예요. 99%도 아니고! 그러니까 부도나서 망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없어서. 빚도 갚기로 작정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다 “내가 못 한다”고 생각해서 죽고 이혼하고 이러지 “이거는 안 돼!” 이러잖아요. 그죠? 어떤 나눔이 너무 바보 같지만 얼마 전 이전 지점에서 알고 지내던 후배들을 반갑게 만나 점심을 대접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자신의 현재 지점장, 과거 지점장 험담만 하면서 즐거워하다 헤어진 일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이런 것도 굉장히 즐거워~ 그죠?^^ 우리는 내 자랑하려면 남을 또 깎아내려야 되잖아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후배들 앞에서 히스기야처럼 바보 같은 얘기만 하다 돌아오면서 마음 한 켠이 씁쓸함을 느꼈어요. 얼마나 미련한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미련한 걸 아셨다는 것이 이사야 같은 공동체 덕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갔다가 띵크 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모임을 한 번 갔다가 와도 우리는 생각을 해요. <내가 사는 날> 첫째는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내 것만 보이려고 해요. 둘째는 2. 그러나 내 것은 하나도 남지 못합니다(16-18절).내 것은 없어요. 하나도 남지 못해요. 16절입니다. 16.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_왕하 20:16이사야가 질문했고, 히스기야의 대답을 들었어요. 그러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명령했어요. 명령이에요. 워낙. 이제 여기서 본문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요. 히스기야는 이미 바벨론 사자들의 말을 들었어요. 세상의 말을 먼저 듣고 세상에 알아주는 것에 너무 기뻐했어요. 그런데 이제 이사야가 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합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요? 근데 세상 말이 훨씬 크게~ 빨리~ 잘~ 들려요. 그러니 우리 마음이 이미 세상 말로 가득 차 있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리고, 들려도 아프게 들려요. 근데 이사야의 질문과 이 히스기야의 대답으로 지금 이제 히스기야는 대번에 경고를 받는다고 그랬잖아요. 예 그 말씀이 뭐예요? 17절입니다. 17.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_왕하 20:17앞서 히스기야는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그렇게 얘기를 했잖아요.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여준 모든 것이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자랑으로 “하나도”를 말했는데, 하나님은 심판으로 “하나도”를 말씀하세요. 히스기야가 자랑하며 내뱉은 말이 그대로 심판의 목록이 되어서 돌아오는 거예요. 여러분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자랑하면, 그 자랑이 심판이 되는 거예요. 히스기야는 ‘내 궁’, ‘내 창고’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이라고 하세요. 히스기야는 자기 것처럼 자랑했지만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니었어요. 조상들이 쌓아온 곳이고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어요. 그걸 자기 것처럼 과시한 순간 수백 년의 유산이 함께 무너지는 거예요. 믿음의 어머니가 기도해 주고, 할머니가 눈물로 쌓아 주고, 부모가 예배를 지키며, 물려준 그 유산까지 다 흘려보내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5천 년 동안 못 살다가 지금 이제 정말 100년이 안 된, 이 초대교회의 그 기도에 할머니, 어머니, 증조할머니, 저는 고조, 증조 제가 벌써 6대까지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그 기도가 지금 “예수가 없다”고 이러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이게 끝이 아니죠. 18절이에요. “네 거 다 가져가고 하나도 남지 않고”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_왕하 20:18심판이 내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자손에게까지 가고 그래서 아들과 딸들이 바벨론 포로의 자리, 자유와 미래가 꺾인 자리로, 지금 끌려간다는 거예요. 이 말씀은 나중에 바벨론 포로 사건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왕족 출신 젊은이들이 바벨론 궁정으로 끌려가는 장면들이 나오잖아요. 그죠? 시드기야 아들, 다니엘과 세 친구 같은 경우를 떠올릴 수 있어요. 기적으로 바벨론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죠. 다니엘이. 그러나 여전히 포로의 자리인 거예요. 자유와 미래가 꺾인 자리예요. 여러분 미국의 총리를 해도 그 사람이 나라가 없으면은요. 그 인정받지 못해요. 나라 잃은 서러움은 당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내가 사는 날’만 붙든 사람의 결말이에요. 