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아직 남은 할 말
욥기 36:1-16
강승현 목사님
제가 며칠 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영상을 봤어요. 참, '설교의 맥락도 비슷하고 참 좋다.'라고 하는 영상이었는데 우리가 조언이나 심각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이 말 하면 안 된답니다. 왜냐하면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라고 하면 그 뒤에 반드시 기분 나쁜 말이 따라오기 때문이죠. 그렇게 기분 나쁜 말을 실컷하고 또 하지 말아야 되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뭐냐면 '왜, 내가 틀린 말했어요?'라는 거랍니다. 실컷 기분 나쁜 말해놓고, 또 바른 소리만 해서 상대의 어려운 마음을 만들어 놓고는 그렇게 '내가 틀린 소리 했어.'라는 겁니다. 아무리 사실이 맞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상황을 고려해야 되죠. 담임 목사님께서 큐티 노트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자나요. '그 사람의 상황과 여건, Context를 고려해서 사실을, Text를 이야기 해야 된다.' 라고요.
오늘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욥기를 딱 들으면 바로 생각나는 단어가 한 두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고난이고 두번째는 인내입니다. 그래서 욥기의 주제가 흔히들 말하기를 '고난을 인내한다.'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욥이 받았던 큰 고난, 욥이 참고 있는 인내는 무엇일까요? 자녀가 하루 아침에 다 죽어버리는 그런 고난일까요? 아닙니다. 그럼 사랑하는 아내가 '너가 믿는 하나님을 저주해라.'라고 떠나버린 가종의 깨어지는 그런 고난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모으고 모았던 일평생의 전재산이 한꺼번에 다 탕진되어지고 없어지는 그 재정의 고난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욥에게 고난은 바로 옆에서 시종일관 계속 떠들어대는 이 친구들의 잔소리를 듣는 게 큰 고난일 것 같습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그렇게 이야기하죠. 또 욥의 고난은 이렇게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 옳은 소리만 하는,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하죠? '내가 틀린 말 했어?' 이렇게 하면서 하는 것이 큰 고난 같습니다. 모두 다 동일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옳다, 그리고 너는 그르다.'라고요. 그렇게 옳고 그름의 프레임에 갇혀서, 하나님이 인과응보라는 그 프레임의 갇혀서 계속해서 이 욥을 괴롭히는 인간들입니다. 누구도 욥의 환경에 처해보지 못했자나요. 그 누구도 이 욥과 똑같은 Context를 당해보지 못했는데 그냥 바른 소리만 계속하니 얼마나 이 욥이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이 성 밑에, 욥이 만약에 성에 살고 있었다면, 성 밑에서 '누구냐, 누구냐.'라고 한 번만 외쳐주면 이 친구 다 던져버릴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힘든 욥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욥도 똑같았어요. 친구들이 계속 인과응보로 '너 죄를 봐야 돼. 너가 잘못한 거 있는 것 같애. 하나님이 괜히 너에게 그런 벌을 주시지 않을 거야.'라고 하니까 욥은 또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난 죄가 없다. 하나님이 왜 그런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이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진짜 죽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걸쳐서 반복적으로 욥기는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이제는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누가 등장할까요?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이 엘리후는 새파랗게 젊은 놈입니다. 상당히 어린 놈이 말을 가장 많이 하는데 '내 말을 들어봐.' 이 말을 제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내 말에 귀 기울여 봐. 이어서 이야기 할 게.' 이게 엘리후가 하는 말 중에 10번 가까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꾹 참고 있다가 이제 막 물보가 터지듯이 욥에게 계속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은 엘리후가 그렇게 또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합니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아니 그게 아니고.'라고 하는 말 있자나요. 그 말을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욥의 세 친구를 포함해서 가장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엘리후는 오늘 또 '이어서 할 말이 아직 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네요. 성경에서 장시간, 또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그렇게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가 있을 겁니다. 오늘 욥의 이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이 말로 통해서 우리가 깊이 묵상하며 Question Think 할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1.'내가'가 주제가입니다.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 이전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준비 기도회를 낮에 목사들이 모여서 그렇게 따로 했었어요. 그래서 하루, 이틀, 삼일 찬양도 잠깐 부르고 기도회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찬양 잠깐 부를 때,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다 똑같은 찬양을 불렀어요. 그때 임재라는 찬양이 되게 유행했었는데요.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죠? '하늘의 문을 여소서.'라고 그렇게 시작되자나요. 그래서 똑같은 찬양만 계속 부르니까 셋째날에는 선임 목사님가 교역자들을 부르더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 제말 하늘 문 좀 그만 열어.' 끊어야 될 때는 끊어야 되는 거죠. 다른 이야기도 해야 되는데 오늘 이 엘리후는 또 이어서 말을 하네요.
