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 성령의 이야기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어려서부터 옛날 얘기, 재밌는 얘기는 참 재밌고 기억에 남네요. 교회 다니면서도 에서의 팥죽이야기. 동방박사 이야기등,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긴데 기억에 남아있네요. 이것들을 큐지컬로 만난다니 기대가 됩니다. 한편의 뮤지컬이 되니, 룻기 사무엘상하를 지나 이번에는 사도행전이 입체적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창조적으로 역사하는 우리들교회 아닌가 싶습니다. 극단 대장부가 구속사를 체득한 배우들입니다. 우리가 큐지컬로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불신결혼 하지말라고 백번해도 노래 하나가 기억에 남네요.
본문의 이야기가 두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이야기 해보려고합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하고 출발합니다. 노스웨스턴 심리학 맥아담스교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정체성을 형성한다 합니다. 나의 정체성의 뿌리는 이야기이고, 좋은일에서 나쁜일로 바뀌는 것을 오염시퀀스. 반대는 구원시퀀스라고 말합니다. (Redemption) 오염시퀀스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만족을 못한다고하네요. 구원시퀀스의 경우에는, 만족스럽게 삶을 살아간대요. 우리의 이야기는 어떤 시퀀스입니까?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다음에 대안은? 이라고 합니다. 결국엔 둘 다 자기 중심성에 기반해 나에게 뿌리를 둡니다. 그래서 행복해도 오염과 구원 사이에서도 나의 어린시절은 어땠어 저쨌어 하면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뿌리로 둔다면 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구원해주신 하나님으로 넘어갑니다. 행복 불행이 상관없어집니다. 나의 간증이며, 나의 스토리가 됩니다. 오늘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려 로마까지 갑니다.
오늘의 성령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 나를 지키는 자가 있어야합니다 [16절]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6절]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갑니다. 길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성령의 경영으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한 지 5년만이며, 영내에 체포되어 니가 나의 일을 로마에 증언하여야 하리라 한지 3년입니다.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일이 쌓여있습니까?
잡혀가고 쫓겨가고. 요즘 큐티하는 고린도후서에도 나오지만, 아가야 마게도냐에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거기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시킨 것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를 맞고 잡혀가고 천부장이 잘못없다고 판단해도 재판이 되고. 결국 로마로 재판가운데 선장 ampbull 선주가 말을 안들으니 광풍이 오고 배가 파선된 후 멜리데에 거쳐 여기까지 옵니다. 로마는 전세계 경제의 10%를 창출한다고 하니, 얼마나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여기는 땅끝나라입니까?
[사도행전 5:8] 예루살렘 온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이 사도행전의 전체를 이끄는 구절이 되는데요.
[16절] 우리가로 시작합니다. 28장을 끝으로, 주어가 우리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로마로 들어간 이후부터 주어는 바울로 기록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고 천부장의 추천서 덕인지 특별대우 합니다만, 한 군인이 지키게 됩니다. 내 옆 형제가 아니라 지키는 사람이 따로 생깁니다. 이 사람때문에 자신의 스토리를 완성시키게 됩니다. 로마까지는 어떻게 도움과 형제들과 왔지만 이 이후부터는 혼자여야합니다. 결국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을 갈 때 아무도 없이 홀로 올라갔으며, 십자가에도 홀로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나혼자 져야합니다. 공동체로부터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면 십자가는 내가 져야합니다. 결론, 결정은 내가 해야합니다. 공동체로부터 위로와 처방을 받았어도, 내가 적용을 해야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요술방망이 점쟁이가 아닙니다. 구속사 최고의 결론을 내주지만 결정은 스스로가 내려야합니다. 나를 감시하는 한 군인이 마치 남편 아내 꼭 달라붙은 사람처럼 감시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 뭐라고 합니까? 바울정도 되었으면 자유좀 주세요 하지 않을까요? 집에가서도, 나를 못믿냐? 하게됩니다.
