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7.(주일) 예레미야 44:15-23 「하늘의 여왕」 최대규 목사님
15. 그리하여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19. 여인들은 이르되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의 형상과 같은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하는지라
20. 예레미야가 남녀 모든 무리 곧 이 말로 대답하는 모든 백성에게 일러 이르되
21. 너희가 너희 선조와 너희 왕들과 고관들과 유다 땅 백성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분향한 일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셨고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닌가
22.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을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
23. 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난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일어났느니라
하나님 아버지, 제가 남유다 같아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전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두렵습니다. 또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전하고 잘 듣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저는 강의나 설교를 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한 강사님이 부부 세미나를 한창 진행했습니다. 세미나를 한 다음에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혹시 결혼을 한다면 지금의 남편이나 지금의 아내랑 또 할 분이 계십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약간 당황하신 강사님이 “지금의 남편이나 지금의 아내랑 다시 결혼할 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까?”라고 물으니까, 저 뒤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손을 드시는 거예요. 너무 기쁜 강사님이 “할머님, 그렇죠? 할아버님이 좋으셨죠?”라고 물으니까 그 할머님이 “다 그놈이 그놈이여~”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저도 그놈이 그놈입니다. 뭔가 선한 게 있겠습니까? “별 인생 없다”라는 우리 담임 목사님의 어록이 진짜 너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옆 분한테 인사하겠습니다. “그놈이 그놈입니다.”
1년에 두 번 진행되는 띵크(THINK) 목회 세미나에서 저는 항상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밥 잘 사주고 예쁜 6살 연상 누나를 만나 결혼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10년 동안 빚 갚는 흉년으로 말씀이 들리게 된 최대규 목사입니다.”
제가 청년부를 맡고 있어서 청년들 주례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은 다섯 쌍 중에 한 쌍이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해요. 그들에게 주례할 때 제가 이렇게 꼭 말을 합니다. “이제 교회 오빠 시대가 아니라 교회 누나 전성시대를 함께 열어 가자!”^^
여성이 참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 뒤에는 어머니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죠. 사도 바울의 동역자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봐도 여성인 브리스길라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아마 신앙 세대주가 아내가 되어서 남편을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우리 부부 목장도 권찰님이 참 중요하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어떻게 돕느냐에 따라, 무엇을 위해 돕느냐에 따라 남편뿐만 아니라 가정도, 공동체도 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들의 선택의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남유다가 다 망했습니다. 그다음에 총독인 그다랴도 암살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애굽으로 내려가 정착을 했습니다. 이때에 아내들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좋을 텐데 그들이 앞장서서 이방 여신을 섬겼다고 하죠. 어떤 이방신인가? 이름이 ‘아스다롯’입니다. ‘아스다롯.’ 우리가 늘 듣던 우상 ‘바알’의 아내라고 불리는 아스다롯입니다. 이 이름의 뜻이 ‘번식하다’라는 뜻이에요. ‘번식하다.’ 그러니까 이름 뜻처럼 자녀를 많이 낳게 하는 ‘다산’, 그다음에 ‘풍요’, ‘쾌락’ 이런 이름으로 불려진 신이었습니다.
요즘 시대의 번식이라고 하면 ‘번영, 성공’이겠죠.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요즘에 하늘의 여왕은 뭘까요? 성공을 꿈꾸는 하늘의 여왕은 뭘까요? 남편 성공, 자녀 성공을 목적으로 둔 여인에게 있어서는 참 이 하늘의 여왕이 거절하기 어려운 우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엔 외모가 너무 중요하잖아요. 돈도 높임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외모의 여왕, 아니면 돈의 여왕 이것이 하늘의 여왕일까요?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입시가 너무 중요하니까 입시의 여왕을 쫓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에 만족함이 없으니 이 무언가를 채워줄 우상을 계속 찾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21절에 하나님은 ‘내가 이것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2절에 이것은 “악행”이고 “가증한 행위”라고 계속 말씀을 하세요.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을 끊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을 통하여서 내가 끊지 못하고 있는 이 하늘의 여왕의 실체에 대해서 우리가 세 가지로 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끊지 못하는 하늘의 여왕의 실체는 ‘듣기를 거절하게 한다’는 겁니다.
1. 하늘의 여왕은 듣기를 거절하게 합니다(15-16절).
우리 15절 16절에 있는데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15. 그리하여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지금 예레미야 앞에 모든 여인, 모든 남자, 모든 백성이 큰 무리로 그 앞에 서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언급하면서 여인들을 먼저 얘기해요.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남자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왜 여인들을 먼저 이렇게 언급할까요? 그것은 이 여인들이 공동체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죄의 영향력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질서를 얘기할 때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뭘까요? 여러분 한번 고개를 한번 돌려보세요. 여러분, ‘목’이 돌아야 머리가 돕니다. ^^;; 그렇죠. 머리인 남자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결국 여자의 목(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 듣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요. 42장만 하더라도 비록 순종은 하지 않았지만 백성이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라는 물음은 했었는데, 이제는 듣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요? 오늘 말씀에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15절에 그들이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산다고 말합니다. 애굽 땅 바드로스 이곳은 애굽의 국경에 있는 곳이 아니고요, 애굽에서도 남쪽으로 내려온 깊은 내륙 지방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내륙으로 들어올수록, 국경에서 멀어질수록 바벨론으로부터 안전할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안전한 곳이기는커녕 우상숭배의 심장부였습니다. 또 이곳에 예전부터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해요. 동족이 이미 있으니까 그곳에 가기가 더 쉬웠겠죠. 그래서 우리가 모이는 무리, 내가 속한 무리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미 그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면 내가 덩달아 죄를 짓는 건 참 쉬운 일이니깐요.
