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0-18
큰 기대를 가지고 높은산 정상에 올랐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못보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잘 보이면 더 좋고, 보지 못하면 아깝다.
팔복산 정산에서는 무엇을 봐야 할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
주님을 만나는 게 모든 문제의 해답이기 때문이다.
1. 문제 때문에 울 때 의외의 천사를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을 갔는데 무덤을 막았던 돌문이 열려 있으니, 막달라 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무 몰라 믿음의 지체인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한다.
이렇듯 어려운 사건이 왔을때에는 믿음의 지체에게 말해야 한다. 안 믿는 친척에게 말하는 게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이니 시신을 찾으러 당장 나설 것 같은데 예수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그냥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포기한 것이다. 부활의 말씀을 그렇게 들어도 아직 알지 못한다.
힘든 상황을 회피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는 문제가 있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지킨다. 문제를 직면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운다.
땅을 치며, 통곡하며 울기력이 없도록 엉엉 우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처럼 부끄럽고 죄가 많은 인생이다.
한번도 올라간 적이 없는, 가족도 없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인생이다.
우리의 인생도 장르와 정도만 다를 뿐 막달라 마리아처럼 밑동짤린 나무이다.
각자의 힘듦이 있지만, 놀림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는 인생이기에 생명과 소망이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삶에서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없는 사람이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무덤앞이 차라리 나은 인생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기에 울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에 유일한 희망이었던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돌보려고 했는데 이마저도 없으니 우는 것이다.
이미 시신이 없는 걸 알지만 자꾸만 보게 된다. 문제가 힘들지만 보면서 울고, 울면서 또 본다.
미련과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과 판박이다.
그러다 갑자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머리맡과 발쪽에 앉고 마리아에게 묻는다.
무덤에 있는 천사라니...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존재를 만나니 놀라면서도 소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천사들이 왜 우냐고 하는 것은 그 이유를 물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울 일이 아닌데 왜 우냐는 것이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는 문제만 말한다. 내 슬픔만 말한다.
그러니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삶에 지친다.
주님은 우리처럼 연약하고 아픈 사람을 기다렸다. 멀쩡한 의인은 주님이 필요하지 않다. 다 죽은 우리를 부활하게 하시려고 와 주신 주님이다.
@ 어떤 문제 때문에 울고 또 울고 있습니까?
의외의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났습니까?
누군가에게 천사 같은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2. 이외의 환경에서 양육하시고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내가 겪는 사건 속에서 주님이 내 뒤에 계시는구나 알면되는데 그게 안된다.
보려고 돌이켰지만 내 힘으로 돌이키니 주님이 안 보인다. 마리아는 왜 주님을 못 알아봤을까? 중요한 영적 교휸을 주기 위한 사건이다.
각자 환경속에서 어떤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내 사전에 내 남편이 바람피는 건 없어야 하고, 내 자녀는 당연히 엄친아이고 이래야 한다는 것이다.
내 고정관념이 너무나 굳세어서 모든것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 이외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이익 때문에 우는 경우가 많다.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제 나를 사람 대접해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부활이 알아서가 아니다. 뭠에 오는 것을 마지막 계획으로 생각했는데 시체가 없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환경이 좋아 무덤덤한 사람이다.
마리아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시체가 보이지 않으니 운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우는 것이다.
내가 겪는 사건이 주님을 만나기 가장 좋은 환경인데 운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왜 우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는데, 마리아는 못 알아보고 시체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묻는다.
예수님이 천사와 같은 질문을 하지만 누구를 찾는지 덧붙이신다. 이미 마리아의 마음을 아시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은 말씀으로 양육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큐티하는 것이다. 목장에서도 이렇게 양육을 해준다.
고난은 피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낭떨어지로 질주하고 있는 우리를 가로 막는 신호이다.
고난은 생각하라고 있는 것이다. 내 삶과 앞으로 가야 하는 삶을 돌아보라는 사인이다. 인생의 방황을 유턴하라는 사인이다.
이것을 말씀으로 생가하게하시고 응하게 하시려고 양육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을 만나야 인생의 방황이 끝난다. 그러니 주님이 네가 찾던 답이 여기 있어. 바로 나야!!!!! 말하시지만,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마리아도 알아보지 못한다.
