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5. 열왕기하 5:9-15 '깨끗하게 되었더라' - 김양재 목사님
1.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아만을 고치기 위해 어린 소녀가 안주인에게로, 안주인이 나아만에게로, 나아만이 아람 왕에게로,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로 그리고 엘리사로 이어지는 우연 같은 만남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은 준비된 우연이었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중 아래 있어요. 내 인생 모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기에 내 생각이 들어갈 틈은 없는거예요.
그러나 이 땅에서 무엇인가 이룬 사람들은 악한 내 생각이 하나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믿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죠. 자신이 하나님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셔야 되는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건들이 양육인거예요.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문 앞에 섰다고 해요. 여호람 왕에게 갈 때는 은 10달란트와 금 6,000개와 의복 10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잖아요. 도움을 청하는 겸손한 모습으로 갔다는거예요.
하지만 엘리사를 찾아가는 나아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점령군 사령관의 모습으로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선지자의 집 문 앞에 섰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세계적인 지도자인 나아만은 벌써 사람을 차별하고 하나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기 병이나 고쳐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내 생각이 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처럼 중요한 인물이 오면 엘리사가 맨발로 뛰어나와 환영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그런데 말을 탄 채로 이리 오너라 하면서 대문 앞에서 버티고 있어요.
엘리사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런 나아만을 특별 대우하지 않았어요. 여전한 방식으로 사자, 곧 비서를 보내요. 게하시겠죠.
한마디로 나아만의 내 생각에는 문전박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금 푸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고 해요. 그러면 그의 살이 희어져서 깨끗하리라고 예언합니다.
근데 이 말을 들은 또 나아만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아만은 분노했어요. 엘리사의 집 문 앞에서 몸을 돌이켰어요. 떠납니다.
나아만의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내 생각으로 모든 것에 분노를 가져옵니다. 어디에 분노했을까요?
(1) 선지자 자신이 직접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분노했어요.
아람의 총사령관인 나아만이 누구 집 문 앞에서 기다려본 적이 있겠어요? 어쩌다 기다리는 일이 있더라도 곧 집주인이 직접 나와 아이고 장군님 이런 누추한 집에 어쩐 일로 납시셨습니까? 영접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 왕도 자기가 왔을 때 탄식했지만 어쨌든 쩔쩔맸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왕도 아닌 선지자가 큰 저택도 아닌 산 속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직접 나와서 인사하기는커녕, 종을 보내 처방만 내리니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확 상했습니다. 이것이 선한 것이 없는 내 생각이에요.
(2) 선지자의 처방도 너무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병을 고치기 위해 아람에서 안해본 주술과 시술과 요법이 없었겠죠. 가장 최고의 주술을 받아봤는데 이스라엘의 선지자도 적어도 자기 하나님 여호와께 이렇게 치료를 구하는 화려한 의식도 부리고 손을 상처 위에서 흔드는 것 같은 신비한 술법도 쓰면서 수리수리마수리 이러면서 온 정성을 다해 자기를 치료해주리라 기대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선지자란 인간이 자기 종 한 명을 틱 보내더니, 강물에 가서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 한마디 툭 던지고 마니까 이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3) 처방의 내용이 너무 찌질했기 때문이에요.
나아만이 요단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남쪽 사해에 이르기까지 흐르기 때문에 한 360km로 정도로 꽤 길어요. 근데 지형상 그 물은 흙이 많이 섞여서 색이 누래요. 더러워 보일 뿐 아니라 신비하거나 영험할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아요.
그런데 반면 나아만의 고향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흐르는 아바나와 바르발은 서쪽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라서 너무나 매우 맑고 깨끗합니다. 전체 길이는 요단강보다 짧아도 훨씬 생명력이 있어 보이는 강이에요. 그러니 나아만 입장에서는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단강에 들어가는게 전부라면 굳이 내가 적국 깊숙한 곳까지 올 필요가 없는거죠. 자기 집 옆에 있는 아바나와 바르발이 요단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좋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요단에 들어가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은 나아만에게는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찌질한 치료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자리에서 하는 내 생각은 분노만 일으키는거죠. 그래서 떠나는거예요.
말들과 병거들이 상징하는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 자부심이 있잖아요. 나아만은 내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거만할 수밖에 없는 군대 장관이에요. 이런 거만한 나아만에게 엘리사의 태도나 그가 전한 말씀은 속을 확 상하게 하는 공격일 뿐이에요. 도저히 봐줄 수도 없고 들어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거만하면 들어야 할 말씀이 들리지가 않아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줄 말씀이잖아요.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어떻고, 근데 태도가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이런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 생각이 강하다는거예요. 내가 맞는데, 내 방식이 맞는데, 내가 그래서 전쟁에서 이겼다, 왜 내 생각에 못 맞추는 거야? 다메섹 강이 훨씬 낫잖아? 지금 이러는거예요. 확신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만함이에요.
