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로지 다른 것이 아닌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서로 다른 배경, 환경에서 자라난 두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결혼이라고 하십니다.
이번 달 청큐에도 집필한 내용이지만,
저는 그동안 많은 친구들을 섬겼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한 친구를 위해서
체육 시간마다 학교 근처 피씨방을 뒤지고
그 친구 집에 찾아가서 어떻게든 학교로 데려왔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왕따 당하는 친구들과 같이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주위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가족들에게, 나 자신에게까지 예수님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오늘 아침도 학교에 가서 큐티를 했습니다.
학교 가는 길, 왠지 모를 우울한 마음이 또 들었습니다.
'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 기복이 심하기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감정이 가라앉는 적이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울한 마음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셨기에
이제는 이겨야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오는 길,
또 다시 한 번 싸워야 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아침에 묵상했던 큐티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사실 큐티하긱 조금 힘들었습니다.
결혼과 부모님에 대한 순종의 말씀이었는데
부모님께 대들지도 않고, 말씀하시면 잘 듣고
결혼은 아직 생각도 하지 않는 나이이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들어온 구절이 있었습니다.
29절 :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온전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에서 걸렸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저는 저를 끔찍이도 미워하고 저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되살아나야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제 육체, 제 마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가지신 애통한 사랑의 마음이 어떻게 깨달아지겠습니까?
처음에 이야기했던 중학교 때의 친구,
수요예배에 가거나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저는 그 친구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 친구를 살려달라고
수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 주위의 친구들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중학교 때를 떠올려보면
비록 교만하긴 했지만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있었고, 나름 자존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에겐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친구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우리 교회 식구들까지도
보호하고 양육하려면 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제가 먼저 살아나야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제가 가졌던 사고방식을 버리고
적용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귀중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요예배에 가서 말씀 듣고 주일까지 또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적용
1.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겠습니다.
2. 정리정돈을 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