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가을에 읽는 전도서
전도서 1:12-14, 3:11-13, 12:13-14
강영안 교수 (미국 칼빈신학교)
오늘 제가 이 설교 말씀드리기 전에 지난 3년 전에 우리들교회에 와서 강의하고 나서 팬데믹을 동안에 그때 했던 강의를 바탕으로 해서 책을 썼습니다. 사실은 2019년 2월 말쯤 제가 강의 부탁을 받고, 한 10개월 정도 매일 앉아서 준비한 건 아니지만 매일 마음에 염두해 두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10월 중순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12월 초에 와서 제가 30분 강의를 했는데, 한 달 반 정도 작업을 했죠. 그리고 여기 와서 강의하고 설교한 다음에 한 두 달 바짝 아팠습니다. 제가 일주일 여기 와서 서울에 강의 때문에 왔다가 미국 들어갔는데, 그 해 겨울 몸이 많이 안 좋아서 힘이 들었었는데, 이제 2월달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원고 가지고 책을 만드는 작업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팬데믹을, 이 코로나를 우리가 맞이했잖습니까. 그러면서 저한테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그때 던졌던 두 질문,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가 큐티를 하면서 주관성에 빠지지 않고, 내 그냥 자의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하나 있고요. 그 다음 두번째는 '왜 이렇게 큐티를 열심히 하는데 그게 삶 속에 드러나지 않는가?'하는 질문. '그 둘 다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데 그거에 대해서 써야겠다.' 마침 제가 3월 12일 콜로라도에 있는 덴버 신학교 강의를 갔다 오는 비행기 간에서 그 생각이 떠올랐어요. '아, 이 질문을 다뤄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그때 이제 6장까지 원래 구성이 되어있더랬습니다. 6장이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님이 하고 있는 큐티,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 큐티에 대해서 소개하는 게 6장이었고요. 그 앞에는 어떻게 서양의 그 전통, 수도원 전통. 그 다음에 동양의, 특히 유교 그 주희, 주자학 전통에서 읽기를 했는가? 그리고 이제 종교 개혁 일어나면서 마틴 루터가 어떻게 수도원 전통의 렉시오디비나를, 그걸 이제 개신교적으로 이 종교 개혁을 바탕으로 해서 바꾸었는가? 그리고 그 바꾼 전통과 이제 우리들교회에서 하고 있는 큐티가 어떻게 역사적 연관되는가? 이런 것들을 6장까지 전개를 했고요. 그리고 7장, 8장에서는 그때 던졌던 질문, 주관성의 문제, 삶의 실천 문제, 이 문제를 다루었더랬습니다. 그래서 2020년 5월달에 이 책이 나왔더랬습니다. 그때 우리들교회 와서 강의하게 된 게 이 책을 만들어내게 된 그 계기가 되었는데요. 그런데 책을 쓸 때마다 제가 늘 떠올리는 성경 구절이 전도서입니다. 제 삶의 요절처럼, 제가 이제 평생 학자로 살아오면서, 특별히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부터 요절처럼 생각하는 게 전도서 12:12입니다. 12:12 뭔지 여러분 혹시 금방 떠오르십니까? 책을 만드는 것 우리 말로는 아마도 책을 만드는 것 그렇게 되어있지를 않을텐데요. 거기 보면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이렇게 되어 있네요, 우리말 번역. 원래 히브리말로는 글들을 많이 짓는 것은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만 헤어지게 만든다 몸을 우리가 마치 천을 많을 비비면 천이 닳자나요.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닳게 하느니라 우리말로는 피곤하게 하느니라 되어 있는데, 이걸 제거 요절 삼아서 그렇게 지난 한 20년을 살았는데요. 사실은 제일 안 지키는 말씀입니다. 요절처럼 따른다 하면서 잘 안 지키는 말씀, 지금도 밤새 뭐 책 읽는다고 또 그러기도 하고 있는데요. 이제 '우리가 지금 가을을 맞이한 이 계절에 가장 묵상하기 좋은 게 역시 전도서다.'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에 계절이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가을이 있고, 겨울이 있자나요. 지금 이제 가을에 묵상할 수 있는 그게 전도서인데 마침 큐티인에 다음 목요일부터 묵상이 전도서더군요. 그래서 오늘 전도서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 전도서가, 우선 첫번째 제가 던지는 질문은 '어떤 책인가?' 전도서 어떤 책인가 하는 걸 먼저 생각해보고요. 그 다음에 두번째, 세번째는 '전도서의 아주 골격이 되는 가르침이 뭔가?'하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 앞으로 한 한 달 정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요.
