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1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출애굽기 5:22-6:13
박재석 장로
할렐루야. 여러분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저는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요 설교를 건너 뛰고, 또 주일 설교에서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박재석 장로입니다. 출애굽기의 헬라어 제목이 엑소후도스 영어로는 엑소더스인데, 긴장되는 생애 첫 새벽 큐티 설교를 엑소더스하고, 또 2주간 터키로 엑소더스 출장을 다녀왔더니 신수가 훤하신 설교 배정하시는 목사님, 신스... 저를 애타게 찾으시는 겁니다. 왜 찾으셨겠습니까? 수요 설교에 서라고요. 그런데 인분이 쇠똥으로 감해진 것이 아니라 쇠똥이 인분으로 더해졌습니다. 주일 설교를 서라고 담임 목사님께 메일을 받았을 때는 정신이 정말 아득해지고 혼미해졌습니다. 오늘 집 나간 제 정신이 돌아오는 날입니다.
최근에 미국에 벤 클라이번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한 한국의 18살의 어린 피아니스트가 너무도 감동적인 연주로 지금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면서 클래식에 1도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제가 13년 전 우리 담임 목사님의 너무도 은혜로운 큐티 설교를 듣고 정말 눈이 휘둥그레져서 큐티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듣고 한 분이라도 큐티를 시작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한 분을 위해서 부족한 저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단 위에 세워주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진정한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면 우리는 큐티를 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 같아요. 오늘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 어떻게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찌하여 하며 부르짖더라도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22-23절)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 앞서서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자신을 따르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바로로부터 바로 무시와 거절을 당하죠. 거절을 당했을 뿐 아니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노역을 가중시키니 이젠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심히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모세가 이에 하나님께 탄원을 하는데 사실 탄원보다 주거니 받거니 논쟁에 가까워 보입니다. 모세는 지금 너무 힘든데 말씀을 읽는 저희는 이 말씀의 끝을 알기 때문에 너무 재밌는 거죠. 참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인생도 이와 똑같은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의 인생은 너무 힘들어서 너무 비극 같은데 그 끝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천국 가니까 얼마나 희극이시겠어요. 얼마나 재미있으실까요. 그런데 주님을 모르는 인생은 이 땅에서 너무도 희극처럼 보이자나요. 그런데 그 끝을 아시니 얼마나 비극이고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모세는 이 백성의 학대에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사실 4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모세에게 '바로가 완악해서 백성들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장 밀려오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전공 과목인 망각에 있어서는 모세가 예외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이 모세의 어찌하여 하며 부르짖는 부르짖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전 만세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사역을 계획하고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이 시기의 모세는 육적 고통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애굽 안의 고센 땅에 살게 하신 것도 구원하시는 것이고, 고통 속에 침묵하신 곳도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여정이었고, 지금 애굽에서 꺼내 주시는 것도 구원하시는 것인데 오늘 모세는 육적으로 꺼내 주시는 것에 더 많은 포커스를 두고 있기에 모세의 리더십 초기인 지금 그에게도 훈련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백성의 학대가 가중해짐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고 계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과 그들에게 남은 훈련도 있었겠지만 영적 지도자인 모세의 리더십 훈련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가 '아, 나의 훈련 때문에 백성들이 수고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천국에 가야 그 정답을 알겠지만 자는 모세의 리더십 초기에는 모세가 그런 생각 안 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의 리더십 훈련을 위해, 그리고 또한 마지막 이 출애굽의 전 과정이 애굽까지도 훈련하시어 끝까지 이방인까지 구원해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인내와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런 모세를 양육해 가시고, 설득해 가십니다.