나아만이 나병이라는 고난이 있으니까 자기 집 여종이 전한 말을 들었어요. 왕에게 부탁했어요. 직접 이스라엘 왕에게 왔어요. 또 그가 알려주는대로 엘리사의 집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가 낮아질 수 있는 내 생각의 한계였어요.
그래 내 병을 고칠 수 있는데 아우 이까짓거 못 참겠냐 한번만 더 참는다 이를 악물면서 이러면서 엘리사 집까지 왔어요. 근데 엘리사가 자기를 맞는 태도를 보고, 그가 내린 처방을 듣자 그만 참았던 화가 압력솥이 터지듯 한번에 폭발하고 말았어요.
여러분, 바로 이게 성품의 한계인거예요. 아무리 내가 잘하고 잘하려고 해도, 누르고 눌러도 눌리지 않는 내 생각의 거만함이 있는거예요. 금 그릇이 아무리 낮아지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거예요. 튕겨져 나가는 것이죠.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마음이 우린 다 종류별로 있어요. 나아만의 거만함은 나만 잘났어라는 생각이잖아요.
나아만이 괜찮은 사람이죠. 충성심 있고 권세 있고 아내 말 들을 줄 알고 계집종의 말도 듣는 그야말로 최고의 남편감이고 그냥 상관감이고 근데 바로 이 나아만의 내 생각이 자기 성품인 거죠.
근데 자기 성품으로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여호람 보다는 나아만이 훨씬 낫지 않아요? 못된 장로보다, 안믿는 아무개 사장이 훨씬 나아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한다고요.
큐티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찾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에요. 다들 문제가 안 풀리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하면서 다 같이 큐티하며 질문하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게 되고, 자꾸 찾게 되는거잖아요.
적용질문)
내 생각으로 분노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자존심, 자부심 특별대우 등 더 나가서 말씀을 듣고 분노해서 예배나 목장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던 적은 없습니까?
나는 적어도 거만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나의 고등거만이 있을까요? 가족을 향해 '내게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라며 거만하게 기대하는 내 생각은 무엇입니까?
2. 벌떼처럼 나아와 해석해 주는 지체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들과 병거들을 몰고 온 나아만 행렬은 이제 분노해서 씩씩거리며 왔던 길로 돌아서 가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지금 너무 열 받았어요.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힘과 시간을 들이면서 온 길인데 병을 고치지 못하고 지금 헛걸음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요.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 어린 소년이고 여종 계집종이고 뭐고 이제 내가 없애버려야 되겠다 이러고 벼르고 갔죠.
수행하던 종들도 너무 노하신 장군님 눈치 보느라고 아무 말도 못하고 가고 있는데, 당장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는 아니다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렇지만 장군의 부하 중 제일 높은 사람 한 사람이 이걸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건 혼자서는 이 얘기를 감당 못할 상황이에요.
그래서 종들 여럿이, 여기 복수잖아요. 종들 여럿이 함께 벌떼처럼 장군에게 나아옵니다.
여기서 나아오다는 말 나가시는 그냥 가까이 가다는 뜻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로 나아가는걸 말해요. 기분이 많이 안좋은 장군님을 잘 설득하려고 기분이 더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면서 꼭 들으셔야 하는 말씀을 올리려고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나아가는 태도예요. 나아만의 종들은 장군 앞에 와서 아주 다들 그냥 납작 엎드렸을거예요. 그러면서 장군을 장군이라고 그러지도 않고, 주인이라 그러지도 않고, 내 아버지여 이러고 불렀어요. 주인을 향해 가장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거예요. 우리가 목장 식구들한테 이렇게 대우하셔야 돼요.
그리고는 이제 나아만을 설득합니다. 선지자가 어려운 일을 하라고 말했다면 그대로 하셨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제가 생각해봐서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라 이러면 그건 할 수 있잖아요. 또 시내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거기서 빌어보세요. 어려운 일 하라고 그랬으면 내 아버지여, 장군님이 하셨을텐데 선지자가 하라고 말한 것이 너무 쉬워서 우스워요 그죠? 말이 안되네요. 흙탕물 같은 요단강에 내려가서 씻으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기가 막혀라 우리 장군님을 뭘로 보는거야?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냥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시는게 어떨까요?
그러니까 모두 옆에서 저도 한 표요, 저도 한 표요 다들 우르르 저도, 저도 벌떼처럼 일어나가지고 칼날 위의 물방울처럼 조심하면서 그러나 공손하게, 그러나 벌떼처럼 설득을 했어요.
