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바알을 죽이라
열왕기하 10:20-27
어버이 주일입니다. MZ세대의 결혼관이 다 너무 다르다고 해요. 결혼은 다 늦은 30대에 하고 평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의 간섭을 못 참는답니다. 경제 공동체는 옛말이고 친구 정도로 수입을 서로 공개하지 않고 생활비 통장 만들어서 쓴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출산 계획이 있어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네요. 그러면 빨리 이혼하고 다른 사람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요즘에 경제 부흥이 일어났죠, 우리나라.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에는 시간과 돈이 생기니까 다 불타는 연애가 그리워서 외도를 하고 이때 이혼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또 일단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되서 만나면 엄마들이 진짜 자식 얘기밖에 안 하고
아이가 언제 스트레스 받고 어떤 행동을 좋아하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아이인지 다방면으로 파악을 한대요. 그런데 배우자에 대해서는 저 사람은 뭘 좋아할까, 언제 스트레스 받고 제일 싫어하는 내 행동은 뭘까 관심이 적기에 공부해야 된다고 해요. 이걸 알면 관계 유지가 정말 쉬워지고 결국 내가 편해지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혼전문변호사의 얘기입니다. 결국 이혼을 많이 성사시킨 변호사도 결론은 배우자를 공부하라는 거자나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세상적으로 완벽하게 잘한 최고의 부부와 부모가 있는데 누구일까요? 바로 아합과 이세벨은 이 모든 것을 잘해서 사마리아 대학을 졸업시키고 돈도 권력도 땅도 다 물려줬자나요. 그런데 그와 더불어 바알 숭배를 물려줬기에 최악의 부모로 자리 매김을 했어요. 바알을 마음에 심어줬기 때문에 물려준 것이 다 똥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똥파리 신이라고 하자나요. 이 세상 신이 결국 똥파리 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예수 믿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을 했건 병자 건 알코올 중독자이든 누구든 최고의 부모님이세요. 그럼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양육해서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바알을 죽여야만 좋은 부모도, 좋은 자녀도 될 수 있고, 좋은 사명자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안의 바알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겠습니다.
1.특별대우의 예복을 벗어야 합니다.
20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되었더라 21 예후가 온 이스라엘에 사람을 두루 보냈더니 바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고 무리가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매 바알의 신당 이쪽부터 저쪽까지 가득하였더라
->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는 예후의 계책이 시작이 됩니다.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는 왕명을 내려서 전국 곳곳에 전령을 보냅니다. 제1회 전국 바알교 부흥회 광고가 온 나라에 뿌려집니다. 광고 내용은 간단 명료해요. 먼저 바알교의 핵심지도자를 모아서 아합 집안이 바알을 제대로 안 섬겼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을 냈어요. 그래서 이제 바알교가 부흥을 해야 되니까 첫째로 바알교는 필참해라, 두번째 불참 시에는 사형이다. 아주 확실하죠? 이 광고를 보고 참석하지 않을 바알교인은 없겠죠. 그래서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다고 합니다. 참석율 100%인 바알교 부흥회가 열렸어요. 아합과 이세벨이 엄청난 규모로 지어올린 바알의 신당 아니었겠습니까. 엘리야가 아합왕 시절에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모아서 대결하였던 사건 기억나시죠. 그걸 상기해볼 때 지금 예후의 대공포로 인해 전국에서 모여든 바알 선지자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겠죠. 그런데 이 큰 신당이 이쪽부터 저쪽까지 가득 찼어요. 모아놓고 보니 세상에 날로날로 이스라엘에 자칭 바알숭배자들이 이렇게 많았던 거예요. 이거는, 결론은 아합이 이세벨과 불신결혼한 이 결과가 이렇게 이렇게 정말 그야말로 그 결과였습니다. 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정말 어제까지 이세벨의 부하였는데 오늘은 배신해서 예후의 부하로 100% 다 모였어요. 이것이 인생의 결론이고 바알교의 특징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예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부모를 따라 바알을 열심히 섬겼죠. 