처음에는 내가 주인공 같다가 끝에는 다 빼앗기고 내 후손까지 끌려간다는 거예요. 우리도 자식 집 건강, 돈, 학력, 이력, 경력, 사역, 경건까지 다 내 것처럼 움켜 쥐고 삽니다. 그리고 그걸 너무나 보이고 싶어 해요. 보여야 이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오.” 내 것이어서 남지 않는 게 아니고요. 원래부터 내 것은 없어요. 예. 그래서 남지 못하는 거예요. 이걸 예수를 믿어야 알아들어요.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 줄 믿습니다. 사명 때문에 주님이 잠깐 맡기신 거예요. 그러니까 “내 거! 내 거!”라고 너무 주장하지 말고요.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인정하고 주를 위해! 구원을 위해! 지혜롭게 사용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어떤 집사가 초신자인데 처음 목장에 다녀와서 너무 놀라 가지고 ‘왜 이분이 그렇게 맛있는 밥을 대접했을까?’ 그래 가지고 집에 가서 챗GPT에 물어봤대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라서 왜 ‘밑도 끝도 없이 밥을 먹이는가?’ 이게 너무 이상해서 얼마나 이상하면 GPT에 물어봤겠어요.) 그랬더니 답이 ‘지극히 작은 자와 지극히 큰 자’ 뭐 그렇게 나왔대요. 아리송하게. 이분이 딱 깨달은 게 ‘우리 집이 기초생활수급자인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래 가지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다가 ‘목사님이 부활은 증명하는 게 아니고 증인이라고 그랬는데 이건 경험해야 알아먹는 거구나.’ 그래 가지고 이제 그렇다고 믿어진다기보다 지금 믿어지기를 원하는 상태에 가깝대요. (참 잘 나셨어요. ‘믿어지길 원한다’도 아니고 ‘원하는 상태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렇게 챗gpt에 날마다 물어보세요.)▪ 적용 질문Q. 자랑해서 심판당한 경우가 있나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얼마나 기쁘게 고백합니까? Q. 나는 자녀에게 어떤 유산을 남기고 있어요? 어떤 믿음의 유산을 남기고 있습니까? <내가 사는 날> 첫째는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내 것만 보이려 합니다. 두 번째는 그러나 내 것은 하나도 남지 못해요. 그런데 이제 세 번째는 3. 그러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19-21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9절이에요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_왕하 20:19어휴, 히스기야가 어쩜 이럴 수가 있어요? 너무 지금 얌체 같지 않아요. 이사야가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잖아요. 근데 히스기야의 반응이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이러는 거예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하나님 말씀이 옳으세요. 당신이 옳으세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들리잖아요?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고요. 뒷말이 붙어요. 근데 만일 아무리 그냥 이렇게 이제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이래도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선하다’라고 하는 이유가 “내가 사는 날에, 내 성전만, 내 인생만 평안하면 된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부분의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문자적으로 보면 자손이 포로로 끌려간다는데, 나라가 없어진다는데, 후대가 굴욕을 당한다는데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괜찮으면 좋다.” 지금 이러는 거잖아요. 그죠?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겉으로는 말씀을 선하다고 받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자기 시대의 평안에 안도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래요. 내년에 전쟁이 난다고 그래도 지금 오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년은 내년이고. 에스겔 8장에 보면 그렇게 이스라엘 성전이 더럽다고 해도 장로들 70명이 눈도 끔쩍 안 하잖아요. 근데 20장에 1년 만에 진짜 망해서 “어떡하면 좋냐고!” 70명 중에 두어 사람이 와서 에스겔에게 묻죠.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_겔 20:3그러니까 그렇게 전쟁 나고 말씀을 들으려면은 안 들리는 거죠. 그때부터 부도나고 나서 말씀 안 보이죠. 남편이 죽었는데 갑자기 그날부터 말씀이 안 보이죠.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괜찮으면 좋다’는 거예요 지금. 히스기야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경건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마음엔 이기적인 안도가 이제 숨어 있어요. 근데 더 놀라운 게 있어요. 앞서 3절에서 히스기야가 뭐라고 기도했어요?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한 것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호소한 이력서가 ‘진실과 전심’이었잖아요. 