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기 들린지가 만 3년이 되는거 같습니다. 2019년 12월 5일, 8일 우리들 교회와서 말씀을 드린적이 있었습니다. 그사이 팬데믹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간동안 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이에 국내에서 가장 먼저 온라인 예배를 시작하고, 많은 영향을 준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이 많은 가정들이 회복되고, 국내 많은 교회에 영향을 준것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을에 되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이 때에, 전도서를 읽는 것이 전통입니다. 같이 묵상하는게 교회 유익하겠다 생각 했습니다.
유대교에는 크게 3개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가을의 초막절이라 부르는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에는 아가서를 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신부가 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언약의 백성으로 읽고, 칠칠절에는 룻기서를 읽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들어서면 초막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텐트 생활을 기억하고, 추수를 준비합니다. 다음주 토요일 부터 초막절에 들어가고, 이 기간동안 유대인들은 전도서를 1장부터 12장 까지 함께 봉독을 합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1.전도서는 어떤 책인지?
전도서의 1장 1절~11절 까지의 서론과 12장 8절 부터 끝까지 결론 그리고 사이에 있는 전도서 1장 12절~12장 7절 까지의 몸통?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론 결론은 3인칭, 본론은 1인칭으로 쓰여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물어보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수집한다는 뜻과,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집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 모은 지혜를 바탕으로 사람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중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살펴보고, 그리고 모아놓고 어떤 가르침, 지혜가 필요한지 말하는 사람이 전도자 입니다.
12~13절
살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전도서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이 됩니다. 먹고, 자고, 아이를 키우고, 재판을 하고, 불의를 행하는 것들 모든 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는 중 한 연설 가운데, 인간에게 캐 묻지 않는 삶은, 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도자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인간의 삶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삶의 가치에 대해서, 삶의 방향에 관해서 질문을 던져 보십니까?
-이 질문을 그리스도 안에서 던질때와 그리스도 바깥에서,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던질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전도서에서 삶을 보는 방식
전도서에는 삶을 2가지 날개로 본다. 한쪽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다. 다른 한쪽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본다.
1장 14절, 2장 1절, 11절, 16~17절, 2장 21~23절
헛됨에 대한 자각과 한탄은 1장과, 2장에 끝이지않고, 4~8장 그리고 마지막 11장과 12장에서도 계속 된다.
11장 8절, 12장 7~8절
계속 반복해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다를 계속 말하십니다. 헛되다는 말이 무슨 말일 까요? 20세기 인생이 허무하다는
허무주의자들이 하는 말과 같은 말일까요?
허무주의자들이 허무주의를 내세울때는,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궁극적 토대가 없는다는 뜻에서 출발을 합니다. 토대없이 아래를 쳐다보면 밑바닥이 없는 그런 존재가 인간의 존재다라는 의식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삶의 기준도 추구해야 할 목적도, 근거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스스로 목적과 근거, 삶의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철저히 인간이 주인이 되어 내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전도자도 똑같이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전도자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신뢰 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표, 바탕이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벨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말은 헤벨입니다. 이는 성경에보면 가인의 동생이 아벨인데, 아벨이라는 말이 수증기, 연기라는 뜻이다. 즉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더 어렵게 존재론 적으로 말하면 헛되다는 말은 알맹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손에 쥘 수가 없다는 것이고, 손에 쥐려고 하면 손에서 빠져 나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격을 우리의 삶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인고, 왜 이런일이 벌어지는지,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받는 일이 왜 일어나는가?를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헛됨을 분명하게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어디서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허무주의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헛되다고 보는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도서에는 삶이 헛되다고 보는것 말고도 다른 가치도 있습니다.