동생 요람도 바알의 주상을 없앴다고는 하지만 또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어요. 오늘 예후가 바알교를 완전히 척결했다고 이후에도 바알교는 없어지지 않았어요. 예후 때로부터 지금 100년이 더 지난 이 호세아 때도 이스라엘에는 바알 숭배가 여전했어요. 요즘 큐티에 바알 숭배에 대한 책망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도대체 바알은 왜 이렇게 질긴 걸까요? 바알은 성공의 신, 번영의 신, 돈의 신이에요. 인간이 제일 바라는 게 성공과 번영과 돈 아니겠습니까? 이 골드야 말로 하나님도 라이벌로 인정하실 만큼 우리를 유혹하는 매력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적용해서 바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는데도 또 다시 살아나서 온 땅을 가득 채우도록 계속 바알은 부흥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바알이 우리 안에서 나오기 때문이에요. 바울의 신당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그냥 바알의 집이에요. 이름도 얼마나 친근합니까. 전혀 이질감이 없어요. 특별히 종교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냥 문화의 일부요 생활의 하나처럼 여겨집니다. 잘 살길 바라는 욕심은 사실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기에 죄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요. 모든 인간이 잘 살길 바라는데 뭐가 문제냐고 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성공과 번영과 돈이라는 이 바알을 우리의 욕심이 사로잡고 노예로 사로잡고 있는 거예요. 교회 와서 사실은 사업을 하려고 해도 안 되고, 로비를 해도 안되는 거예요. 내가 나라나 교회나 집안의 제사장으로 죽어져야 하는데 내가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실은 직장도 해결이 안 되고 집안도 해결이 안 되고 나라도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중심 잡는 한 사람이 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사실 다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신전을 가득 채운 엄청나게 많은 그 바알 교인들의 욕심을 예후는 전부 옳다고 특별대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잠시 후에 죽일 건데 '니가 옳다, 니가 옳다.'이러고, '그게 뭐가 잘못이야. 공부는 잘해야 되고, 학교는 일류가 되고, 회사는 잘 가야 되고.' 다 특별대우를 합니다.
22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 예복은 특별한 용도를 위해 특별한 모양으로 만든 옷이에요. 구별되는 옷, 돋보이게 만든 옷이에요. 바알의 집이라 불린 바알 신전에는 이 예복을 보관하는 창고가 따로 있었고 관리자도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예복을 내다가 그랬자나요. 그러니까 평소에 예복을 얼마나 많이 준비하고 있었는지 온 바알교인이 한 번에 모였는데도 모자라지 않은 거예요. 아니면 예후가 치밀하니까 밤을 도와서 만들었을 수도 있죠. 보통 때는 바알교 평신도들은 이 예복을 입지 못했을 거 아니예요. 제사장이나 교사쯤 되어야 입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특별한 날, 전국 부흥회 날에는 참석자 모두에게 예복을 풀었어요. 모두가 특별한 예복을 입었어요. 그러니까 그 외적인 감각을 만족시켜주면 무엇이든이 인기를 얻게 되어있다고 그래요. 우리가 교황 즉위식을 보니까 막 금빛 옷에 금호를 들고 다들 빨간모자 하얀 모자, 망토를 입었는데 형형색색이 대단하지 않아요? 본 적 있으시죠? 이게 계책의 귀재 예후의 실력이에요. 군중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이용했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호주의 유명한 Hillsong 교회가 있고, 그것이 뉴욕에도, 전 세계 30여개 국에 15만명이 예배를 드린다는. 거기에 말씀 들으려고, 교리 들으려고 가는 게 아니예요. 멋진 어떤 아무개 목사 보려고 간다는 거예요. 그 멋진 목사 완전 연예인이에요. 딱 봐도 몸매 신경쓰는 사람이에요. 외모, 발표 스타일 매주 다르게, 온 몸에 문신 기본이고, 찢어진 청바지, 가죽 재킷, 옷을 너무 잘 입고, 나르시시즘과 지배욕으로 가득 차서 열광적으로 찬양하고, 인구통계학, 마케팅 전략 등 짜여진 치밀한 사업 계획대로 저스틴 비버 등 유명한 사람들과 개인 인맥을 구축하며 전 세계적인 부흥의 성을 쌓았어요. 그런데 창립 목사도 그렇고 2대 목사도 그렇고 결국 이제 여러 가지 음행 등의 문제로 하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올림픽 스타디움 같은데 쫙 모여있자나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 이해도 돼요. 그런 걸 하고 나면 연예인들이 굉장히 허무하거든요. 뭘로 이렇게 좀. 그래서 이 땅에서 드러난 거는 축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다른 특별예복은 종교 개혁 이후에 우리가 만인 제사장이라고 가르치자나요. 