19절에서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라고 했어요. 3절과 19절의 ‘진실’은 똑같은 단어고요. 3절에 ‘전심’과 19절의 ‘태평’도 같은 뿌리의 말이에요 ‘샬롬’.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 앞에 드렸던 기도의 언어가 이제는 자기 시대에 평안만 구하는 자기 위로의 언어가 된 거예요. 하나님 앞에 엎드린 말이 자기 생존만 챙기는 말로 바뀌었어요. 게다가 히스기야는 자기 죽음 앞에서는 그렇게 통곡했잖아요? 그런데 자손이 당할 심판 앞에서는 울지도 않아요. 오히려 괜찮다고 하는 거예요. 내 인생만 아무 일 안 당하면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녀를 죽이는 아버지를 결국 닮았나?’ 막 이 이 생각까지 드는 거죠. 우리 다 아버지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그러죠. 이게 ‘내가 사는 날’만 붙드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자기 눈물은 있지만 남에 대한 눈물은 없어요. 심지어 자기 후손에게도 말이죠. 자기 평안은 절실하지만, 다음 세대의 고통은 먼~ 바벨론이고 먼~ 이야기예요. 우리는 내! 건강, 내! 집값, 내! 성공엔 그렇게 민감해요. 그런데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웁니까? 다음 세대의 믿음을 위해서 얼마나 걱정합니까? 이 나라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세요? 히스기야를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너무 슬픈 거예요. 이 대목은 열왕기서를 관통하는 질문 “유다가 바벨론에게 왜 멸망 당했냐?”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이에요. 히스기야의 실책이 그 이유였어요. 어쩌면 겨우 한 번의 실수에 대한 징벌치고는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도 하나님보다 외세를 의존하며 늘 앗수르를 끼고 돌고 그냥 애굽을 끼고 돌고. 하나님을 뒷전 삼았기 때문임을 기억한다면 이 히스기야에 대한 이 벌은 아주 공정한 거예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예언을 들은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선하다고, 왜냐하면 네가 사는 날은 태평과 진실이 있다고 이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히스기야는 완전히 ‘역적’ 아니에요? ‘매국노’ 아니에요? 이게 이유를 쫙 밝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히스기야의 마지막을 어떻게 기록하는지 보세요. 20절입니다. 2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_왕하 20:20히스기야는 종교 개혁만 한 게 아니에요. 많은 업적도 남겼어요. 수도를 만드는 엄청난 공사를 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의 물 부족 문제도 해결하고 앗수르 침공에 대비해 성의 방어력을 크게 높인 거예요. 대단한 왕 맞습니다. 역대하 32장을 보면 백성은요, 히스기야를 왕의 묘실 높은 곳에 장사하여 경의를 표했다고 해요. 하지만 성경은 이걸 한 줄로 지나가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모든 업적에 대한 평가는 이 단 한 문장 18글자로 끝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대단한 업적도 큰 경의도 히스기야를 ‘내가 사는 날’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어요. 그런데 말씀은 자기 마음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어요. 바깥은 지켰는데 안은 못 지켰어요. 성은 업그레이드했는데 자기 영적 성전은 업그레이드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진짜 결론은 뭔가요? 21절이에요. 21.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_왕하 20:21히스기야 인생의 마지막 기록은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므낫세가 누구입니까? 유다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하나예요.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모두 뒤집어엎었어요. 그 결과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최악의 왕 므낫세의 등극’으로 닫히는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아이러니일까요? 히스기야는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마침표가 ‘므낫세’란 말이에요. 여러분 히스기야 곁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어요. 말씀을 들었어요. 양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히스기야는 끝내 자기 힘으로 ‘내가 사는 날’을 꺾지 못했어요. 이건 양육의 한계가 아니죠. 인간의 한계예요. 히스기야도 자기 힘으로는 안 되었는데, 누가 자기 힘으로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또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봐야 되잖아요. 