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서 알리자]
피투성이라도 살겠다!
열왕기하 7:3~11
김양재 목사님
[들어가며]
말씀을 들을지어다, 역사하는 힘이 큰 기도로 송구영신 닫고 열었습니다.
해석이 잘 되어 해결되었다면 이제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표어는, '거주할 처소를 세웁시다.'입니다.
교회도 세워지고, 가정도 세워지고 육신의 장막도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가야 합니다.
우리들교회가 말씀을 듣고 나눠줄 것만 있는 인생이 되어 이제 가서 알려야 할 선교 영역이 많다.
의료 선교, 건축 선교, 교육 선교, 미용 선교. 이제 가서 알려야 합니다.
무엇을요?
구속사의 복음을.
누가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요?
오늘은 이제 가서 알리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 죽을 것 같은 고난이 기회입니다.
3~4절.
이제 2차 침공에서 장로들은 드디어 엘리사의 말을 들으러 왔고,
왕은 죽이려 하고, 장관은 물값이 떨어진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믿는지 보겠습니다.
이제 성벽은 절대 넘어갈 수 없고, 넘어가서도 안 되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넘어가면 곧 죽음이에요.
먹을 것이 동난 지금은, 성안도 성 밖도 죽음 아래 있습니다.
극한 굶주림 속에서도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공동체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극과 극 사이에 껴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주인공인 나병 환자 네 사람입니다.
굶어 죽어도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 천민.
지금까지 열왕기하를 읽으면서 나병 환자가 두 사람 나왔습니다.
나아만 장군과,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병 환자가 네 명이나 나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나병 환자가 또 나와요.
나병 환자가 뭐라고 왜 계속 등장시킬까요?
그들은 나병 환자로 육신의 병을 얻어서 구원 얻었지만,
고통에 무감각한 영적인 나병 환자 같은 우리 자신을 좀 생각해 보라는 말이에요.
유대인의 탈무드는 여러 곳에서 이 나병 환자 네 명을 게하시와 그 아들들로 봅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끝났다는 거예요.
시간 순서로도 이게 게하시로 볼 수 있지만, 시간 순서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나병의 치리가 구원의 사건이 되지 않고, 영원한 심판으로 끝났다면,
게하시를 왜 이어지는 8장에 다시 나오게 하셨겠어요?
물론 예수님 시대에 10명의 나병 환자를 다 고쳐주셨지만,
한 명의 사마리아 나병 환자만 감사해서 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세요.
그러면 병 고쳤는데 구원을 못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판례집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양육과 구원의 드라마를 봐야 합니다.
탈무드처럼 나병 환자는 저주고, 그래서 옳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 아니라고 봅니다.
이 네 명 가운데 게하시가 있다고 봅니다.
앞서 6장에서 아람 군대가 1차 침공 때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을 포위했었잖아요.
기억나시죠?
무섭게 나병으로 치리를 줬어도 치리의 목적이 구원이기에, 쫓아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엘리사 옆에서 사환 역할 한 것도 없이,
아람 군대가 오니까 두려워서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이까?'만 외쳤잖아요.
그런데 엘리사는 눈높이에 맞춰서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죠.
그래서, 게하시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어요.
대체 게하시가 뭐라고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거기까지였어요.
2차 침공에서는 게하시가 또 사라져요.
어떤 적용도 안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무 이름도 없는 나병 환자 넷 중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치리 받은 후로, 게하시의 이름으로 호칭한 적은 없어요.
여전히 이름만 없는 게 아니죠. 사환이라는 직분도 없어요. 아직 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선생을 향한 죄송함을 너머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졌을 거예요.
엘리사는 내치지 않았지만,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은혜도 보여주셨지만,
그 은혜를 소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은혜는 잠깐일 뿐, 금세 악하고 음란한 자기 본성으로 돌아가 버리는 자신을 보며 절망했을 거예요.
한편 2차 침공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굶주림으로 아비규환이니,
게하시같은 나병 환자는 설 자리가 없어요.
엘리사는 장로들, 여호람 왕, 장관을 상대하고 있는데,
나병 환자인 자신이 그 당시 고정관념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겠죠.