이 바드로스라는 지역에 ‘테베’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테베라는 고대 도시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거대한 우상 신전과 무덤들이 있었다고 그래요. 이 테베가 지금 이집트의 ‘룩소르’라는 도시라고 해요. 여러분, 나중에 한번 집에 가서 찾아보셔요. 지금은 찾지 마세요. 룩소르라는 도시를 찾아보니까 저도 이집트 여행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참 한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그때 남겨진 고대 유적들, 신전의 기둥들 그리고 기둥들에 새겨진 벽화가 사진으로만 봐도 그 위용이 정말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러면 그 남유다 사람들이 다 황폐해진 남유다를 뒤로하고 애굽으로 와 그 신전들과 애굽의 문화와 애굽의 언어와 애굽의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것들을 봤을 때, 점점 그들은 애굽의 가치관에 녹아들었을 겁니다. 말씀에서 점점 멀어지고 이제 애굽의 영향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흐려지기 시작했을 겁니다.
저희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저희 아들이 어른이 되면 꼭 살고 싶은 동네가 있는데 서울의 잠실에 사는 게 꿈이래요. 어떤 잠실이냐면 롯데타워가 잘 보이는 잠실이랍니다. 그래서 “롯데타워에 살고 싶은 거야?”라고 물어보니까 “아니, 롯데타워가 잘 보이는 데서 살고 싶다”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이요, 판교 옆에 있는 ‘사송동’이라는 곳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어요? 아는 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마치 나사렛처럼, 자신의 이름을 점처럼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동네에 제가 살고 있습니다.^^ 동네에 공장이 많아서 밤이면 편의점밖에 갈 데가 없는 그런 동네예요. 우리 아들이 그런 동네에 살다가 롯데타워를 한번 가보니까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잠실에 사는 게 꿈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어요. “믿음대로 될지어다.” ^^
여러분, 황폐해진 남유다에 돌아가면 살길이 막막할 것 같은데, ‘나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신식 교육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점점 말씀이 듣기가 싫어집니다. 이미 그들 안에 우상이 점점 커져 귀를 막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이 왜 그렇게 애굽에 가지 말라고 하셨는지 조금 이해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어디에 있어야 안전한가?‘라는 질문보다 ’내가 과연 어디에 있어야 말씀을 듣기에 적합한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말씀 듣는 구조 속에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애굽의 영향을 받으며 애굽의 눈으로 예레미야를 딱 보니 백성이 얼마나 예레미야가 무시가 됐을까요? 세상의 왕 애굽의 왕, 바벨론의 왕은 저렇게 건재한데, 예레미야가 너무 무시가 되었을 겁니다. 하찮게 여겨졌을 거예요.
그래서 17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겠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레미야 너의 말보다 이제 우리 말을 더 믿고 우리가 말한 대로 그냥 살아보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제 우리의 판단을 더 믿고, 나의 판단을 믿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서원하면서 맹세까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황폐한 가정, 황폐한 직장으로 돌아가라고 그만 좀 얘기하세요! 제가 얼마나 잘 살 수 있는지 한번 제가 보여드릴게요!”라고 하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헛된 맹세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때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예레미야를 두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를 막고 허송세월하는 것이죠. 저에게도 때마다 예레미야가 있으셨어요.
지금도 사랑으로 저를 양육해 주시는 담임 목사님이 “최 목사는 묻지를 않아”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묻지를 않는다’고 양육해 주십니다. 또 “뚱뚱한 목사에게 들을 것이 없다”라고 촌철살인 해 주시는 권사님이 저한테 계세요. 그런데 권사님 죄송해요. 제가 조금 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작년에 “요요 올지어다”라고 정지훈 목사님이 이곳에서 기도를 했어요. 기도발이 좋으신 우리 정지훈 목사님…… 또 제가 목자가 처음 됐을 때 저희 부목자님이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셨는데 저에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목사가 아니다.”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말 제가 오랫동안 귀를 막고 듣지 않겠다고 무시한 예레미야가 계십니다. 지금은 천국에 가신 저희 장인어른 아버님이세요. 저는 25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장인어른을 처음 뵀을 때 연세가 70대 중반이셨어요. 처가에 가서 뵀던 장인어른의 모습은 인생의 여러 풍파와 실패를 맛보시면서 정말 깊은 좌절감에 빠지시고, 자녀들에게는 수억 원의 많은 빚을 남기시고, 본인은 부엌 끝에 작은 방에 자신만의 동굴을 만드시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 방 안에는 겹겹이 쌓여 있는 수많은 책, 그리고 자신만 누울 수 있는 침대와 작은 TV가 전부였어요. 하루 종일 책을 보시며 신문 스크랩을 하셨습니다. 식당에 가시면 고성을 지르시거나 식당 아주머니들과 싸우시는 통에 가족들은 아버님과 함께 외출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보면 참 많이 무시가 되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아버님의 삶이겠지요. 실패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셨잖아요.) 13살에 북한에서 홀로 내려와서 혈혈단신으로 외로이 오랫동안 사셨기에, 그런 삶이 만들어낸 모습이었겠죠. 그런데 저는 장인어른의 그런 삶을 이해하기보다 장인어른이 너무나도 무시가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 중 하나는 제 마음속에 돈을 사랑하는 우상이 가득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는 장인어른의 말을 내가 들을 필요가 없다’라는 너무 완고하고 악한 마음이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이 얘기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외로우시니까. 가족들은 잘 얘기를 안 들어주니까 사위인 저를 불러다 놓고 1시간씩 얘기를 하셨습니다. 본인이 책에서 본 내용들을 이야기하시면서 제가 목사이니까 “목사가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말씀부터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속으로 참 너무 ... 그랬어요. ‘자녀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아버님인데 저런 얘기를 하셔서 뭐 하나, 아무것도 남겨줄 것이 없는데 저런 말씀하시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하면서 저는 귀를 닫았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작정한 남유다 사람들처럼 제 마음도 그랬습니다.