이런 연약한 히스기야를 하나님은 다윗 버금가는 성군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이걸 또 생각해 봐야 돼요. 왜죠? 언약 때문에, 그게 택자이기 때문이에요. 근데 병 낫고, 징표 주고, 예물 주고. 그거는 된 거밖에 없잖아요? 아무리 양육해도 말씀이 안 들리는 거예요. 병 낫고 징표 주고 예물 주니까 말씀이 안 들려요. 히스기야에게는 두려워하던 일을 임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두려워하게 하던 일을!! 그래서 환난을 허락하시네요. 인생은 육이 무너지지 않으면 영이 세워지기가 어려워요. 이것이 히스기야를 위한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정말 눈물 어린 사랑인 거예요. 이 환난이 사랑인 거예요. 그가 앗수르 때문에 바벨론의 사자에게 보물을 그렇게 자랑했는데 ‘내가 사는 날’만 붙들고 있으니까 병 낳은 후 곧 18장에 보면 그 두려워하던 앗수르가 북이스라엘만 멸망시킨 게 아니고 째깍째깍 시시각각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가 딱 쳐들어왔어요, 앗수르가. 그러면 이때가 히스기야는 14년 개혁하고 죽을병에서 나았어요. 그런데요. 전자동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앗수르 타도!”를 외치던 그가 금세 앗수르에게 “내가 범죄했다”라고 막 앗수르 왕에게 빌었어요.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얼마 드리면 돼요?”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은 300, 금 30 내라!” 이러니까 그거 다 드리고 더 나가서 성전, 왕궁 곳간의 은을 다 주었고 자기가 성전 개혁할 때 모든 기둥에 입힌 성전 문의 금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정말 하나도 안 남기고 모두 산헤립에게 바쳤어요. 이게 히스기야 현주소예요. 백여 년 후에 바벨론에게 빼앗기기 전에 앗수르에게 빼앗기는 예행연습을 미리 한 번 시키셨어요. 그래도 유다도 정신을 못 차려요. 지금 예수 믿는 우리나라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요, 이게 왜냐하면 열왕기하 18장 16절에서 지금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 조공으로 모두 바친 은금 있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지난주에 20장 13절에서 바벨론 사자에게 막 자랑했던 은금이 그때 존재했잖아요. 그게 있으니까 자랑했는데 앗수르가 쳐들어오니까 이걸 다 뺏겨서 준 거예요. 그래서 그때가 히스기야 14년인데요. 우린 작년에 이걸 먼저 읽었어요. 그 병 나은 후 바벨론에게 자랑했던 보물을 앗수르에게 다 드렸어요. 그런데 말이죠, 앗수르가 뇌물은 다 받아먹고 곧 2차 침공을 하면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근데 드디어 히스기야가 이때 회개를 하는 거예요! 19장 3절에 “환난과 징벌과 책벌의 날”(왕하 19:3, 개역한글)이라고 구체적으로 회개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를 책벌하고 징벌하는 전쟁이라... 아팠을 때는 그런 회개 안 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히스기야에게는 아픈 것이 예 한계적인 고난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때서야 성전에 가서 산헤립의 편지를 놓고 기도했어요. 이때 진정한 기도를 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히스기야도 돈도 하나도 없고 지금 성전 기둥의 금까지 다 뺏겨서 줬어요. 돈도 하나도 없고 18만 5천 명이 쳐들어오니까 이때서야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네요, 예. 그러니까 우리가 1차, 2차 흉년 가지고 안 되고 3차 흉년. 그러니까 그때도 이거 하나님의 다 세팅에 있는 거예요. 히스기야는 내 사랑하는 자식이잖아요, “네 기도를 들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앗수르 18만 5천 명이 송장이 된 거예요.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그렇게 부족해도 언약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렇게 지켜 가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되었다며 없는 인생임에도 우리는 저절로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려고 해요. 그러니 은혜에 붙들려 살면서도 늘 힘들고 두렵고 걱정이에요. 내가 사는 것이 나이기 때문에 구원의 길을 온전히 가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도 여기 “내게 사는 것”이라 그랬잖아요. “내가 사는 날”, “내게 사는 것” 예, 히스기야와 바울이 똑같이 ‘사는 것’을 말했어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내가 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죽음은 통곡이었고 자손의 포로는 방관이었고 끝에는 므낫세를 남겼어요. 반면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이었어요. 사는 것도 그리스도고 죽는 것도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주님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주신 은혜예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은 내가 만들어내는 삶이 아니에요. 