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세와 탐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20절)나아만이 깨끗함을 얻고 가져온 엄청난 예물을 엘리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환인 게하시가 그 예물을 받아내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받으리라는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의 뜻입니다. 즉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하고 계획한 가운데 받아내겠다 입니다. 또한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닌 내가 받으리라고 합니다.
나아만이 가져온 값진 예물에 게하시의 탐심이 용암처럼 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물을 엘리사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반면에 받으리라고 한 게하시는 자신이 주인공이고 여호와의 일을 자신의 하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보면 탐심은 멈춰야 하는 것이고 구속사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탐심을 하나님꼐 맹세하는 척 하며 더 불타오른 게하시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감정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복음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과학적 진실보다 개인의 감정을 더 진실하게 여기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여자라고 생각을 하면 여자가 가는 곳에 어디든 가도 된다는 생각 등 법도 질서도 없이 감정을 우선시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들 거짓에 거짓을 더해서 감정을 충만하게 여기니 게하시 같은 지도자가 생기고, 그런 지도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서 게하시가 한 행동은 엘리사의 슬픔입니다. 게하시의 야망 때문에 결정적일 때에 구원의 방법이 이루어 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 져야 하는데 레아보다 라헬이 최고고 유다보다 요셉이 더 낫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민주의를 앞세워 결국 북이스라엘이 섬기는 맘몬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게하시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옆에 있어도, 선지자의 수제자이어도 맘몬신에 사로잡힙니다. 그럴듯한 말을 해도 은혜가 없기 떄문입니다. 구속사를 이해해도 적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속을 썩이고 감옥에 다녀온 아들이 예수를 믿는 것과, 서울대를 나오고 세상적으로 잘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것에 받아들이는 것이 다릅니다. 이처럼 실생활에서 받아들이는 적용이 힘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라헬이 좋고, 요셉이 좋아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지금이 받아야 할 때인지, 말아야 할 떄인지, 떠나야 할 때인지, 머물러야 할 때인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적용질문
저건 내 것인데, 내가 받아야 하는데 하며 받아내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멈춰야 할 탐심과 맹세하고 힘써야 할 구속사적 적용이 구별되십니까?
2. 탐심은 거짓을 낳는다는 것을 알야 합니다.
(21절~23절))게하시가 얼마나 요란하게 달려갔는지 나아만은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돈을 받아야 하는 게하시는 평안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치밀하게 말합니다.
게하시는 선생님까지 팔아가면서 예물을 달라고 합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 의심이 들까봐 그럴듯한 이야기를 합니다. 젊은 생도 두사람이 도와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자기로서는 어마어마한 은 두달란트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줍니다. 거기다 두배로 줍니다.
게하시는 요구한 것보다 더 받게 되자 놀라 아니라고 연기를 합니다. 그런데도 나아만은 강권적으로 줍니다. 게하시가 치밀하게 꾸민 거짓말이 성공을 하게 됩니다.
게하시의 행동은 은혜를 받은 사람을 등쳐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스승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게하시의 마음은 아마 복잡했을 것 같습니다.
(24절)언덕위에 올라는 꿈의 언덕에서 어둠으로 추락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게하시의 탐심입니다. 얼마나 치밀하고 영약하고 똑똑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25절)엘리사는 어디서 오느냐의 물음을 합니다. 게하시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게 할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게하시는 선생님이 정곡을 찌르자 정신이 나갑니다. 게하시의 예상에 엘리사는 방에 있어야 하는데, 나와 있으니 예상에서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욕심에 눈이 먼 게하시는 원치 않은 때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니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이 거짓말을 나아만에게 치밀하게 한 것과 다른 갑작스럽게 나온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온 거짓말은 평소의 습관입니다. 즉 고정관념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 옆에서 수족으로 제자들을 관리하고 엘리사의 지팡이를 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막중한 자리에 있는 게하시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거짓말을 한 것은 속으로 늘 거짓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신해 풀어준 바라바를 옳다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바라바는 로마에 있어서 십자가를 져야하는 중대범죄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독립군 지도자 같은 자였습니다. 그런 자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어주라고 한 것은 구속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못박아 십자가에 메달리게 하였습니다. 가롯유다도 예수님 발에 비싼 향유를 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은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이처럼 탐심은 결국 거짓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적용질문
탐심을 감추려고, 또 채우려고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까?
치밀하게 거짓말을 잘합니까?
습관적으로 나오는 거짓말은 무엇입니까?
3. 내 고난이 내 죄보다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6절)게하시의 거짓말에 너무 수가 다 보입니다. 믿음이 약할수록 더 보이게 됩니다.
엘리사는 게하시가 어떻게 나아만을 만났고, 어떻게 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받을 때냐고 묻습니다.
이때 지금은 하나님을 배반한 북이스라엘에서, 어둠이 짓게 들인 이방나라에서, 누구보다 사명으로 깨어있어야 할 선지자와 제자의 때를 말합니다.
구원을 위한 너무도 중대한 시간에 게하시가 탐심에 눈이 멀어 받을 생각만 하니 나아만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 쳐들어오면 어떻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나아만을 양육해가고 있는데 니가 정신이 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사의 꾸중과 양육은 결국 치리로 이어집니다.
(27절)나아만은 깨끗함을 얻어 하해져서 돌아갔는데, 게하시는 나병을 얻어 눈같이 됩니다. 그 나병은 게하시 혼자만이 아니라 자손까지 이어집니다.
이방나라의 거만한 장수였던 나아만은 나병이 떠나간 후에 겸손한 종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선지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섬겼던 게하시는 사명보다 돈을 쫓아 결국 자손 대대로 나병에 걸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게하시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엘리사가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너무도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돈에 욕심을 좀 낸 것이 뭐가 대수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 뭐가 대수라고 이렇게 까지 벌을 주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속적인 생각입니다.
구속사적인 사고로는 게하시가 엘리사에 들킨 것이 복입니다. 나병을 얻은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평생 나병 때문에 고생하면서 자신의 탐심과 죄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최소의 셋팅이 되는 것입니다.
나병에 안 걸리고 이 땅에서 성공만 하다가 결국에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병으로 고난을 얻어 내 죄를 깨닫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떠한 고난도 허락하신 것은 구원의 목적과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주님을 의지하도록, 내 생각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고 주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구속사적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이 땅에서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밑동짤린 나무와 같은 인생이기 떄문입니다.
적용질문
속이려 하다가 걸려서 평생 기억하며 거룩해 질 수 밖에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걸린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고난이 내 죄보다 약함을 인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