그러나 못믿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성령을 이해하기를, 내 삶에 써내려가기 위해서는, 나를 지키는 자가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지키는 자 없으면 흘러떠내려갑니다. 물질 병 기 막힌 고난때문에 떠내려가지않고, 나를 끝없이 감시하는 상황을 통해, 그 삶을 통해, 성령의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그 이야기는 감사와 행복을 뿌리가 아니라 상처로 얼룩져 끝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한 죽음과 그 죽음 뒤에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시댁과 남편의 그 한 명이 만명같이 감시하곤 했습니다. 그 한 명만 없으면 내 세상일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한 명이 지켜도 만 명이 저절로 지키는 삶입니다. 그만큼, 두렵고 떨리는 공개된 길이 되었습니다. 시집살이 할 때는 그렇게 도망가고싶더니 남편이 가고 혼자가되니 나가고싶다는 마음이 싹 사라지더라구요. 처가살이 하는 지체들은 시댁에 공기도 싫다곤 합니다. 숨이 막히니까요.
그러다가 분가를 하게되면 나가는 게 싫어집니다. 분가하면 열심히 주의 일 하게 될것 같더니, 멀리멀리 떠내려갑니다. 그러므로 환경은 믿을 게 못됩니다. 저 사람과 살면 원이없겠다 하지만 속지마세요. 나의 행복과 불행은 헛 것입니다. 주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하는 사람을 만나야합니다. 지금도 가정 회사 학교에서 열심히 감시받는 사람이 가능성있습니다만, 이런 사람이 주의 일을 써내려갑니다.
그것도 잠시 일 수 있습니다. 그런 잠시라도 순간의 주님과의 만남만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용/
나를 지키는 한 사람이 만 명 같은가요? 만 명이 한 사람 같은가요?
즉 나를 지키는 사람이 없어도 있는 것 같이 사나요?
지키는 사람만 없으면 마음대로 할 것 같은가요?
처가살이 시집살이의 애환을 나눠보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성령의 이야기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저도 시집살이중에 주님을 만났으나 8년을 더 같이 있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이야기로 승화할 수 있는지 8년이나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 소망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의 매임을 이야기해야합니다. [17-20절]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17-20절]
바울이 주어가 되어 무엇을 했나요? 로마에 입성하니, 황제를 만나야합니다. 하나님은 로마 분봉왕들을 다 만나게 하셨기에 로마 총독을 만나게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않고, 여전한 방식으로 배척했던 유대인들을 향하게 합니다. 돌고 돌아 계속 상처줬던 그 사람들에게 들어가게 (믿지않는 내 식구, 내 종족, 동족들에게) 하는 겁니다. 어디를가도 가족과 동족은 잊을 수 없어요. 이것이 성도의 갈 길입니다.
바울이 언제나 전도하러가서 유대인 회당부터 갔습니다. 배척을 아무리 받아도 일단 거기 들어가서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열매가 많아도 내 가족이 무조건 중요합니다.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이렇게 로마까지 왔다면, 바울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 이야기를 내 동족 유대인들에게 또 하고자 합니다. 구원도 관심없지만, 가장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내 동족 내 옆의 사람이 바울을 가장 박해하는 사람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겨우겨우 터 잡고 사는 그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로마에서 추방당해 고린도로 왔듯, 그들도 기독교인들 때문에 쫓겨났다고 합니다. 즉 안 좋은 일은 다 예수믿은 너때문이야 하는 박해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 둘 씩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탈하는 사람도 이렇게 생깁니다. 구원에 대한 해석도 그 동안 번제로 화목제로 불태우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제물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성전이다 하는 말을 하니까,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즉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유럽 여러 아시아교회들에서 바울만 가면 항상 소동이 났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 안 받아들이는 사람 때문입니다. 갈때마다 오해를 풀지 않으면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가 될까 두려워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20절] 함께 너희와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청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관습을 어긴 적이 없기에 죄가 없지만, 오직 너희들과 눈으로 보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로마까지 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나를 죄가 없다여겨 석방될 일을, 형제들인 유대인들의 반대로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겁니다.