내가 사는 날을 주님께 맡기고 날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맡기신 내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고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거예요. 너무 쉬워요. 큐티하고 목장에서 나누는 거예요. 예배 오는 거예요, 유튜브 예배 언제 끊길지 모르니까 현장 예배 오셔야 돼요. 아직 끊긴 거 회복 안 됐어요. 요새 우리 울림 유튜브 채널로 말씀 내보내고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으셨어요. 붙들기는커녕 우리 위해 다 내어 주셨어요. 자기 평안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실수할 수 있어요. 아니, 히스기야보다 훨씬 더 실수합니다. 히스기야도 넘지 못한 우리 안의 한계를 그리스도께서 넘어주신 거예요.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서 우리도 그 한계를 날마다 넘어가게 하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열왕기하 18장, 19장의 그 2차 침공에서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그가 오늘 본문 사건에서 이사야에게 들은 말씀이 있잖아요. 그죠? 근데 그때는 자기 말씀으로 안 들렸어요. 그런데 앗수르가 쳐들어오니까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아섰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기에 히스기야가 다시 하나님만을 1순위로 두고 바른 방향으로 그의 연장된 인생 15년을 걸어가게 하셨어요. 그러면 이제 19절의 해석이 달라지는 거죠. 다시 한번 읽어요. 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_왕하 20:19그러니까 이사야 말씀을 처음 들을 때는 “내가 사는 날만 태평해서 선하다”고 했어요. 이것도 맞아요. 근데 1, 2차 침공을 겪고는 환난이 지나고 다시 해석을 하니까 나 같은 죄인을 아직도 내가 사는 날 동안 살려주시니 선한 거”예요.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셔서 너무 선하고, 또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는 말씀도 자기가 겪어보니까 이렇게 훈련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100% 맞으시기 때문에 “그 환관이 되리라”도 선하다고 고백한 것이 되는 거죠. 결국 므낫세도 사로잡혀 갔다가 회개하게 되잖아요. 그죠? 히스기야의 그 고백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마지막이 회개였기 때문에 성군으로 자리매김을 한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처음과 마지막의 고백이 다 맞아요. 맞지만은 택자예요. ★택자는 오늘 완전할 수 없어요. 근데 하나님이 양육시켜 가시면서 거룩하게 가시는 거죠. 역대기는 앗수르의 1차 침공 때에 그렇게 뇌물을 퍼준 히스기야의 실책을 딱 눈 감습니다. 그 얘기는 없어요. 열왕기는 일부러 히스기야의 실책을 그가 마치 변질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성경 후반에 배치해서 이건 어쩌면 히스기야가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회심한 히스기야를 통해...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어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소망하게 한 최고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잘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말씀을 열심히 볼 때, 누구도 정죄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품어야 될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그죠? 예.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몰라요. 우리는 히스기야보다 훨씬 더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가시는 거예요. 이제 고백이 달라져야 돼요. “내가 사는 날이 행복하며~ 평안하면~”이 아니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하게 도와주세요!!!”가 되어야 되고요. ‘내가 사는 날’을 붙들지 마시고 그리스도께 맡겨야 돼요! 내 평안만 구하지 말고 자녀와 후대의 구원을 구해야 돼요! 내 인생만 챙기지 말고 공동체를 품어야 돼요! 내 것을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되는 거예요! 이 길만이 우리의 ‘내가 사는 날’을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날’로 바꾸어 주는 줄 믿습니다!열왕기는 히스기야의 실수를 많이 언급했지만 역대기는요 이 전쟁 얘기 하나도 없어요. 오직 그냥 개혁한 얘기만 세 장에 걸쳐 기록했어요. 그냥 히스기야의 좋은 점만, 이것은 뭘 의미하냐면 “우리는 택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실수를 해도 천국 시민이라!” 이 뜻이에요. “우리의 실수는 다 넘어가신다” 이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히스기야가 그렇게 내탕고를 다 보여줘서 정말 그래서 바벨론 포로로 갔는데 그런 히스기야를 보고 “유다의 역적”이라고 안 한다는 거예요 그죠? 왜냐! 히스기야는 유다의 최고의 예수를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를 가져온 것보다 더 큰 개혁은 이 땅에 없기 때문에! 