2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 2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후가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은 누구를 위하여서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걸 직역하면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후는 아직 남아 있는 말이 '하나님을 위한 말이다.' 라고 그렇게 강한 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만 과연 진짜 그럴까요? 엘리후가 그렇게 정말 하나님을 위한 말을 할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통찰력이 이 정도 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이 정도다라는 것을 교만으로 내비치고 있는 것이죠. 더욱 그러한 것이 3절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 3절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엘리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지식이 먼 곳에서 왔다고 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으로 먼 곳, 다른 동네나 다른 나라에 가서 유학을 해서 그 지식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말을 쓴 진짜 이유는 앞에 이야기했던 하나님을 위하여를 연결하기 위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것이 목적이면 먼 데서 온 지식은 어디서 왔을까요?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 온 지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 교만의 정점을 찍는 4절을 보면 그렇게 나와져 있습니다.
4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 제가 읽어볼게요.
진실된 언어 습관, 우리 OST 보셨죠? 담임 목사님께서 송구영신 예배 때도 말씀하셨자나요. 진실된 사람은 어떤 말 쓰지 않는다고요? '진실로, 정말로, 참으로.' 이런 말을 쓰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떡하니 엘리후가 뭐라고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고 있어요? 진실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앞서서 자기가 한 말에, 이 반응 자체를 보니까 진실 아닌 것처럼 느껴지니까 어떻게 해요? 진실로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온전한 지식을 갖춘 자라고 그렇게도 이야기하네요. 이렇게 저렇게 자기를 형용을 하고 있습니다. 꾸미고 또 꾸미죠. 마치 이세벨의 화장처럼 자기의 말을 이렇게 저렇게 막 꾸밉니다. 나르시시즘적인 자아도취에 빠져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서서 엘리후는 많은 부분에 오류를 저질렀어요. 욥이 했던 말을 곡해해서 다르게 번역해서 욥에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후 역시도 이 하나님의 인과응보의 논리를 더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뭔가 좀 고급지게 정죄하는 겁니다. 고등 교만의 모습을 엘리후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좀 뭔가 더 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더 있어 보이는 엘리후가 왜 고등 교만을 보이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말 앞의 주어가 뭐라고 붙어져 있습니까? '내가'라고 되어져있습니다. 2절에 '나를, 내가, 내가', 그리고 3절에 '내가, 나를', 4절에 '내 말은' 그리고 3절에 잘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지식이라고 나와져있는데, 이 지식이라는 단어는 1인칭이고 단수 명사입니다. 그러면 지식 앞에 주어가 뭐가 붙어야 될까요? '나의' 지식이 붙습니다. 지식이 오긴 왔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도 내 지식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려 짧은 4절의 구절에 7번이나 자기를 드러내고 있네요. 우리가 하는 말 중에 '나'라는 주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나'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을수록 하나님은 뒤로 물러가계시죠. 특히나 어떤 일에서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 라고 할 때, 교회 사역을 한다 라고 할 때, 그리고 어떠한 일을 만나서 나눔을 할 때 자꾸 나의 이야기, 내가 나오면 그때 그것은 교만에 빠지고 우상이 되어지는 겁니다. 나에게 남은 말이 무엇일까. 내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아직 남은 한 말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고 또 물어본다면 우리의 입술에 '하나님께서', 그리고 우리의 말은 '예수님이'라고 시작되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몇 번에 걸쳐서 설교를 하면서 고백을 했는데요. 