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전한 산당제사 ( 왕하 15 : 1 - 7 )
1027 기도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수고해주신 성도님들과 청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또 붙회떨감 기도회를 수능 전에 한 번 더 해서 이른 비 기도회로 어제 진행했다. 붙회떨감 붙으면 회개하고 떨어지면 감사하라는 뜻으로 구속사적인 감사인데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 감사를 원하기에 수능을 앞두고는 떨자도 듣기 싫다. 그런데 오늘 아사랴는 거꾸로 붙으면 자랑하기 바쁘다. 여전한 방식으로 자기만 높였기에 아사랴는 역대하에서 웃시야로 불리는데 부국강병의 대명사였지만 열왕기에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나병으로 치셨다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은 여전한 산당제사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산당을 제거하려면
1. 겸손한 환경이 축복입니다.(공동 통치하던 때 24년)
1-3절
이렇게 북이스라엘 남유다왕들이 계속해서 번갈아 나오면 머리가 살짝 복잡해진다. 공동통치인지 단독통치인지 알기 어렵다. 1절에 여러보암 제 27년은 아사랴가 단독통치를 시작한 해이다.
2절은 그가 왕이 됐을 때 16살이라는 것은 그때로부터 24년 전을 말하는데 아버지와 공동통치를 시작한 해를 말한다. 52년 중에 공동통치한 24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벌써 2주일 전이라 멀리 멀리 가버렸나요
아버지 아마샤는 정직했으나 회개하지 않고 에돔 정벌 후 교만해져서 북이스라엘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완전히 패배한 후 예루살렘까지 점령되는 초유의 일을 겪었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었기에 어린 아들과 공동통치를 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에 반역으로 살해당했다. 그 아들 아사랴는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성장했다. 아버지가 잘나갈 때도, 패배할 떄도, 마지막에 같은 무리에게 살해되는 고통도 다 보았다. 아버지 아마샤만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하고 북이스라엘도 밉고 압박하고 잔소리해대는 유다지도자들은 더 밉고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은 원수가 됐다. 요아스 이후 유다왕들이 상처와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나요? 대제사장 고모부 밑에 평생 눌려 살다가 마지막에 신복의 반역으로 죽은 요아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연민에 벗어나지 못해 같은 길로 가다가 반역으로 죽은 아먀샤 그리고 그 상처와 연민이 아사랴에게 이어지고 있다. 다윗 왕가에 이런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창세기부터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야 알 수 있다. 이렇게 아사랴는 참 겸손한 환경에 있었다. 자신을 높이고 믿고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마음에 상처와 연민만 가득했고 왕권 또한 허울 뿐이었다. 그래도 요아스도 아먀샤도 정직했다고 한다. 아사랴도 성품으로 정직함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아사랴의 엄마 여골리야가 있었다. 신결혼을 한 아먀샤가 아들을 믿음으로 키울 수 있었다. 믿음의 양육은 고난 중에 빛을 발한다. 그래서 역대하에 웃시야 즉 아사랴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있는데 같은 역사를 열왕기를 공동체 관점에서, 역대기는 구속사적인 개인적 관점으로 기록했기에 차이가 있다. 역대하 26장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하나님을 찾는 동안은 형통케 하셨다고 한다. 웃시야가 무슨 일이든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우리가 스가랴서를 통해 아는 그 스가랴와는 다른 사람이다. 웃시야 할아버지 요아스도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그 교훈을 들었다. 이 웃시야도 스가랴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는 형통했다. 왜 찾았을까? 하나님을?
어머니 여골리야를 통해 믿음으로 양육을 받았기 떄문이다. 그러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고난 가운데 절망하거나 다른 우상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았다고 어마어마하게 형통하게 하셨다. 패배 후 15년을 숨죽이며 살았으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하나님 아니면 기댈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더니 그 패배가 변하여 형통이 됐다. 웃시야의 형통은 정말 대단하다. 광개토대왕같은 것이다. 여로보암의 성공과 견줄만했다. 블레셋과 암몬을 굴복시켜 조공을 받고 농사, 관개수로, 군대 재건을 하여 30만명을 넘겼다. 그러니 남쪽 시내 반도까지 세력을 회복하여 항구도시 엘랏을 건축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 형통이 컸는지 역대하 26장 25절에 보니 웃시야의 이름이 널리 국외로 퍼졌다고 한다. 그것도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해진 결과로 소문이 쫙 났다고 한다. 그러니 형통의 비결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형통이시고 상급이시다.