1. 전도서가 어떤 책인지
전도서는 모두 1장에서 12장까지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자세히 보시면 그 구조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장에서 11절까지는 일종의 서론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는 아주 기본이 되는 그 골격, 그걸 드러내 보여주고요. 그리고 이제 12장 8절부터 12장 14절 마지막까지는 전체 결론이라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건 모두 3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도자가, 전도자가 이렇게요, 3인칭으로. 그런데 이제 그 몸통 역할을 하는 1장 12절에서 12장 7절까지는 1인칭으로 되어있습니다. 나 전도자가, '나 전도자가 이렇게 저렇게 관찰해보고 연구해보니 이렇더라.'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죠. 그것도 이제 5장 마지막까지, 6장 초반부까지는 그냥 '이렇더라, 이렇더라.' 계속 서술을 하고 있고요. 이제 6장 넘어가서는 그러니 이렇게 해라. 이렇게 살아라.' 그렇게 교훈을 주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보면 전도서라고 할 때 이 전도서라고 하는 말, 그게 이제 원래 히브리 제목이 코헬렛인데요. 혹시 교회라는 말, 모임이라는 말을 히브리 말로 카할이라고 한다는 말을 여러분 들어서 알고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같은 계통의 말인데요. 코헬렛은 뜻을 보자면 한 세가지 의미를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모으는 사람 그러니까 이런 저런 지혜의 글들, 지혜의 가르침을 수집하는 사람이란 의미, 그 Collector라는 뜻이 있고요. 그 다음에 하나는 사람들을 모으는 Gatherer라 하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걸 바탕으로 해서 이제 세번째 의미가 가르치는 사람 또는 설교하는 사람이란 그런 의미가 전도자라고 하는 의미 속에 들어가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히브리 이름으로 코헬렛이라는 말을 통해서 전도서가 어떤 성격의 책인지 그걸 통해서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흩어져 있는 여러 속담이나, 격언이나 그 이스라엘 민족 전통을 통해서 내려오는 것들, 또 근동 아시아에 있는 것들을, 그걸 모으고 그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그 역할을 여기서 전도자가 하고 있다 그렇게 이제 말을 수가 있는 거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소크라테스가 한 글들이 대부분 플라톤이 쓴 글들인데요. 소크라테스 자신은 하나도 쓴 게 없고요. 플라톤이 쓴 가운데 아폴로기아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것이 재판을 받을 때 첫번째 자기 변론이 있고, 두번째 자기 변론을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변론을 하면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그거입니다. '검토해보지 않은 삶, 따져서 캐물어 보지 않은 삶, 그 삶은 인간에게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사실 그 앞에 소크라테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당신들이 나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나는 철학을 하겠다. 왜냐하면 이게 내가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기 때문에 잠자고 있는 아테네 시민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철학을 계속 해야 되겠다.' 그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거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물음을요. 물론 그 밑에는 삶에 대한 물음을 캐물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그 믿음이 있죠. 소크라테스는 그 방법은 질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문답법이라는 걸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삶을 성찰하는 방식인데요. 여기 전도서의 하는 방법은 소크라테스와는 조금 구별이 되겠죠.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그런 문답법을 사용했다면, 어떻게 보면 이성을 토대로 해서 철저하게 물어가는 방식이었다면, 여기 전도서의 전도자가 하는 방식은 인간의 삶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거였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훨씬 더 경험주의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죠. 자 그래서 이제 이 맥락에서 여러분들에게 예비적 질문, 첫번째 질문을 하나 던져 보겠습니다.
