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4.
참석: 박영빈, 김정한, 임현호, 이영찬, 이시헌, 정인호, 김진형
<말씀 요약>
본문: 요한복음 5:1-15
제목: 고친 이는 예수라
설교자: 정정환 목사님
어젯밤에 설교 준비를 마치고 기도를 하는데, 왜 저에게 주일 설교를 맡기실까 기도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열왕기하 말씀 전해주시면서 엘리사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는 게하시가 나오는데, 게하시가 나와서 죄 고백하고 찌질한 얘기 나누라고 허락하시나 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한류게임이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게임에서 이기고 최종으로 남는 사람이 상금을 갖는 내용이었습니다. 456억원을 위해서 456명이 경쟁을 하면서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치룹니다. 돈과 출세를 위한 헛된 소망에 사로잡힌 참가자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과정을 거칩니다. 인간성의 실종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오늘날 삶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행복이 없는 적자생존,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연못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습니다. 그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시는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나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나의 누운 것을 보시고 먼저 찾아오십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연못 주위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앉아있고 누워있습니다. 천사들이 가끔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서로 제일 먼저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나오면 나머지 병자들은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자비의 집이지만 전혀 자비를 찾아볼 수 없고 선착순의 논리만 존재하는 무자비한 전쟁터였습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기약없는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38년을 병으로 누워있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절망과 외로움과 아픔 속에서 하루하루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16년동안 중풍을 앓아 오셨습니다. 혈기 마른 사람에 해당이 됩니다. 이 긴 시간동안 병을 앓아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자식으로 옆에서 보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랜시간의 병은 사람을 무력하게 하고 희망조차 상실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38년의 병자도 아마 혈기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고 계셨고 오래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질문하신다. 니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한 질문을 왜 하시는 걸까? 뻔한 질문은 왜 하실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병자로 하여금 회복되고 싶은 마음을 일어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내가 너의 구원자라는 첫 시작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38년의 병자처럼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육신과 마음의 질병으로 누워있는 나. 번번히 실패하며 모든 의욕을 상실해버린 나, 죄에 절어서 있는 나. 주님은 오늘 이런 나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알고 계십니다. 절망과 깊은 외로움을 체휼하셨던 주님은 지금 나의 마음을 체휼해주고 계십니다. 나의 외로움과 절망과 수치와 아픔 고독 열등감... 그 모든 걸 아시는 주님은 나에게 오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니가 낫고자 하느냐? 왜 이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날마다 베데스다 연못만 바라보는 나. 그 나의 모든 시선과 관심을 이제 예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다 드러내게 하시면서 나 스스로를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암이 생기면 그 부위를 드러내서 절개하는 게 치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너의 구원자는 나란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예수님이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먼저 말 걸어오는 사건이고 질문하시는 사건입니다.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님에게 답을 하기 위해 think합니다. 말씀묵상하고 큐티합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내가 끌고 온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갑니다.
공부를 해도 베데스다 연못에 먼저 들어가는 것 같아서 밀리는구나 좌절감만 들었습니다. 시험을 치니까 아는 게 없으니 답안지에 쓸 말도 없고 이런 상황도 모르는 제 친구는 도서관에 있는 것만 보면서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꾹꾹 찔러댔습니다.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혼자서 강둑길 걷다가 하루종일 오락실 갔다가. 극심한 무기력에 사람조차 만나지 않다 보니까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실어증에 걸린 사람 같았습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열등감과 자기연민과 공허함 속에 폐인처럼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지냈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하나 안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군대로 갔습니다. 하지만 군대도 도피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구타, 폭언 등) 제대할 때가 다가오니 여기를 떠난다는 기대감도 생겼지만 사회로 나가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군인들을 대상으로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적용질문: 내가 지금 누워있는 자리, 주저앉아있는 자리, 널부러진 자리는 어디입니까? 나는 어떤 베데스다에서 나의 갈망과 소원이 이뤄지길 바랍니까? 돈, 건강, 학벌, 행복, 스펙, 성공, 외모, 사람 등 어떤 베데스다입니까?