적용 여러분의 환경이 비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남을 탓하며 원망합니까? 하나님의 양육을 잘 받고 있습니까?
어떤 분의 나눔이다. 고3 떄 저희 반 교회 다니는 친구가 7명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고3때는 공부에 집중해야한다고 집중해야한다고 하니 친구 중 1명이 싸워서 교회를 갔고 그 떄 이후로 선생님이 그 친구를 무시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교회를 안 다녔지만 그 친구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몰려왔고 이것이 악한 형통을 구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저는 결국 원하는 대학을 못가고 제 친구는 원하는 대학을 갔다고 한다.
형통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데 있는데 거꾸로 했다는 것이다.
2. 강성하니 산당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14년의 부국강병 시대)
4절
아사랴가 제거하지 않으니 백성이 여전히 산당제사를 드린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모든 성군의 왕들이 다 제거하지 않았다. 그 한 사람의 지도자가 너무 중요하다. 교회에서는 목사, 집에서는 가장, 나라에서는 위정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도 7절로 끝나더니 아사랴의 인생도 7절에 요약이 됐다. 열왕기에는 보여줄게 없는 인생들이다. 3절의 아사랴가 정직히 행했다는 그 한 절에 치적이 다 언급된다. 그리고 4,5,6절이 실전이다. 그래서 딱 산당제사 때문에 나병걸렸다 밖에 없다. 열심의 특징이 산당예배이다. 여전한 산당이 또 나온다. 산당은 기복신앙과 성공복음의 상징인데 자기 연민이 가득찼을 때 그 때도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다. 자기 편이 없는데.. 뭔가 믿음으로 24년을 지낸 것이 아니다. 환경이 겸손하니 네네네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형통하게 되니 여전히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산당이 익숙하고 평범하게 되어서 악인지도 모른다. 아사왕 여호사밧왕 다 왕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기에 구태여 제거할 필요를 못느낀다. 제거한 왕은 히스기야 왕 요시아 왕이다. 그런데 산당, 예수를 믿어도 성공과 기복을 못버린다. 절대 못버린다. 그래서 여전하게 산당제사를 드린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2백만이 훨씬 넘는 성도들이 함께 기도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무서운 이유는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죄를 더 익숙하고 평범하게 만드는 악법인데 어떤 산당을 짓고 산당제사를 드려도 다 옳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말만 하면 인권에 걸리는 시대가 왔다. 물론 지금 침묵하는게 지적이고 교양인 것 같다. 우리 체면 생각하면 다 용납하고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냥 내버려두면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고 그런 것이다. 시청 앞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 기도를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한 쪽에서는 목사가 더 나쁘고 불법을 행하는데 왜 그런 것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하고 동성애자 소수 인권은 보장받아야 한다 이러면 맞아보인다. 회개없는 정직을 말하니까 다 맞아보인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을 미워하는게 아니라 동성애는 생명을 낳지 못한다.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죄이다. 인간의 연약함은 남유다왕들도 행위적인 죄를 안 짓는 왕들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행위와 믿음의 차원이 아예 다르다. 행위와 믿음을 모르니 그 얘기를 한다. 산당이란 결국 내 주장으로 내 생각으로 잘 되기 위해 비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잘 되면 교만하고 안 되면 절망한다. 내가 그 기복을 제하지 않았는데 내 자녀 내 백성이 어떻게 제하겠는가? 자녀들이 잘못되면 우리가 다 연자맷돌 가지고 빠져야 한다. 내가 주님을 만났다면 가슴이 애통하셔야 한다. 내비두면 되겠지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자식도 성도도 다 내 거울이다. 이 죄악을 역대기는 여실히 고발한다. 웃시야가 강성해지니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했다고 한다. 무슨 악을 행했을까? 제사장들을 제치고 자기가 성전에서 직접 향단에 분향하려 했다. 마음이 너무너무 높아지니 눈에 뵈는게 없어진다. 거치는게 없어진다. 눈치 볼 사람도 율법도 질서도 다 없어졌다. 자기가 하나님이 됐다. 게다가 지금 웃시야는 제사장들을 향해서 트라우마, 분풀이를 하고 있다. 제사장 귀족, 지도자 이 사람들이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괴롭혔고 반역해서 죽였잖아요. 이 가족의 사연을 넘어서기가 이렇게 어렵다.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너무 어렵다. 상처와 연민으로 한이 쌓인 아사랴는 최고 지도자격인 제사장들을 보면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런데 단지 힘이 없으니 눈치보면서 네네네네 하고 있다고 형통하고 강성해서 두 손에 큰 힘이 생기니 복수했다. 할아버지 요아스도 똑같았다. 그래서 여호야댜 아들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다. 눌렸던 분을 풀려고 말이죠. 웃시야도 똑같이 그러는 것이다. 그래도 정직한 사람인데 양심의 가책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형통하고 강성하니 잘못인줄도 모른다. 본인 보기에는 너무 당연하다. 이렇게 성공했는데 내가 나라를 위해 먹고살게 해줬는데 예루살렘 성을 준수했는데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다. 양심도 이겨버린다. 날 때부터 죄인이 맞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보다못한 제사장 아사랴와 용맹한 제사장 80명이 항의를 한다. 향단에 분향하는 일은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왕이 범죄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아사랴는 듣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낸다. 버럭 폭발적인 분노를 쏟아냈다. 아주 집단으로 몰려와 항의하는 것에 대해서 트라우마가 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다 그렇게 죽었으니.