2장 24절, 3장11절, 3장 22절, 5장 18~19절, 9장 7~9절, 11장 9절
최소한 7번이나 반복해서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이 전도서 1장에서 12장 까지 계속 반복되는데, 이것을 하나의 날개로 보면 또 하나의 날개는 먹고 마시는 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병형 하는것, 나란히 있는 것이 전도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삶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를 카르페디엠이라 표현합니다. 그날그날을 즐거워 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속에는 주어진 한계에서 주어진 것을 기뻐하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2장 24절, 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주셔서 받은 것이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재산을 모으든, 지식을 쌓든 모든것들이 허망하게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렇게 할 수 있는것도 하나님이 주셔서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일이라 생각하고 하는것들이 결코 무익하진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먹는거,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일들을 보면 어느것도 나에게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온 것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유통구조로 오지 않았다면 그 전에 하나님이 빛과 비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내 주변에 만나는 친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생각들, 특히 학자들은 남이 쓴 책을 참고해서 생각을 확장해 나가는데, 이것이 없다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는 것들이 다 허망하게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는 의식을 하게 되면, 결코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인이구나 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게 되면...우리가 선물을 보게 되는 시선이 어떻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을 주면 자녀는 감사하다고 할것 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당연히 나올 것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바로 뒤따라 옵니다.
김양재 목사님이 늘 가르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고 합니다. 행복을 추구해서 행복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행복은 추구해서 얻어지는게 아니라,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거룩하게 살아간다면 행복은 필연적으로 뒤따라 올 수 밖에 없는 선물 입니다.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감사가 따라 옵니다. 그리고 기쁨이 따라 옵니다. 불행은 비교에서 따라 옵니다. 어디서든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부러워 할 수 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삶을 선물로 인식한다면 비교하지 않는 마음 자족하는 마음도 따라 옵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아이들이 선물을 받으면 그냥 창고에 두지 않습니다. 그를 가지고 놉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선용 해야 합니다. 바르게 사용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선물이라면 이를 가지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삶이 선물이 아닌 내가 확보한것, 쟁취한 것이라 생각하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결과인데, 이는 내가 추구한다고 얻는게 아니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선물로 받은 선물을 제대로 써야할 과제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어떤 방식의 삶이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선물로 선용하는것이 될까요?
-그냥 있어 주기만 해도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교회 전통을 보면 전도서를 보는 두 극단이 있었습니다.
하나 극단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4세기의 제롬이라는 분입니다.
제롬은 전도서의 핵심을 세상에 대한 멸시로 이해합니다. 철저하게 세상을 멸시 하는것, 그리고 이 세상에 하는 모든 일, 어떤 일이라도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 천년을 지배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우리의 일상의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찬예식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제롬보다 천년뒤에 마틴 루터가 한 강의를 보면 전도서의 가치는 이세상을 비관으로 보는게 아니라, 이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고 그를 기뻐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가 이야기한 토대로 보면 둘다 입니다. 루터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보는, 일상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는 것을 강조 할 수 있고, 그렇다고 제롬이 강조한 허망한 것으로 보는것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아까 제가 두 가치를 날개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몸통은 무엇일까?
12장 13~14절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알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며 누리며 사는것, 이 삶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웃을 사랑하고 그를 통해 나의 삶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는것, 그리고 거기서 오는 결과로서의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삶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누리는 이 삶도 허망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과거와 미래에 올 부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때, 자기를 완전히 부인할 때, 죽는 것만 아니라,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 날때, 그때 누릴 수 있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와 함께 나를 쳐서 죽일 때, 그리고 그를 통해 예수와 다시 살아날 때 부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묵상할 때, 우리의 삶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길 바랍니다.
기도제목
혜국 - 요즘 기도가 잘 안되는데 목원들을 위한 기도를 자주 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가 회복 되길 / 사람들을 잘 분별 할 수 있길 / 육신의 건강
세진 - 직장 붙회떨감 / 말씀으로 중심 잘 잡길, 상대를 배려한다고 휘둘리지 않기
두성 - 양육 첫모임에 양육 과제 못했는데 앞으로는 빠짐없이 해내고 양육 수료 할 수 있길
성도 - 양육 수료! / 퇴근후에 대학원 수업을 들어서 몸이 많이 지치는데 수업 빠지지 않기, 졸업 / 신교제, 신결혼
형주 - 양교하면서 말씀으로 성장 할 수 있길 / 자신의 모습을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