카톨릭처럼 소수만 특별하게 보지 않고 모든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며,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입어 똑같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게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서 교회의 질서를 부정하는데 쓰이면 안돼요. 질서 안에서 서로가 다른 역할이 있는 거예요. 모세와 아론을 향해 '너희만 거룩하냐. 우리도 똑같이 거룩하다.'라고 하며 윗질서를 무시하며 반역했던 고라처럼 하는 게 만인 제사장이 아니예요. 인간의 공동체가 완전하지 않아요. 다들 죄인이자나요. 한결 같이 교만해요. 그러니 할 수 없이 질서를 두셔서 때가 될 때까지 서로가 훈련되게 하셨어요. 윗질서가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예요. 훈련될 때까지는 서로의 질서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서로가 남을 나보다 높이 여기는 공동체예요. 그런데 날마다 '목자가 틀렸다.', '마을이 틀렸다.' 계속 이렇게 되면 이게 옳고 그름이 아니자나요. 인격이, 또 목원이 훨씬 훌륭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100% 죄인인 거를 생각해서 이제 어떤 경우에도 내가 예복을 입고 특별대우 받으려하는 그런 모임과는 너무 다른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 떠나 우리끼리 모이면 그냥 군중일 뿐이에요. 그런데 군중은 그 자체로 특별한 별도의 인격을 가지고 있자나요. 군중 심리라고 하자나요. 멀쩡한 개인도 군중 속에 들어가면 그냥 판단력이 흐려져요. 국민 또는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사회의 대표라고 주장하면서 모두가 검찰이 되고, 판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기업가가 되고, 교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언론인이 되려고 합니다. 아니, 그 위에 서서 전부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모든 질서를 폭력적으로 다 해체하려고 해요.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알의 예복을 입은 바알교도들의 심리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길로 놓고 좁은 길을 가라고 하면 이렇게 모였겠습니까. 아합을 그리도 섬기던 바알 선지자 제사장이 아합과 이세벨이 딱 죽었다고 하니까 어저께까지 충성심 그런 거 다 국 끓여먹으시고 하루만에 예후에게 다 모였어요. 여러분들 어떤 데나 100% 찬성도 이상한 거고, 100% 반대도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자신들에게 예복을 입혀 특별한 존재로 대우해주는 것 같으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우리는 One of them을 싫어해요.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지금 마구마구 채워지는 것 같아요, 예복을 입으니까. 혼자 있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아서 너무나 너무나 힘들었는데 예복을 입은 군중 속에 들어가니까 자기도 힘과 지식과 돈의 예복을 입은 특별한 존재가 된 거 같아요. 어떤 그룹에 막 들어가니까. 그래서 더 열광하고 더 소리치며 더 행동을 합니다. 이게 바알의 예복, 특별대우의 예복이에요. 내 안에 있는 바알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대우의 예복을 입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이미 입고 있는 특별 대우의 예복이 있다면 벗어버려야 합니다. 특별대우 좋아하는 내 마음을 모르면 내 안의 바알을 죽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특별대우의 예복 입은 줄도 모르고 이미 입고 있는 예복에도 만족하지 않고 항상 더 특별한 예복 입기만을 바라면서 '그게 아니고.'만 외치고 있다면 내 안의 바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가장 특별한 존재예요. 베드로전서 2장 9절말씀처럼우리를 이미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우리는 거룩한 나라고 왕같은 제사장이에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우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다는 이 대단한 특별 대접을,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아요. 이 세상 그 무엇이 주님의 생명보다 특별하고 귀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받은 특별 대접이 주님의 생명만큼 큰 데 말입니다. 이제는 이 특별함에 인생의 닻을 내리시고 바알이 주는 헛된 특별 대접을 찾아 헤메는 이 방황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를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나는 거예요.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교회보다 더 거룩히 여기며 위하는 모임이나 대회가 있습니가? 가족모임, 골프모임, 동문회, 학부모 모임, 각종 동호회, 다단계 모임 등 거기서 어떤 특별대접 받기를 구합니까? 내가 당장 벗어버려야 할 바알의 예복은 무엇입니까?