드디어 사명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나병 환자라는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여러분도 그러고 싶을 때가 너무 많죠? 그동안 그렇게 양육해도, 됐다. 안 됐다.
가정이고 교회고 역할이고 사명이고 환경을 탓하며 다 버리고 주저앉고 싶을 때만입니다.
이게 다 우리 이야기에요.
게하시가 곧 우리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주제가는 죽을 것 같다.입니다.
여기까지 와야 합니다.
자기의 자리는 나병 환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주제를 알아야 해요.
저희도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활동한 지 100년이 안 되는 판국에,
며느리의 때, 아내의 때, 엄마의 때, 여자 목사의 때.
다 여자로서 걸어왔잖아요.
QT 하니까 그때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셔서,
그래서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님들의 선교가 정말 고맙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여기서도 죽을 거고, 저기서도 죽을 것이에요.
그래서 죽을 것 같은 고난, 이것이 나병 환자 네 명의 인생을 요약하는 말이에요.
여기서 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겠다.가 아니라,
피투성이라도 살겠다는 것이죠.
이게 믿음보다 이 사람들이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병이라는 죽을 것 같은 고난에 있으니 하도 무시당하여서 이게 가능한 태도예요.
낮은 마음이에요.
그러니, 다 포기하고 들어온 게하시가 이런 나눔을 주도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그는 그대로 죽고 싶었겠죠.
하지만 다른 세 명의 나병 환자 친구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나병 환자인 친구들이,
같이 살아보자고 외쳐주니까 같이 끌려갔을 것.
환경이 겸손한 것이 겸손한 거다.
그리고 그것이 끌려가서 결국 엄청난 구원의 시작이 됩니다.
이런 나병 환자와 비교하면 여호람 왕은, 이 아람이 쳐들어와서 피투성이 된 재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어요. 어찌 여호와를 더 기다리리오. 반문합니다.
여호람이 손에 의지하는, 능력이 있는 장관도 마찬가지예요.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을 듣고도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왜입니까? 마음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피투성이 된 삶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상식 밖 기적을 바라며 피투성이 같은 삶을 이어가느니, 현실을 깔끔하게 인정하게 죽겠다는 거죠.
게하시가 나병 환자가 아니라 왕과 장관 옆에 있었다면 또 그대로 따라갔을 거예요.
그래서 내 옆에 누가 있느냐? 어떤 공동체가 함께 있느냐?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평생을 좌우합니다.
여러분, 피투성이라도 살겠다는 나병 환자와 피투성이라서 죽겠다는 왕과 장관 중 누가 더 멋있으세요?
누구처럼 되고 싶으세요?
엉망진창이 된 결혼이라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세속사 가치관으로 보면 신뢰가 다 깨어진 결혼을 이어가느니,
깔끔하게 이혼하고 새 출발 하는 것이 더 멋있다고 봅니다.
이 세속사 가치관으로 보면 피투성이처럼 망가진 삶을 놓지 않고 살아내느니,
미련 없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게 더 멋진 것 같아서 이런 행위를 하죠.
하지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깨뜨린 이혼도,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끝내는 자살도,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한 죄입니다.
자꾸 이것에 대하여 공감하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게 죄라고, 무섭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결론은 영원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반대는 영벌이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남는 것 같지만 뒤로는 밑지는 선택이에요.
구속사 가치관으로 보면, 수치를 지고 사는 유다에게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거부하며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 왕과 장관이 아닌,
수치를 무릅쓰고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나병 환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나병이라는 고난에 이미 들어가 있어서.
그래서 성안에도 밖에도 갈 수 없는, 죽을 것 같은 고난보다 생명이 귀하다는 걸 알아서 망가질 줄 알아.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잘 망가져요.
그러나 왕과 장관은 수치를 당해본 적이 없어서, 망가질 줄 몰라요.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죽을 것 같은 고난이 오면, 살 소망을 쉽게 버리고 말아요.
배우자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무시당하고 있습니까?
시댁에도 친정에도 속할 곳이 없습니까?
본가에도 처가에도 갈 곳이 없어요?
가정에도 직장에도 쉴 자리가 없습니까?