목사님도 방금 얘기해주셨듯이 이 물욕, 소유욕에 관해서, 또 어떤 것을 보면 가지고 싶어서 견물생심하는 안목의 정욕이 꽤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여지고 나타나지는 이 안목의 정욕들이 내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있는 원천의 죄를 다 해석해 줄 수 없더라고요. 우리들교회에 와서 저를 보게 되어지는 객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 정말 내 속에 죄가 이러이러하구나.'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여전히 되었다 함이 없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꾸 경험하게 되었어요. 지난주 월요일에 집사람 생일이었는데요. 원래 집사람이 생색을 내거나 뭘 막 사달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일 며칠 전부터 계쏙해서 저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선물 뭐 사줄 거야? 생일 선물 뭐 사줄 거예요?'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좀 귀찮은듯이 '어, 그래 뭐 사줄까?'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또 몇 번을 물어보길래, 제가 그날은 살짝 미쳤는가 봅니다.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니는 뭐 해줬는데?'라고 이야기했어요. 사실 집사람은 항상 저에게 많은 것을 해 줬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작년에 12월달에, 몇 달 전에 생일이었는데 저기 자세히 보면 돈 도 있고, 상품권도 붙여져 있습니다. 저렇게 선물도 해주고, 항상 이벤트를 해줬어요. 그런데 제가 미쳤는지 '니는 뭐 해줬는데?'라고 물어보는 게, 왜 그랬냐면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을 안 해줘서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예요. 하물며 프로필 사진에도 이 사진을 올려놨는데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화를 꾹 참고 며칠이 지났어요. 그리고 카톡이 하나 왔어요. 어떤 카톡이 왔냐면 '이 선물 사줘.'라고 구체적으로 사이트를 줬더라고요. '아, 그런가보다.'라고 하고 넘겼는데,월요일날 저는 마치고 집에를 갔는데, 월요일이 생일이었는데요. 집사람이 일찍 와 있는 거예요. 어, 항상 저보다 늦게 오거든요, 직장이. 그런데 일찍 와 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안 좋아요. '아, 뭔가 잘못됐다.' 싶어서 제가 예전 카톡을 막, 집사람이 준 카톡을 막 열어보니까 카톡에 '내 생일에 여기 데려다줘.'라고 하면서 식당을 요렇게 붙였더라고요. '나 생일에 3시에 마쳐.' 이렇게 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까맣게 있고 설교한다고 머리하러, 머리하고 집에 그냥 그렇게 막 털래털래 들어갔던 겁니다. 그래서 그때서야 막 비로소 그 주소에 있는 식당에 예약을 한다고 예약이 되겠습니까, 당일날에. 그런데 이거는 정말 일부분입니다. 제가 물건을 사고 지고 이고 모으면서 진짜 오랜 시간동안 살아왔거든요. 저희 집이 아파트 제일 윗층이에요, 제일 위층이라서 옥상에 올라가는 계단이 아무도 사용을 안해요. 그래서 그 계단에다가 제 짐을 잔뜩 갖다놨습니다. 어떻게 갖다놨냐면 이 정도로 갖다놨어요. 그런데 저기 안에 뭐가 들었냐면 내 신발, 내 전자기기, 내 물건, 그리고 나에 관련되어진 모든 것들. 제가 정리하면서 보니까 집에 관련된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집사람에 관련된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제가 이기심에 나밖에 모르는 그런 아주 고약한 사람이더라고요. 교육전도사일 때인데 애가 3살, 4살이고 연년생이었어요. 저는 학교 다닌다고 아침에 저만 이렇게 차려입고 휙나가버리면 집사람은 애들 둘 다 챙겨서 입히고, 먹이고, 자기 또 챙겨서 그렇게 둘을 데리고 애들 다 어린이집 내려두고 그렇게 직장에 갑니다. 또 하루종일 직장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오면, 또 반대로 애들 다 데리고 집에 와요. 그래서 애들 또 씻기고, 애들 또 준비하고, 또 어지러놓은 거 다 정리하면 그때서야 저는 '에헴.'하고 이렇게 들어와요. 정말 나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에헴.'하고 들어오면 하는 말이 ' 빨리 자자. 피곤하니까 빨리 자자.' 들어오자마자 같이 좀 정리해주고 그러면 좋은데 저는 바로 씻으러 들어가버립니다. '내가 찝찝한 걸 못 참으니 내가 먼저 씻어야 된다.'라고 그렇게 들어가버립니다. 저희 가족이 5명인데 이기적인 이 '나'라는 삶의 주어 때문에 '거룩한 가정'이라는 주어가 없었습니다. 내가 편한대로,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나를 위해서만 살았던 섭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 많은 물건 중에 가족을 위한 게 단 한 개도 없다면 나의 이 마음 안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나의 것들로만 가득차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나'라는 주어는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더불어서 다른 사람을 전혀 공감해주지 못하는 그런 말이 되어집니다. 적용질문입니다.
