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옳은 말씀 -
- 사도행전 28장 25절-28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는데, 우리가 성령의 나라 시민이 되었으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그 나라 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나라법인 성령을 준수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성령의 말씀은 옳은 정도가 아니라 100%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도 하루 종일 전한 설교를 이사야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 옳도다로 마무리합니다. 그것은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옳은 말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지면 안됩니다.
25절
바울이 하루종일 전한 복음을 듣고 유대인들은 믿는자와 믿지않는 자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거기서 돌이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변화가 워낙 크기에 기존 유대인들과는 서로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다를 누가는 아 심포니라고 표현하는데, 심포니는 아름답게 어루어진 화음을 말한다. 그 앞에 부정접두어 아가 붙어 불협화음이 됩니다. 유대인으로써 서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무리 중에서 사로 친구 아이가 하고 지내며 화음을 만들어 내며 지냈는데. 합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 잘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내 옆 사람의 소리, 전체의 소리를 들을 때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확실히 신앙 고백이 되어야 남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먼저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소리만 내고 내 목소리만 크게 내는 게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반응해서 또 소리 내고 또 소리 내며 기도하다 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듣고, 여기는 크고 여기는 작게. 크레센도 디크레센도.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다 작게 내는데 혼자 크게 내면 내가 불협화음을 내고있구나! 하고 알아야한다. 내가 가정에서 내 목소리만 내고 있었구나.를 인정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고침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보통 성공한 사람들, 잘난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말 안 듣고도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위험합니다.한 분야에서는 그게 맞을지 몰라도 삶의 모든 분야에서는 그 한 사람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속사의 하나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믿기는 했으나 아직 고난의 양육을 받지 못해서 불협화음을 참고 들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은 흩어져 뿐이었습니다. 믿으나 안 믿으나 안 맞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나 교회나 갈라서기를 밥 먹듯 합니다. 물론 결혼 전엔 맞지 않으면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의 원칙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와 지혜와 타이밍은 바로 원칙에서 부터 비롯됩니다. 너무 힘들어서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반드시 지키라고 하는 것이 성령의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을 지켜가면서 거룩을 이루어 갈 때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믿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주께 인도하려고 섬겨야 하는데, 아직 고난의 양육을 받지 못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직 까지 유대인 습관이 남아있어 성령의 옳도다 가 안되고 서로 내가 옳다며 싸웁니다. 이렇게 까지는 못참아 하며 결국 헤어집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한 결과가 흩어짐입니다. 여기는 지나다 그냥 들린 곳이 아니잖아요. 성령의 경영으로 몇년을 기도하고 준비하며 기다렸던 로마입니다. 비록 쇠사슬에 매여 군인의 감시를 받는 죄수로 와있지만, 그토록 기다리며 고대 하던 로마에서 전한 첫 설교입니다. 그 설교를 듣고 믿은 사람이 생겼는데, 열매가 분명히 있는데, 누가는 그 믿은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은 유대인이나 믿지 않은 유대인이나 서로 맞지 않아 흩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시간이 되어 흩어진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아 흩어졌다고 기록합니다. 하루 종일 설교한 바울에게는 청중이 서로 싸워 흩어진 시간이 온 것입니다.
♤적용질문
내가 은혜를 받아도 안 받아도 불협화음의 주인공입니까?
고난의 양육을 안 받아서입니까? 교회의 양육을 안 받아서입니까?
일단 양육은 어디까지 받으셨나요?
그래서 서로 맞지 않아 떠나고 싶은 사람(상황)은 누구(무엇)입니까?
2. 옳도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26절
바로 이 때, 바울에게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이사야 6장 9절 말씀이다. 당시로부터 약 7백여년전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아무리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고 사건을 통해 아무리 보여주셔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백성의 완악함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은 후에 높은 보좌를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고 연기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전한 높은 보좌의 말씀을 듣고 충만해서 유대인들도 믿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봤음에도 흩어졌잖아요. 흩어지면 안되고 이사야는 그 영광을 보고 화로다 망하게되었도다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이 해야 할 말이다. 한마디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와 백성은 죄인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자신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나의 실체를 하나님 앞에 내려 놔야 합니다. 사명자는 이렇게 자신의 죄인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을 보지 못하니까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부터 정결케 되어 다시 입술이 부정한 자들 가운데로 파송 된 사람입니다. 말씀도 잘 전해야 하지만, 잘 전하면서 나의 죄성을 보고 가는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 성경이 안 깨달아 지는것은 가장 큰 심판입니다.