여기서도 죽을 것 같고, 저기서도 죽을 것 같은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이런 고난은 죽을 이유가 아니에요. 거듭날 기회에요. 복음을 경험할 기회입니다.
그래서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깨어진 결혼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온전히 회복시키고 구원하십니다.
상상 못 할 정도로 힘든 집이 많아요.
자녀가 욕하고, 아내와 남편이 욕하고, 서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면 살고 싶지 않죠.
그리고 어떻게 그런 집이 있어? 체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똑같아요.
비참합니다. 매를 맞고 욕먹으면. 그런데 이게 다 아파서 그래요.
제정신인 가족은 그러겠어요? 대인관계가 안 되죠.
그런 식구랑 살아내야 하는 게 밑동 잘린 나무의 사명입니다.
힘든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하나님이 화살을 쏘셨으면 책임져 주십니다.
훈련이에요. 길이 참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 앉아있잖아요. 택자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이러지 좀 말고.
하나님이 만든 것 중에 질서가 위대한데, 그렇게 남편을 자꾸 무시하고 그러지 좀 말아요.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 올리셔야 해요. 술 먹고 난리 쳤다고 그렇게 자녀들 앞에서 무시하지 말아요.
물론 아내도 무시당하면 안 되지만, 아내는 복종, 남편은 사랑이잖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
그래서 아무리 때려 부숴도 남편을 욕해서 자녀들을 망가지게 하지 마세요.
똑같은 자녀들이 될 줄 아셔야 합니다.
(적용)
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다면 무엇입니까?
나.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어야 한다.'와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 중 어디에 동의합니까?
2. 값없이 받은 구원이 알릴 소식입니다.
5~8절.
이 죽을 것 같은 고난에서 죽기만을 거부한 이 나병 환자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일어나는 적용도 필요합니다.
실낱같은 소망을 붙들고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난 네 사람은 아람 진영으로 갔어요.
이게 웬일입니까? 진영이 텅텅 비었어요.
군대가 먹던 식량과 쓰던 무기는 물론, 의복과 장막도 그대로.
말과 나귀도 안 타고 갔어요. 은과 금도 다 두고 갔어요.
그야말로 사람들만 쏙 빠져나간 거예요.
이 넷은 영문도 모르죠?
배가 고파서,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어요.
그저 제일 가까이 있던 장막에 들어가서 허겁지겁 배를 채웁니다.
허기를 달래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뭡니까?
은, 금과 의복입니다. 돈이죠.
그런데 여러분, 왜 하필 은과 금과 의복일까요?
이 세 가지는 언제 나왔었죠?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에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이었어요.
그런데 그 후에, 나병에서 치료받은 나아만에게 게하시가 달라고 한 건 뭐였죠? 은과 의복이었어요.
아마 금은 차마 구하지 못했을 뿐인데, 자기로서 은 두 달란트도 엄청난 가치이니까.
게하시가 욕심 때문에 나병의 치리를 받았는데, 그 치리로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사명을 다 포기했는데,
적군들이 다 도망간 진영에서 은과 금과 의복을 보니 또 눈이 뒤집혔어요.
여기서는 게하시가 다른 셋을 주도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재물을 싹 다 가져가서,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게 감춥니다.
돈 감추는 것은 게하시가 박사잖아요.
자기 전공 나오니까, 얼마나 신나게 감췄을까요?
장막 하나 싹 털고 나와 보니까, 이런 장막이 들판을 가득 채운 거예요.
눈이 더욱 돌아갑니다. 이제 고생 끝이다. 이 돈이면, 나병도 문제가 될 거 없어.
어디 가서도 잘 먹고 잘살 수 있겠다. 이제 행복 시작이네.
이런 기대에 부풀어 이 장막 저 장막 돌아다니며 보이는 은과 금과 의복을 감춥니다.
여기 오기까지는 통장도 없이 망한 인생인데,
갑자기 새 통장 개설과 함께 잔액 수천만에서 수억에서 수십억 원이 쌓이게 됐어요.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아람 군대가 모든 물품을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간 이유를 몰라요.
성경은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6~7절.
자기들이 감히 맞설 수 없는 엄청난 적군이 이스라엘을 도울 원군으로 온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래서 너무 급하니까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심지어 말과 나귀도 못 탈 정도로 혼비백산.