[적용] 고난 가운데 있는 목원이나 가족에게 마지막 남은 할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이 될 것 같습니까?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라고 교묘하게 포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편, 아내에게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입니까?
2.새로운 언어로 말을 해야 합니다.
욥과 세 친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왔자나요, 오랜 시간동안. 그런데 이 욥과 세 친구가 좁혀지지 않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욥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세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조금씩이라도, 아니면 한 사람이라도 각을 잡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텐데 똑같이 평행선을 그으며 전혀 자지가 하고 싶은 말들만 하더라 라는 거죠. 지금 이 욥에게 주시는 고난은 이제껏 자기가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욥이 느끼는 하나님은. '어, 나는 죄가 없었는데, 내가 그렇게 큰 벌을 받을만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욥이 엄청난 물음표를 찍으면서 그렇게 계속 하나님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계속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이렇지 않은데,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만났던 주님이 이런 분이 아니신데.'라고 계속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인과응보. '네 죄를 봐라.'라고요. 그래서 이 말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6장 6-7절에 욥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표준새번역인데요.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6 싱거운 음식을 양념도 치지 않고 먹을 수 있겠느냐 닭걀 흰자위를 무슨 맛으로 먹겠느냐 7 그런 것들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냄새조차 맡기가 싫다 지금 친구들이 쓰고 있는 그 언어는 내가 지금 필요한 언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귀만 따갑게 하는 하늘의 언어만, 옳은 말만 계속 하고 있다는 거죠. 이 새로운 언어를 찾고 싶은 욥의 노력은 8장, 9장, 10장을 지나면서 더욱 구체화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법정 공방에까지 세우는데 피고로 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막 질문을 하고 말하고 싶어하는 거죠. 친구들은 욥이 필요한 새로운 언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옛날에 있던 그 하늘의 소리로만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기죠. 새로운 언어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새로운 언어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요 큐티 예배 때 여기서 설교를 하면 저기서 담임 목사님께서 이렇게 처방을 해주시고 양육을 해주십니다. 제가 처음 여기서 설교를 하고 목사님이 이렇게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구속사가 뭐예요?' 이렇게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제가 어버버하면서 말씀이 들리고 어쩌고 저쩌고 하니까 목사님이 딱 한마디로 정리해주시더라고요. '구속사는 요셉이 아니고 유다자나요. 당신이 나보다 옳도다 라고 이야기하는 게 구속사자나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님들에게 그럼 한 번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요셉이 아니라 유다일까요? 요셉은 민족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코람데오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어찌 범죄하리오.'라고 이야기하며 떳떳하게 살았대요. 그리고 이 민족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때요? 며느리인 다말과 동침하며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자나요. 그런데 왜 요셉이 아닌 유다일까요? 한마디로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이 아닌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오시기 위한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야기,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이야기가 새로운 언어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로운 언어는, 구속사의 언어는 어찌보면 성공의 언어가 아닙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싸워 이겨내는 것이 바로 새로운 언어입니다. 의기양양 잘되고 내가 잘나갈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옆에 아무도 없을 때 처절한 이 외로움을 가운데에, 우울증 가운데 있을 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낙망하고, 넘어지고, 좌절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바로 새로운 언어가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식이 꽤나 있다 라고 자기가 스스로 높였죠?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까지 왔다고 그렇게 교만했습니다.그 엘리후의 말은 새로운 언어들을 썼을까요? 제가 봤을 때는 이 엘리후 역시도 그렇게 새로운 언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절부터 14절 중에 제가 몇 가지 제 생각에 이런 새로운 언어를 써서 예수님을 넣으면 어떨까 하고 한 번 해봤습니다.
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
-> 하나님은 능하시니 자녀들을 멸시 당하게 하시고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시고 ...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원래 친아들인 예수의 자리에 우리를 수양, 양아들 삼아주셨자나요.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이 멸시를 당하게끔 일부러 하신다는 거죠. 왜요?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고 부딪혀봐야 그 자녀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겨내봐야 그 자녀가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인들을 살려두십니다. 왜 살려두실까요? 악인을, 악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예후를 봤자나요. 예후를 통해서 이세벨, 아합의 집 길의 끝판왕이었던 이세벨을 처단하시는 것을 보면 그렇구나 할 겁니다.