내가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심판 가운데 살았겠는가를 봐야 됩니다. 이사야가 입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 받은 다음에야 사명을 주십니다. 이 순서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자마자 이사야는 내가 여기있다고 합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이사야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만나고 회개의 은총을 경험하므로 적극적으로 소명에 임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오늘 말씀을 주신 것이다. 내가 가겠나이다, 내가 여기있나이다 하니 희한한 말씀을 하십니다. 부르심을 받고 가도 사람들이 하나도 못 알아들을거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완전히 자기 나라, 내 나라가 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무서운 말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의 시간을 앞당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목장에서 안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처럼 자기 입술이 부정한 것을 보고, 자기 죄를 본 사람들은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9절. 이 한 구절 말씀이 바울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이혼하고. 이럴 때 바울에게는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사건을 만나면 제일 먼저 감정부터 반응합니다. 열심히 전했는데 둘로 흩어져 갈라지는. 이런 사건이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안되겠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망할 수가 있어, 내가 그렇게 뒷바라지했는데 떨어질 수 있어. 대체 왜 그런거야! 행복에 초점을 두고 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무너지니 이해가 안되어 불평 원망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루 종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했는데. 들을 땐 아멘 하며 응답하더니 금세 나가자마자 흩어져 버리니 안타까움, 실망, 슬픔.. 여러 감정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정이 아닌 말씀이 딱 기억났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읽은 말씀, 들은 말씀, 묵상한 말씀이 있었기에 감정이 요동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왔을 때 말씀이 기억날 수 있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떠오른 말씀 한 구절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반응하나요? 말씀을 기억하고 옳도다 합니다. 헬라어로 칼로스라 하는데 상황에 딱 들어 맞는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비춰 이 상황을 보니 우연이 아니구나, 억울한 일이 아니구나, 슬퍼하고 힘들어할 일이 아니구나! 이런 고백이 나오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해석입니다. 옳도다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를, 진행되는 과정을, 앞으로 일어날 결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평소 말씀을 많이 들어 둬야 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날마다 큐티인 본문으로, 그 안의 한 구절로, 한 단어로 내 생각, 마음을 조금씩 적셔야 합니다. 그래야 사건이 올 때 사건의 본질을 해석할 수 있어야 요동 하지 않습니다. 해석이 안되니 자기 감정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나라 백성은 옳은 말씀이 있기에 그러면 안됩니다. 변하지 않는 상사, 부모 등 그사람에 변화를 우리보다 성령님이 더 답답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아무리 힘든 사건이 와도 옳도다 하길 기도해야 됩니다. 이 옳도다의 모습을 보이라고 잘 세우고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다.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 읽고 묵상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적용질문
힘든 사건이 왔을 때 말씀이 기억나 이 말씀이 옳도다! 하고 해석한 일이 있습니까?
3. 돌아와 고침 받으라는 간절한 초청입니다.
이런 불협화음을 감지한 바울이 그들 모두를 향해 날린 한마디는 이사야 6장 9-10절입니다.