몸만 겨우 도망갔어요.
이 모든 일을 주께서 하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호람 왕도 아람 왕도, 이 세상 왕이라고 해서 전쟁을 잘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오늘 이 나병 환자 네 명 주목해야 하는데.
열왕기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주로 부릅니다.
지금까지 여러 주가 나와서 저마다 주인 행세했어요.
여호람, 아람 왕도 물론, 장관도 자신을 실세로 여기면서 그렇게 까불었어요.
그런데 진짜 주님이 등장하세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사마리아를 에워싼 군대를 한순간에 몰아내십니다.
여러분 사업이 안 되고, 되고, 모두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으면, 우리 하나님이 굶기지 않으세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자. 왜냐하면? 밑동 잘린 나무라서.
인생이 참 짧아요.
구원의 능력으로 등장하신 주님의 은혜로 이 네 사람은 그야말로 구원을 제일 먼저 뜨겁게 경험합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아무 수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전혀 예상과 기대하지 못했어요.
이 죽을 것 같은 고난에서 마른 광야에 비 한 방울이 오면 너무 감사하잖아요.
애굽 땅, 나일강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감사합니까? 죽
을 것 같은 고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람 진영에 왔을 뿐인데,
거기서 엄청난 구원을 값없이 받았어요.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신 구원을 제일 먼저 누리고 있어요.
이렇게 값없이 받은 구원이 우리가 알릴 소식입니다.
합격, 취업과 승진과 성공은 노력한 만큼 성취하는 거죠.
물론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내 힘으로 수고하지 않고서는 이런 성취를 기대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취를 너무나도 전하고 싶어요.
이런 소식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우리 자녀들이 그런 소식을 많이 들려주기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빌고 또 빌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성취의 소식은 내 강함을 자랑하는 거예요.
이런 자랑은 풍선과 같아요. 바람을 아무리 넣어도 작게 보이는 풍선이에요.
만족하지 못해요. 더 크게 하려고 계속 바람을 넣습니다.
자랑에 자랑을 더하고 과장하고, 없는 것도 지어내어 보태고, 펌프질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결국 뻥 하고 터져버려요.
한 방에 추락하고 맙니다. 처음에는 잠깐 아름다운 소식처럼 보이지만, 결국 더 큰 수치로 끝나고 말아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는,
사도 바울은 부득불 자랑하게 되더라도 오직 약한 것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2장에 내 약함을 자랑할 때,
그 약함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강한 능력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려야 할, 아름다운 소식은 주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은혜로 베푸신 구원뿐입니다.
모두가 100% 죄인이에요. 주님이 100% 이루신 구원을 똑같이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값없이 받은 구원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은 아무리 자랑해도 터지지 않습니다.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더욱 커져서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구원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합니다.
주님의 능력이라서.
주님을 자랑하고 자랑했는데 제가 뻥 터졌습니까?
거저 받은 구원을 나누고 알릴 때 우리의 표어대로 거주할 처소가 가정과 교회에,
이 복음이 필요한 곳곳에 세워질 줄 믿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선교에도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을 알리는 모임이 바로 목장 아니겠어요?
여기서 바로 약함을 자랑하잖아요.
목장 가는 게 선교의 첫 교두보에요.
왜? 한 목자님이 목장을 마무리하면서, 목원들의 나눔이 다 은혜로워서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이 목자님은 정말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있기만 하면 변하세요.
1년 동안 부족한 가운데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던 목장이었다.
울컥한 적도 많다.
오늘은 특별히 성령님께서 눈물을 허락해 주셨다.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
게하시나, 아람 족속도 똑같이 허락하신다.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어떨 때는 눈을 열어주시고 어떨 때는 눈을 감게도 해주시면서,
그 과정에 고난과 축복이 있는데 구원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믿지 않는 둘째를 위해 간곡히 기도해야 할 것 같다.
저도 기도하지만, 목원들을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눔하니까 부목자가, 이번 목장은 목자님이 한 번도 쉬지 않고 목장을 하시고,
그래서 저도 처음으로 목장 보고서를 한 번도 빼지 않고 작성했다.