2.여호와의 종과 함께 생명 걸고 적용해야 합니다.
23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 예후가 바알의 신당에 직접 들어가는데 혼자 들어가지 않습니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함께 들어갑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이 바알교 척결이 예후 혼자 생각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보다 든든한 지지자가 될 바알교도들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바알교 척결은 여호나답의 뜻에 따른 거예요. 여호나답이 예후를 어렵게 어렵게 설득했을 거 같아요. 여호나답의 지지가 필요했던 예후가, 왜냐하면 이 바알교를 척결하고 나서는 북이스라엘을 다스려야 되니까 여호나답의 지지가 너무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이 예후는 믿음은 없지만 머리가 왕 좋아요. 정치 천재예요. 믿음이 없으면 머리가 좋길 바라고, 머리가 안 좋으면 믿음이 좋길 바라고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꼭 좋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결국 머리가 좋아서 그의 뜻을 받아들였겠죠. 이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예후가 바알교도 무리와 대면하는 자리에 여호나답과 함께 들어갑니다. 오래 전 갈멜 산에서 그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면했던 것처럼 이제 두 사람이 바알교도 전체와 마주했어요. 여호나답과 더불어서 신당에 들어간 예후는 신당 안에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남게 하라고 해요. 특히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신당 안에 있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 얘기는 바알교도들만 죽이려는 계책이자나요. 그렇지만 영적으로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6장 15절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냐고,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과 바알을 섬기는 사람은 물과 기름 같아서 함께 할 수 없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너무 잘 지내면 그 사람은 바알교를 섬기고 있는 거예요. 이제 예후 계책의 클라이막스인데요.
24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 명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넘겨 주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 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 24절, 25절이에요.
드디어 바알교 부흥회가 시작됩니다. 신당에서 번제와 다른 여러 제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후는 80명의 호위병과 지휘관들을 신당 바깥에 배치하는데요. 이들은 전 이스라엘 군대에서 아주 정예 부대, 아주 센 특공대였어요. 친위대였으니까요. 예후는 이들에게 바알숭배자들이 바깥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고, 놓치면 자기 생명을 대신 내놓으라고, 그리고 바알부흥회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끝나자 명령을 내립니다.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그래서 명령대로 군사들은 거기 모인 모든 바알숭배자들을 죽여서 신당 바깥에 던집니다. 이세벨도 창밖으로 내려 던져졌는데요. 이세벨의 영적 자식인 바알숭배자들도 밖에 던져집니다. 여러분, 잠시 전까지 바알교도들은 잔뜩 들떠서 신당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자나요. 그 신당 안에서 온갖 열심과 정성으로 바알에게 제사를 올렸어요. 그런데 그 결말이 칼에 죽은 시체가 되어서 실려나옵니다. 그리고 쓰레기처럼 던져져요. 신당이 마치 커다란 괴물 같지 않습니까? 그 숭배자들을 다 문으로 삼킨 다음에 정성, 돈 다 빼먹고, 단물 빼먹고 찌꺼기를 딱 밖으로 뱉어버리자나요. 이것이 우상 숭배와 거짓 종교의 기본 구조예요. 이 숭배자들은 우상을 앞세운 교주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먹잇감일 뿐이에요. 자기 욕심 채우려고 우상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과 섬김 받는 사람이 이해타산이 딱 맞아 떨어졌어요. 그래서 막 '종말이 가까왔다. 그냥 다 피난해라. 나한테 다 가져와라.' 그러면 그 서로의 가치관이 같으니까 갖다가 헌금을 내고 그러는 거죠. 결국 우상을 앞세운 누군가에게 소비되고 마는 거예요. 여러분, 잠시 뒤에 버려질 것인데 다 죽어도 좋다고 달려갑니다. 요즘 정치가 딱 이래요. 정치와 문화도 우상숭배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술은 발달하고 우리 머리는 커지는데 우리는 오히려 더 어리석게 변해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부터 눈물로 회개 해야 할 이 시대의 악입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져서 바알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내 바깥에 있는 바알보다 먼저 내 안의 바알을 죽여야 하는데, 집에 모신 우상단지 아무리 치워야 뭐 해요. 내 마음에 우상을 섬기는 마음이 살아있으면 바깥의 우상단지는 다시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 누구도 자기 안에 있는 바알은 혼자 죽일 수 없어요. 예후가 아무리 전차를 잘 몰고 활을 잘 쏴도 혼자 바알교도들을 다 상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함과 약함을 절대로 꺾을 수 없어요. 