땅 이름이 목적지가 아닙니다. 악하고 음란한 고린도에 왔을 때 밤에 환상 중, (사도행전 18장) 하나님은 이 성중 네 백성이 많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로마를 변화시켜야 하리라가 아니라 로마에도 이 성중 백성이 많은 것을 일러줍니다. 이 고생은 너희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라고 바울은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라는 단어는(프로스랄레우) 딱 2번쓰였는데 [행 13:44] 쓰입니다. 바나바와 1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처음 설교할 때 쓰입니다. 부정과거동사로 딱 한번 말했는데, 그 다음 안식일에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아주 형편없는 바울인줄 알고 회당을 빌려줬는데, 다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들을 보고 시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 얘기 하기만하면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한것입니다. 마지막에 유대인들보고 하는 설교가 같은 동족 같은 대상에게 할 때 또 쓰입니다. 시작과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이야기가 구속사 이야기.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구원 예수 회개 등으로 표현했는데, 로마에서는 내가 이스라엘의 소망때문에 쇠사슬에 매였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표현입니다. 제자들도 사도행전 처음에, '주께서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고난 중에 두셨으니 너희 알바 아니라' 했듯, 나도 너희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나도 이스라엘의 소망을 바라고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들에게 맞는 어휘를 선택했습니다. 전도시 어휘선택이 이처럼 참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한테 예수믿으라는 말 쓰면 경기 일으킵니다. 나사렛, 예수 이런건 발작버튼입니다.
말이 교만하면 안됩니다. 어휘선택이 중요합니다. 자기 민족을 대적하는 일도 아니고 번제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소망때문에 매이다라고 했습니다. 매임은, 신약에서 많이 쓰이 진 않은 단어지만, 히브리서 5:2에 쓰입니다. 대 제사장에 대해 무식한 자들을 받아들임은 자기도 매여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 쓰입니다.
바울이 말 한 것 처럼,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매여있으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차별하기 쉬운 그들을 내가 매여있다면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매여있는 것 처럼 주님도 연약에 매여있다고 합니다. 이게 매임입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역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쇠사슬에 매여있다 풀린 정치적인 독립과 해방이 아닙니다. 그런 이스라엘 소망이었다면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 지러 오시지 않으셨을거다. 나도 죄수의 모습으로 쇠사슬에 매여있는 모습을 결코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의 소망은 죽은자의 소망입니다. 곧, 부활의 문제로 심문받노라 라고 말했듯, 결국 예수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풀었습니다. 죽은자의 소망은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받는다고, 그들의 바라는 것은 구약을 넘어 이 땅의 성취. 회복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 이스라엘 소망을 말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가장 부정적인 무식 ampbull 미혹된 자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하고, 그렇기 위해서 매인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모든게 된다가 아니라, 이렇게 매여있고 죄수가 되어도 하나님이 임하면 성령의 이야기가 되고, 이 모든 모습을 통해 이래도 하늘이 열린다는 걸 보여줘야한다. 라는 말입니다. 바울같은 사람이 쇠사슬을 차서 얼마나 수치스러운 모습입니까?
도리어 당당하게 유대인의 높은 자들에게 청해 보여주며 내가 이스라엘의 소망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소망때문에 매였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매임이 부활의 증거로 약재료로 쓰인다면, 그 약재료로 내 안의 죄악을 회개해야하는 겁니다.
바울은 사명 감당하다가 돌팔매 맞아도, 독사가 물어도, 배가 파선되어도, 때려죽음 당해도 나눠줄것만 있게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죄를 보게 되었는데, 바울은 스데반 집사 죽인 일을 평생 기억합니다. 어떤 고난이와도 내 죄보다 고난이 약합니다. 이것은 큰 비밀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내가 주님을 박해한 죄인은 어떤 억울함도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쇠사슬의 매임이나, 어떤 상처라도 거기서 자기 죄를 봐야합니다. 그 매임에서 성령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상처로부터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게 권능입니다.
이 쇠사슬에 매여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며, 이것이 나의 간증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신세한탄이 아닙니다. 이 환경속에서 내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땅 끝나라 세계 최고의 로마에 왔으나, 여기를 변화시킬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 유대인 바로 너희들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뽑아 택하여 제사장 세운 민족이고 증거합니다. 너희 자체가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임하지않아 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도 얘기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못들어도, 2천년 후 우리가 듣습니다. 그래서 못 알아들어도 꼭 전해야합니다. 전하기만 해야합니다.