[적용] 여러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삶의 가치에 대해서, 삶의 방향에 관해서 질문을 던져 보십니까? 이 질문을 그리스도 안에서 던질 때와 그리스도 바깥에서. 그리스도와 상관 없이 던질 때 차이가 무엇입니까?
2. 전도서에서 삶을 보는 방식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서 전도서에서 삶을 보는 방식이 어떤지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전도서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저는 이걸 두 날개에 비유하기도 하고, 또는 두 선율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아니면 두 주제음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쪽으로 흐르고 있는 주제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편에서 또 다른 주제음이 함께 그것과 대응을 이루면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헛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먹고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선물인 줄 알고 즐겨라. 기쁨 가운데 살아라.'고 하는 이 두 개가 전도서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다같이 한 번 말씀을 같이 읽어봤으면 좋겠는데요. 빠르게 화면에 뜨는대로 한 번 같이 읽읍시다. 1장 2절 말씀부터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 다음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장 14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2장 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2장 11절), 16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2장 16-17절), 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장 21-23절) 이렇게 헛됨에 대한 자각과 한탄은 1장과 2장 뿐만 아니라 계속 이어서 4장, 5장, 6장, 7장, 8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9장, 10장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11장, 12장에 가서 보면 헛되다라는 게 다시 계속됩니다. 11장 8절에 보면, 같이 할까요?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장 7-8절) 이렇게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히브리 말로 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 이게 계속 반복됩니다. 하벨이란 말은 공기, 수증기, 연기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발림이란 말은 복수형이거든요. 마치 아가서 아가라고 할 때 그걸 히브리말로 쉴 하쉬림이라고 하거든요. 영어로 하면 song of the songs, 노래들 가운데 노래라 마찬가지로 여기에 헛되고 헛되다는 말 쓰는 말이 하벨 하발림 그 말은, 그걸 그대로 직역을 하면 공기 중의 공기로다, 연기 중의 연기로다, 또는 수증기 중의 수증기로다 그렇게 직역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공기 중의 공기, 연기 중의 연기, 또는 안개 중의 안개. 뭘 이야기하려고 할까요?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예를 들어 우리가 호흡을, 숨을 쉬었다 하십시다. 아니면 답배를 피는 사람이 담배 연기를 만들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그게 오랫동안 남아있지 않고 금방 눈에 보였다가 그냥 사라져버리자나요. 그러니까 헛되다고 하는 말은 여기서 뭘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고, 이해해보려 하더라도 이해할 수가 없고, 뭐가 영원히 남아있지 않은, 일시적이고 잠시 잠깐 있다가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라.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20세기, 또는 19세기 말 가령 니체나 사르트르나 까미유나, 이런 실존 철학자들이 말하는 그 허무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의미라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니체나 까미유, 사르트르가 말했던 허무주의는 '인간의 삶의 어떤 목적도 없고, 어떤 기초, 기반이 없다.' 그런 의미의 nothing입니다. 니힐리즘이란 말 또는 나이힐리즘, 뭐 두가지 용어로 발음을 하는데요. 그 니힐이라는 말, 그게 라틴 말 리힐이란 말이 영어로 하면 nothing이거든, nothing이즘 아무것도 없다. 뭐가 없냐? 우리의 삶을 떠받쳐 주고 있는 어떤 기초, 바탕, 터전 이것도 없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어떤 가치, 목적, 그와 같은 것도 없다. 어떤 외제적인,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외제적 가치나 외제적 목적이 없다라는 주장이거든요. 자 그러니까 그러면 허무하게 살자 그런 의미냐 하면 전혀 그러지가 않습니다. 니체, 까미유, 사르트르 다 같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떠 받쳐주고 있는 어떤 기초가 없고, 그리고 우리 바깥에 설정되어 있는 어떤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또는 어떤 그런 외제적인 가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걸 만들어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두 가지가 함축되죠. 하나는 '어떤 외제적 목적이나 가치를 설정하는 신, 하나님, 그와 같은 존재는 없다.'라고 하는 무신론이 하나가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목적도 설정하고, 가치도 부여하고, 가치도 창조해내고, 기초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아주 극단적인 휴머니즘, 극단적 인간주의가 거기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무신론적 허무주의와는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어떤 의미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하신 이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하는 일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궁극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가 뭘 알려고 해봐야 그걸 그렇게 제대로 깊숙히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제 이것들이 영원히 남아 있는 어떤 그 알맹이가 있는, 어떤 Substance가 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철학 용어를 가지고 이걸 다시 좀 어렵게 이야기를 해보면,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쉬운 것들을 어렵게 말하는 재주가 있거든요. 