그 한계를 우리 스스로 넘을 수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의 종들과 함께 해야 되는 거예요. 예후가 여호나답과 함께 하는 것처럼, 또는 여호나답이 예후와 함께 하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서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해야 돼요. 여러분 예후와 여호나답은 사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예후는 외향적이고, 여호나답은 내향적이고, 예후는 겁 없는 행동파고, 여호나답은 겁이 많은 사색가예요. 예후는 평생 아합의 군대에서 밑바닥부터 바알을 섬기며 살던 사람이고, 여호나답은 수 백년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 사람이에요. 이 둘이 '내가 어떻게 저런 인간하고 함께 해.' 이러면 일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둘이 그래도 지금은 바알교를 척결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동지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이 천차만별 달라서 목장에서도 도저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어요. 그런데 맨날 손가락질 '어떻게 저 사람하고 같이 갈 수가 있어.' 아니, 예후하고 여호나답하고 어떻게 같이 가요, 인간적으로 맞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구원의 일에 하나가 되면 다 되는 거예요. 지금은 내가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대통령도 쓰실 수 있고, 장관도 쓰실 수 있고, 다 쓰실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대통령이 믿음이 없는데.' 이딴 소리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뭉치면 강해진다.'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예요. 우리 주님은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면 거기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세요. 왜냐면 가장 강한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약하디 약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맞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라도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하면 강한 우리들이 될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종인 지체들과 함께 하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여호나답과 함께 한 예후가 자기와 함께 한 80명의 호위병들에게 생명을 걸고 바알 섬기는 모두를 죽이라는 명령을 했자나요. 생명을 걸고 그 명령을 실행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걸어야 해요. 무엇을 위해서 일까요? 말씀대로 적용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열심히 해라.', '최선을 다 해라.' 이런 말이 아니예요. 아니, 열심하면 예후를 따라야 할 자가 없자나요.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늘 십자가 지는 순종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너무 하기 싫고, 사과도 그렇고, 무릎 꿇고, 이런 하기 싫고 힘든 일을 말씀 때문에 적용을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생명을 건 적용이에요. 십자가를 길로 놓는 적용이에요. 이렇게 십자가 지는 적용을 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의 바알을 없애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건 없어요, 그런데 자꾸 자꾸 욕심이 한꺼풀씩 없어지면서. 제가 이제 목회자 세미나 1회 때부터 생명 내놓고 십자가 지는 일꾼 10명만 있으면 5천명도 감당할 수 있다. 그 한 사람이 없어서 천 명이 안 되는 거다. 공식적인 교육을 얘기하는 게 아니예요. 처음부터 이걸 언급한 이유는 저 같은 평신도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를 제가 경험했기 때문이죠. 제가 신학을 한 것도 아니고 백도 없고 남편도 없는데 여기까지 왔자나요. 우리가 말씀대로 적용하려고 하는 한 사람 있으면 성령이 도우십니다. 십자가 지는 순종을 하면 그 다음에 거기에 따르는 열심은,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런 열심은 저절로 따라오는 거예요. 그런데 거꾸로 하시면 안 돼요. 열심으로 뭐를 하고자 하면 예후같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80명이 수 천 명을 상대했자나요. 딱 맞자나요, 우리들교회. 맞지 않아요? 내가 없는 말 합니까.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내 안에 가득한 탐욕과 음란과 중독과 시기와 질투 같은 각종 바알을 내가 이거 한 가지 순종했는데 다른 것들을 하나님이 계속 죽여주시는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바알을 섬기는 자입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종입니까? 내 안의 바알은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통하는 영적인 동지가 있습니까?생명 걸고 적용할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생명 내놓고 교사 부목자 목자 마을 초원 장로 권사 목사를 하고 있습니까?