구원을 위한 이런 태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처방하는 방식과 내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인거예요. 마음이 높아서 그 말씀이 들리지 않고 튕겨져 나갑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으로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말씀을 그의 종들은 들었어요. 종들은 이스라엘 선지자가 시키는대로 하면 주인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거예요. 확실히 장군보다는 이 종들이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높은거예요. 왜냐하면 이 비천한 환경에 있는 종들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낮은 환경에 있잖아요. 마음이 상하고 낮았기 때문에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순종해요. 종들도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에요.
평소 당한게 많기에 분노하는 주인도 너무 이해가 되는거예요. 그리고 요단강에 들어가기도 너무 쉬워요. 그래서 벌떼같이 나와서 외치는거예요. 그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요. 화를 내실 일이 아니라고요 순종해 할 이유가 100가지도 더 된다고 이거 하면 절대로 손해나는 일이 아니에요. 눈 딱 감고 말씀대로 한번 해보세요. 이 어려운 선지자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해석해서 외칩니다.
이게 우리들교회 목장이 하는일 아니에요? 이렇게 벌떼처럼 나와서 해석해주는 지체가 있을 때 말씀대로 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 순종을 할 수 있게 되는거죠. 깨끗해지게 되죠. 거룩해지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 이혼하고 싶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 안드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리 겉으로 거만해보여도 속으로는 살 수가 없이 힘들고, 겉으로 아무리 강해보여도 속은 다 연약합니다. 이 곤고함을 홀로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벌떼처럼 나와서 말씀을 해석해주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이혼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있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혼도 막아지고 자살도 막아지는 것을 우리들 공동체를 통해서 열매로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는 다 연약하지만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불러주신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벌떼 공동체가 가장 강한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일단 '아니'부터 하는 편입니까?
벌떼처럼 나아와 외치는 지체들의 말을 들었더니, 어느덧 깨끗함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까? 맹신주의라고 생각됩니까?
지체들과 함께 나아가 공감해주고 해석해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3.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못 이기는 척하고 아람으로 가던 발걸음을 유턴해서 요단강 쪽으로 내려갑니다. 종들의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순종합니다. 내 생각으로 할 때는 분노했는데,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 내려가게 됩니다. 공동체가 너무 중요해요. 그래서 적용하도록 도와서 내려가는데요. 우리는 뭐든지 인정하는게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실제로 실천하기는 생각처럼 쉬운게 아니에요. 7번 내려가서 몸을 씻는게 처음 몇 번은 몸을 씻을 수도 있지요. 까짓 밑져야 본전인데 한두번 했을 때 자기 몸에 어떤 변화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순종할 것인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말에 대한 진실성에 의심을 품고, 다 하던 일을 이렇게 중단하게 되는거죠. 좋은 강에 들어가서 고쳐준다면 그게 주술과 다름없지요.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치유가 일어난 것이죠. 그동안 수많은 제안과 편지와 대화가 오고 갔지만 실제 치료는 너무 간단하게 끝마쳐지는거예요.
열왕기서 기자는 나아만이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도 그래야 돼요. 요단강 물속에 자신을 완전히 잠글 정도로 내려갈 뿐 아니라 7번 반복했어요. 아울러 성경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주로 죽음을 상징하지요. 죽어지는 이 순종, 십자가의 겸손을 의미하고 회개를 의미하고 그것이 이제 깨끗해지는 길인데요.
나병에 걸린 나아만의 그 흉측한 피부가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된 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 7번 몸을 잠근 직후에 바로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거에요.
우리가 여리고 생각하면 알죠? 13바퀴 지날 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근데 마지막에 무너지는거는 단번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타하르 동사는 병의 치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나는데요.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가 있는거예요.
그만큼 나아만은 진심으로 회개했다는거예요. 7번을 이렇게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그러니까 단순히 나아만을 육적으로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거예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결과, 그 살이 어린아이처럼 되었다는 것은 나아만도 2절에 어린 소녀가 가졌던 믿음을 같이 갖게 되었다는거예요. 이 같은 회복을 체험한 후에 엘리사에게 되돌아오죠. 나아만은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이죠. 궁극적으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료를 받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깨끗한 자는 살아난 자이고, 살아난 자는 겸손한 자이고, 겸손한 자는 남을 낫게 여기는 자, 이것이 깨끗한 자입니다. 내가 고침 받아서 남을 낫게 여겨야 되는거예요. 살려야되는거예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이 병만 고침받는게 아니에요. 여러분, 병 고침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거예요.
적용질문)
여러분은 병 낫기가 목적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목적입니까?
김경은
1.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2. 내 생각에 갇혀있는 나병에서 깨끗하게 고침받기를
3. 물에 몸 담그는 적용으로 남은 양교 4주 꼭 갈 수 있기를
박소영
1. 고등교만 회개하고, 말씀과 공동체에서 깨끗함 받도록
2. 우리 목장 예배 회복되기를
3. 가족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