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_지수현(고등부)
저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 모두 불교를 믿고 있었지만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간 이유는 오로지 간식과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2학년을 마쳤을 때 저희 가족은 아빠가 사업을 하고 계신 중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어를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1년 후에 바로 중국 현지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생활은 즐거웠지만 아빠의 사업은 계속해서 안 좋아져서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고 아빠의 사업은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안정적이지 못해 저희 가족은 항상 아껴 쓰고 절약해야 했습니다.
저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새로운 학교에 적응도 빨리 하고 친구들도 금방 사귀었습니다. 그 중 저와 친했던 한국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왔다 갔다 간식을 받으러 교회에 갔었지만 점점 사람들과 정이 들면서 교회가 좋아졌습니다. 6학년을 졸업할 때 쯤 비전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6박 7일 동안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비전여행을 통해 하나님은 진짜로 살아계신다는 걸 믿게 되었습니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가 기도한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 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듣는 그대로 다 믿게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언니도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동생도 기독교 유치원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집에 교회 집사님이 사셨는데, 그분이 전도 모임에 엄마를 초대하셨습니다. 불교를 믿는 아빠는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겠지만 그때 우울증 증세를 조금씩 보이시는 엄마가 걱정되셨는지 교회라도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집사님들은 엄마의 자궁 속에 자라고 있던 혹이 치유될 수 있도록 매주 기도해 주셨습니다. 의사들이 분명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던 그 혹은 중보기도 덕분에 말끔히 사라져 있었습니다. 엄마는 그 사건으로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직접 보며 제가 처음으로 만난 하나님은 구하면 뭐든지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셨습니다.
그러던 중 아빠가 아시는 분과의 동업으로 저희 가족은 카자흐스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문화를 가진 그 나라에 가보고 싶어 거부감 없이 받아 들였습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평소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지만 그 나라의 말인 카작어도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와 달리 언어를 배우는 속도가 느렸고 악마의 언어라고 불리는 러시아어를 배우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기 바로 현지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성격이 조용하고 말도 없고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저는 현지 아이들에게 말을 잘 걸지 못했습니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마음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조용히 있다가 집에 오기 일쑤였습니다. 한인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 친구들 또한 큰 위로가 되지 못했고 매일 밤 중국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는지 한인 교회에 청소년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함께 기도하던 시간은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저의 생활도 힘들었지만 선교사님은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내 아픔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분명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저의 상한 마음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을 때 아빠도 힘이 드셨는지 6개월 후 저희 가족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국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미의 기준이 동양 사람인 카작 사람들 덕분에 자존감이 높아졌고 성격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 엄마가 다니시던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빠가 카자흐스탄에서 힘들 때 항상 도와주시던 교회 분들을 보시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구나’ 하시고 중국에 돌아왔을 때 다같이 교회에 나가게 된 것 입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믿음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 저희 가족은 힘든 일이 많이 있었지만 함께 기도하고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한국학교에 가면서 저는 이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친구들과는 술을 마시며 세상적으로 놀고 교회에서는 착한 척 믿음이 좋은 척하며 살았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살았기에 죄책감 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삶 가운데 언니가 한국에서 대학을 입학한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가족은 다함께 살아야 한다며 다 같이 한국에 들어오자고 하셨습니다. 아빠는 가족들이랑 함께 살려고 노가다 일이라도 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빠가 그냥 중국에서 사업을 하시며 한국으로 보내주시는 돈으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컸고 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아빠의 뜻은 꺾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적응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고 다 한국사람들인데 카자흐스탄 보단 났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과 달리 학기 때문에 한 학년을 꿇어서 들어가게 된 저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도 눈물이 날 정도로 중국이 가고 싶었고 거기 있는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빨리 한국에 오게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원망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학교의 아이들은 술과 클럽에 자유롭게 가지 못해서 그런지 휠씬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저를 그런 범죄의 나라에서 빨리 건져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교회에 처음 왔을 때 간증하는 사람들을 보고 저런 말을 어떻게 하나 너무 신기했는데 저에게도 고난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셔서 고난이 고난으로 보이지 않게 하시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이었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꿈이 없었던 저에게 한의사라는 꿈도 주셨습니다. 또 이번 겨울 수련회를 통해서 미워하고 이해하지 못 했던 아빠와 언니를 용서하게 되었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물질 고난이 있어 힘들고 가끔 중국이 그립습니다. 이런 고난들을 잘 이겨 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 항상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