적용/ 난 나의 매임에서 이타적인 이스라엘의 소망. 즉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말하나요? 이기적인 신세 한탄만을 하고 있나요?
다른 말로 매임에 대해 부끄러워 숨깁니까?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약재료로 나누고 있나요?
로마의 헬레니즘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박해하게 됩니다. 갈 길이 머네요. 그들은 돈에 매여있고 학벌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강성함을 너무 부러워해 도리어 시기합니다. 그래서 초점이 로마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학벌이면 다냐? 나눔해보라 했더니 엄청 쏟아져나오더라구요.
*** 학벌에 대한 나눔
- 형제 중 듣고자 하는 자들이 반드시 남아있습니다 [21-22절]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1절] 유대인 지도자들은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벨릭스 아그립바와의 일을 왜 모르겠어요? 이렇게 소란한 일을 일으킨 바울과 연관되기 싫습니다. 유명하니까 확인 차 와봤습니다. 바울이 쇠사슬의 매임을 보며 낮은 마음으로 자세히 설명하니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의 걱정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에 대한 나쁜소식도 들은 게 없어요 등을 얘기합니다. 무죄입증하려고 여기 온게 아닌데 하여튼 무관심하네요.
그러나, 바울의 태도때문에 22절에 이어집니다
[22절] 바울이 거기서 자기 억울함과 결백함 주장했다면, 바울과 유대인 지도자 사이에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바울과 함께 이야기하고싶었던 이유를 다 이루니까요. 바울의 매임을 직접 보고있고, 그 까닭이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말을 듣자, 지도자들은 바울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데,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궁금하고. 바울의 행동은 그들의 인본적사상으로는 감잡을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바울처럼 쇠사슬에 매여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철학자 전도자들 워낙에 많이 만나봤을 그들은, 성령 충만으로 매임을 받아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싶어하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무죄를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동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꺼리는 그리스도 예수파에 대한 마음이 열립니다.
어디서든 그들을 반대받는 줄 알고 풍문으로 들었던 것 같고, 정확한 예수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정해주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반대하는 종교구나 여기서도 꽂혔을 겁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듣게하기 위해 바울은 기독교가 부정적이지 않다라는 얘기를 하기위해 이 고난들을 겪으며 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을 위해 온 것이에요.
집회를 갈때마다 참석자들은 이런 얘기는 처음들어본다는 피드백들을 많이 듣습니다.풍문으로 들을 땐 큐티가 이상하다그러던데.. 70평생의 이야기를 그 사람들은 한 시간에 듣고 변화되는 사람이 1시간에 꼭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해주겠지? 그런건 없더라구요. 어디서 듣거나 풍문으로 들을 땐 어디서 반대한다 등 부정적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고 온 나라가 하나님 믿고 잘 살아야한다고 하면 다들 긍정적으로 듣습니다. 나눔할 때도 아름답고 착한 이야기만 해야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본질은, 악하고 음란한 이야기입니다. 스토리는 아내를 두번 팔아먹은 아브라함, 사기꾼 야곱,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이야기, 기생 다말, 과부 룻과 나오미 이야기. 처녀와 잉태한 마리아이야기. 이것들은 이야기만 듣고는 참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번 주에도 기막힌 일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건이 있으면 바울의 말이 너무 잘들립니다. 그리고 반대로 잘들리게 하기위해 내가 쇠사슬에 매여야합니다. 내 상황에서 그들의 상황, 아픔속으로 들어가 전해야합니다.
이 때 내 이야기를 말씀의 이야기로 전해야하는 게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그 이야기(겉으로보면), 하지만 무너진 내 마음속으로 그 이야기가 들어오면, 성령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결국 로마는 나 혼자 들어가야하고 마지막 종착역인 내 가족 내 동족입니다. 반대하는 이야기도 풍문으로는 들었겠지만 다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던 이웃들, 큐티모임을 하는지 있는지도 몰랐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이야기는 듣던지 안듣던지 들려줘야합니다. 전도는 숫자채우려고 하는게 절대 아닙니다. 성령의 이야기를 들어야 그 사람이 변하고 그 가정이변합니다.