3.그 근원을 불사르고 헐어야 합니다.
26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 바알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상징하기 때문에 계속 너무 인기가 있었겠죠. 그런데 그 우상 또한 너무 익숙하고 친근했기 때문에 인기 없기가 더 쉬웠어요. 바알의 우상은 기본적으로 특별한 게 없어요. 그냥 기둥이에요. 재료도 다양해요. 나무로 된 목상, 돌로 된 석상, 금속으로 된 동상. 그러니까 신전이나 성이나 마을회관이나 시장이나 집에 모셔두기도 쉬었고 인테리어 효과도 있었을 것 같고, 그래서 만들기도 쉬었지만 없애기도 사실은 쉬운 거예요.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한 예후는 이제 그 숭배의 근원이 되는 목상들을 불사르고 제일 큰 바알의 목상, 그러니까 바알의 석상을 헐어버려요. 산산조각 낸다는 거예요. 예전에 소련 붕괴될 때 사람들이 레닌과 스탈린 동상들을 땅에 떨어뜨려 깨뜨려버리는 장면을 기억하고 계시죠. 지금 예후가 부하들 시켜서 바알 우상을 그렇게 없애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없애버리고 있어요. 우리가 북한에 가면 그냥 김일성 동상이 곳곳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합 왕조, 아합의 집의 상징이기도 한 바알의 집도 산산조각 무너뜨리는 거예요. 다윗의 집이 하나님의 집과 하나이듯이 바알의 집은 아합의 집과 하나인 거예요. 그 아합, 잘나가는 아합은 이 세상 맘몬 신하고 딱 하나예요. 아합의 집에 대한 심판의 꼭대기가 바알의 집인 바알 신전을 파괴하는 거예요. 아합의 집은 이제 진짜 끝난 거예요. 백성에게 엄청난 시각적 효과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 아합 집의 멸망이 뇌리에 각인되었을 거예요.
예후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당이 무너져내린 자리를 변소로 만들었어요. 공중화장실 정도가 아니라 분뇨처리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가장 더러운 곳이죠. 예루살렘에는 그런 장소가 힌놈의 골짜기예요. 그 제사 드리고 쓰레기를 갖다가 버리는 힌놈의 골짜기. 바알의 집이있던 자리는 사마리아판 힌놈 골짜기가 된 거예요. 여러분 한 번 파괴된 신전을 후대에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자나요, 그렇죠? 그런데 이미 더러워진 신전 터, 변소가 됐다고. 자신들이 거룩히 모시는 신의 신전이 변소가 됐어요. 그러면 거기다가는 신전을 걸립할 수는 없는 거예요. 정말 예후가 대단하죠. 바알 신당이 변소가 된 것이 오늘까지 이른다고 하는데요. 열왕기가 기록된 시기까지 계속 변소로 남아있다는 것이니까 예후 때로부터 최소한 300년 이상 그랬다는 거예요. 그렇게 그렇게 강력했던 아합과 이세벨 왕조 이렇게 수치스럽게 무너졌습니다. 아합 권력이 정점에 있을 때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나 이런 일이 역사에서 늘 반복되자나요.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저절로 마음이 낮아지고 조심하게 되지만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형통할 때, 이기고 또 이길 때는 마음이 높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예외가 없어요. 그래서 형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건이 생기고 고난이 오는 거는 정말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도 반 만년이래에 지금이 젤 잘 사는, 지금 호세아 때도 여로보암 가장 강성한 때. 그러니까 이런 Hillsong Church들의 문제가 일어나는 건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셔가지고 이 땅에 있을 때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입학하게 해주신 천국입성학교 커리큘럼이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시험을 봐야 해요. 실력 떨어지지 말라고, 여러분 좋은 학점으로 졸업하라고. 졸업이 언제냐고 물으신다면, 학위는 언제 받느냐고 물으신다면 인생의 정점인 죽음의 때. 살아생전 졸업식은 없어요. 언제까지 계속 되냐고, 왜 고난이 자꾸만 찾아오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니는 학교가 너무 명문이라서 과정도 길고 졸업도 느려요. 거기는 영원한 영생 학교, 천국 가는 학교자나요. 우리 같이 끝까지 잘 다닙시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 동창회에서 다 만나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실 얼마 안 남았자나요, 그렇죠? 밑동 잘린 나무인데. 여기 여기 붙어라, 나랑 같이 만날 분은 여기 여기 붙어라. 안 드는 사람은 뭐예요. 