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로 태어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모, 외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랐습니다.우리가 태어날 때 아빠는 하와이에서 공부 중이셨고 엄마는 회사일에 열심이었기에 우리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갓난 애기부터 수원에서 생활했기에 수원이 아닌 곳에서의 생활은 불편하고 불안했습니다. 아기때 아빠가 우리를 만나러 방학 중에 오시면 우리는 낯을 가리며 울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서울에서 따로 생활하시며 주말에만 오셨기에 우리는 엄마를 보고도 울었답니다. 쌍둥이인 저는 둘이서만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고, 현재 환경과 주위 사람에 익숙해져 조금이라도 바뀌면 불안해지는 약간의 강박관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치원 때문에 엄마, 아빠와 살게 되면서 모든 맞춘 듯한 환경이 어긋나는 일 이였습니다. 사립초등학교 추첨에 둘 다 당첨되어 입학하고, 아빠의 직업이 호텔리어이기 때문에 호텔에 드나드는 일도 잦았습니다. 방학이면 여행하기 좋아하는 아빠께서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부유하기 그지없던 환경이 제게 당연해 질 때 쯤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소송 때문에 컴퓨터와 문서더미에 휩싸여 지냈습니다. 원체 엄마 아빠일에 관심이 없었고, 엄마 아빠 역시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전화소리와 대화에서 간간히 들리는 단어들로만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다니던 회사와 소송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아빠가 회사 까지 그만 두시고 엄마의 소송을 돕는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 였습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영원할 것 같던 부유함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때 엄마아빠는 다시 저희를 수원으로 보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두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이였습니다. 가정히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을 때 친구분의 전도로 아빠가 먼저 우리들교회에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위해 그 시기에 교회에 나갈 수 있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아빠는 지방에서 근무를 하셨고 엄마와 함께 수원 집에서 생활하였는데 하루는 엄마가 가출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문자와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일하시던 호텔에 잠시 가셨었는데 아침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복도 CCTV에 엄마가 찍혔기 때문에 자의로 사라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의 가출 역시 저에게 큰 상처로 다가올 수 없었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는 익숙하였고, 원체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엄마의 가출을 예상하였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엄마라면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결국 아빠가 백방으로 뛰어다니신 덕분에 엄마를 찾을 수 있었고, 바로 정신병원으로 입원되었습니다. 엄마가 정신병원에 입원한지 약 1년 정도 되었을 때 집으로 우편이 하나 왔습니다. 청주 여자교도소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엄마가 입소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적혀있었습니다. 소송으로인한 엄마의 입소소식을 제가 먼저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덤덤히 받아들인 제자신이 아직도 의아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그 누구도 엄마의 입소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이야기로는 법정에서 엄마가 자신의 안경을 깨뜨려 손목을 그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사건을 함께 견딘 아빠에게 있어, 우리들 교회의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희 가족의 생활이 많이 달랐을 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가 없는 동안 저는 초등학교에서 나름 모범생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상장은 받은 지 일주일 만에 가방에서 꺼내는 일이 흔했고, 5학년 때엔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먼저 선을 긋고, 공감대가 맞는 친구가 잘없어, 어떠한 관계를 맺는 것이 사치로 생각 되었고 조별로 하는 과제에 있어 의욕 또한 없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은 어디에 있든 새로운 나만의 아지트가 형성되었고, 다른사람이 감히 넘어올 수 없을 번데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때가 많아 붙임성도 떨어져 친했던 친구들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에 대한 미련이 있지 않았기에 힘들진 않았지만, 멀어짐으로 인해 혼자만의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늘어난 건 사실 이였습니다. 그렇게 약 2년가량 시간이 흐르고 퇴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서야 아빠가 엄마의 입소소식을 말해주셨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2009년 5월 출소를 하였습니다. 아빠는 중학교에 올라옴과 동시에 흩어져 있던 가족이 모여 살아야 한다며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기뻐해야하는 일이지만, 저는 기쁘지 만은 않았습니다.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네 명 이서만 지내본 기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흩어져 사는 것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또 더 이상의 변화도 원치 않았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엄마 아빠와 생활하면서 아빠는 우리를 교회로 데려 가셨고 수원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즐겁게 교회를 다녔기에 반강제로 서울로 오게 되며 교회도 자연스레 바뀌어야 했고, 그렇게 오게 된 우리들 교회는 지금껏 다녔던 교회와 다름이 불편했습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단체생활 이라면 곧 죽어도 싫다하는 저이기에 내가 이교회에 적응하면 사람도 아니다 라는 등 속 깊이 우러나오는 불평으로 매주 아빠의 뒤꽁무니를 공격했습니다. 고학년 때부터 매달 오던 매일성경은 매일 저를 귀찮게 했고, 모기소리 같은 김양재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귀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했습니다. 교회와 집의 일정한 선을 긋고 싶은 저였기에 하루하루 교회의 영향을 피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제 개인의 공간이 작아져 갔습니다. 이기적인 성향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이기적인 행동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우리들 교회에 다니면서 서서히 합리화가 걷힌 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애써 외면하고 싶은 제 모습 이였습니다. 합리화하는 저를 긍정적인 저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보고 싶은 모습과,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개인의 공간에 중독되어 있었고, 단체생활을 거부해 왔던 것 입니다. 또한 부유했던 환경에서 생긴 자만심과, 갑자기 무너져버린 것에 대한 열등감으로 목자가 된 저이지만, 무의식적인 이기심으로 친구들의 상처를 간절히 체휼하지 못하며, 저희 가정의 사건을 안타까워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빈자리 조차 무뎌진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제가 하나님을 만난 거라고 생각하니 감사가 됩니다. 아직은 불완전한 저와 하나님의 관계지만 저보다 더 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굳어 단단해진 제가 깨지지 않아 힘이 들 때 즉시 손 내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만든 감옥을 저만의 다락방으로 오해하고 있던 저는 익숙하지 않았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픈 친구와 마주보고 손을 잡은 채로 기도하면서 숨기는 것들이 적어졌고, 선생님의 아픈 나눔을 들으면서 체휼하고, 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변화가 무섭고, 새로운 것에 적응도 더디지만, 소중한 공동체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서 앞으로 만날 날들이 두렵지 만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