어렵게 말해보면 존재론적으로 헛되다는 말은 그건 '어떤 알맹이가 없다, 어떤 Substance가 없다, 쥘 뭔가 가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라고 하는 의미,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알 수가 없고, 그러니까 어떻게 이 세상으로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받고, 오히려 악인이 오히려 영예를 받고, 제대로 장례식도 치르고 그렇게 존경을 받는지, 또 어떻게 판사들이 재판할 때, 검사들이 기소할 때 그렇게 엉터리로 하는지 그 도무지 그런 걸 우리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그 '알 수가 없다.'는 게 있고요. 그 다음에 이제 세번째가 어떤 궁극적 가치라고 하는 거, '그대로 영원히 머무를 그런 가치가 없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해 온 활동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시면, 뭐 한편으로 '완전히 무의미하다.'라고 말은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정말로 그것들이 영원히 남을 어떤 뭐가 있는가, 또는 속속들이 어떤 내용이나 정체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절대적 가치가 있는가?' 물어보면 '아니라.'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지난 한 35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해왔는데요. 그 동안에 책을 한 20권 정도 쓰고, 그리고 이제 논문을 한 120편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무슨 가치가 있을까? 쓸 때는 애쓰고 이렇게 머리 다 빠지고, 다 하얗게 되고 했지만, 뭐 쓸 때는 또 재미도 있었죠. 그렇긴 하지만 그게 무슨 대단한 무슨 그게 남을 건가 뭔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도서관에 꽂혀 있다가 나중에 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겁니다. 그게 뭐가 남아있을 것들이라는 그게 하나도 있지를 않는 거 거든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저한테는 마음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아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하는 내 스스로를 조롱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는 건 틀림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걸 지금 전도에서 가르치고 있고요.
[적용] 여러분은 삶의 헛됨을 분명하게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어디서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허무주의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헛되다고 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제 그게 한 편, 헛되다라고 하는 게 한 편이 있으면서, 또 다른 한 편, 다른 하나의 날개, 또 다른 하나의 주제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전도서 2장 24절에 볼 수 있는 이 구절입니다. 같이 읽으실까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장 11절),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3장 22절), 18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5장 18-19절),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8장 15절),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장 7-9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11장 9절) 이렇게 전도서에는 최소한 7번이나 반복해서 그 기쁨 쉬므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하면서 도중에 다시 기뻐하라, 또 헛되다고 이야기하고 또 기뻐하라, 또 헛되다고 하고 또 기뻐하라 이게 반복해서 두 양쪽에 같이 이렇게 섞여서 나오는 게 전도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완전히 헛되면서도,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서는 우리의 삶을 볼 때 '아 이것이 내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요?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 2장 24절 '이것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고, 심지어 수고하고 하는 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몫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죠. 한편으로 보면 아주 강한 낙관주의고, 심지어는 쾌락주의까지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우리가 먹고 입고 잠자고 그렇게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들과,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친구들, 우리의 교우들, 그리고 우리의 하는 생각들, 이것들이 나에게서 나온 게 뭐라도 있는지.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 아침 식사를 드시고 오실텐데요. 여러분들이 식사 드신 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여러분들 한테서 나온 게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한테서 나온 걸 먹지를 못해요. 우리는 우리 살을, 우리 것을 먹지를 못해요. 우리 속에서는 먹는 거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아요. 이건 모두가 바깥에서 들어와야 됩니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어온 거를 각자가 먹어야 돼요. 어떤 사람보고 '너 졸리니? 내가 대신 자 줄게.' 그럴 수는 없어요. 아, 대신 불침번을 서 줄 수는 있죠. 그러나 대신 잠을 자 줄 수는 없어요. '너 배고파? 가만히 있어. 내가 대신 먹어 줄게.' 그럴 수도 없어요. 각자가 먹어야 돼요. 그런데 각자가 먹어야 되고 각자가 자야 하지만 우리가 먹고 자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라,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 특별히 전도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거, 그게 많이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주신다, 주신다 히브리말로는 나탄이라는 말인데요. 