저도 살면서 모세처럼 하나님께 정말 많이 어찌하여를 부르짖으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또, 모세처럼 사명을 받고서도 계속 하나님께 핑계 대고 징징 거리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재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약간 특이한 재혼 가정인데요. 어머니는 첫번째 결혼을 하셨는데 연달아 세 딸을 낳으셨고 그 시대에는 그것이 핍박의 사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갓 아이를 낳은 산모였던 어머니에게 시댁에서 밥도 안 해주고 계속 딸만 낳는다고 심하게 핍박해서 저희 어머니가 산후 우울증이 심해지시고 정신적으로 아프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첫번째 시어머니가 서울행 편도 기차표를 끊어서 아픈 사람 손에 쥐어주고 기차를 태워 버리셨다고 해요. 기차를 타고 가시다가 그냥 내리신 곳이 저의 고향, 지금의 아산입니다. 그 당시에는 온양 온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는데요. 웬 젊은 여자가 기차역에서 왔다 갔다 배회하니까 역무원이 신고해서 그날로 어머니는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 되셨는데요. 거기서 직원으로 일하시던 분이 바로 제 아버지셨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가정이 있으셨지만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데리고 병원에서 나와 살림을 차리셨는데 그 가정이 바로 저의 원가정의 시작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가정 들으시면 많이 불편하시죠. 더구나 명절인데 그 심정 제가 너무 이해합니다. 저의 간증에 불편하시다는 분들이 종종 있으셔서 제가 미리 사과와 양해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정신이 연약하셨고, 또 원치 않으셨던 재혼이었고,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원해서 만들어진 이상한 재혼 가정이었기에 저희 집은 태생부터 늘 불안정하고 불안했습니다. 재혼 가정은 근본적으로 늘 불안하고 불안정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한아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재혼 가정입니다. 이것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연한 성격적인 원리인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고, 다시 스스로 짝을 만든 거니까 불순종의 형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가정을 통해서 부모님은 6남매를 낳으셨고 제가 6남매 중 막내입니다. 어머니가 우울증이셨고 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큰 교통사고로 신경쇠약을 앓고 계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저도 그런 상향을 물려 받아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기쁜 감정도, 슬픈 감정도, 고통도, 불안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느끼는 강도가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주님을 몰랐고 그런 불안을 늘 스스로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고, 세심하게 점검하고, 완벽하게 해 놔야 안심이 되니 점점 강박적인 성향으로 변해갔습니다. 저희 둘째딸이 어릴 때 저와 성향이 너무 똑같아서 최근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더니 소아 우울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때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자나요, 병원에도 안 갔을뿐더러. 그래서 알았습니다. '아 내가 소아 우울증인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저는 이런 가정 환경이 전혀 이해되지 않아서 늘 '왜 이렇게 이상한 가족들이랑 살아야 하지?', '왜 우리집은 가난하지?', '왜 우리 부모님은 나이가 많고 못 배우셨지?', '왜, 왜?'하면서 늘 '어찌하여.'를 부르짖으며 살았습니다. '어찌하여.'가 '왜?'자나요. '제발 정상적인 가족들과 살고 싶다. 왜 우리 가족들은 다 이상하냐.' 이것이 저의 '어찌하여.'였습니다.
그런데 혼돈의 청년 시절을 지나고 돌이켜 보면 혼전임신과 낙태와 동성애, 마약 등 수도 없이 씻을 수 없이 많는 죄를 지은 제가 저희 가족 중에 가장 이상하고 가장 비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교회 와서 말씀이 들어오니 그제서야 저의 모습이 거울 속의 실루엣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그 실루엣이 점점 나의 모습으로 선명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족 중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적용] 예수를 믿고 사명을 위해 나아갔는데 더 학대를 당하게 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여전히 하나님께 어찌하여 하며 부르짖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쩌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일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2.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1-8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 6장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히브리 문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강력한 언약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교차 대구법이 뭐냐면 2절부터는 위에서 아래로, 8절부터는 아래에서 위로 말씀이 서로가 교차하면서 대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2절에 나는 여호와이니라, 8절에 나는 여호와라, 3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8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렇게 계속해서 대구를 이루는데 이런 대구법을 통해서 점층법적 구조가 오늘 7절 말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7절 말씀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자, 제목이자, 출애굽기의 목적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 전 구속사의 정점인 것입니다. 3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이지만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처럼 전능의 