이것이 산당제사를 평범한 일상으로 여기며 끊지 않고 여전히 들인 인생의 결론이다. 어떤 원수가 있어도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한다. 내가 이 분노를 개인적으로 갚으면 안 된다.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행하는 악의 끝은 듣기 싫고 듣지 않는다. 내가 제일 옳기에. 그만큼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거 하지 말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것이다. 다들 가난하면 듣고 부요하면 안 듣는다. 이게 진리이다. 그래서 가난하니까 듣는 것이다. 없으니까 듣는 것이다. 산당을 제거해야 여전한 산당제사가 멈추는데 산당을 제거하는 사람이 없다. 중요한 것은 제거할 수 없는게 아니라 제거하지 않는다. 익숙하고 평범하고 편하니 내버려둔다.웃시야의 원수를 갚는 일을 산당이 있어야 편들어주기 때문이다. 기복이 있어야지 우리 왕이시여 얼마나 그동안 ㅎㅁ들었습니까? 다 죽이세요! 라고 하는 것이다. 언약궤의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영적으로 다 잠이 들어있다. 겸손한 환경은 이런 잠을 깨어주기라도 하니 축복이다. 형통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이대로가 좋사오니가 된다. 여전히 편한거 찾고 더 높아지려고 하고 더 가지려고 하니 산당제사를 드린다.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그레데 같은 사회 모습에서 사무엘, 한나 같이 예배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10.27를 통해여 진정한 종교개혁이 되기를 바란다. 내 욕심만 채우려는 수고, 나만 높아지려는 노력 다 가지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제치려는 것 나쁜 습관, 중독, 연약한 아픔 뒤에 숨어 내 주장만 하는 것도 산당이다. 윗자리부터 산당제거를 하지 않고 자기 욕심과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혀 온 나라를 자기 사욕을 쫓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웃시야처럼. 그래서 우리는 여전한 산당제사를 제거하는 적용은 또 여전한 방식의 날마다의 말씀으로 오늘부터 하나씩 시작하는 것이다. 여전하게 산당제사를 드리면 여전히 말씀 묵상으로 제거하는 길밖에는 없다. 하늘에서 능력이 뚝 떨어져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적용 내 욕심과 교만으로 추구하는 내 산당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지지난주 목세 탐방 후 소감을 읽었다. 한 목사님이 모임의 연령층이 다르면 고백 관심사 초점이 다 다른데 여긴 와보니 초점이 딱 하나 죄에 대한 고백과 그것을 회개하고 나누는 것을 보니 나이, 신분, 출신, 성분을 다 뛰어넘는구나, 소그룹의 장벽이라면 연령의 장벽을 생각했는데 말씀으로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구나를 보셨다고 하셨다. 너무 놀라웠고 산당을 제거하는 것 이게 말씀 공동체 기복이 아닌 구속사의 말씀으로 나눔을 하는 목원님들의 수준이 목자님들이 잘 이끄시는 것도 있지만 경청하고 호응하고 반응을 너무 잘해주시니 놀랍고 목원들이 나눌 떄에 예스 노로 끝날 수 있는데 목자님과 권찰님이 왜 그러셨어요? 왜 그런 마음이 드셨어요? 질문해주시고 연결을 잘하시는 것을 보며 참 탁월하다고 나누셨다. 바로 이것이 산당제사를 제거할 수 있는 비결 중의 비결이다.