6 ...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 ...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셔서 더 큰 고난을 받게 하시며 그의 눈을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서 떼지 아니하시며 그를 개들과 같이 앉히사 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찾게 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성도가, 또 세상 사람들이 동일하게 같은 고난을 받는데 성도의 고난이 다른 것은 이 고난으로 연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면 말씀이 들리지 않고, 고난이 연단을 받아야지만 그때 비로소 말씀이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녀가, 전장에 나가기 전에 이 자녀를 더 큰 전투력을 키우고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서 고난에 고난을 더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므비보셋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은 개와 같은 나를 다윗의 이 식사의 식탁 자리에 올라오게 하여 그와 함께 식사를 하게 하는 것으로 회복을 시켜주자나요.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차마 아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의와 사랑으로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가족 공동체가 되어진 겁니다.
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 그들의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더욱 단단히 조아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바운더리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줄로 잡아주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늘 죄인이라서 하나님의 이 영역을 자꾸 벗어나려고 합니다. 태초 이후에 아담은 에덴 동산의 영역을 벗어났고, 우리는 가정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고, 교회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줄을 단단히 더 조아주셔서 묶어주시는 공동체로 만들어주시는 거죠. 특히나 이 소그룹, 목장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셔서 작은 죄라도 빨리 오픈하고 나에게 있는 마음에 답답한 것을 빨리 덜어내서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이 영역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안전 장치를 해준다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을 다 정리해서 말하면 한마디로 '우리는 100% 죄인이다.'라는 겁니다. 인과응보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이 도덕법만 지키는 죄인밖에 안 됩니다. 왜요? 자꾸 또 다시 도덕을 100% 지킬 수 없자나요. 하지만 이 새로운 언어로, 구속사라는 언어로 하나님을 보게 되어지면 이제 하나님이 그냥 일반적인 신, 이때 욥과 세 친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새로운 언어로 우리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데, 특히나 욥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데 욥과 친구들은 여전히 옛날에 쓰던 그 말만 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의 말만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따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리고 정죄를 하면서 하나님을 하급한 신으로 그냥 내려놓고 말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만나 주신 그 언어, 그러면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고 새로운 언어가 되어지는 겁니다. 늘 이곳에서 울려퍼지는 구속사의 말씀이 새로운 언어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 그들의 귀를 닫힌 채로 내버려 두사 교훈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시고 명하여 죄악에서 내 죄를 보게 하시나니
저희 목장에 한 여집사님 이야기를 잠시 좀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집사님이 우리들교회 오신지 한 3~4년 됐는데요. 이전에는 국사 교사로 공부에 열의가 되게 있으신 그런 분이셨어요. 그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데, 새로운 언어로 사랑했으면 참 좋았겠는데 예전의 그 언어로 계속해서 사랑하고 이렇게 다스렸던 거예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하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 신설학교가 생겼답니다. 보통 신설학교가 생겨지면 사람들 빨리 충원이 안되자나요. 그래서 지원하는 사람들이 바로바로 다 충원이 되어졌대요. 신설학교다보니까 선배들이 없어서 흔히 말하는 소위 일진들, 동네 껄렁껄렁한 친구들이 다 그 학교로 갔대요. 