2. 말씀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베데스다의 38년 병자는 육적인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 영적인 병도 깊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고쳐주겠다고 하신 게 아니라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쓰인 단어입니다. 병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에게 부활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회복, 생명, 구원입니다. 그래서 병자가 할 일은 이 말씀 그대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피해의식으로 몸부림칠 때 낙심 중에, 중독 가운데, 죄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다 보고 있었단다. 이제 일어나라.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으로 나를 고치십니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나를 구원해주십니다. 베데스다 연못물이 생명수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생명수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병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말씀이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그 말씀을 내가 듣고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날마다 듣는 이 말씀이 나를 치유합니다. 이 말씀이 곤고한 내 삶에 육신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일은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의 인애와 자비하심에 나의 존재를 맡기고 의탁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이게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자비의 집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자비의 집입니다. 내가 저것만 가지면, 저 사람만 만나면, 저 곳에만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걸 자비의 집 베데스다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내 옆에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자비의 집입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자비의 집 베데스다입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집회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수년간 저를 사로잡고 있었던 영적인 병과 마음의 병을 주님께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제 앞에 찬양집이 있었는데, 한 찬양 가사에 제 시선에 갔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혼자서 이 찬양을 무한반복으로 부르는데,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 혼자 일어날 수 없는 이런 저에게 일어날 힘도 의지도 없는 저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정환아 내가 다 보고 있어 내가 너를 도울거야 일어나 걸으렴, 일어나라.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님 되심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제가 공부를 했던 목적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출세하고 싶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가진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만나시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끝나고 2가지 확신이 있었는데, 내 인생의 베데스다에서도 예수님이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다는 사실, 두 번째는 내가 그분을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대로 돌아온 그 주일에 11명의 후임과 함께 교회로 예배를 드리고 위해 출발했습니다. 후임병사들을 잠시 앉게 했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에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단 한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하게 됐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더니 나머지 형제들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와 다를 바 없던 저를 일으켜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제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방식으로 적성에 가장 잘 맞는 곳으로 인도를 해주셨습니다.
적용질문: 내 속에 있는 절망과 원망, 상처, 자기연민, 피해의식은 무엇입니까? 나는 베데스다에 누워 무엇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소문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까?
3.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또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셈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생명보다 율법이 중요했습니다.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아프면 나도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죠. 아들이 배고프다고 하는데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유대인들은 병자에 아픔에는 하나도도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체휼도 없습니다. 율법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율법의 정신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는 그 자체에만 꽂혀있습니다. 병자가 38년 된 시간에서 회복이 되었다면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줄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너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잘못됐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를 왜 하셨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알멩이는 관심이 없고 온통 껍데기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전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만 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잡습니다. 본질을 외면하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을 진정한 안식이 바로 예수님께 있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종교적인 열심은 있는데 그 열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영적 나병에 빠져서 심각성을 모르니 중증환자입니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심각한 병자들인 것입니다.
저도 그랬다. 제가 가지고 있는 틀,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제단했습니다. 그래서 편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38년 된 병자처럼 주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기는 했으나 자기애와 기만, 위선과 탐욕이 있었습니다. 내 몸 편한 게 우선이다 보니 이런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온몸으로 불편함을 드러냈습니다. 영적 나병에 걸려 사역을 하다가 치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자기 중심성에 대해서 말하라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애를 받을 뻔했습니다. 목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예수님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목사 자신이라고 하니 얼마나 수준 미달인가. 역사 공부를 하던 딸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라가 좋으세요? 백제가 좋으세요? 나는 내가 더 좋아. 웃자고 하는 농담이었지만, 그 말속에는 뿌리깊은 자기애와 나르시시즘이 드러났습니다. 이 기준과 잣대로 주위 사람을 판단하고 나만의 경계를 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닌 척 위선을 떱니다. 이게 자기기만입니다. 내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인본적인 사람의 전형입니다.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나같은 게 목사로 사역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게하시처럼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면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보라 니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병자는 병고침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무런 수고도 노력도 안했는데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니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38년 된 병자도 게하시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상실한 이 환자에게 남은 구원을 이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변화된 삶.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38년 된 병에서부터 고침받은 것, 더 중요한 것은 그 병 때문에 만난 예수그리스도, 그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을 감사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오늘을 회개하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고 전하는 증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일에 눈물이 났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은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순간을 볼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이 기쁨을 나에게 주시려고 38년 된 병자같은 나를 이 유대인 같은 나를 불러주셨구나, 게하시 같은 나를 구원해주시고 값없이 받은 이 아람다운 소식을 전하게 해주시는구나 느꼈습니다. 저 또한 이 기쁨을 알게 되니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이 감사가 나왔습니다. 유대인처럼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았고 사역을 통해 높임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게하시처럼 사역하다 영적 나병에 걸리고 엘리사 같은 담임목사님의 마음을 근심케하는 사역자였습니다. 이 땅에서 육적 수치를 드러내므로 영적 수치를 가려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게하시같은 나를 위한 주님의 나팔소리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죄많고 찌질한 게하시 같은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인생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셔서 니가 공사중이더라도 내가 너의 구원자이니 나를 의지하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로의 말씀이지만, 엄중한 명령으로도 들립니다. 내 삶을 끝까지 지켜주시겠다는 신실한 약속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가망이 없는 인생입니다. 한쪽은 38년 된 병자, 다른 한쪽은 끝없는 교만과 정죄 속에서 사람들을 비난하다가 망할 인생입니다. 저 자신도 이 둘처럼 그렇게 살다가 끝날 인생이었을 겁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은 또다시 찾아오십니다. 말씀해주십니다. 니가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된 인생을 살아가렴. 베데스다에서 내 마음에 세상 소망과 욕심이 채워지고 고대하는 행복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학교 이름있는 직장, 투자하고 사업을 하면 대박이 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그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한 채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참가자들처럼 헛된 세상 신화에 나를 던지고 있습니까? 진짜 베데스다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나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주목하고 계셨고 결핍과 부족과 아픔을 아신 예수님이 바로 베데스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절망의 자리 헛된 소망의 자리 무기력의 자리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적용질문: 내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또 다시 범하지 않아야 할 죄, 피해야 할 자리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입니까, 거룩입니까?