여기가 예후 인생에서 쓰임 받는 최고의 순간이에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아합의 집에 하신 말씀을 예후를 통해 다 이루셨어요. 하나님을 향한 진짜 열심이 있는 여호나답과 동지가 된 덕분에 아합의 집을 넘어 바알의 집을 그 근원까지 불사르고 헐었어요. 북이스라엘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겼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어요. 다음주에 이어서 보겠지만 사실 더 나아가서 금송아지 개혁을 해야 되는 그 중요한 거를 안 하고 여기서 멈췄어요. 예후는 바알 숭배의 근원이 바알 목상과 신당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거예요. 진짜 근원은 내 안에 있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내 바깥에 있는 바알은 다 죽일 수 있었지만 내 안에 있는 바알은 죽이지 못했어요. 왜죠? 있는 줄을 몰라요, 예후가. 그래서 머리는 거기까지 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편 없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거죠. 그러니까 알면 그랬겠어요. 예후는 열심으로 다 했는데 내 속에 바알이 있는 걸 몰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어. 그런데 머리가 천재야. 헷갈리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속사적인 말씀 묵상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의 빛으로 내 옆의 사람들을 비추고, 내가 하는 일을 비추고, 내 주변 상황을 비추는 일도 너무 중요하고 필요해요. 그러나 이렇게 내 바깥에 있는 것, 아무리 말씀으로 잘 비춰서 해석하는 지혜를 가진다 해도 내 자신을 보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예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거죠. 말씀의 빛으로 가장 먼저 내 자신을 비춰야 해요. 내 안의 감춰진 죄악을 비춰서 봐야 합니다. 내 안에 가득한 바알 우상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바알 우상을 아무리 없애봐야 여러분들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어요. 근본은 언제나 바깥이 아닌 안에 있는 거예요. 뿌리는 드러나는 법이 없어요. 땅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려면 땅 파는 수고를 해야 되는데. 우리가 금요일 큐티 본문에서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시는데 굳고 완악한 내 마음을 기경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후는 지금 너무너무 정치를 잘 했는데 중요한 거, 영적인 거, 이걸 못 알아먹어. 북이스라엘에는 그래서 선한 왕이 단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예후를 선한 왕, 다윗 같은 그런 왕이 못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자기를 보는 일이 없어요. 맨날 죽이는 거 밖에 몰라. 인간 청소기예요. 지금 큐티를 하면서 날마다 선택을 하는 훈련은 지금은 눈에 안 보이나 엄청난 인격과 영성을 쌓아가는 훈련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반복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훈련은 가장 보화를 쌓는 훈련인 줄 믿습니다. 이번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바알 우상들을 다 찾아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면 좋겠어요. 다음 주일이 성령강림 주일이거든요. 회개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서 모든 분들이 성령받는 기적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야지 내 안의 바알을 보는 거예요. 이게 기가 막히지 않아요? 예후가 구속사를 모르는 거예요. 세속사에서는 최고인데 그거는 설명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겉에 거는 너무 잘해요. 우리가 교양 있고 다 잘해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내 안의 바알을 못 보기 때문, 내 안의 바알을 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어요.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바알의 목상처럼 이제는 불사르고 헐어야 할, 나를 유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가까이 가기 싫은 변소로 만들기 위해 이번 한 주 어떻게 불사르고 헐어버리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