2020년 1월에 88세가 되신 아버님이 고관절이 다치시면서 수술도 되지 않아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몸이 쇠약해지셨어요. 자녀들에게 참 많은 서운함과 빚도 남겨주셨지만 그래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평생 북에 계신 어머니. “오마니”라고 부르셨어요. 오마니. 북에 계신 오마니를 보시는 게 평생 소원이셨던 아버님은 금강산에도 몇 번 다녀오시기도 하셨습니다. 자녀들은 아버님이 천국에 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전했지만 바램과는 달리 “내가 예수가 길이고 진리인 것은 믿겠지만, 생명인 것은 믿지 못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일평생 내 오마니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너희들이 말하는 천국에 우리 오마니가 계시지 않으면 내가 천국에 갈 이유가 없다. 그곳이 나의 천국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 마음속에는 애통함보다는 ‘아 그냥 좀 믿으시지. 이렇게 가족들을 힘들게 한 세월이 많으신데, 이것마저도 힘들게 하시네.’ 애통함보다도 무시의 마음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무시와 회개를 계속 반복하면서 아버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는 것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혹 북한에도 교회가 있다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는데, 어머니께서 혹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셨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머님이 만약 지금 천국에 계시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고 물으니까 아버님이 말씀을 못 하시는 거예요. “꼭 천국에 가셔서 어머니를 한번 찾아보세요!” 이것이 성경적으로 맞느냐는 이야기를 떠나서 그 이야기에 아버님의 마음의 문이 열려서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2020년 1월 6일 임종이 가까운 그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목사인 사위인 제가 아버님께 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누가복음 1장 77절부터 79절까지입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아버님 귀에 말씀을 읽어드리는데 아버님이 반응을 하시는 거예요.
“아버님, 최 서방입니다. 아버님, 오늘 죄사함을 받으셨대요.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대요. 천국 문에서 예수 이름으로 들어가실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아버님이 고개를 이렇게 끄덕이시는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과 마지막 한마디씩의 인사를 끝내고, 아버님은 30분 뒤에 소천을 하셨습니다.
제가 왜 이 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드리냐면, 제가 오늘 말씀의 예레미야의 말을 듣기를 거절한 남유다의 모습이 제 모습이라는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는 14년 동안 아버님 앞에 앉아서 듣기를 거절하고, 무시하고, 듣는 척을 하고... 사실 아버님도 아셨겠죠? 그런데도 아버님이 그렇게 얘기하시는 건 저는 지금도 사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사실 하나도 마음으로 진정으로 들어드린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은 제가 사위라고 또 목사라고, 그리고 “아버님, 이 말씀을 믿으셔야 해요.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그 말을 아버님은 진심으로 받아주시고, 눈물 흘리시면서 천국에 입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누가 예레미야일까요? 제가 예레미야일까요? 아니면 저희 아버님이 예레미야일까요?
적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Q. 내가 꿈꾸는 여왕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예레미야는 누구인가요?
Q. 내 말을 증명하려고 헛맹세까지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Q. 말씀을 듣고 거절하는 나보다 듣고 순종하는 그가 나보다 옳다고 인정되나요?
자, 우리가 끊어내야 될 하늘의 여왕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 하늘의 여왕은 본래 하던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겁니다.
2. 하늘의 여왕은 본래 하던 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17-18절).