왜, 선배들한테 이렇게 터치 안 받으려고. 그 학교가 아직까지 신설학교라서 그런 친구들을 잘 잡아주고 선생님들도 잘 갖춰졌으면 좋은데 그러질 못해서 그 여집사님 아들이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계속해서 방황하고 그 친구들과 나쁜짓은 나쁜짓은 다 골라서 하더라는 겁니다. 학교에 한 달도 안되고 두 달도 안 된 사이에 계속해서 호출을 받아서 불려가고 불려갔었어요. 그러면서 이 엄마가 하는 말과 아들이 원하는 말이 하나도 맞지가 않아서 계속해서 평행선만 긋고 달려갔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지옥과 같은 날을 보냈대요. 하필 또 아빠가 부재여서 외국에 가서 일하시는 바람에 더 이 아들을 잡아줄 수가 없었다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만약에 지금 우리들공동체 같으면 공동체에 묻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그 처방도 받기도 했을 건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렇게 지나는데 어느 날 이 아들이 엄마한테 와서 '나 자퇴할래.'라고 이야기하더라는 겁니다. 이게 자퇴라는 게 나쁜쪽으로 아니라 '이 학교에 있다가 정말 자기가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 같아서 자퇴를 하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았다.'라고 대안학교를 신청을 해서 대안학교 가는 시험을 치는데 이 녀석이 시험만 치면 되는데 시험 치다가 도중에 또 나와버렸대요. 그래서 지금 엄청나게 급한 상황이 되어진 거예요. 원래 학교도 돌아가기 어렵고, 대안학교의 준비는 이거도 못 가고. 그래서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데 약간 불법을 써서 집은 송파구에 살고 있는데 강남구에 학교에 전학을 하게 됐어요. 어떻게 했냐면 강남구에 살고 있는 아빠 친구의 그 지하에 집을 여기다가 이전을 하고, 주소지를 옮겨놓고 그렇게 해서 했답니다. 자, 이때부터 이 두 모자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전쟁이냐, 입학해서 첫날에 교감 선생님이 이 두사람을 따로 불러서 '위장 전입 아니냐?'고 '위장으로 하지 않았냐?'고 그렇게 콕 찍어서 이야기했답니다. 학급에 들여보내지도 않고 4시간 동안 거기 앉혀서 계쏙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막 얘기했대요. 그래서 어찌어찌 넘어갔는데 들키면 안되자나요.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이 안에 누군가가 신고하면 이게 다 취소가 된대요. 그래서 100일 동안 어떻게 다녔겠어요. 지하로 숨어서 다른 친구들 보지 않게 숨어서 숨어서 이 아들이 그렇게 그렇게 다녔습니다. 이 차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학교를 나를 보내서 엄마가 ....' 또 이 엄마는 '내가 니 잘되라고 하지 않았냐.'고 계속 매일매일 싸우는 겁니다. 그렇게 그렇게 싸우다가 한 일주일 남겨놓고는 이 아들이 될대로 되라고 하면서 그냥 나와버렸대요. 그렇게 차 밖을 나와버렸대요. 그런데 다행히 다행히, 다행인지 100일을 넘겨서 그 시간이 지나갔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아들은 엄마와 단 둘이 차를 타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 새로운 언어로서 아들에게 '아들아, 내가 미안하다. 아들아, 너가 내 욕심 때문에 이렇게 수고한다.' 이렇게 얘기했으면 됐었을 것을 '너 잘되라고 하는 거라.'고 그런 옛날의 언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구속사로 새로운 언어로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남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용질문입니다.
[적용]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늘의 언어만 써서 더욱 힘들게 한 적이 있나요? 우리들교회에서 배운 구속사적 언어 중에 특별히 나를 회개하게 하는 언어는 무엇인가요?
여전히 내 죄보다 내 고난이 크다고 외치시나요? 내 죄보다 고난이 작다고 인정이 되시나요?
3.귀가 열릴 때 말해야 합니다.
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 엘리후의 모든 다 잘못 된 말은 아니었어요. 모두 다 나르시시즘적인 교만한 말이 아니었어요. 들어야 할 말도 있었습니다. 방금 읽은 이 15절의 제일 포인트는 구원과 귀를 여시나니라는 거예요. 구원에 관련된 말은 곤고입니다. 그리고 귀를 여시나니에 관련된 말은 학대예요. 그러면 이것들을 다 붙여서 말을, 문장을 만들어보면 이렇게 되죠. '하나님은 곤고와 학대로 구원하시며 귀를 여신다.' 학대 당할 즈음에라고 때를 나타내져있는데 다른 성경에는 역경으로 인해 그러니까 곤고와 학대가 있어야 비로소 귀가 열리고 말씀이 들린다 라는 겁니다. 목사님 늘 그렇게 이야기하시자나요. '말씀이 들리세요?' 이 말은 무엇이에요? 그러면서 또 연결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어야 말씀이 잘 들릴텐데.' 딱 이 구절의 말씀 아닐까요? 고난이 있으면, 학대가 있으면 열려진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이 다가왔다, 역경이 오는 거 같다 라고 하면 '아, 이제 드디어 내 귀가 좀 열려지는구나.' 나의 자녀에게, 그리고 내가 속해져있는 가정과 직장에 어려움이 닥쳤다라고 하면 '아, 나의 자녀가 드디어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하겠구나.'라고 그렇게 여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 16절입니다. 한 번 더 같이 읽을까요?