거기서 이제 선지자 나단이라는 이름이 나왔죠. 그 나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게 항상 이렇게 붙어서 다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모두가, 모두가 우리가 하는 생각,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의 이 모든 일상, 저 햇빛, 공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 라고 하는 말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다면 선물로 받은 사람의 태도가 뭐겠습니까? 아마 1차적인, 가장 즉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선물에 대한 태도는 감사일 겁니다.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죠. 받은 거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 감사한다는 건 곧 나한테서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이게 나 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타인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보혈로 우리를 건져주지 않으셨다면, 이 구원의 선물을 주지 않으셨다면, 그 구원의 선물이란 말이 히브리 말로 카리스아니예요? 그게 은혜입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가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 없이 살지 못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마땅한 태도는 감사하는 거일 텐데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감사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감사하지 않으면 불평이 생길 거고, 그리고 불만이 생길 거고, 그 가운데서 뭐가 일어나냐면 결국 비교 관념이 생깁니다. 칸트가 그렇게 말하죠. '인간이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에게 이성이 없다면 비교하지 않을 거예요. 이성이라는 말, Reason이라는 말은 추론하는 능력인데요. Reason, Reasoning 추론하는 능력인데, 이 추론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서로 미루어 짐작하고 하는 걸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삼단논법 이용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의 추론이고요. 또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것도 일종의 추론입니다. 그런데 동물 같은 경우는 비교 때문에 엎드릴 순 있죠. 큰 사자 앞에 작은 사자가 가면 그게 힘에 짓눌려서 엎드리겠죠. 그건 비교 관념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에 기초한 거라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텐데요. 우리 인간의 경우는 비교 관념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것들을 축적하고자 하고, 남보다 더 우월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그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감사해야 되고,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누리는 것들 이것이 하나도 빼지 않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는 그 의식을 갖는 겁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안다면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냥 선물을 장롱에 집어 넣어둡니까? 아끼다가 뭐 된다고 그러자나요.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물은 아낄 게 아니라, 썩힐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써야죠, 선용해야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각자가 받지 않은 선물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 자본주의 사회가 뭐 돈을 워낙 강조하고 사회적 지위라든지 이런 것들을 강조하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또 그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또 그 한 공동체를 기쁘게 만들고 의미있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냥 있어주는 것 만으로 해도 기쁨이 되고 그것이 공동체를 세워 나가고 하는 그런 경우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각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스스로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옆에 있는 사람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눈으로 볼 때 '아, 저 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또 장점, 우리에게 주는 이런 또 선물이라는 것들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을 거 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선물을 선용하고 그것을 우리의 과제로 삼아서 우리가 해야 될 일로 삼아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라 그렇게 말씀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제 세번째 질문, 여기에 관련해서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적용] 어떤 방식의 삶이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선물로 선용하는 것이 될까요? 그냥 있어 주기만 해도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이제 마무리 짓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전도서에 대해서 교회 역사를 보면 크게 두 가지 대비되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비관주의적인 해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아주 낙관주의적인 해석이 있었는데요. 비관주의적인 해석을 대표하는 경우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라틴이름으로는 히에로니무스라고 하는 교부인데요. 영어로는 Saint Jerome이라고 그러죠, 성 제롬. 성 제롬이 전도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콘템투스몬디 이 세계에 대한 멸시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 세계를 멸시하라. 