우리 17절 18절 한번 읽어볼게요. 17절 18절 시작
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그들이 이제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참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듣지 않으면 해석이 틀어지고, 해석이 틀어지면 결론이 틀어지고, 결론이 틀어지면 삶이 틀어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우리가 섬겨왔던 하늘의 숭배를 끊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도 구속사를 모르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 왔습니까? 배우자가 나를 배신하고, 자녀가 속을 썩이고, 질병에 고통받고, 사업이 부도나고, 돈이 모자라서 전전긍긍할 때 말씀이 없는 우리의 삶은 “아! 내 인생은 망했구나. 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더 이상 살 길이 없구나!”라고 해석을 하고 이혼하는 것 외에, 죽을 것 외에 다른 결론이 나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행복을 쫓아 결혼했습니다. 20년 전에 제가 전도사를 했는데요. 그때 사례비가 30만 원인가 50만 원인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결혼했겠습니까? 아내가 직장을 다니니 ‘아! 아내 덕을 보면서 아내한테 기대어 살면 되겠다.’ 싶어서 결혼을 했습니다. 가장이잖아요. 남자로서 ‘아내를 내가 책임져야지!’ 이런 마음보다 ‘아, 그냥 아내한테 기대서 살면 편하겠다. 내가 꼭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겠다’라는 마음에 결혼을 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것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어떤 분이 제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쓰레기시네요.” 이렇게 얘기하시는데 사랑도 했어요! 여러분! 사랑이 근데 너무 이기적인 사랑이어서 문제였지 제가 막 돈에 팔려 가고 막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막 이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막 제가 어디 섬에 팔려 간 것처럼 결혼에 팔려간 걸로 오해하는데 정정을 좀 해드릴게요. 사랑은 했는데~ 사랑은 깔고~ 사랑은 까는데, 너무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약간 이렇게 정정해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네 다시 얘기할게요. 네 이거는 원고에 없었는데.^^;; )
참 이렇게 결혼할 때 여러분도 아마 꿈꾸는 결혼이 있었을 거잖아요. ‘결혼하면 이렇게 될 거다’ 저도 그런 걸로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안정적인 수입이 아내로부터 계속 나오니 그걸 잘 모아서 나중에 유학도 가고, 유학이 아니면 그래도 우리가 주를 위해 선교도 가고, 그런 안정적인 수입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뭘 해도 되겠다’라는 제가 그런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명보다는 그런 제 개인적인 어떤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빚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정말 캐도 캐도 빚이 나오더라고요.^^
저도 성경책에 손을 얹고 결혼했는데... 제가 부산에서 결혼했거든요. 목사님 주례로 결혼을 했고, 그다음에 평생 사역자의 가정으로 살 거라고 막 기도했는데, 그렇게 결혼을 했는데, 그런 저의 기대가 무너지니. 제 안에 ‘결혼을 괜히 했구나’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내가 결혼을 괜히 했구나’
오늘 남유다 사람이 “하늘 우상을 폐하면서부터 우리가 궁핍해졌다.”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저도 해석이 안 되니 ‘그냥 내가 결혼을 잘못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고단해졌구나’ 라고 제가 그렇게 막 해석을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석을 하니까 어때요? 삶이 괴롭고, 아내를 미워하게 되고, 처가 집은 더 싫어하게 되고. 이런 게 제 마음에 너무 지옥같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고 또 설교도 하고 찬양도 하니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양 거짓된 포장으로 이렇게 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예레미야 설교를 준비하는데 왜 마음이 이렇게 또 어렵고 힘들까?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그래도 진실한 설교자였어요. 말씀 임하는 대로 그냥 얘기했어요. 그런데 저는 늘 거짓된 포장으로 설교를 했던 것이... 그런 시절을 보냈다 보니까, 이 예레미야가 참 저한테 너무 많이 힘들고 어렵더라고요. 저는 우리들교회에 오기 전까지 정말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우리들교회를 와서도 당분간은 해석을 하지 못했어요.
2016년 1월 30일 제가 우리들교회의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이 ‘불신결혼’이었어요. ‘난 교회에서 결혼했으니 불신 결혼이 아니야’라고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냥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양육을 받고 제 삶을 돌이켜 보니까, 하나님이 저한테 말씀하시는 것 같은 거예요. “대규야! 네가 한 결혼은 신결혼이 아니야. 모양은 신결혼이었지만, 교회에서 결혼했지만, 너는 정말로 불신결혼한 거야!”라고 주님이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왜냐하면 신결혼에 대해서 자꾸 알아보니까 ‘나의 반을 버리고 상대방의 반을 채우는 게 신결혼입니다. 거룩을 목적으로 두는 게 신결혼입니다.’ 라는 얘기를 듣다 보니까 저는 그런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나의 반을 버릴 생각도 없고, ‘상대방이 다 나를 맞춰줘야지만 행복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결혼을 꿈꾸니 제 결혼은 신결혼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도 말씀 없이 정말 엉뚱하게 제 삶을 해석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지금 엉뚱하게 해석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힘들어도 계속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래요.