하나님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아는 데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로 알려져야 하고, 야다의 하나님, 즉 부부 관계처럼 벌거벗고 만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아무것도 없어도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갈 수 있다고 강조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도 때마다 시기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주님을 미처 알지 못하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때는 제가 주님을 잘 모르니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그림자를 비춰 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인생의 방황기를 지나고 감정적으로 주님을 만난 청년 시절에는 제가 주님을 만난 감격과 죽음과 같은 중독으로부터 빠져나온 그 감격이 너무도 커서인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오직 치유하시는 하나님만 알았지 언약의 약속과 사명에 대해서는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참 후에 우리들교회에 와서 구속사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언약의 하나님을 아는 단계로 나아갔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소아 우울증이었던 저는 늘 머리 속에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은 '사람은 왜 태어나는 거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지?', '인생은 왜 이렇게 허무하고 슬프지?', '이 슬픈 인생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지금으로 치면 유치원생 정도의 나이부터 뭐 거의 이런 정도의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고 일부는 우리 집의 가난에 대한 수치심과 내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교우 관계에 대한 고민도 일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늘 외롭고 곤고하고 힘들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예닐곱살 시절 어느 날 동네의 한 빌딩 옥상에 있는 아주 작은 교회의 전도사님을 통해서 주님이 제게 그림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전도사님은 저의 그런 내면의 슬픔을 보셨던 것 같아요. 너무도 따뜻하게 저를 교회로 인도해서 간식도 주시고, 찬양도 가르쳐 주시고, 그림도 가르쳐 주시고, 영어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영어가 지금으로 말하면 파닉스였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자나요. a는 '아.', b는 '비'. 그때 배운 영어로 제가 대학까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에게 공부에 대한 흥미를 알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는 시작이었어요. 갑자기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전도사님이 너무 보고싶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제가 초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결혼한 누나네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선호라는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고등학교는 전통 있는 사립 미션 스쿨로 배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주변에는 믿음 생활하는 친구들과만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방황이 시작될 때까지는 저는 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 있었는데 한참 나중에 깨달은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나, 작은 나이지만 만세 전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셨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저의 예배를 너무도 받기 원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어릴 때부터 쌓여온 우울과 분노가 폭발하고 심한 방황 후에 주님을 만났을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처럼 전능의 하나님으로 저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서울에 살던 큰 누나와 매형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가뜩이나 자존감이 낮은 제가 결혼한 누나의 집에 더부살이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도 누나에게 비교적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았고,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모세처럼 부유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고, 무뚝뚝했지만 때때로 매형이 늘 클래식 음악이 저에게는 매형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저희 매형이 신앙 교육을 해줬더라면 좋았을텐데 매형이 신앙 교육은 잘 해주시지는 않았고 맨날 클래식 음악만 들려주셨거든요. 근데 너무 신기한 게 제가 지금의, 그때 매형의 나이 정도 되니까 클래식 음악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애들한테 맨날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착한 모범생으로 살았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나에게 기대를 갖는 부모님과 시댁의 눈치 가운데서 나를 키워야 했던 큰 누나 때문이라도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제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방황이 시작됐는데 그때는 정말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도 같았습니다. 표현을 하자면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바람이 들어와 있는데 나 조차도 내가 어디로 갈 지 모르겠고 제어가 안되는 어떤 그런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 드러내 지을 수 있는 죄는 20대 때 정말 다 지어본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저는 독립을 하였고 많은 여자 친구들을 사귀면서 음란하게 살았습니다. 