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6. 주일설교 팔복산의 통로
여섯 개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다 큐티인을 쓰신다고 합니다. 예전엔 갈 때마다 아무도 안쓴다고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열매 주시는 만큼, 큐티인 사역하는 것은 가정을 살리는 것인데, 사단이 너무 싫어하는지, 매섭게 공격합니다.
이민사회에서는 간증이 세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더 세게 역사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같이 갔기에,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희망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면 팔복산의 지름길 통로인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이 올라가시고 내려가시는 것에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미션이 긍휼로 나타납니다.
1.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7절/ 긍휼은 매우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아파할 만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은 차별없이 사랑하는 박애는 아니지만 조건적인 것도 아닙니다. 3개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에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긍휼이 아닙니다. 동정은 비교의식, 우월감, 자기만족을 볼 수 있습니다. 인정하기 쉽지 않은 우리 본성인데, 기부, 동정을 베풀 때 후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점검해보면 인간이 100%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있던 것이 없어지고 안좋은 일이 생기면 베푼 것에 생색이 납니다. 내가 선하게 살았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는 생각을 안할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선함을 기억하고 불평하고 생색을 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입니다. 남이 부당하게 고통 당할 때 내 마음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뜻합니다. 헬라 문화에서 피고는 재판정에서 배심원의 마음에 긍휼을 부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호소하고 변호 중에 엉엉 울어댑니다. 또 어린아이를 포함한 식구를 보여주면서 최대한 불쌍한 척 애를 써 처벌을 넘어갔습니다. 부당한 고통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당해서는 안될 사람, 그런 사람이 고통을 당하니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것. 맹자가 측은지심을 설명한 예도,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불쌍히 여겨 돕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통당해야 마땅한 사람이 고통당하면 우린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긍휼은 차별적입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면 억울해서 불쌍히 여겨 돕는다는 것. 이런 판단이 있어야 죄인들이 모여 사는 인간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법이고, 도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 머물러 있습니다.
- 주님의 긍휼은 상식, 도덕, 윤리적 오해를 바로 잡아주십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네요? 어떤 자격, 조건을 붙이지 않으십니다. 이웃을 긍휼이 여기거나, 긍휼이 여길만 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긍휼히 여기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같은 사람도 가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옳고 그름은 팔복산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팔복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상 가치를 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왜 긍휼히 여겨야 할까요?
우리는 다 밑동짤린 나무라서 그렇습니다. 원수까지 포함하여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알지도 못한 채로 떨어지던 통로가 죽음의 낭떠러지를 이제야 알았기 때문에 복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고난이 있거나 없거나 불쌍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평생 겪는 모든 고난, 고통, 환란은 죄에 뿌리를 두고 죽음의 예고편일 뿐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고 두려움을 경험하면 장차 올 죽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고난이 없으면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아무 고난이 없으면 고난 있는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 가족, 이웃,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팔복산의 통로에 오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대단한 죄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한마디에서부터 작은 일에서부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 피자 따뜻하게 해놓겠다고 했는데 베란다에 둔 남편 나눔
적용/ 남을 불쌍히 여김이 나보다 못한 사람 동정입니까? 의인과 죄인 차별하는 긍휼입니까? 무조건적인 주님의 긍휼입니까? 우리 모두 밑동 잘린 나무라는 인식이 있습니까?
2.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나 긍휼이 필요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적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날 힘들게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둘 다 죽어가는데 누굴 긍휼히 여길 수 있을까요? 남을 걱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에 긍휼히 여김은 구원의 반석에 오른 사람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알기에 반대의 늪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 긍휼 : 엘레오스 -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라함, 헤쎄드가 합친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 라함 : 어머니의 자궁. 창자가 끊어지듯 아파하는 슬픔과 애통.
- 헤쎄드 : 자비. 슬픔, 애통으로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으로 더 나아가 실제적으로 하는 행동. 긍휼을 말합니다.
즉, 긍휼은 자궁 속에서 같이 아파하는 엄마의 사랑을 내가 먼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9:15-16]
15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이 너희를 잊더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으리라.