남유다 백성은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무엇입니까? 우상숭배를 할 때 왜 벌을 내리지 않으신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래 참으신 거예요. 그들은 그 참으심을 우상의 축복이라고 잘못 해석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우상숭배를 폐했을 때부터 문제였다’라고 얘기했던 그때가 요시야 왕이 개혁했을 때입니다. 여러분, 남유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이 하나 나왔잖아요. 근데 그 율법책을 딱 보니까 너무 회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옷을 찍고 막 회개하면서 이제 명령을 내립니다. “이 나라의 산당을 다 제하자!” 그러면서 “이 나라의 하늘의 여왕을 섬기는 우상을 다 제하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참 너무 잘한 것이죠. 그런데 그 이후에 요시야 왕이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 나가게 됩니다. 근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역대하 35장 22절에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애굽 왕 느고랑 싸우러 나가는데 하나님이 그(느고)를 통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아니다! 싸울 게 아니다.” 그런데 그 말을 안 듣고 요시야 왕이 끝까지 전투를 밀어붙여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생긴 일이죠. 그런데 이 남유다 사람들은 그때 그것을 막 상기하고 생각하면서 ‘아! 요시야 왕이 죽은 일은 하늘의 여왕을 패했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없던 허위 기억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근데 여러분 한두 사람이 잘못된 기억을 가질 수 있지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기억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집단이 기억을 공유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이걸 “집단적 오기억” 집단적으로 다 잘못된 기억을 한다는 거예요. 찾아보니까 이게 ‘만델라 효과’라고도 부른답니다. 참 너무 신기했어요. 왜냐하면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이 2009년에 ‘투병하고 있습니다’라는 뉴스가 나왔대요. 그런데 그때 많은 사람이 ‘만델라 대통령은 1980년대에 감옥에서 투옥하다가 이미 죽은 거 아니야?’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조사해 보니까 그 당시 뉴스에 “만델라가 감옥에 갇혔다, 정치 지도자들이 많이 갇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결핵에 죽는다. 정치 지도자들도 결핵에 죽는다.”라는 뉴스 보도를 많이 보고 사람들이 ‘아! 만델라 대통령이 결핵에 걸려서 이미 1980년대에 죽었구나!’라고 다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이렇게 ‘집단적으로 잘못된 기억을 할 수 있구나’라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게 된 것이죠. 여기 많은 사람이 있는데요. 집단적으로 잘못된 기억을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억보다도 기록이 훨씬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큐티를 적으면서 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은혜를 받은 것들이 많은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다 그것도 이상하게 기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이 현실이 너무 힘드니 “그때가 좋았지~~” 합니다. “그때가 좋았지~” 하며 과거를 다 미화해요. 그런데 돌아가야 할 그 자리를 생각해 보니 우상숭배하는 자리밖에 없는 겁니다. “그때가 좋았지~”라고 하면 다 죄짓는 자리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 보세요!) “우리 조상, 우리 선조, 우리 왕들, 우리 고관들이 거리에서 성읍에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전제 드린 것” 이거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겁니다. 그거밖에 없었기 때문인 거예요. 우리가 부모님의 우리 가족들의 부부 싸움 이혼, 재혼, 바람, 도박, 폭력, 술, 혈기, 무시, 자살, 담배, 쇼핑, 폭식, 음란물, 게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참 지긋지긋하다. 싫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어느샌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나도 자연스럽게 그 모습이 저절로 배어 있다는 것 때문에 또 한 번 놀랍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우리 아버지의 그 모습이 나에게 또 배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생각은 의식의 영역인데 말은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제발 생각 좀 하고 좀 말해!”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이미 내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악한 것을 늘 몸으로 익혀 갑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본래 돌아가려고 하는 그 자리를 끌어내고 새롭게 돌아가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이것을 훈련하는 겁니다. 큐티하고 생활 예배드리고 목장 오는 것은요, 몸으로 계속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편법이 내 몸에 익었던 것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것을 내 몸에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저도 자녀를 기르는데 자녀 양육이 참 어렵습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잔소리를 아무리 한다고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시험당할 때, 내가 상처받았을 때, 내가 혈기가 날 때,
내가 정말 회의감이 들 때, 내가 정말 사람이 싫어질 때,
사람이 믿어지지 않을 때!
내 원래 본래의 성질대로라면,
아니면 내가 과거에 본래 행했던 대로라고 한다면,
아니 본래 우리 부모님이 행했던 대로라고 한다면
(본래)갔을 그 자리에 가지 않고 하나님한테 가는 것! 그걸 보여주는 것이 자녀 양육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본래 나는 절대로 묻지 않는 사람인데 이제는 조금 물어보게 돼요. 이 ‘본래’가 아니라 ‘이제는’이 되는 것!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보다 더 값진 것을 물려 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본래로 행하는 건 다 숭배하는 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본래 다 죄를 숭배하고, 세상을 숭배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그냥 잘 먹고 잘살고자 온갖 것을 분향하고 전제했습니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보다 이런저런 분향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해요. 예배는 항상 죄 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은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돼요. 회개 없는 죄 사함은 없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숭배에 죄 사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거래만 존재한 거예요.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과의 거래처럼 드리면 그것이 우리가 본래 숭배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가족분들이 참 많이 오십니다. 청년들도 참 많이 와요. 처음 교회를 찾아오는 청년들도 많이 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중학교 때까지 교회를 잘 다니다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청년들도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한 돌아온 청년이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잘 다녔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났다가 부모님이 교회에 계시니 다시 그냥 부모님이 있는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내가 언젠가는 교회로 좀 돌아가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어떻게 여러분 이런 은혜가 있을까요? 저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돌아올 믿음의 자리를 잘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청년 자매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린 시절에 아빠가 술 마시고 때리고 가출하고 이런 게 비일비재했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랑 싸우면 하루 이틀씩 꼭 가출하는데 자기 혼자만 이렇게 집에 남겨졌다는 거예요. 안방 서랍에 이혼 서류가 있는 것을 늘 확인하면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사춘기가 되면서 방황이 시작되고 자해까지 하고 학교도 잘 가지 않고 부모님과 갈등이 점점 극에 달해지면서 우리들교회에 오게 됐다고 합니다. 오니까 나누는 청소년부가 좋아서 나누면서 또 은혜도 받고 좋았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의 사랑이 부족했다고 생각한 자신이 이제 남자 친구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외로움을 해결하고자 남자 친구를 만나고 끊임없는 불신교제를 계속하면서 혼전 순결도 지키지 못했다고. 근데 그런 와중에 부모님은 교회에 정착하셔서 아빠의 방황의 주기도 이제 길어지고 두 분은 목자까지 되신 거예요. 그러면서 대학에 졸업할 때쯤에 취업을 또 해야 되니까 또 돌아온 거예요. 양교도 받으면서 “하나님, 취업이 되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또 취업이 됐어요. 또 그때뿐이에요.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고 이제 코로나로 인하여서 또 교회를 잘 못 가는 상황이 생기니까 “아니, 내가 이렇게 열심히 돈 벌고 내가 밥 굶어가면서 일하면서 돈을 버는데 무슨 십일조를 드려야 돼? 혼전 순결은 대체 또 왜 지켜야 되는 거야?” 이러면서 또 교회를 떠났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 어린 간절한 전화 한 통으로 처음으로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 남자와 헤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 계기로 인하여서 다시 교회로 돌아와 부서를 섬기고 예배를 섬기며 회복이 되고 있다고. 그런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대요. 그런데 때마침 봉헌하는 날 제가 십일조를 드리게 되는 적용을 하게 됐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까지 내 삶을 책임지실까? 개입하실까?’ 늘 궁금했는데, 작은 기도 하나 작은 생각까지도 하나님이 다 아시고 제 삶을 계획해 나가신다는 것이 이제는 믿어져요.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고백이 되어져요.”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까요? 왔다 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떠났다 돌아왔다. 우리 부모님이 참 힘드셨겠죠? 하지만 믿음으로 자녀에게 돌아올 자리를 잘 준비하고 계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왜 애굽에 살고 싶지 않겠어요? 뭐 말씀을 듣고 싶어 하겠어요? 그 때에 내가 본래 가려는 그 자리가 여러분이 계신 신앙의 자리라면 우리는 굉장히 성공한 부모님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적용 질문드릴게요.