두 명의 여자친구를 동시에 만난 적도 있고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낙태를 종용하였습니다. 회개를 몰랐기에 낙태 후에는 알 수 없는 심한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끊임없는 자살 충동이 몰려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 압니다. 예수 십자가로 처리되지 않은 선함과 착함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무서운 잔인함과 파괴적이며 전위적인 성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의 호의를 몰랐기 때문에 사람의 호의와 친절함을 늘 갈구하며 살았고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남녀노소 대상에 상관없이, 간, 쓸개 할 것 없이 다 나눠주고 그러한 관계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대학교 때 단짝 친구와 인본주의의 끝판왕, 음란의 끝인 동성애까지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성애가 죄인 줄도 몰랐고 이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내 삶을 파괴할지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주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의 끝이는 항상 '나는 피해자야.'하며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는 감정, 자기애적 나르시시즘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다들 아시겠지만 동성애가 왜 무서운지 잠깐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동성애를 경험한 사람은 이것이 죄인지 알고 지었든, 모르고 지었든 심한 우울증을 경험하게 되고 자살 충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우울증입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종류가 다름이 있어요. 비단 저만이 느꼈던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엄격히 금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형벌이자 사단이 지옥으로 끌고가는 가장 진화된 형태의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인정하든 안 하든 무의식적으로 동성애를 경험하면 그것이 죄인 줄 영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몰려오게 되고 그것을 잊으려 기독교나 동성애에 반대하는 세력과 맞서서 치열하게 싸움을 싸우게 되는 거죠, 내가 옳음을 증명하면 죄책감이 사라지게 되는 줄 알고. 하지만 옳음을 증명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죄책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기 전까지는, 회개로 완전한 유턴 전까지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돌아오면 되지.'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돌아오기가 너무 힘듭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다시는 에덴 동산으로 못 돌아오듯이 말입니다. 그냥 불완전한 세계에 살게 될 뿐이죠. 시작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만일 단순한 호기심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동성애를 시작했거나 진행 중인 분이 계시다면, 혹시 자녀분이 동성애를 하고 있다면 빨리 공동체에 오픈하고 끊어내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혼전 임신과 낙태, 동성애까지, 거기에다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는 마약과 대마초에도 손을 대는 등 도대체 나란 존재는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모르는 지경인 완전한 애굽의 노예가 되어 그냥 삶을 포기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신음하던 그때, 6장 5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저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저를 만나주시는 기적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어떻게 만나는지 방법도 모르고, 큐티도 몰랐고,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로 집안에 갇혀 혼자 있던 제가 저도 모르게 나온 한마디 '주님 살려주세요.'하는 그 한마디에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드디어 방문해주시고 만나주시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 콧물이 흐르고 내가 범했던 죄와 잘못된 것들이 눈 앞에 화면처럼 지나가는데 난생 처음 깊은 회개의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니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고, 창밖에서 반짝이는 나뭇잎, 햇살조차도 나에게 인사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창조하셨다는 기쁨의 감격에 '아,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하는 기가 막힌 경험을 하였습니다. 개념적인 부활에서 실제적인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게 실제적인 부활을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요. 주님을 만나니 그동안 품었던 수많은 의문들과 질문들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계대 혼인법에 대해서 주님을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질문을 하자나요. '일곱 형제가 있는데 형이 죽고 아우 죽고 다 죽었는데 그럼 누구의 아내냐?', 뭐 아니면 부활에 대해서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냐?'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오해하였도다.' 하시자나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오해한 것들이 많았는지, 어리석은 질문들과 사실들을 믿고 살았는지 단번에 깨닫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저에게는 구속사적인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케하시고, 살려주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에 있는 큰 누나의 소개로 우리들교회를 알게 되었는데 인터넷으로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들었던 담임 목사님의 첫번째 설교는 정말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목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이라는 제목의 담임 목사님의 간증과 사부님의 소천과 구원의 내용이 담긴 설교에 너무도 놀랐고 '이건 진짜구나.'