<적용 나눔>
A: 세 번째 대지의 적용질문에 답하자면 내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최소한 지켜나가야 할 규칙인 것 같다. 일하는 직장에서든, 대중교통에서든 최소한 우리가 지키기로 한 규칙에 대해 어긋나는 것을 보면 상대를 정죄하고 대놓고 지적을 하는 것 같다. 내가 또 다시 범하지 않아야 할 죄, 피해야 할 자리는 바로 그러한 규칙이나 약속을 위반하거나 어기는 행동을 마주한 상황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같은 죄인이라고 하셨는데 매일 큐티를 하고 은혜를 받음에도 정작 몇 시간 뒤에는 잊고 다시 내 원래 성격대로, 내 가치관대로 생각하고 언행을 하니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설교 말씀과 주제 큐티 말씀을 보며 내가 매 항상 죄인임을 기억하고 큐티 말씀을 아침에 한번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꾸준히 다시 보고 묵상하며 적용하는 하루를 살아야겠구나 하는 찔림과 깨달음을 느꼈다.
B: 말씀은 작년 제주도 아웃리치 갔다오고 난 이후로는 잘 들리긴 한다. 하지만 너무 망하는 사건이 연속으로 이어지다 보니 생색이 많이 난다. 오늘 주일 설교 말씀이 내 말씀 같았다. 다음주부터 큐티를 꾸준히 하며 다시 회복해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말씀은 유대인이 현대판 나르시스트라는 것, 행복이 목적이 아닌 거룩이 목적이어야 한다라는 부분이었다. 그 말씀을 들으며 나에게도 나르시즘이 있고, 내 힘으로 여전히 무엇을 하려 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교회를 다님에도 일이 잘되지 않는 것이 있다 보니 다시 세상 적으로 떠내려가려 하는 것이 있다. 내가 이번 사건들을 통해 느껴졌던 것은 낮아지지 못하고 내 강한 자존심으로 살아가려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C: 나는 돈이랑 행복이라는 베네스다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D: 세 번째 대지에서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2017년도부터 교회를 다니며 내 중심으로 생각하였기에 예배나 목장을 잘 사수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육도 받고, 양교도 받았지만 아는 사람도 잘 없고 공동체에서 붙잡아주던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떠내려가는구나 싶었다. 내가 귀찮다 라는 이유로 부서도 뭐도 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들으니 찔리기도 하고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E: 나는 두 번째 대지의 적용질문인 피해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가 환자였던 것이 피해의식인 것 같다. 조현병으로 발병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작년에 퇴원하면서 처음 직장을 구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처음한다. 그래서 매달 돈을 조금씩 모았는데 이래서 내가 결혼을 할 수나 있을라나 하는 원망이 든다. 또한, 정규직이 나도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F: 세 번째 적용질문을 보면 내 기준으로 옳고 그름으로 정죄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셨는데, 회사에서 일할 때 경력에 비해 일을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무시가 된다. 코딩은 실력이 보이는 데 저 사람은 경력이 저렇게나 되는데 왜 저 정도밖에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것 같다.
G: 내가 지금 주저앉은 자리는 예전에 무기력하게 무너졌었던 상황인 것 같다. 옛날에는 내 열심히 열심히 뛰었지만,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며 무기력한 상태로 있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있어 주저앉고 누워있던 자리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말씀묵상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찾아서 해나가고 있다. 예전처럼 단순히 내가 잘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수치들을 나누는 게 나의 드러나지 않았던 나병이기에 이것을 나누고 가면 은혜가 있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 같다.
<기도 제목>
박영빈
1. 매일 큐티로 먼저 내 죄를 보고 목장 식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2. 진짜 베데스다인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일어나 빚 갚을 수 있도록
3. 내가 나았음을 믿고, 다시는 불신교제와 세상 성곡으로 죄짓지 않고 신교제 소망 주시길
김정한
1. 지금처럼 하나님과 말씀,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가까이 할 수 있도록
2. 하나님이 우리는 죄인이라 하셨는데, 이를 기억하고 내가 옳도다가 아닌 네가 옳도다를 실천하고 적용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3. 지난주 큐티 본문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마시려면 먼저 내 수치와 상처, 죄를 드러내야 한다 하셨는데, 하나님과 공동체, 그리고 나 자신 스스로에게 수치와 상처들을 숨기거나 하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고 말하는 적용할 수 있도록
이시헌
1. 예배와 목장에 잘 참석하고 무기력과 우울감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2. 이번 주 중요한 일이 두 개나 있습니다. 담대하고 탈없이 잘 치룰 수 있게 지혜와 용기 주시기를
정인호
취업 고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김진형
여자친구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후처리가 잘 진행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