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주일예배
제목: 가을에 읽는 전도서
본문: 전도서 1:12-14, 3:11-13, 12:13-14
설교: 강영안 교수 (미국 칼빈신학교)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3: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1. 전도서는 어떤 책인가?
코헬렛이라는 말을 알고 읽는 게 중요합니다. 수집자이고 전도자이며, preacher라는 세 가지 뜻을 닮고 있습니다.
전도서 1:1-11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12:8-14절은 최종적 결론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키라고 합니다.
1:12-12:7은 전도서의 중심을 이루는 본문으로, 1인칭으로 되어 있어서 내가 이루어 보니, 내가 경험해보니, 내가 해보니입니다. 경험을 토대로 서술합니다.
1:12-6:9는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세히 서술합니다. 디스크립션합니다.
6:9이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지 삶의 교훈을 줍니다. 프리스크립션합니다.
전도선는 삶의 의미를 살핍니다.
철학자 중에 삶의 의미를 크게 살핀 소크라테스는 3가지 이유로 기소를 당했습니다. 아테네의 신을 섬기지 않은 무신론자이며,개인의 신을 도입했으며,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명목으로 시민재판을 받습니다.
첫 번째 재판에서 유죄를 받습니다.
두 번째 변론할 때, '나를 보낸 것은 아테네의 신이 시민을 깨우기 위해 보낸 것'이라며,당신들에게 동의하지 않고 물질에 찌든 삶의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게 하며, 그게 임무라고 했습니다.
검토해보지 않은 삶은 가치없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서양의 역사에 길게 영향을 줍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으로 묻습니다.
솔로몬 전도자는 인생을 생각하는 걸, 경험을 통해 관찰하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성주의자라면, 솔로몬은 관찰주의자입니다.
적용질문)
- 여러분은 삶의 의미, 가치, 방향에 관해서 질문을 던져 보십니까?
- 이 질문을 그리스도 안에서 던질 때와 바깥에서 던질 때와 상관없이 던질 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2. 전도서의 가르침의 한 축인 모든 것이 헛되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헛됨에 대한 자각과 한탄은 1장과 2장에만 그치지 않고, 4장 6장 7장 8장에서도 나오다가 11장과 12장에서도 나옵니다.
히브리어 벨 하발림, 벨 하발림, 콜 헤벨은 헛되고 헛되다는 뜻입니다. 헤벨과 하발림은 연기 안개라는 뜻으로, 연기 중에 안개이며 안개 중의 연기입니다. 일루션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컨트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가 우매함보다 낫지만,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며, 죽음이 같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다 같다고 합니다.
욥이 위로자가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학대받는 현실이며, 재판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뭘 좀 이해해보려 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 악인은 잘 살고 의인은 못 사는 것을 도무지 알 수 없어 헛되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알맹이가 있고 실체가 있는가 물어봐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죽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물어봅니다.
이런 강한 인식이 전도자가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관찰한 것이며, 그래서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합니다.
이것은 20세기에 나온 철학자들의 허무주의와는 다릅니다.
소극적 의미에서의 허무주의는, 우리의 존재가 어떤 목적도 없고 가치도 없으며 기초도 없다는 의미에서 nothing이라고 합니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허무주의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보면 소극적 허무주의는 무신론자이며, 적극적 허무주의는 우리가 의미의 창조주가 되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창작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규칙을 만들고 창작해내는 것이 근대의 허무주의입니다.
하지만 근대의 철학은 내 삶을 통치하는 통치자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가 나의 주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가 창조주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말하는 nothing은 이것과 다릅니다.
적용질문)
- 여러분은 삶의 헛됨을 분명하게 경험해보셨습니까? 그것을 어디서 경험했습니까?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허무주의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헛되다고 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3. 또 다른 한 축인 모든 것을 선물로 알고 사는 삶은 무엇인가?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전 2:22)'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
전도자는 이를 비롯해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슈하 즉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하고 수고하고 기뻐하는 삶을 즐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누리는 것, 주변에 있는 것, 먹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다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며 다 바깥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것들에는 모두 죽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소가 죽고 돼지가 죽고 자연이 죽었습니다. 죽음을 토대로 삶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이 가능한 건 당연한 게 아닙니다. 여러 노동과 유통과정을 통해 먹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수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차근차근 따져보면 우리 가족, 주변 사람들도 물론 키운 수고가 있지만, 모두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우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학자도 이전 학자들의 수고로 학문이 정립되고 책으로 적혀지며, 그것을 보고 또 책을 쓰고 발전한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바깥 세계를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며, 읽지 않으면 자기 생각 속에 갇힙니다.
내 삶은 내 손으로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하난미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선물을 받으면 보이는 태도는 감사입니다. 감사로부터 나오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결혼은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거룩이 목적이라고 행복을 배제하는 게 아니며, 행복은 거룩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대로 살면 거기서부터 행복이 옵니다.
깊은 감사의 자리에 설 때, 비로소 불행하지 않고 그 삶의 상황을 만족하게 받아들이고 고통 가운데서도 만족하고 자족하게 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평하고 비교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창공을 보고도 감사할 수 있다면 만족스럽고 행복할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이성이 있기에 비교한다고 했습니다. 짐승은 비교하지 않으며, 본능적으로만 지낸다고 했습니다. 남보다 비교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자족함을 해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게 됩니까?
받은 선물을 선용하게 됩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내가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공동체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은사가 될 수 있고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공동체의 삶의 방식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만이 아니라, 학자로서 직업인으로서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께 우러나와서 감사드려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에서부터 나오는 부수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전도서에 5번 나옵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이 세계의 삶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삶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러기에 이 땅에서 예수의 말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미래에 올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지금도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며 날마다 매달리는 삶이라는 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통해 예수와 함께 죽고 세례를 통해 예수와 함께 살아난다고 합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예수와 함께 살아나서 의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만약 구원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가치없는 것입니까?
구원이 감사해서 선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의의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제목>
동재형
- 주신 일 잘 하며 영육간 건강 잘 챙겨주시길
승혁
- 회사 업무와 양교 과제시간 지혜롭게 분배할 수 있도록, 양교 끝까지 수료할 수 있도록
- 신교제
상훈이형
- 가족과 예비신부의 영육간 회복과 안정 지켜주시길
- 가정의 화평 지켜주시길
시하
- 어머니 건강이 다시 회복되도록 지켜주시길
- 나와 내 가족, 여자친구 건강 모두 지켜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