3. 하나님이 치십니다 (나병의 14년)
5-7절
아사랴에 대해서는 열왕기에는 나온게 없다. 산당예배 드려서 여호와께서 치셨고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아들이 대신 치리했다고 한다.
형통함과 강성함 가운데 교만해진 웃시야를 여호와께서 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위해서 웃시야를 치시는 것이다. 치다는 만지다 닷다의 뜻으로 단순히 매로 때렸다기보단 고치기 위해 이리저리 만지고 보살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손보다의 뜻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40명이 넘는 왕이 있는데 그 왕중에서 하나님이 치셨다, 손보셨다고 말씀하신 왕은 웃시야가 유일하다. 아사랴가 유일하다.그만큼 이 손보심은 특별한 것이다. 뭐가 특별한가 하면 웃시야 왕이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던 그 자리에서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병이 임하였다. 나아만 장군처럼 옷으로 감출 수 있는 곳에 생긴 것이 아니다. 저주의 상징이 떡하니 이마에 찍혔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이렇게 치시니 웃시야가 성전에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했다.
이 아사랴는 북이스라엘 베가 살롬 오므리와 비교하면 예배 한 번 드린건데 뭔 나병까지 줘 하며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신게 아닌가 할 정도로 나아만보다도 시종 게하시보다도 혹독하게 치셨다. 아니 그렇게 52년간 수많은 치적을 베풀고 왕으로 살았는데 그 많은 업적은 하나도 기록되지 않고 산당제사 드리다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는 7절에 인생이 기록됐으나 전쟁만 하고 갔다고 나온다. 남유다의 아사랴는 똑같은 7절이지만 나병환자로 살다가 별궁에 거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게 훨씬 두렵지 않으세요? 그냥 죽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죽지도 못하고 나병환자가 되어 혹독한 벌을 받았다. 왜 그렇게 아사랴를 세게 대하실까? 이 세상에 교만 중의 가장 악한 교만은 영적 교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악해서 자기네들 정권이 탐이 나니 반역을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영적 교만이 뭔지 모른다. 그래서 아유~ 우리는 대통령이나 하고 싶은 속물들이야 로 끝난다. 하지만 웃시야는 자기가 너무 완전무결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적교만이 들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아사랴가 52년동안 왕위에 있는데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의 뜻인 아사랴가 제위하는 동안 북이스라엘은 계속 왕이 바뀌는 것이 보며 자기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겠는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일 뿐인데. 그러니까 자기가 왕을 하다가 제사장까지 된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을 안 찾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여호람, 요아스는 계속 엘리사를 찾았다. 힘드니까. 하지만 웃시야는 너무 형통해지니 찾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있었다.
저 옆의 교회는 계속 목사가 한 달만에 6번 바뀌는데 이 목사님은 50년을 넘게 장기집권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교회 좋은 교회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하나님 자리에 딱 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맘대로 해도 된다, 북이스라엘은 제사장을 마음대로 세워서 아예 역사에서 없어졋는데 웃시야가 하나님보다 더 위로 가고자 하는 죄를 하나님은 견딜 수 없어하셨다. 영적교만은 하나님이 간과하시지 않는다. 사람이 지위와 권세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영역을 다 넘는다. 목사를 우습게 본다. 이 세상의 법이 목사보다 더 위에 있다고 외친다. 권세, 지위가 없으면 아예 넘보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이 믿음없이 영적영역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면 인간은 가르침 받는 것보다 가르치고 싶어해서 믿음이 있건 없건 가르치거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교회에서 각종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안 해 안 해 하다가 지나보면 왜 안시켜주지? 섭섭해하기 시작한다. 이게 다 영적인 영역의 일이다. 그 영역에서 보니 저 사람은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보니 아무것도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데 왜 가르치는거지? 왜 좋아하지? 나도 가르치고 싶다 하며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해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바람잘날이 없는 것이다.