Q. 자꾸 돌아가고 싶은 옛 자리는 어디인가요?
Q. 구속사가 아니라 세속사로 해석해 잘못 결론 내린 것이 있나요?
Q. 내 자녀가 돌아올 신앙의 자리는 준비되어 있나요?
우리 끊어내야만 하는 하늘의 여왕 세 번째는 교묘한 혼합주의로 포장을 합니다.
3. 하늘의 여왕은 교묘한 혼합주의로 포장합니다(19절).
우리 19절 한 절인데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9. 여인들은 이르되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의 형상과 같은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하는지라
여인들이 이제 대놓고 막 큰소리로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는 너무나도 교묘한 것이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있어도 괜찮다’라고 착각하게 하는 거예요. 여인들은 “하늘의 여왕 숭배가 엄청난 배교가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 가정에서 아주 좋은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분향하는 게 뭘까요? 분향. 애굽이나 바벨론의 그런 이방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신전들 안에서 막 그 신전 창기들과 음란한 것을 행하면서 이런 제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제사를 하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거부감이 좀 들잖아요. 우리도 타 종교에서 하는 것 중에서 예를 들어서 대놓고 나쁜 짓같이 보이는 걸 하라고 하면 ‘그거는 아니지!’라고 우리가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남유다 사람들이 말했던 그런 우상숭배의 분향과 전제는 무엇이냐면, 일단 자기 집 지붕 위에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조그맣게 가족 제단을 만들고 이제 향을 피워 올리는 거예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향을 쫙 피워 올리는 겁니다. 그게 기도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와~ 이거 진짜 밤하늘 보면서 옥상에서 불 피운다고? 이거 완전 캠핑이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맞죠? 너무 좋아 보이는 거예요. 멋져 보이고 고기도 굽고 막 이렇게.
전제가 뭐냐면요. 포도주나 독주를 땅에 쏟는 겁니다. 땅에 쏟음으로써 하늘에서 비를 내려서 이 땅을 적셔 준다라는 것을 기원하는 거예요. 많이 얻고 싶으면 많이 쏟으면 되는 거예요. 축제처럼. 맞죠? 막 쏟으면 돼요. 저는 그냥 이거 딱 하면서 여름에 그거 알죠? 물 막 뿌리는 거. 워터쇼 막 이런 거. 워터쇼가 아니라 뭐죠? 예 흠뻑쇼! 막 물 쏘는 것. 저는 그냥 개인적으로 묵상하며 그런 게 연상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숭배의 하이라이트는 이제 밀가루를 잘 반죽해 가지고 이제 모양을 만드는 거예요. 여신의 모양을 이렇게 만들어~ 저렇게 만들어~ 여신의 모양을 만들고 여신을 상징하는 별 모양도 만들고 초승달 모양도 만들고 이렇게 빵을 구워가지고 그 제단에 올리기도 하고 가족들이 오순도순 이렇게 만들어서 먹습니다. 이게 예레미야 7장 18절에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지붕 위에서 과자를 굽고, 술을 붓고, 온 가족이 나눠 먹습니다. 한마음으로 자녀는, 아버지는, 아내는 각각각 자기 일을 척척척 해 나갑니다.