이번주 역시 탄식이 나오는 사건이 곳곳에 나왔습니다.
*** 민백기 목자님 아내 안미정집사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는, 청년부 출신입니다. 결혼 1년 전, 자매는 어떤 청년과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결혼 조건으로 신랑이 양육받고 목사 주례받는 것, 부부목장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형제가 응답을 안 한 것입니다. 거절당했습니다. 이 자매는 우리들교회에서 살아났기에 곰곰히 생각하다 그 사람과 파혼했습니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 아웃리치 갔다가 우리들교회에 10명의 청년을 양육했다는 목자 민 집사와 결혼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살다가5살 7살 아이를 둔 그는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이럴 때 그때 결혼을 잘못됐네하면 안됩니다. 과연 믿음의 안 집사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사고 당일에 기도제목을 올립니다.
출근길 신호위반으로 달려오던 1.5톤 트럭에 치여 뇌출혈 척추, 갈비뼈골절이 일어났습니다.
의식 심장박동 혈압을 움직이는 그 부분을 뇌 수술로는 접근이 불가합니다. 오직 하나님 밖에 할 일이 없는 시간입니다. 자세히 적어줬고, 그날 큐티말씀으로 기도제목을 올렸습니다.
-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리며 균등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구원의 사건이 되도록
- 의식이 속히 회복되고 자가 호흡할 수 있도록. 치료 과정을 지켜주시기를
- 제가 슬픔과 연민에 빠지지 않고 말씀으로 제 자리 잘 지키기를
- 로마로 향해가는 여정에 성령의 담대한 마음을 주시기를
- 모든 과정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낼 수 있도록
- 276명의 복음특공대의 기도해주시기를
남편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잘 지켰다는 게 느껴져 고맙고 미안하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공동체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인지, 아이들과 일상을 잘 살아 낼 수 있는 경험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됩니다. 전도대상자로 기도하던 이모가 네 남편 살려주면 교회 가겠다며 서원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의식없이 누워 있는 남편을 통해서도 어떻게 일하시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지않은 친구들도 너무 간절히 기도해주고, 세계 곳곳에서 기도해주고 있다는 소식.
자매의 기도제목이 순식간에 4000회 클릭되었습니다. 남편 사고가 저주받은 사건이아니라, 무너진 나를 세우시고 풍성하고 넘치는 사건이 될줄 믿습니다. 화요일에 사고가 났는데, 중환자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그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다음날은 수요예배에 왔습니다. 너무 의연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쇠사슬에 매였어도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합니다. 이 젊은 엄마가 어떻게 이럴까요? 남편이 될 뻔 했던 사람과 파혼했던게 믿음이라는게 이해가됩니다. 바울과 같이 타서 깨어진 배입니다. 그러나 다 구조되었듯 민백기 집사도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해주길 바랍니다.
다음 주 성탄절입니다. 이번주 바울의 이야기가 공연됩니다. 우리들교회 뮤지컬이라고 선한 게 뭐가 있을까요. 내 동족 유대인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우리들교회 이야기를 듣도록 다같이 오기를 바랍니다
적용/
내 사상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인가요 부활을 바라는 천국의 가치관인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인가요 풍문으로 들은 것인가요?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나요 많은가요 무관심인가요?
결론. 성령의 이야기는 나를 지켜야하는 이야기가 있어야합니다. 성령의 매임으로 쇠사슬의 매임을 이야기해야하며, 형제중 듣고자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깁니다.
기도제목
유다니
- 믿음이 생길 수 있도록
- 내년 학교 잘 붙어갈 수 있도록
박경찬
- 2022년을 돌아보니 많이 잔병치레했는데 건강하게 회사생활 적응할 수 있도록
김준범
- 아프지 않도록
- 지금 대학 잘 붙어갈 수 있도록
이서호
- 회사 잘 붙어 갈 수 있도록
- 수요일부터 몸살감기가 붙었는데, 나을 수 있도록
안식
- 내일 형 이사를 잘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 내년에 매여가는 부분들이 걱정되는데 잘 붙어갈 수 있도록
- 새 목장, 새로운 본부장, 새로운 개편 상황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