16 손바닥에 새겼고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ampbullampbullampbull
자격과 공로가 없는 태의 점으로 있는 우리입니다. 항상 이스라엘의 무너질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하십니다. 무너진 내 가정, 사랑, 인생을 주님은 보고계십니다. 자기 태중에 나온 자식이기에 아무리 형편없어도 손바닥 안에 새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 애통으로 공감해주시고 헤쎄드를 베풀어주셔서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기까지를 말하는 사랑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깊이, 넓이, 높이를 가진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실천적 긍휼은 큐티 본문 마태복음 18장에 1만 달란트 채무를 탕감받은 자가 100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모색하게 구는 것에 대해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여집니다. 우린 그렇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을 몰라서 긍휼을 받아도 100 데나리온의 긍휼로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없습니다.
전도사님에게 그냥 온 일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주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첫 주자인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본문에서 비례 수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긍휼을 베풀어주신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고 시점이 미래입니다. 앞에서 뭐든 응답되면 믿기 좋을텐데 싶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인간이 아무 것도 안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삶에서는 물론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긍휼한 자를 기억하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팔복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팔복의 삶은 오늘 죽어도 천국갈 수 있는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위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긍휼은 주님의 긍휼을 입지 않고서는 동정, 자원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긍휼을 베푼 자는 다른 인간에게 긍휼을 입는다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의 영향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옳고 그름으로 따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돌로 여인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메세지는 죄인이 어떻게 감히 다른 죄인을 정죄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의인 주님도 용서하시는데 본성이 같은 우리가 정죄할 수 있겠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긍휼을 받으면 타인에게도 당연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른 호칭 여자여 로 부르고 계십니다. 구원이 이런 것입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고 계십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구원 공동체입니다.
적용/ '그 사람은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다'며 정죄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라함, 헤쎄드. 망하기 전 호세아 선지자.
우리가 중독된 첫 대상이 자식입니다. 자녀가 착실하고 공부 잘 하길 바랍니다. 나의 분신이 세상에 나왔는데 속을 썩이고 기대치에 못 미치면 수치스러워 살 수 없습니다. 나의 안녕, 모든 기대를 자녀에게 걸었으니 미치지 못하면 잠이 안 오는 우리입니다. 그게 집착입니다. 그런데 다들 너무 사랑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행복을 자녀에게 걸고 들들 볶고, 안되면 때리고 난리칩니다. 자식 하나만 내려놓아도 큰 적용인데, 자식과 애인을 끊어보면 집착인지 사랑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 배우자 중독에 걸렸기에, 호세아 같은 모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30년 후에 망할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호세아의 가정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백성이 너무 미련해서 망하기 30년 전인데도 당장 재앙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어떤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낳는 족족 망하고 죄사함 받지 못하는 내 식구들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음란한 아내 고멜, 아들은 흩으시고 폐하시는 이스르엘. 르하마에 부정어 로가 붙은 로르하마 라는 딸. 암미에 로가 붙어 로암미. 위에서 아래까지 콩가루 집안 그 자체입니다. 이런 자식을 주셔도 긍휼히 여김 받아서 긍휼히 여김받고 평강할 수 있냐?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라고 모델로 쓰임 받습니다. 이 집이 선지자 집안인데, 온 집안이 콩가루입니다. 그래도 그 삶은 구원을 소명받은 삶입니다.
영원한 형벌은 없습니다. 호세아 가정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이 망했다고 해도 영적 이스라엘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론 무너진 성벽 - 여자/마약/바람/ 등을 절대 못 끊습니다. 그러나 은혜로는 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예배 드리며 죄를 내어놓으면 죄가 힘을 잃습니다.
이런 시절에 호세아가 말씀을 전합니다.