너무나도 이 겉모습만 보기에는 아름답고 따뜻하고 좋아 보여요. 그러나 본질은 하나님이 없는 거짓 화평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을 화를 일으키신다고 하시는 겁니다. 너무 교묘하지 않습니까? 근데 이 사람들이 이 여인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19절 보면요. “우리가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제가 드렸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남편의 허락받고 하는 거예요!”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남으라는 예레미야 앞에서 “남편이 하라고 해서 하는 거예요~” 라고 남편의 뒤에 숨어서 핑계 대고 있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여인들은 무엇을 가지고 와서 얘기하냐면요. 율법을 가지고 와서 얘기하는 겁니다. 민수기 30장 7절에 보면 여자들, 아내들이나 딸에 대한 율법이 나오는데 서원과 맹세에 대한 율법이 나와요. 여자들이나 아내들이나 딸이 “내가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거나 서원할 때에 남편이나 딸의 아버지가 그것을 승인해 줘야지만 그것이 인정되는 겁니다. “이렇게 할게요”라고 할 때 남편이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것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얘기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님, 보십시오. 우리 남편이 이것을 허락해서 제가 하는 겁니다. 저희는 지금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고 하면서 율법의 한 부분만을 딱 가지고 와서 “지금 우리가 정죄 받을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닙니다.”라고 합리화를 하는 것이에요.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편에게 허락받았어요.” 이 말 한마디처럼 “저 교회 다녀요.”라고 하는 이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세상 가치관이 담겨 있는 성공과 자녀 교육과 돈을 사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저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니 문제가 없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복은 항상 이렇게 우리 가운데 가장 교묘하게 찾아오는 혼합주의입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너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 안을 들여다보면 정말 온갖 우상들이 가득하죠. 오늘날의 혼합주의는 정말 우리 가운데 ‘문화’라는 이름으로 매력적이게 찾아옵니다. 재미있으면~ 힐링이 되면~ 그것이 나의 자기계발이 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이 세상의 무속이라고 말하는 것들, 전생, 성적인 혼합주의, 불륜이라고 심지어 말하는 것, 아니면 가정을 깨뜨리는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힐링이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스며듭니다. 아무런 비판적인 사고 없이 수용한다면 우리는 우리 영적인 경계선이 다 무너져서 나중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게 우리가 쫓아내야 될 교묘한 혼합주의일 것 같아요.
영상을 제가 유튜브에서 하나 봤는데요. 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제가 법륜스님 영상을 하나 봤습니다.^^ 네, 법륜스님 영상을 봤는데 한 여성이 이렇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결혼하고 아이 두 명을 낳았는데 사는 게 힘들어서 이혼을 했습니다. 좀 살다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재혼을 했는데 사는 게 참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제가 뭘 잘못했을까요? 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참 이 여성분이 표정이 진짜 너무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사실 참 우리가 목장에서 좀 듣는 얘기잖아요. 여러분은 그럴 때 뭐라고 대답하실 것 같아요. 나름대로 여러분의 생각이 또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 스님이 뭐라고 대답할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제가 계속 들어봤습니다. 그 스님의 첫 대답이 “왜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 번도 못 해 본 결혼을 두 번씩이나 했는데 얼마나 잘하신 겁니까?” 이러더라고요. “저는 낳아보지도 못한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길렀는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너무 잘 살았습니다.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사셔요.” 이러더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댓글에 뭐라고 썼는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댓글을 찾아봤어요. 첫 번째 가장 위에 있는 댓글이 이렇게 돼 있었습니다. “교회는 매일 죄를 보라고 하는데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데 불교는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내가 불교를 좋아한다” 그렇게 돼 있더라구요.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해석이 되십니까? “회개하라”보다 “잘 살았다”라는 말이 듣기는 좋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절대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예레미야의 “회개하라”가 듣기가 참 힘들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살리시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었으면 좋겠어요.
적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Q. 내 신앙에 팔복과 기복은 몇 프로씩 있나요?
Q. ‘예배드리고 목장에 나가니 이것쯤은 괜찮겠지’ 하고 있는 타협은 무엇인가요?
Q. 문화와 재미라는 이유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고 있는 일은 또 무엇인가요?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하늘의 여왕을 쫓아내지 못했던 그들의 운명은 결국 어떻게 됐을까요? 시간 순서상으로 보면 예레미야 44장이 예레미야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이 설교 이후에 예레미야가 어떻게 됐는지는 성경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유대 전승에 보면 예레미야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해요. 끝까지 듣기를 거절한 그들의 손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순교를 했습니다.
‘왜 이것까지 적용을 해야 할까? 왜 이 말까지 해야 될까?
돌에 맞는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혼하지 말라고 그리고 돌아오라고 이 적용을 해야 될까?
예레미야는 40년 동안 이렇게 듣지도 않은 설교를 왜 했을까?’
제가 이 예레미야를 묵상하면서 참 사실 너무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건 저는 베드로나 요나가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한 번의 설교에 3천 명이 다 듣고 “아멘” 수많은 사람들이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고 싶어 하니 예레미야 말씀이 참 너무 힘들더라고요.
40년 동안이나 그렇게도 듣지 않았던 예레미야는 마지막 순간에 돌을 맞는 순간까지도 마치 스데반처럼 눈물 흘리면서 이 말씀을 전했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참하게 끝난 것 같지만, 예레미야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 말대로 하나님은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보자”라는 이 존엄한 하나님 말씀대로 남유다는 멸망을 당하고 아주 소수만 남유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서 나중에 또 주님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시지요.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복하지 않아서 스스로 자멸한 것입니다. 혹 예레미야처럼 ‘내가 이걸 끝까지 해야 될까?’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죽음 전까지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죽은 후에라도 여러분의 자녀나 그 한 사람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이 예레미야처럼 듣고 묻고 전하고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렇게 주일 설교를 하기 전에 사실 와이프랑 잘 안 싸우거든요. 왜냐하면 와이프가 저를 잘 맞춰줘요. 주일 설교한다고. 그런데 예레미야 하면서부터 많이 싸워요. “네가 예레미야다. 내가 예레미야다.” 어제는 막 아내가 막 저를 찌르는데 아내도 화가 나고 저도 막 화가 나는데 사실 맞더라고요. 제가 진짜 듣고 싶어 하지를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젯밤에 제가 이제 “아버님 얘기를 쭉 내가 듣잖아. 여보” 이렇게 했는데 그러면서 저희 아내가 아버님의 마지막 유언의 영상 1분짜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봐. 아버님이 이렇게 마지막 유언하셨어” 저는 못 봤거든요. 딱 이렇게 보는데 한 30초 보고 제가 “어 됐어. 꺼.”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내가 “당신은 진짜 뭘 듣는 거야?” 이러면서 막 화를 내더라고요. “설교에 그렇게 써놓으면 뭐 해. 이거 하나도 안 들으려고 하는데” 근데 그 말을 듣는데 처음엔 너무 막 화가 났는데 나중에 막 벽을 쳐다보면서 막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맞더라고요. 안 듣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예레미야를 죽이고 있더라고요.