오늘 아사랴가 제사장이 받는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인정을 인위적으로 뭔가 해서 받으려고 하면 열매가 없다. 아무리 흉내를 내도 안 된다. 모든 것을 달달 외워서 앵무새처럼 설교해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지위로 강성해지니 상처를 준 제사장들이 실력없고 꼴도 보기 싫고 다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구속사이다. 그런데 성경을 어느 한 부분을 보고 적용하면 무서운 것이다. 항상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구속사이다. 저럴 수 밖에 없었겠다... 웃시야는 내가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교만을 떨지만 이 땅에는 질서가 있다. 질서를 강조해서 우리들교회를 떠난다는 분도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구원의 문제인데 아사랴가 강성해지니 옳고 그름의 문제로 몰고 갔다. 예전의 제사장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 죽었다, 원수 갚을 때도 됐다 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자신도 자기네들이 죽인자의 아들이지만 왕으로 세워주셨다. 산당은 항상 내 입장만 옳기에 내 연민, 내 절망, 내 교만을 편들어달라고 하는게 산당제사이다. 내 편만 들어주는 붙게만 해주면 승진만 해주고 이것이 산당제사이다. 이것을 그러지 말라고 하면 다 싫어한다. 아사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내 도움이시다 인데 그렇게 도와주시니 일순간에 교만해졌다. 웃시야왕이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다고 한다. 역대하는 이 단절의 핵심을 짚어 알려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전은 모든 생활 네트워크의 중심이다. 거기에서 끊어지면 다른 관계도 다 끊어지는 것이다.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성전에서 끊어진 것이다. 나병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자기가 스스로 네트워크의 중심이고자 했던 웃시야인데 거기서 오히려 완전히 단절된다. 자신이 주인이었던 왕궁은 아들 요담에게, 예배 중독자처럼 예배하던 산당은 갈 수가 없게 됐다 예배를 그렇게 우습게 여기시면 안 된다. 결국 여러분들은 예배를 떠나 이 땅에서 여러분을 우쭈쭈 해주는 분들과 노는게 그렇게 좋으세요? 예수 믿는 왕들도 다 신복들이 죽였다. 인생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이 별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서 연명하다가 죽고 만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예수씨때문에 다윗의 후손에게서 등불을 빼앗지 않으셨다. 그의 사적과 행한 일을 유다왕 역대지략에 반면교사로 다 기록되게 하셨고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게 하시고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가게 하신다.이것이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치신 심판이다. 그냥 때린게 아니라 손보신 것이다. 부서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 고쳐쓰시려고 만지시는 손길이다. 같은 매라도 패는 것과 손보는 것은 다르다. 패는 것은 죽이는 것이고 손보는 것은 살리기 위함이다. 여로보암은 그냥 악하게 살다가 죽었지만 웃시야는 문둥병 걸려 별궁에 거하게 하신 것은 축복이다. 내 안에 비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이다. 욕심, 확신, 자랑을 비우라고 별궁에 거하게 하신 것이다. 내 옛사람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웃시야 인생이 롤러코스터같다. 겸손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찾으니 기이한 도우심으로 10층 꼭대기로 쑥 올라가서 강성하고 형통해졋다. 하지만 그러니 교만해지니 한순간에 지하 10층으로 떨어져버렸다. 눈깜짝할 새에 떨어질 수 있다. 우리도 저마다 별궁이 있다.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여러 관계속에 살면서도 단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기마다 별궁에 거하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제가 그 과정을 지났잖아요? 시집살이 5년의 별궁을 거하면서 얼마나 부글부글 끓었는지 모른다. 주님 만나고 나서 그 생각이 간 곳이 없어지고 거듭나도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피아노, 자식을 단계적으로 내려놓게 됐는데 그렇게 내려놓으니 열매가 있었고 영적교만이 있었겠는가? 과부로 여성목사로 늘 구조적으로 별궁에 거하게 하셨다. 늘 나의 교만을 저절로 보게 하신다. 제가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지만 2백만 기도회에서 설교를 했으니까 이제 그 설교 했다고 또 팔백오십명의 바알 선지자를 물리친 엘리야가 이세벨이 죽이고자 하니 도망갔다고 하는데 어김없이 제가 그런 꼴이다. 귀있는 자는 알아 들으세요. 그냥 하나님은 저를 그렇게 별궁에 가두신다. 아들이 통치를 해도 뒷방 늙은이가되어서 나병까지 걸렸으니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곳에 있으니 죽는게 나을텐데 믿음이 있어서 자살은 안했다. 아사랴가 이땅에서 형벌을 다 받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아사랴가 나병걸려서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지만 마태복음 계보에 올렸다. 얼마나 14년간 자기 성찰을 했겠는가? 이런 영적 교만이 있을까 늘 두려운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늘 구원을 이루는 말이 무슨 말인지 날마다 뼈저리게 닿는다. 아사랴는 역대하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인 웃시야로 불리는데 웃시야가 죽은 후에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는다. 별궁같은 상황에서 웃시야와 같은 내가 완전히 죽어야 성전의 이사야가 본 영광이 내 삶에도 이어질 것이다. 이사야가 처음에는 웃시야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그가 죽었을 때 너무 슬퍼했다. 이것이 나를 단절되고 별궁에 갇히게 하신 하나님의 처사이다. 여전히 산당제사를 드리는 나를 쳐서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시는 사건이다. 52년동안 이를 갈고 스가랴의 묵시를 받을 동안 14년 형통했고 마지막 14여년은 나병에 걸려서 별궁에 거하니 가장 강력한 왕인 웃시야의 왕의 인생을 보면 별인생이 없어서 참 슬프다. 그래도 하나님은 52년간 장기집권하게 하신 것은 긍휼하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유다에는 비교도 안 되는 악한 왕들이 남아있다. 이정도면 괜찮은 왕인데 왜 괜찮냐면 나병걸려서 이다. 나병이 인생의 축복이었다.