26-27절
너희가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내가 고쳐줄까 걱정이다!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7백년 전 하신 말씀을 지금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 상태를 우둔함으로, 개역한글에ㅅ선 완악함으로 번역합니다. 마음이 살이 쪄서 두껍고 단단하니 고집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하던 것 절대로 고치지 않는 고집이 바로 우둔함이고 완악함입니다. 고집이 많은 경우 의도적이지만, 사람들을 겪다 보니 의도적이지 않은 고집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만은 못버려! 하는 의지를 가지고 고집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무슨 문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상대방이 무엇을 지적하는 지도 몰라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선하고 착한 얼굴로 네 대답하는데 도무지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면서 난 고집 없어 하고 말합니다. 의도적이던 비 의도적이던 악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 악에 대해 타고난 고집이 있습니다. 인간이 100% 죄인이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듣는 것과 깨닫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전파되는 것에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면 빛이 생기고 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말씀에 복종합니다. 천사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말씀이 능력 있게 전파되는 현장에서 이 옳은 말씀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딱 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나 입니다. 내가 눈을 감고 마음을 닫으면 그 어떤 능력의 말씀도 내 삶 속에 전파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 안 듣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는 사람은 들으면 깨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깨울 수 없는 사람은 자는 척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안 일어나기로 작정했기에 못 깨웁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이던 비 의도적이던 우리는 다 악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안 들으니까, 내 삶 속에 하나님 말씀을 유일하게 가로막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내 욕심, 음란, 죄로 인해 성령께서 나에게 오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아무리 성령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뭐합니까? 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내 속에 욕심, 시기, 미움, 음란함.. 이것들이 딱 가로막고 있습니다. 불신결혼은 안된다고 느헤미야가 수염을 뜯고 옷을 찢으며 뜯어 말려도 내 눈앞의 저 사람이 너무 멋있어 보이니 듣기는 들어도 안 듣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안 봅니다. 이 말씀 앞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이혼은 안된다고 말씀이 말하지만 그 몸이 한 몸이라 말하지만 안 듣는다. 이 정도면 해야 돼,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듣기는 들어도 안듣고 보기는 보아도 안보면서 말씀이 오면 딱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진짜 들어야 할 말씀에는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심판의 말씀 앞에는 눈을 딱 감아버린다. 올 한해 23년, 성령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고침받아야한다. 조금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 같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단 해야 합니다. 말씀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침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는 이유가 욕심 때문입니다. 로마가 너무 좋고 이 땅이,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눈을 감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고침 받는 것은 지금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손으로 가는 적용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적용하면 살 길이 막막할 것 같은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앞에 적용하고 내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 때 내가 가로막고 있었던 성령께서 내 생명 속에 임할 줄 믿습니다.
고쳐줄까함이라의 이사야 6장 10절을새 번역은 고침받게 될까 걱정이다 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합니다. 이 이야기를 유대인이 미워서 했겠습니까? 정말 간절히 돌아오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골육 친척을 위해 아픔을 가지고 이 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에도 똑같이 말씀이 나옵니다. 저도 부르셨다. 그래도 전하지 않으면 핏값을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9장 3절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라 마음에 고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라고 말하는게 참 말이라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다 보면 근심도 고통도 거짓말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근심을 하면서, 야망의 근심을 하면서 영적 근심을 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너무 감사해서 앉으나 서나 성경 읽고 가치관이 변하도록 주일 학교 목장 등을 섬기며 가르쳤더니 다른 집 아이들은 변해서 새 사람이 됐는데 내 아이는 학교도 안가고 학교도 떨어지고.. 공부는 잘하는데 교회하고는 담을 쌓았다면 얼마나 큰 근심일까요? 이 근심은 야망의 근심일까요? 영적 근심일까요?. 그건 여러분이 THINK해보셔라.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만큼만 근심하게 되어있다. 주님과 사랑으로 연합되어갈수록 구원받지 못한 식구때문에 쉬지 않는 고통이 있어야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구원때문에 기도하고 가면 옳도다! 하고 내가 구원때문에 확실한 믿음으로 가게되면 반드시 구원이 다 이루어질 줄 믿는다.
그러니까 기다려야 합니다. 구원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니다. 내 죄가 큰 사람들은 잘 기다립니다. 왜 구원을 이렇게까지 원할까요?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실제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구원이 안되고 있으니 바울은 최고로 힘든 구원의 대상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돌아오는 것은 여러분들이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안 돌아올수록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게 많아지면 이게 구원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 돌아온다고 나도 싫어하고 흩어지니 안되는 것입니다. 내 식구가 안되는 것 만큼 구원의 지경이 넓어지는 사람을 수준이 높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안될수록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가야겠는데 내가 해봤자 되는게 없네, 교회 옮겨야겠어 하니 흩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도 흩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성령의 옳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 사랑이 가능한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내가 내 옆에 사람이 계속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소리는 무엇인가요?
나는 어떤 말씀 앞에 눈을 감고 있나요?
올해에 내가 고침을 받고 싶은 부분은 어디입니까?
* 기도제목
다정언니
- 불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상아
- 운전면허 공부하기.
- 회사를 지켜주시기를.
은혜
- 생활예배 잘드리기.
- 졸업을 앞두고 직장 인도해주시기를.
- 사람 만나는 거 분별 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