예레미야를 죽이는 입장에 있든, 예레미야의 입장에 있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다 주님께로 돌아오시는 여러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여왕 쫓다가 자멸하는 백성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 말씀 하나 붙들고 끝까지 순종해서 진짜 점으로 하나 찍고 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것 때문에 나중에 천국에서 “잘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잘했다.” 우리가 그 칭찬 하나 듣고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믿음으로 우리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
주께 홀로 섭니다.
생명의 말씀 읽고 순종해
주를 예배합니다.
기록된 말씀 힘이 있어서
진리로 우릴 거룩케 하며
거룩한 말씀 세세 영원히
복음이 되어 말씀하시네.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
한 사람 찾으시는 주님의 약속을 믿어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
순종하며 주 따라가는 자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뤄갈
주의 교회여 일어나라 ♬
우리 이 시간 기도합시다. 듣기를 거절하는 우리 마음이... 주님, 우리 마음을 만져주셔서 듣기 원하는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본래 돌아가려 하는 자리가 악의 자리, 우상숭배의 자리가 아니라 예배의 자리, 섬김의 자리, 전도의 자리, 그런 자리가 될 수 있도록 바꿔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교묘하게 혼합주의를 섬깁니다. 주님, 하나님 한 분만을 쫓아가는 인생이 되게 도와주십시오. 라고 은혜를 구하며 우리 주여 한 번 부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망하고 빼앗기고 처참한 상황인데도 듣기를 거절합니다. 세상 애굽을 바라보니까 약속의 땅인 남유다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그냥 여기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 이런 우상이 점점 자라납니다. 저에게도 예레미야를 주님이 보내주셨는데 돈 우상으로 돈이 없다고 무시했습니다.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해줄 게 없다고 무시하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참 외로웠을 텐데, 참 힘들었을 텐데 그것을 제가 한 번도 알아봐 드리지 못하고 나를 힘들게만 한다고 무시했습니다. 나라는 우상이 있으니, 외모의 우상이 있으니, 차별의 우상이 있으니, 돈의 우상이 있으니 듣기를 거절합니다. 우리도 바닥까지 무너져야 들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지 우리의 죄성인지 주님 모르겠습니다. “들어라”라고 40년 동안 아무리 외쳐도 듣지를 않는데 주님, 이렇게 듣기를 어려워하는 우리입니다. 주여,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자녀에게 보여준 것이 저도 없습니다. ‘본래 돌아가려고 하는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해 보니 돈을 쫓고 세상이 좋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본래 돌아가려고 하는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의 삶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저희 딸도 저희 아들도 듣지 않겠습니까? ‘말만 저렇게 하고 하나도 하나도 본래 돌아가는 자리가 없다라고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설교를 하니까 참 마음에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이 듭니다. 교묘하게 깨지지 않는 기복이 제 마음에도 있습니다. 붙회떨감 붙회떨감 알지만 딸이 대학에 다 떨어진 것을 보며 “감사해요. 주님”보다 큐티도 하기 싫고... “살아있어서 고마워”라고 할 때도 있었는데, “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고마워”라고 할 때도 있었는데, 여전히 세상이 좋아 기복이 좋아 대학 떨어진 딸에게 한숨을 쉬며 무시의 말을 합니다. 주여, 바닥까지 또 내려가도 깨닫지 못하는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기복을 좋아하여 하나님을 섬겨도 늘 두 마음인 것을 우리 불쌍히 여겨주셔서 증명하려고 하는 삶이 아닌, 그냥 말씀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려고 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늘의 여왕 바라보고 망할 인생이 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 다 아시고 보시고 들으시는데, 그 하나님 바라보고 한 걸음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나라가 주님 어디로 가는지 말씀에 반대하는 악법을 다 막아 주시옵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를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선교사님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예배에 정말로 마음이 힘들어서 육신의 질병 때문에 힘들어서 오신 분이 있다면 예수님의 피 묻은 손으로 안수해 주셔서 나음을 입게 도와주시옵소서. 정말로 다 주저앉고 ‘옛날의 자리로 돌아가야 되겠다. 옛날 그 자리로 가서 죽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한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나아오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도 해외에서 사역 감당하시는 담임 목사님의 영육을 붙들어 주시옵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귀한 예물 주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기쁘게 받아 주시옵시고 하나님께 드릴 것만 있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만 있는 풍족한 인생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이디어와 사업과 프로젝트와 모든 목장에 기름 부어 주시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