이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제롬의 경우가 4세기 분이거든요.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던 그 초기 시기입니다.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하느냐 그러면 수도원으로 가야 돼요. 이 세상을 피해서. 그런 수도원적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혼자 독거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원했던 거죠. 그런데 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게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입니다. 우리가 이제 한 달 지나면 10월 31일 종교개혁 기념일을 보내게 될 텐데요. 루터가 일으킨 종교 개혁은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믿음 뿐만 아니라 사실을 우리의 일상의 삶의 그 가치를 평가하는 데서도 엄청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게 곧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그래서 전도서를 읽을 때 이 세상에 대한 멸시란 관점보다는 모든 걸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이걸 누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 관점에서 전도서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게 옳을까요? 이것 중에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까요? 전혀 아니라고 봐요. 둘 다 입니다, 둘 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날개가 필요한데 이제 날개를 허무와 기쁨 이렇게 잡지 말고 이제 날개를 펼쳐가지고 그 밑에, 아니면 그 위에 이 세상 것들은 헛되다고 하는 걸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동시에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건데요. 만일 이게 날개라면 이 몸뚱어리가 뭐겠습니까? 몸뚱어리 역할을 하는 게 뭘까요? 전도서에 다섯 번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 하는 겆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어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 포함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말하자면 전도서의 골격이라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 제일 마지막 말씀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일인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우리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덮어 주시고 우리가 심판의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예요? 그럴 수 있는 게 다름 아니라 부활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삶으로 끝이 날 것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그 기대 때문에 이 세상을 한편으로는 허무하게, 헛되게 아무것도 궁극적 가치가 없다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누릴 수가 있는 거 거든요. 그런데 이 부활을 우리가 생각할 때 그냥 미래의 부활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과거의 부활과 현재의 부활과 미래, 이 세 시간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거, 그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 간접 증거가 있는데요. 첫번째는 제자들도 믿지를 않았어요. 그러나 결국 제자들도 나중에 믿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증인을 내세운 게 여자들을 내세웠자나요. 그 당시는 여자는 증인으로 세우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게 조작한 거라면 남자를 증인으로 세우지 왜 여자를 세웠을까요?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세번째 세상에 사실 아닌 것, 그냥 마음 속에 그러리라고 믿는 것 가지고 죽는 사람은 없자나요. 스데반, 그리고 둬에 사도행전 12장 보면 야고보, 그리고 그 다음에 죽 이어서 나중에 바울, 베드로 다 순교했습니다. 다 목숨을 걸었던 것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와 함께 부활할 겁니다. 그 부활에 대한 소망, 그걸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데요. 그게 오늘 현실인 것은 예수와 함께 세례 받음으로 인해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우리의 삶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 죄에 대해서 죽고 이제 의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제 예수와 함께 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들교회는, 저는 확실히 믿건데 부활의 공동체라 그렇게 믿습니다. 이 다시 살아나는, 예수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그 부활의 능력이 올 가을에, 그리고 오는 겨울, 내년 여러분 평생까지 그렇게 있기를 바랍니다.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예선, 우정
기도제목
미혜
세상에서 참 누리고 싶었던 그리고 여전히 누리고 싶은 저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저의 교만을 봅니다. 모든 것을 소유했던 솔로몬의 헛되다는 고백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저 인도해 가주시기를
회사의 아이디어와 프로젝트에 기름을 부어 주시고 개발 인력을 충원해 주시기를
이번 주 아빠 심장 진료가 있는데 검진 결과 큰 이상이 없기를
목장 식구들 헛된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버거울 때가 있을 텐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의지하며 가기를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예수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을 맛보며 갈 수 있도록
목장에 붙어가며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을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날씨가 추워지는데 건강 잘 챙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