적용 여호와께서 치신 사건은?
어떤 별궁에 갇혀 있습니까? 별궁 같은 상황에서 내가 비워야 할 것은?
공동체를 통해 채워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누리고 있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사업이 너무 잘 되어서 교만이 끝에 있는데 고소를 당했다고 하셨다. 검사가 저를 찾는 것에 의문이 들었지만 피의자로 불려 조사를 받게 됐는데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검사실로 갔고 검사를 만나서는 내 행동이 혈기가 올라 벌떡 올라 검사의 얼굴을 쳤다고 하셨다. 내가 피의자 조사를 받을 인생이 아니다! 하며 가슴을 쳤는데 씨익 웃으며 검사가 잘걸렸다 표정이 보였다고 한다.그날 자정이 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그 날 저녁에 교회 다시니는 집사님이 저를 교회로 인도하려고 만나려는 날이었는데 그날 구속이 됐다. 그래서 그날 성경책을 받아들고 믿음이 하나도 없어서 분해하며 죽기를 작정하고 굶으며 첫장부터 성경책을 읽기 싲가했는데 그렇게 죽고자 15일을 굶으니 성경 읽다가 힘없이 쓰러지게 되어 경찰병원으로 후송됐고 죽먹고 회복됐다, 성경을 아무것도 모르지만 정독하다보니 삼년동안 감옥에 갇혀 성경을 7번 읽게 됐는데 그렇게 읽다보니 내 생명이 말씀 안에 있다는 확신이 들어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다, 큰 은혜로 구치소에서 우리들교회에 오게 됐고 한번도 주일예배를 빼먹지 않고 우리들교회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누셨다.
형통하고 강성한 분은 예배를 폐하고 계신다. 네가 설교해봐라 야~ 나는 떠난다 하는 분들이 계신다. 안 들리는 것이다. 똑같은 말인데 안 들린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말씀을 맺습니다. 산당제사는 폐하려면 겸손한 환경이 축복이다. 그래도 이래서 저래서 자기 연민으로 형통하다가 강성하니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니 끝까지 칼을 물고 쫓아와서 치시는 것이다. 그 모델로 웃시야를 썼기 때문에 웃시야 인생을 생각하면 참 슬프다. 우리 인생이 뭐든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인데 거룩을 목적으로 놔야 행복한데 이 분이 거룩으로 가는 것 같다가 하나님이 치시니 만들어가셨다.
<기도제목>
유진
1. 회사에서 질서순종 잘하고 업무 잘해낼 수 있도록
2. 매일 큐티할 수 있도록
3. 가정이 평안하길
4. 신결혼
우지현
1. 회사에서 착한 척 하지않고 업무의 경계를 잘 지킬 수 있도록
2. 엄마 화요일에 항암치료 받으시는데 잘 받고 오시길
3. 아빠가 전도축제 때 오셔서 꼭 등록하시길
4. 신결혼
5. 은미언니의 신교제
은미
1. 주시는 일에 순종할 수 있도록
2. 혼자있는 시간에 절제의 훈련 잘할 수 있도록
슬아
1. 아파서 반죽 반대로 얘기하는 실수가 나왔는데 정신 바짝 차려서 일에만 집중해서 실수가 없도록
2. 목장 새로 바뀌면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잘 이겨내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 의지하며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3. 돈 알뜰하게 절약해서 잘 쓸 수 있도록
4. 우리가족 건강과 구원
5. 신교제 신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