어떤 목원은, 목장 식구들 외에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시면서 제게도 은혜가 많이 된 것이,
내 말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감사하고 큰 힘이 되었다.
또 한 분은 이번 목장이 정말 은혜로웠다. 많이 통했다. 인도 잘하고 가신 것 같다.
처방 주신대로 일주일 치 약을 먹고, 나잇값을 못 한 것이 미안하고 민망하다.
너무 멋있지 않아요?
다른 목자님은 오늘 저희가 모인 횟수를 세워보니 47번. 54주 중에서.
본가 어머니보다 더 많이 만났고, 가장 바쁜 금요일 저녁에 밥도 먹는 모임인데,
요즘 시대에 남들은 역행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 공동체가 저와 가정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목자님은, 저는 진짜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아내를 만나서,
여기까지 안정적으로 왔다는 걸 인정하게 돼요. 우리들교회 공동체의 저력이,
제가 힘들거나 지치거나 어렵거나 슬플 때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다 공동체 안에서 머물러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저는 이 공동체가 있어서 어떤 사건이 오더라도 두렵지 않아요.
또 한 집사님은 우리는 엉망이 되었는데, 말씀이 우리한테 꽂히고 다 내 이야기로 들리고 있어요.
고난이 없으면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많은데, 제가 계속 들으니, 남편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속은 자, 속인 자를 듣는 순간 다 해결됐어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자격이 없고,
내가 죄인이라는 걸로 다 해결했습니다.
QT 할 때마다 구체적인 말씀이 들어오니 기적 같아 깜짝 놀라고, 제가 편안해지고 있습니다.
(적용)
가. 주로 자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더 자랑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건 뭐예요?
나. 더 자랑하고 싶어서 과장하는 것은 없습니까?
다. 값없이 받은 구원을 알리기 위해 자랑할 내 약함은 무엇입니까?
3.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9~11절.
나병 환자 네 사람은 게하시가 주도한 이 약탈 아닌 약탈을 신나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아마도 게하시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 같은데.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도다.
왜 게하시라고 그러냐면? 나아만의 은과 옷을 탈취했다고 선생한테 걸린 것이 딱 생각났을 것.
치리 결과 생긴 나병이 보였을 거고, 그 이후 겪은 많은 일들이 떠올랐겠죠.
뭐가 잘못이에요? 아름다운 소식을 사마리아 성에 알리지 않고 있는 게 잘못.
허덕이는 동료 시민들이 생각나는 거예요.
자기가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였다는 것이 생각났어요.
엘리사의 오랜 양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에요.
은과 금과 의복이 전부였던 인생이, 은과 금과 의복 너머에 있는 구원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은과 금과 의복을 그냥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걸 감추었다고 표현한 것은 절대 진리를 생각한 거예요.
사실 도둑질이라고도 할 수 없죠.
침략군이 버리고 간 걸 주워 담는 일이 도둑질은 아니죠.
그런데 감추었다고 표현했어요.
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지금 당장 가서 알리지 않는다면, 아침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자기들에게 미친다고 합니다.
선지자의 말씀으로 받은 양육이 있어서, 벌에 대한 개념이 있어요.
자기가 치리를 받았었잖아요.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한 것이 많은 것은 인생에서 손해가 아니에요.
당한 만큼만 두려워할 줄 안다.
당한 게 없어서 무서운 게 없으면
자기가 주인 자리에 앉아 내려올 줄 몰라요.
여호람이 두려운 게 없잖아요.
착하고 일류인 사람이 두려운 게 없어요.
거절 당해본 일이 없잖아요.
장군도 그렇죠?
당한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또 당한 것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당한 게 많아도, 말씀으로 양육되지 않으면,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두렵게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네가 내 고난을 알아?'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보면 괴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인간이 선한 게 없어요.
우리 머리만으로는 죄가 뭔지, 죄에 대한 책임이 뭔지, 죄에 대한 벌이 뭔지 알 수 없어요.
고난만 많고, 양육되지 않은 사람과 고난은 없지만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좋고 나쁘고 따지는 건 의미 없어요.
자꾸 저 사람은 착해, 저 사람은 나빠. 이런 소리 하지 말아요.