이런 실수 한 가지 실수로 그를 매국노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이제 행위로 평가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행위는 51:49, 52:48로 끊임없이 거룩해져가는 과정에서 실수는 늘 할 수 있지만 예수를 제대로 보여준 개혁을 했기 때문에 다윗 버금가는 성군으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거예요! 이것을 처음 오신 분은 못 알아듣지 그렇죠. 그러니까 믿는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믿는 우리는 이걸 구속사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도 “옮긴 바 되리라” 는 이사야 예언이 이 말씀이 임할 수도 있겠습니다. ▪ 적용 질문Q. “이것만 아니면 괜찮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Q. 자녀의 구원이 성적이나 성공보다 정말 더 중요합니까?Q. 요즘 내가 사는 날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에요, 나예요? 자녀예요? 돈이에요, 물질이에요? 돈이 있어서 평안해요? 태평해요? Q.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이번 주 결단하고 적용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고백한 목사님이 간증을 보내주셨습니다. 히스기야 말씀을 들으면서 참 회개가 많이 되었습니다. 전 의사가 잘 살아야 20살을 넘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듣고 기도원을 다니다가 기도원 누나로부터 어려서 당한 성추행 때문에 제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생명을 살려주시면 사명의 길을 가겠다고 서원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다가 이제 음란의 사건으로 목회 13년 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가족이 살기 위해 우리들교회를 왔습니다.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자기의 모든 것을 자랑했는데 목회를 내려놓고 이제 학교 지킴이를 했는데 레크레이션 지도자 1급 자격증으로 인기가 있어서 막 강당에 손자 180명을 담당하다 보니까 제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겸직하면 안 되는데 장애인 활동 보조 일을 하며 학교도 근무하고 장애인도 돌보고 거기다 특수교사 선생님의 추천으로 제 수업이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막 여기저기서 수업을 하다가 보니까 이제 이 일을 (벌써 우리들교회 오신 지 15년 되셨습니다. 15년 만에 처음 간증문을 적어 주셨네요. 목회자들이 그러네요.) 작년 겨울에 디스크 파열이 왔고 MRI를 보신 교수가 “신경이 다 죽었네요. 돌아오지 않아요.” 사형 아닌 사형 선고를 받고 퇴원하고 산재 처리하는 과정에 제가 겸직한 것이 드러났는데 대학원 후배가 이사야 선지자가 되어서 저의 부정과 죄를 말하는데 저는 또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결국 산재 처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지난주 설교부터 목사님의 말씀이 저에게 우레와 같이 경고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만일 산재 처리를 했다면 저는 고발당해 실형이나 그동안 받은 급여를 다 토해내야 할 판에 주여, 하나님이 또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주어서... 그래서 이제 ... 그러니까 다 지금 아프고 “하나님, 고하오니 이번 살려주시면 열심히 사명 감당하겠습니다” 하면서 (이따만하게 썻는데 이거 줄이느라고 제가 혼났네요,) 그래서 히스기야처럼 “내가! 내가!” 하며 앞으로 전개될 바벨론의 침공을 예비하지 못한 모습에서 오늘 저의 불법을 다시 회개하였습니다. 저를 생명 연장하며 호흡으로 가시니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며 앞으로는 정직히 행하겠습니다. 공동체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상처가 나았는데도 징표만 구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15년 만에 이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히스기야 설교를 듣고 이렇게 해주셨다고 그러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히스기야도 마지막에... 그러니까 지금 다 힘들지고 어려워지고 하니까 이렇게 이제 하나님께서 회개를 하도록 역사하신 거 같아요. 15년 만에 이거를 처음 이렇게 하셨으니까 목회자들은 회개하기도 참 어려운 거 같다는 생각은 이렇게 들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가진 게 있을 때 참 그런데... 하여튼요 감사하고요. 이제 말씀 맺어요.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내 것만 보이려 합니다. 그러나 내 것은 하나도 남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찬양합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기도제목 내가 사는 날만 붙잡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내가 자랑하는 내 속의 열등감, 트라우마를 직면하게 해달라고, 우리의 모든 망하고 흥하고는 말씀 때문이라는 것이 100% 믿어지게 해달라고, 누구 탓 좀 하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내가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여서! 