이제 좀 좋은 말들 나오니까 아멘이 좀 나오죠. 오늘 마무리는 좁은 곳을 지나 넓고 기름진 곳, 넓은 곳과 기름진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가장 기름질 때가 언제일까요? 제가 지금 딱 기름져보이지 않습니까, 통통해서. 여기가 이렇게 살이 쪄서 뽈록 들어가서 땅콩같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가장 기름질 때는 살이 찔 때입니다. 가장 건강할 때 기름져 있습니다. 건강하려면 참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건강을 하려면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넓은 환경이, 그런 이 상황이 조성되어져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할 수 있습니다. 출산 때 애기들을 보면 그 엄마의 가장 좁은 곳을 뚫고 나오자나요. 사람이 물리적으로 가장 좁은 곳을 지나올 때가 출산할 때입니다. 좁은 곳을 비집고 나오려면 얼마나 그 애기가 힘들겠습니까. 우리는 산모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눈으로 보니까 산모한테 늘 '고생했다.'라고 '아이고, 수고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제일 고생한 이는 누구일까요? 애기입니다. 정말 그렇대요. 산모보다 이 애기가 훨씬 더 많은 고통과 고난을 이 산도를 지나오면서 그렇게 느낀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좁은 길을 이끌어내시니 우리가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말씀이 들려지고 내 죄가 보여지면 기뻐하는 것보다 어찌보면 이 죄를 회개하고 뉘우쳐야 되니까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여전히 모르고 지나간 것, 내가의식하지 않고 덮어버렸던 것, 내가 생각나지 않으력 저 등 뒤로 던져버렸던 모든 것들이 회개하면서 일어나야 되니 어찌보면 이 좁은 길을 지나는 역경을 몸으로 부딪혀야 합니다. 곤고한 날 학대로 통해서 구원의 말씀이 들려져 회개가 되어지면,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넓은 곳으로 앉혀주시고, 가장 기름진 것으로 우리를 상을 채워주십니다.
제가 처음에 집사람의 생일을 못 챙겨줘서 핵폭탄이 터졌다 라고 이야기했자나요. 설마 그거 하나로 핵폭탄이 터졌겠습니까. 신혼 초부터 쌓이고 쌓이고 쌓였던 것이 펑하고 터져버린 겁니다. 지난주 목요일날 저희 목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연애 때부터 쌓이고 쌓였던 것들을 하나하나 조곤조곤 하나, 둘 이야기하더라고요. 고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듣고보니 저는 그냥 물욕, 소유욕, 그리고 회피하려는 이런 것들만 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죄가 아니었어요. 저의 이기심, 나밖에 모르는 이게 가장 큰 죄였습니다. 한 분 집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은 두려운 것이 있나요? 두려운 사람이 있어요?'라고 물어봤어요. 저는 두려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도 두렵다 라고 그렇게 잘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어머니와 저는 이 폭력과 폭언의 학대를 너무 심하게 당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항상 무서웠습니다. 제가 잠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제가 들어오자마자 '씻고 자자.'라고 이야기한다 라고 했었자나요. 왜냐하면 제가 잠을 보상받아야 된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잠에 대해서 잘 못자서 약을 먹지 않으면 하루에 다섯 번, 여섯 번은 중간에 그렇게 막 깨고 숙면을 취하지 못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술만 드시면 집에 와서 자는 저를 깨웁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때리시고 폭언을 쓰시고 잠을 안 재우는 거예요. 어느 날 저녁에 어머니께서 전화가 옵니다. 부모님께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식당을 하셨는데 엄마가 전화가 오면 이런 얘기를 하셔요. '현아, 아빠 술 드셨어.'라고요. 그러면 저는 그 전화를 받으면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거죠. 그리고 저의 귀는 '삐-.'라는 소리와 함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이명이 들릴 정도로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왜요? '아빠가 또 언제 오실까.' 자다가도 조금이라도 덜컹 소리나면 '아빠 오셨나?' 그리고 자다가도 조금이라도 아빠 안 오시면 계속해서 깨어지고 깨어지는 겁니다.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그 두려움의 대상이 일순간 사라져버렸어요. 긍정적인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는데 하나님 역시도 두려워하기 싫게 됐어요. 왜냐하면 저에게 두려움은 공포였으니까.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말씀이 들리려면 이 고난이 왔을 때 연단으로 생각해서 받으면 되는데 저는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하게 연결이 안 되어져 있어서 고난이 오고, 역경이 오면 어떻게 했느냐? '어려움 대신해서 내가 쾌락으로 채우면 돼, 고난을 대신해서 내가 물건을 사서 모으고 눈에 보이면 돼, 그리고 힘든 일이 닥치면 내가 구덩이를 파서 거기 있으면 안 맞겠지, 그것을 피할 수 있겠지.'