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교회 나가는 것은 제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뜨겁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성경학교에서였습니다. 5학년 때 처음 교회 반주자로 섬기기 시작할 때만 해도 감사로 영광 돌리리라 마음먹고 기도하며 시작했는데, 차츰 제 마음속엔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이 아닌 열등감과 자만이 교차되었고,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려 마침내 반주를 한다는 명분으로 십일조도 안 내게 되었습니다. 항상 은혜로 가득 차서 했던 반주도 어느 순간 형식화되었고, 제 자리를 치고 올라오려는 목사님 딸과 경쟁 구도에 놓이게 되면서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 앞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반주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자신이 너무 싫어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사춘기 시절, 부모님의 심각한 마찰이 제 눈앞을 막막하게 하였습니다. 안수 집사님이셨던 아빠가 성경이 거짓이라며 예수님을 부인했고, 언니를 친딸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언니와 엄마에게 폭언을 일삼고 엄마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빠는 한창 사춘기였던 언니를 친자 확인을 해야 한다며 두 번이나 병원에 데려가셨고, 언니가 보는 앞에서 저에게 많은 돈과 핸드폰을 사주면서 언니를 위축시켰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언니가 딸로서 무시당하는 가운데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외로웠습니다.
저의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이 112였을 정도로 아빠의 폭언과 폭행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나만 예뻐하는 모순된 아빠가 죽도록 미웠고, 엄마와 언니는 내가 지켜야겠다는 어린 생각에 엄마께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당시 잠재적으로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학교에서 터지면서 저도 별별 사고를 다 쳤습니다. 학생부에서는 무슨 일만 터지면 모든 싸움의 원인이 저라며 저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저는 집에서는 말 잘 듣고 순하고 여성스러운 딸이었지만, 학교에 나오면 그 누구도 못 말리는 폭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빠에 대한 상처가 있었던 저는 수많은 남자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언제 버림받을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맘대로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남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저의 여러 가지 방황 속에서 엄마는 제게 크게 실망하셨고, 저 역시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는 서운함으로 엄마를 멀리했습니다.
엄마는 이혼을 할 때도 나를 데려가지 않겠다며 큰집에 연락을 했었고, 저는 엄마한테 울며 불려 매달렸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엎드려 아무것도 먹지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엄마는 저와 언니를 데리고 이혼하셨고,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독히 외로운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아빠 얘기를 할 수 없었고, 교회 친구들은 서서히 제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아 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교회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싸늘해진 장로님들과 안수 집사님들의 태도가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의 기도와 권유로 부흥회 반주를 맡으면서 제 맘속엔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고, 엄마를 저주했던 나의 원망어린 기도가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엄마를 미워한 내 모습을 회개하며 진심으로 불쌍한 엄마의 행복한 새 출발을 위해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너무나도 좋은 새 아빠를 만나게 해 주셨지만 저에게는 딱히 행복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때의 반항적인 기질이 저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툭하면 ‘남사스러워서…’라는 말을 자주 하셨고 가정에 대한 저의 불신의 벽은 더욱 높아져 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땐 금요예배 반주를 간다며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술을 먹고 외박을 하며 놀았습니다. 몇 주에 걸쳐 거짓말을 하다 엄마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집 근처의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항상 목사님 딸과 경쟁구도에 놓여있었던 제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을 사모님과 큰언니는 오히려 좋아하셨고, 저는 나의 두 번째 엄마라고 생각했던 사모님께 상처를 받고 정말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 근처의 교회로 옮긴 뒤에도 반주자로, 학생회 부회장으로도 섬기게 되었지만 저는 아이들을 무시하며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천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척, 밖에서는 양아치처럼 지내는 이중적인 모습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부르심의 때에 내 죄를 보며 자복해야 했는데 저는 말씀으로 견고히 서 있지 못했기에 다시금 무너지는 사건이 오게 되었습니다. 여자 집사님들께서 수군거리시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쟤잖아~ 그 이혼하고 재혼한 집 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 집사님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이다음에 죽어서 심판을 받으라며 정죄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심부름하고 교회 일에 보란 듯이 더욱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그때쯤에 엄마는 우리들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우리들교회를 불신했습니다. 내 잠을 깨우는 목사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너무 싫었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학교 안에 이상한 천막을 쳐놓고 플라스틱 의자 하며, 전혀 경건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떠들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시끄럽게 떠들었습니다. 나를 새 신자 취급하는 것도 자존심 상했고, 교회의 수준이 의심되었습니다. 큐티도 정말 어거지로 했습니다. 전 부회장을 할 정도로 믿음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끄적였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교회에 나오던 무렵, 소경 바디매오의 큐티를 할 때 내 마음속의 딱딱한 교양과 위선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치 중에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바디매오를 보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까지 피아노 반주하는 교양으로, 부회장의 교양으로 단 한 번도 뜨겁게 찬양해본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주님께 내 영혼의 치유를 위해 울며 부르짖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후 올 때마다 마음이 벅차올랐고, 아는 친구들은 없어도 외로움이 없었고 또, 또 가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나의 자리에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해서 기도했던 기복적이던 신앙을 회개하고, 엄마 아빠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또 언니 기도를 하라며 사건을 주셨습니다. 제가 고 3일 때, 언니가 우울증과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점점 어린아이같이 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제가 첫째 딸처럼 집안일을 다 해야 할 땐, 물론 언니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서로 대립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언니를 통해 말씀이 들리게 하셨고 주님은 항상 말씀으로 나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들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변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으로 내 환경을 보니 해석이 안 되는 환경이 없었습니다. 내가 순종이 잘 안 되는 것이 아직까지도 힘이 들긴 하지만, 이젠 머리로나마 내게 오는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혈기로 가득했던 얼굴이 차츰 녹아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등부 아이들을 보면 갖은 상처를 다 안고 살았던 중학교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혼, 재혼 가정에 있는 아이들부터 반항하고 거룩한 척 하는 아이들까지… 여러 모양의 아이들을 체휼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통해 알지 못했던 죄, 잊고 있었던 죄까지 드러내실 때는 너무도 괴롭지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생각에 감사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수치와 아픔밖에 없었는데, 이런 고난을 ‘약재료’로 사용되게 하시고 교사의 자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