예, 정말, 그래서 망하고 흥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랑하는 것이 심판이 되는 거, 이거 알게 해달라고. 내가 이제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우리가 예수 믿는 우리는 해석을 잘해야 되잖아요. 이 나라를 위해서, 전 세계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정말 ‘내가’ 회개하게 해달라고. 이 ‘내가’ 회개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다들 이제 정말 내가 회개하는 심령 되게 해달라고 다 같이 주님 부르고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아버지, 히스기야의 인생을 이렇게 쭉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나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인생을 살고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여서 개혁을 했지만, 죽을 병이 들고 앗수르를 이겨보겠다고 바벨론과 정말 동맹을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1순위가 되지 못하니 정말 히스기야에게는 185,000명의 이런 침입이 꼭 필요했다고 보여 져요. 히스기야는 드디어 “내가 환난과 징벌과 책벌의 날에 이르렀다”고, 이것이 징벌과 자기를 책벌하는 전쟁이었다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정말 우리가 끝없이 우리는 기복을 원하고 이렇게 병 낫기를 원하고 징표를 원하고 예물을 좋아하지만은, 이런 히스기야를 하나님은 다윗 버금가는 성군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185,000명이 수고를 했습니다. 앗수르가 수고를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성군 되기 위하여서 그렇게 엄청난 앗수르가 수고를 했습니다.주님, 우리가 누구를 손가락질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고난이 축복이라는 얘기는 그냥 나오는 얘기가 아닌데. 주님, 그렇게 우리가 행위로 판단하고 정말 “오직 믿음”이 안 되고 날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손가락질하고 서로 탓을 합니다. 주님, 정말 우리가 가족에서도 서로 탓을 하고, 전도가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악한 시대가 전도가 안 되는 가정과 교회와 나라라고 하는데,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 히스기야가 망하기 직전에 이제 심판을 100년을 유예를 했지만은 망하기 직전에 185,000명이 이렇게 쳐들어와야 되는 이 시기에, 지금 내가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히스기야가 회개하는 거밖에 할 것이 없는데, 주님! 이 모든 아버지 하나님,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전 세계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는데, 제가 먼저 회개를 합니다. 우리 한 사람의 회개가, 히스기야 한 사람의 회개가 유다를 살렸듯이, 저 한 사람의 회개가, 여러분의 한 사람의 회개가 우리나라를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주님, 저 좀 용서하시고 우리나라 살려주시옵소서. 우리 가정 살려주시옵소서. 이 전쟁의 곳곳에 아버지 하나님, 정말 히스기야처럼 회개하는 한 사람의 위정자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곳곳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나라 살려주시옵소서! 이 나라 살려주시옵소서! 이 나라 살려주시옵소서!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주여, 살려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이름을 부르는 거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내가 사는 날’의 말씀을 듣고 신앙고백으로 드린 헌금을 받아주시옵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로 결단하여서 하나님께 드릴 것만 있고 사람들에게 줄 것만 있도록, 주여 저희들의 회사와 사업과 공부와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와 물질과 건강과 관계와 목장에 기름을 철철 부어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기도제목
A: 예배가 회복 되고 가족들 지켜 주시도록B: 대구 출장 잘 마무리 되고, 일터와 비전 위해 은혜 주시도록 C: 섬기고 있는 아이들의 예배 회복과 사명과 비전 위해 기도하기D: 천국 부흥 부활 위해, 정해 주신 경계에서 기쁨으로 하루 살도록E: 지켜 주신 인생을 기억하여, 사마리아와 땅끝이 (나)라는 것을 알고 일본 선교지와 나의 구원 위해 기도하기F: 고슴도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던 것에 참-감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드리고, 괜찮고 잘했고 스스로 인정하여 평강 누리도록G: 영육을 잘 돌보고 분별의 영을 허락하시고, 돕는 손길 보내시고, 경주 평택 광주 잘 내려 갔다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