*** 예전 국민일보 인터뷰
건강한 교회로 소문난 목회 노하우가 뭐냐고 물어봤습니다. 날마다 큐티와 너무 힘든 시집살이 경험이 아닐까 얘기했습니다. 구약의 호사에 선지자도 아픔을 너무 다 겪다 보니 잠시는 힘들었지만, 백성의 아픔을 위로해줄 너무 좋은 약재료가 됐습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이 힘들지만 구원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약재료입니다. 불신결혼 하지말아야 하겠지만, 일단 했으면 너무 좋은 약재료입닙다. 내 식구의 불쌍함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호세아가 가정을 보는 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 소명입니다. 여로보암의 부강한 때를 맞게 하시고,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교회는 다녀도 구원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너무 부요하니 성적으로 문란하고 동성애가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의 목적이 거룩임을 이해를 못하는 시대입니다. 어디를 가도 가정 지키라는 말씀부터 아무리 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큐티를 위한, 부흥을 위한 큐티가 아니라 가정을 지키기 위한 큐티를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생각만 해도 힘들다면 집착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먼저 경험한 우리들교회 성도들의 긍휼히 여김받은 헤쎄드가 전세계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 받았기 떄문에 그런 간증들이 계속 흘러 퍼지고 있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사랑받고 자랐나요?
무너진 내 가정 때문에 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증거라고 몇 % 생각이 되나요?
*** 교회 4년 다닌 분의 기억나는 말씀 로뎀나무 밑에 있는 엘리야를 부르신 말씀 - 갑자기 눈물이 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2집 살림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연녀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도중 아내가 여보 라고 뒤에서 불렀던 일이 생각나서였습니다.
3.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야 합니다.
마태복음 5:44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라.
불쌍히 여길만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기복산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데, 그런 긍휼(조건적인 긍휼)은 팔복산에 오르는 통로가 아닙니다. 원수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것을 주셨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는 피해의식으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화상당한 23년만에 이지선 교수는 아직도 가해자가 사과하러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신은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사고를 만났다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피해자-가해자로 살면 내 인생만 피폐해집니다. 밑둥 짤린 나무의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용서의 종결자는 하나님 뿐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힘든 대상을 팔복산에 데리고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 사연, 억울함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으며 죄악을 깨닫고 주님을 만난 구원이 너무 크고 중요함을 알기에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같은 그 사람도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자리에 놓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함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긍휼히 여김 받는 존재입니다. 날마다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족해도 구원의 긍휼히 여김 받는 근거가 주님이기 때문에 다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내가 너무 부족해서 다른 부족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부족함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품으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게 하십니다. 섬기다 보니까 나의 부족한 긍휼이 채워져 갑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해 완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되어서 복음 전하는 새 방언을 전하도록 표적을 주셨다고 합니다. 형편 없지만 복음 전할 때는 힘이 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아야 가능하고 힘든 사람을 손과 발이 가는 적용으로 주님의 긍휼함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이고, 돕고자 할 때 나의 부족함이 매꿔집니다.
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만 없으면 복이라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어서 복이라고 대하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 덕분에 내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장 하면서 나의 모습을 보고, 날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복의 통로라고 외쳐야 합니다.
적용/
용서해야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인정합니까?
주님만이 용서의 종결자이심을 믿습니까?
부활절 전도축제 때 내가 팔복산의 통로가 되기 위해 어떤 순종을 하시겠습니까?
목장에 그 이름을 내어놓고 함께 기도하는 것, 내 입에서 그 사람의 입이 나왔다는 것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다 용서해도 한 사람이 용서가 안된다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히 여기면 창자가 끊어지듯 아프게 됩니다.
어떤 여인이 지도자와 간음했는데, 그 여인의 남편이 지도자를 죽이고 감옥에 갔던 사실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인에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죽고 남편은 감옥가고 수치 당한 사람은 여인입니다. 이미 충분히 벌을 받는데, 하나님은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하셨듯, 우리도 환경이 주어지면 힘든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마음 속으로 음욕을 품으며 TV에 나오는 아이돌을 보며 오빠 하고 간음을 하고도 들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린 창자가 끊어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나라고 생각하며 엄마의 자궁에 보호되듯이 함께하는 형제로 여기면 이런 사건이 왔을 때 기도하지 않을까싶습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인가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힘든 사람과 같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고 긍휼하는 사람입니다.
[나눔] 오늘은 휘문1부 97박세림 목장과 조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