마리아도 예수님이 살아계신 모습을 봐도 자기가 정답으로 생각하니 슬프다. 주님을 보고도 찾는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사모함이 커도 예수님을
스스로 찾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활의 주님은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과 장소에서 만나게 된다. 그래서 못 알아본다. 의외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사건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시체 없어졌다고 울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에서 쓸개 탄 포도주는 안 받으시고, 신 포도주만 받으셨는데, 십자가는 착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분별하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내가 거절 못해서 쓸개 탄 포도주를 받는 차감으로 집안과 나라가 망한다.
내가 주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과 장소를 결정해놓기 때문에 주님은 할 수 없이 의오의 장소를 통해 만나주신다.
우리도 너무 좋은 문제인데도, 울고 있지 않은가?
주님을 만나느 일에 내가 울고 있구나... 적용해보시길 바란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까요?
예수님이 마리아 이름을 부르신다. 그러니 비로소 마리아는 알아보고 '랍오니'라고 대답한다.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4절에는 내가 내 힘으로 돌이키니까 예수님이 안 보였다. 하지만 16절에서는 신앙의 돌이킴이니 주님이 보인다.
직접 이름을 불러주시니 울고 있는 것에서 주님꼐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주님은 이렇게 형편 없는 나를 먼저 찾아오시고, 울 고 있는 나에게 이름을 불러주신다.
나의 모습 그대로 주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 문제투성이고, 울고 있는 나여도 괜찮다. 일어날 힘이 없고, 피할 곳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
그냥 주님이 이름 불러주시면 일어나게 된다.
고난이라는 사건으로 불러주시고 말씀을 통해 만나주신다.
@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신 고난과 말씀은 무엇인가요?
3.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사명 감당하게 하십니다.
신앙으로 돌이키니 말씀이 안들린다. 신앙의 돌이킴이면 회개가 된다.
나를 불들지 말라,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 계속 주님을 붙들고 늘어지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생각이 나니 다시 육신의 예수님을 붙들고 만지려고 한다.
우리도 힘들때는 돌이키다가도 괜찮아지면 다시 행복했던 때를 꿈꾸면 육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남편이 돌아오니 사명을 놓아버리고 놀러다니고 싶다.
예배, 목장,주님,교회를 다 떠나도 좋다고 한다. 육적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다. 그러곤 울고불고 하니 주님이 놓아라!!해도 안된다 한다.
이제는 새로운 부활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타적으로 살라는 것인데...
그러니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고 하시고,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제자들은 다 흩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사명을 받았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처음 간증한 곳이 기라성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아이러닉하지 않은가,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주님을 만나면 누구에든지 전할 수 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목이 마르다고 했다 하신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인생과 내 인생도 성경에 응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성경에 목이 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세상에 목이 마르다. 정욕에, 야망에, 성공에 목이 마르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목이 마르지 말라고 하신다. 성경에 목이 마르다고 하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 내가 주를 보았다고!!!고 외치는 삶이 우리의 처음, 중간,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남편,자녀,돈 때문에 주님을 붙들었으면 사명으로 나가야 하는데, 여전히 남편, 자녀, 돈을 붙들고 있으니 이 세상에 목마르지 마라, 오직 성경에 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니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가.
@놓치고 또 놓쳐도 또 붙들려고 하는 육신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내가 듣고 싶은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까?
부활이 내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까? 남편, 자녀, 돈 등이 기쁜 소식입니까?
<기도제목>
송연- 가족구원
섬김- 내 감정을 잘보고 인정해주고 남동생이 우리들 교회 등록하고 목장에도 나갈 수 있도록
혜인- 이력서를 넣고 있는데 가장 선한길로 인도해주시기를. 디스크 통증 감해주시기를
정연- 양교에서 솔직하게 나누고 가족건강과 체력지켜주시기를. 신교제, 신결혼 준비될 수 있도록
채연- 신결혼 하기 전 청년의 때를 잘 누릴수 있도록. 결혼예배가 구원잔치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