구원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인간은 어떤 모양으로 살든 다 악하고 음란해요.
구원받을 자격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이걸 알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해요.
주의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양육이 없으면 좋은 교육도 꽝이고, 고난의 경험도 무용지물이에요.
극적인 고난에 속아서도 안 되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교양과 스펙에 속아서도 안 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자 수제자로서 거만해져서 스승의 지팡이를 휘두르던 게하시에게는,
이 겸손한 나병 환자 친구들과 있는 것이, 그가 있어야 할 자리였어요.
또 고난만 충만한 나병 환자에게는 그래도 말씀으로 양육 받은 한 사람, 게하시가 꼭 필요한 존재.
양육 받은 게하시 덕분에 그래도 구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양육이 만나니,
절망뿐이던 이들의 인생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복된 소식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를 버린 사람들이 있는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문에 딱 도착했어요. 떠났던 자리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누구를 부릅니까? 문지기.
그들에게 어떤 존재예요? 가장 못 된 간수 아니겠어요?
나병 걸린 자기들을 향한, 사회 전체의 배척과 조롱을 상징하는 존재들.
한 마디로 문지기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나병 걸린 게하시가, 이걸 말씀으로 양육 받을수록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결국 나 때문에, 내 구원 때문에 가장 수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데까지,
드디어 이 복음이 깨달아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병 환자를 무시하지만, 특별히 앞장서서 무시해 주는 사람이 문지기.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앞장서서 나를 조롱하고 수치 주는 사람이 가장 큰 공로자.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왕이나 장관을 통해 알리지 않으십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도 알리시지 않습니다.
성 밖에 격리된 나병 환자들을 통해서 알리세요.
그것도 아무리 양육하고 치리를 줘도 변하지 않는 게하시가 포함되었어요.
나병 환자들을 통해서 알리십니다.
대체 왜 이런 어려운 방법으로 알리실까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게 우리 고정관념이 아니겠어요?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이 직접 은혜로, 알리신다는 걸 보여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얼굴도 아름다워야 할 것 같고.
교양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정말 많은 영혼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난다고 하셨어요.
기억납니까?
그래서 그 지혜가 광채. 십자가는 지혜, 지혜는 타이밍. 지혜를 알고 말씀을 적시 적소에 쓰는 사람.
빛날 줄 믿습니다. 예쁜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성령의 광채.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믿음이 좋을 것 같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라서 자격 있는 사람을 쓰실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아름다운 소식이 다 무너진 인생, 소망 없는 인생,
자랑할 게 악하다는 것뿐인 인생을 통해서 알리셔서 그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속적 가치관이 강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듣지 않아요.
2024년 첫 주일에 주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주할 처소를 세우는 사명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 확정이 아니에요.
교회 수를 늘리자는 말이 아니에요.
세속적 가치관이 왕 노릇을 하는 시대에 너무나도 중요하면서 시급한 일,
구속사, 말씀 묵상 운동을 일으키자는 거예요.
이것이 가정 중수, 인구 절벽의 문제까지 해결하자는 거예요.
출산율 0.72로 떨어지고, 서울은 0.59로 떨어졌습니다.
이거보다 심각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낙태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하고, 인권이 어디까지 왕 노릇을 해서,
그렇게 마음대로 언제까지 결혼 안 하고, 낙태하고, 이혼하고 그럴 거예요?
나라를 살리는 구체적인 적용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교회 생기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이 나라를 살리고자. 개척 첫날부터 부르짖었어요.
우리들교회를 통해 베푸신 양육이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인권이 왕 노릇을 해서 낙태해라. 결혼하지 말아라. 자녀 대신 반려견 키우시면 안 돼요.
땅에 떨어지는 양육이 하나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게하시같은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분수령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돌이키기를 소망합니다.
몸과 마음을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는 사명을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적용)
가. 고난과 양육이 조화를 이룹니까?
나.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 나를 살린 아름다운 소식을 그에게 어떻게 가서 알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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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장 예배 참석 인원 : 5명
Q1. 올해 첫 목장인 만큼 이미 알고 있는 사이도 있지만 서로 간단하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Q2.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다면 무엇입니까?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어야 한다.'와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 중 어디에 동의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