하는 생각에 마법에 홀리듯이 목사님의 설교를 다 듣고 그 주일 2009년 9월 21일에 바로 우리들교회 휘문 채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교회 홈페이지가 지금의 워드 프레스 방식이 아닌 옛날 방식의 홈페이지라서 목사님의 아주 옛날 설교부터 그 당시 최근 설교까지 다 담겨져 있었거든요. 정말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것을 다 들었습니다. 정말 듣고 싶어서 좀이 쑤셔서 못 참겠더라고요. 그 어떤 드라마 시리즈물이 이렇게 보고 싶고, 듣고 싶을까요? 그 어떤 것이 이렇게 재밌고, 슬프고, 감동적일까요? 없겠죠.부부의 세계, 스카이캐슬, 우영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전해주세요. 점심 시간 땡 하면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하고 PC방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거예요. 거기 뛰어 가서 목사님 설교 듣고, 퇴근 땡 하면 집에 와서 또 듣고. 그때는 스마트폰이 보급화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때 목동에 살았는데 회사는 영등포였는데, 영등포에서 목동까지 차로 10분이면 가거든요. 그런데 그 넘어오는 길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또 영등포에서 목동 그 구간이 딱 정체 구간이에요. 그럼 '차야, 제발 빨리 가라. 나 집에 가서 목사님 설교 들어야 된다.'하고 차들을 어르고 달랬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 헐레벌떡 뛰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밤을 꼴딱 새고, 다음날 출근해서 졸다가 점심 때 또 PC방 가서 듣고. 그렇게 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으면 일주일만에 다 들을 수 있습니다. 너무 충격이었고요. 말씀을 듣고 바로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런 말씀도 있구나.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듣다니.' 정말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하던 심정이 이랬을까요? 정말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진짜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맞습니다, 거룩한 행복이요, 거룩한 행복. 일주일을 그렇게 들었더니 얼굴이 거의 폐인이 돼서 우리들교회 첫날 왔는데 등록 사진이 정말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 제가 청년부 본부장으로, 그리고 또 엘더로 섬기고 있는데요. 우리들교회 청년부 정말 귀하거든요. 정말 우리 청년들은 정말 실제적인 구원, 인생의 목적을 정말 실제적인 영혼 구원에 놓고 가는 친구들이에요. 이런 청년들 제가 우리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보기 힘들 것 같아요. 그 순수한 청년의 나이에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섬긴다는 거, 저는 부끄럽지만 제 인생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청년들이 말씀을 잘 깨닫고, 또 순수해서 적용도 잘 하는지 정말 제가 존경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우리들교회 자부심 청년부에 소속되어 은혜의 일대일 양육과 양육교사를 마치고, 그때 양육을 받으며 정말 거의 매주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양육을 했던 것 같고 정말 그때 그 양육자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양육이 12주였던 것 같은데 12주 동안 제가 양육을 받으면서 매주 울었던 거 같아요. 지금도 눈물이 많거든요. 그런데 그 양육자님이 12주 동안 같이 울어줬어요. 그러니 제가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 기억이 나죠. 그리고 저의 오픈에도 따뜻하게 결혼할 때까지 저를 맡아 주시고 인도해주신 청년 목자님들, 장년부에 와서 만나게 된 모든 목자님들과 권찰님들 정말 얘기하자면 오늘 밤을 새며 얘기해도 다 못할 구원의 감격과 스토리들이 있습니다. 장년부에 와서 경험하는 목장은 정말 또 다른 신세계였습니다. 제가 짤막하게 그때 분위기를 말씀드리면, 일단 금요일 저녁에 목장을 하면 거의 새벽 한 시쯤 돼야 끝납니다. 그런데 느낌적으로 목장이 왜 그렇게 빨리 끝나는지 마치 한 시간 목장하고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 주가 아니라 일 년, 이 년, 수 년 동안 그렇게 같은 느낌이 그렇게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목장이 새벽 한 시에 끝나는데 끝나면서 속으로 '아니, 목장을 이렇게 빨리 끝내면 안 되지. 영혼 구원이 목적인데 이렇게 빨리 끝나면 돼?'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또, 목장을 했는데 주일 예배 끝나고 한 집사님 댁에 모여서 떡볶이, 라면을 끓여 먹고 거기서 2차 나눔을 한 적도 있습니다. 엊그제 목장을 했는데 또 모이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할 얘기들이 많은지 정말 수다쟁이들이에요. 그런데 그게 사모하지 않으면 그렇게 모이기가 힘든 것이거든요. 제가 요즘 그때 섬겨 주신 목자, 권찰님들의 영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많이 회개가 됩니다. 그리고 늘 마음의 고향 같고, 늘 그립고 그렇습니다. 안 믿는 누구가 묻더라고요. '아니, 젊음을 교회에 갈아 넣었는데 안 아까워?' 안 아까운 정도가 아니라 너무 고맙죠. 일찍부터 갈아 넣었어야 되는데 늦게 갈아 넣어 너무 원통하죠. 그 친구는 그걸 모르는 거죠, 어서 빨리 교회 와야 되는데. 그 과정들을 통해서 제가 비로소 언약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7절, 저를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말씀에도 있는 말씀인데 이 똑같은 구절이 바로 저와 권찰이 결혼식 하던 날 큐티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8장 10절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새 언약이기에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죄 많은 제가 비로소 공동체에서 담임 목사님의 주례와 공동체의 엄청난 축복 속에 신결혼 함으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기로 맹세하신 약속의 땅으로 드디어 건너와 이제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적용] 나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전능의 하나님입니까? 언약의 하나님입니까? 애굽의 노예로 살며 신음할 때에 나를 만나주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까?