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을 비롯해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안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프다고, 힘들다고, 죽겠다고 이야기해도 오랜 시간동안 목사로써 상담을 하고, 설교를 하고, 사람을 살려야 된다는 그 사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저만 생각했었습니다. 내 감정이, 내 기분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의 이기심 때문에 집사람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이 참고 힘들었던 내용이 제 귀에 들리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덮여있던 제 귀를 열어서 '아직 남은 할 말이 있다.'라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내 주어진 가족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라.' 라고요. '너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서 회피하고 물건을 사 모아서 보상 심리 받으려고 했던 그 똥을 던져 버리라.'고요. 저는 적용으로 그래서 한 20년 넘게 이고 지고 있던 짐을 내려던지려고 합니다. 목장에서 목요일날 그렇게 선포를 했습니다. 아까 봤던 그것들 제가 다음주에 저희 집에 목장을 하거든요. 다음주 목요일날 모두들 오셔서 옥상에 올라가보시라고요. 저의 똥이 다 치워졌을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가 열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 하시는데 이 물리적인짐이 치워지면 영적인 저의 두려움에 올바른 하나님이 대상으로 채워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후원이 꼭 필요합니다. 어떤 후원이요? 260, 상의는 100입니다. 제가 달라는 게 아니라 필요하신 분들 언제든지 연락주셔서 260 사이즈 신발들, 가방, 티셔츠 다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1부 마치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문자가 쇄도하더라고요. '목사님, 말씀 은혜 받았습니다.' 이건 인사겠죠. '저희 신랑 신발이 260이에요. 티셔츠가 100이면 딱 맞을 것 같아요. 기타 등등으로 문자가 엄청나게 왔습니다. 이렇게 우스개로 이야기하고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이제 저는 말씀의 결론을 맺는 가운데에 말씀처럼 살아보고 하나님이 옮겨주신다 라고 이야기한 것을 나누고싶습니다. 이제는 보상 의식과 '내가'라는 이 이기심에서 내 죄를 보는 기름진 곳으로 옮겨 가겠습니다. 가정은 제가 늦게 들어가고 싶고 최대한 밖에 나가고 싶어했던 그런 가정이었는데 이제 가족들에게 '미안해.', '사랑해.'라고 하는 새로운 언어를 쓰는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내 말만 들어봐.' 사역의 현장 동역자들에게 '내가 들어줄게.'라고 하며 진정한 기름진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요리 조리 숨어 있었던 목장 공동체와 교회에서 아빠를 용서할 수 있고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교회로, 가장 기름진 곳으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적용의 말씀드리겠습니다.
[적용] 최근에 말씀이 들려지는 곤고와 학대를 당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좁은 곳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와야 하는데 좁은 곳이 좋사오니 하고 나오지 않는 곳은 어디입니까?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중복되고 쓰지 않으면서 이고 지고 있는 물건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주희
1.내가 내가 하며 내가 드러나는 삶이 아닌 예수가 예수가 하며 예수를 드러내는 삶 살아갈 수 있기를
2.내가 먼저 죽어지고 엎드려지고 회개하는 삶 살 수 있기
3.엄마 무릎 통증 감해지고 집에서 무릎 회복 잘 되어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기를 연약한 우리 엄마를 지켜보호 하여 주시길
4.우리의 아둔함과 어리석음을 아시는 주님 미혹된 주님의 어린 양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엄마를 신천지로 이끈 이모와 다른 지체들도 신천지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여주시옵고 그 이모가 더 이상 신천지로 다른 지체들을 끌어 들이는 것을 막아주셔서 하나님께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주시길
5.선미, 수연, 가림 모두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예선
1.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살도록
2.사람의 어떠함을 묵상하지 말고 말씀으로 넓은 곳으로 돌아나와 주님 안에서 참 기쁨 누릴 수 있도록
은우
1.번갯불과 천둥 소리로 '내'가 주제가 아닌 것을 알게 하시고, 기이한 능력으로 허물들을 눈처럼 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받은 달란트가 사람 살리는 것으로 열매 맺게 하시고,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가운데 평강 누리는 저와 목장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