3. 다시 말씀하심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9-11절)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 하나님의 뜻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서 당황하는 모세에게 연이어 하나님은 또 다시 말씀하시므로 바로에게 가기를 명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너무도 확고한 의지를 애굽 왕 바로에게 직접 나타내시려 함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선한 뜻을 사람들이 외면할지라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저의 인생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한 번 정하신 선한 뜻을, 저 조차도 외면한 저의 인생을 주님께서는 끝까지 붙드시고 사명자로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이렇게 공동체 장로라는 직분자로, 또 저는 굉장히 샤이하고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사업하는 CEO로, 게다가 또 저는 나가서 사람 만나는 것을 많이 즐겨하지 않거든요. 왜 그런 사람 있자나요. 나가서 사람 만나면 에너지를 뺏겨서 집에 올 때쯤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와 아내의 공통점이 있는데 저희는 일주일을 집에 있어도, 열흘을 집에 있어도 서로 전혀 안 심심해합니다. 성향이 둘 다 나가는 성향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제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업하고, 또 함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교회에 큐티인을 전하는 사명자가 될 줄은 저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인생의 각본에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던 것이죠. 주님의 시나리오에는 있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 해외에 현지 디아스포라 교회에 방문해서 큐티인을 전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들교회와 우리 담임 목사님을 모르는 분이 없는 거예요. 이제는 정말 강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우리들교회, 큐티인, 우리 담임 목사님이 맞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박수 한 번 쳐 주셔야죠. 담임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약속을 들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 그냥 돈이나 달라.'하며 고통 없이 영광만 구하는 것이 바로 신자, 불신자 구별 없이 우리 인간이 구하는 목표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보이는 기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노역에 혹독한 사람이 때로는 누구 말도 듣지 않고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마음이 상하고 노역의 혹독함이 깊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말씀이 들리는 데까지, 그리고 공동체를 만나는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돌아왔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 안 듣는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우리도 먼저 들리고 깨달아서 공동체의 직분자로 세워질 때 이렇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단 직분자가 아니더라도 말씀이 먼저 들린 자로써 말 안 듣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들린 말씀을 전해주면 그것이 곧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럴 때 나 또한 상한 마음과 가혹한 노역으로 사람의 말,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고 품으며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적용] 나는 혹시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까?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다시 말씀하여 반드시 성취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찌하여 하며 부르짖더라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심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꼭 만나시고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목장 모임 참석
미혜, 연수, 예선, 우정, 민희
기도제목
아버지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재취업 할 수 있기를 주님이 인도해 주세요.
남동생이 최종합격 하도록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발령 속히 가능하도록 최적의 자리로 인도해 주세요
여동생이 새로운 직장에서 잘 적응하고 주일예배를 성수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환청증세가 있다고 해서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는 힘마저 사라지지 않도록. 새 힘주시고 능력의 말씀 안에 거하도록. 말씀이 나를 붙들고 순간순간 일어날 수 있도록.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만나기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도록. 매일 주시는 말씀 안에서 평강을 누리도록
미혜
어찌하여 어찌하여 왜... 할지라도 매순간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일상을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아빠가 고된 노동에 스트레스로 화를 많이 내어 엄마가 힘들어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확인하려는 아빠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빠를 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언니(혜진언니)가 코로나 이후 면역력이 더 약해져서 체력회복이 안되고 작은 질환들이 몸의 여기저기서 생기고 있는데 언니의 건강을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고 면역력을 증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 목장 식구들 어찌하여 왜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해주시기를
예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도록
내 옳고 그름으로 이상하다고 외치며 가는 것이 많은데 수준 낮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때마다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목장에 붙어가며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다음주에 아시아 지역 매니저가 온다고 합니다.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수치를 잘 감당하고 지나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