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주일설교
사도행전 26장 8-18절
성령의 권한
권한이 클수록 권한의 경계를 지키기가 너무 힘들다.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왕으로 유대인의 사정을 너무 잘 알지만 왕이 되니 로마의 편에 서게 된다. 내 사정을 너무 잘 아는 가족들이지만 남의 편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편에 서 있는 그들에게 성령의 약속을 받은 내가 성령의 권한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오늘 설교에 권한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 사도행전 26장 8절
사두개인과 달리 바리세인은 부활을 믿는다. 그러나 그 부활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었다. 실재 중의 실재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부활을 머릿속으로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내 주변의 사람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절대 용서못할 부모가 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다.
여기다 -크리노 - 판단하다, 정죄하다, 비난하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을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비난하고 헐뜯고 있다. 수많은 간증을 들었음에도 믿지를 못한다. 자기 환경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으니 그냥 무시하고 만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기복에서 팔복으로 변하여질 때 이 땅에서도 맛볼 수 있는 부활의 모습이다. 이것이 무중력 상태이다. 팔복의 가치관이 되면 나는 움직일 수가 없는데도 걸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각자의 분량에 맞는 부활을 경험케 된다. 그리고 완전한 부활을 향해 계속 나아가게 된다. 내가 기도했는데 부활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팔복의 가치관이 들어오면 성령의 권한이 생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죽은 자임이 깨달아야 져야 한다. 죽은 척 해서는 안 된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면 아직 내가 완전히 죽어지지 않은 것이다. 부활이 믿어지면 나같은 죄인을 살리셨으니 저러한 사람도 살리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 생기게 된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사건이다. 부활을 맛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듣든지 안 듣든지, 욕을 먹든지 나의 영원한 본향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된다.
부활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지 말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부활이 개념으로 믿어집니까 실재로 믿어집니까?
저 사람은, 저 가정은 절대 변하지 않아 하며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로 인해 내가 죽은 자임이 인정이 되십니까?
- '나도 그랬다'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힐난하려고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더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 사도행전 26장 9절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 사도행전 26장 10절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 사도행전 26장 11절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사도행전 26장 12절
사도행전 22장 26장은 바울이 직접 설교한 본문이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삶의 스토리가 3번이 반복되어 간증된다. 바울의 간증이 똑같이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수치과 죄고백의 간증은 그 사람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힘이 있다. 나도 예수를 대적하던 사람이었다는 바울의 간증은 우리 모두 예수 믿기 전에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예수의 대적자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고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고 심히 겪분하여 그들을 박해했다고 고백한다. 즉 예수님의 대적자였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게 받은 권한으로 예수님을 박해하고 대적했다. 바울은 자신이 대제사장의 종이었고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발로 뛰었다. 자신도 자신의 상전처럼 되고자 열심을 내었다. 이렇게 악하게 세상의 권한을 휘두르며 인간으로서의 월권을 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고백한다.
우리도 가족을 생각해서 한다는 일이, 내가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한 일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박해하고 대적하는 일이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바울은 과거 자신이 행한 죄들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인간이 스스로 하는 생각은 온전할 수 없다. 학벌이 있고 박사여도 어림도 없다. 밑바닥 인생을 겪어본 사람이 훨씬 영적인 지식이 있다. 내 스스로 생각한 그 일이 결국 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선함을 품고 하는데 겉으로 하는 일은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이 이단들이 하는 일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전혀 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풀었다. 육체로 말미암을 사람들이 하는 일이 모두 이렇다. 옳고그름을 논하나 옳고그름을 전혀 모른다. 육체로 난 자는 권한이 주어지면 박해하는 데 사용한다. 인간을 악하고 음란하며 한 사람도 선한 자가 없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내 자아와 내 생각이 무너져야만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내 자아가 예수의 대적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애와 자기열심 그것이 예수님의 가장 큰 적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십자가와 원수가 된다. 이런 자가 많은 일을 행할 수록 많이 죽이고 많이 핍박하게 된다. 그러니 제발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에 잘 묻고 순종해야 한다.
큰 권세가 있을수록 더욱 깨닫지를 못한다. 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렇다고 말하며 열심히 박해를 한다. 그것이 예수를 대적하는 일임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에코이스트는 주목 받는 것을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최고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나 에코이스트는 나르시시즘을 자석처럼 끌어들인다. 나르시스트는 소시오패스만큼 위험한 존재다. 에코이스트나 나르시시트나 결국 똑같다. 부활이 안 믿어지기는 둘 다 똑같다. 에코이스트가 예수 믿기가 사실 더 힘들다. 정말 둘 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대안이 없다. 서로를 서로를 죽일 뿐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대적은 조금씩 쫓아내신다고 하셨다. 매일 공동체에 나누며 말씀보고 살아내는 것이 최고의 적용이다.
내 권한이라 여기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영육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도 그랬다'며 이번 명절에 내 간증을 준비하고 있나요?
나는 자기애성 나르시시스트입니까? 남만 생각하는 에코이스트입니까?
실력이 없고 부활이 개념으로만 믿어지면.. 그냥 '나도 그래' 라고만 말해라.
내 힘으로는 내가 회칠한 무덤임을 깨달을 수 없다. 다 누군가의 수고가 있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내 자아가 죽어지지 않으면 내가 높아질수록 간증을 하기가 어렵다.
- 나의 피흘림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 사도행전 26장 13절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 사도행전 26장 14절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사도행전 26장 15절
모든 유대인들에게 말하던 바울은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한다. 바울은 밝은 빛을 보게 된 일이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이었음을 밝힌다. 9절과 달리 15절에서는 나사렛을 뺀다. 때에 따라 맥락에 따라 이처럼 바울은 눈높이를 맞춘다. 아그립바가 나사렛을 무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를 박해하던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광채에 엎드러진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앞의 두 번의 간증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말씀이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다. 그러니 히브리어로 말씀하신다. 바울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신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는 말씀은 그 당이 농경문화이던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소가 밭을 갈 때 반항하며 뒷발질을 할 수록 소가 더 심하게 가시채에 찔리게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예수님은 바울의 열심이 결국은 바울 자신을 핍박하는 것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알려주신다. 예수님은 바울 한 사람의 마음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핍박하며 피흘리는 바울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은 너무도 불쌍히 여기시며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스스로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아픔이 그분의 아픔인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아그립바에게 하고싶은 말을 자기 간증으로 전하고 있다. 아무도 알지 못해도 아그립바의 마음 속에 커다란 가시채가 있음을 알고 있다고, 이제 그만 스스로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핍박을 멈추고 예수께로 돌아오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아파할수록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얘기를 자신의 삶의 간증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를 박해하고 상처입고 피흘릴 때 예수님도 함께 아파하고 피흘리고 계신다. 그러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해주신다. 가시채인 줄을 알면서도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계속 뒷발질을 한다..
바울의 이 마지막 간증은 뭔가 다르다. 가시채 얘기가 나온다. 자신의 진면목을 더욱 직면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내가 저랬겠구나.. 주님이 얼마나 나 때문에 힘드셨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핍박을 잘 받아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주님이 나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의 삶 속에 커다란 가시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른다. 그러니 바울이 피눈물이 나는 것이다.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바울이 팔복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다. 오직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것이었다. 그러니 정죄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성경이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가시채에 찔려 고생하는 우리를 위해서다.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제 가시채를 벗어버리고 성령의 권한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나도 똑같았다고 간증하고 용서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은 내게 가장 밝은 빛이십니까?
더 밝게 여기는 빛이 있습니까?
내 삶에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아픔, 나를 계속해서 찌르는 가시채는 무엇입니까?
내가 스스로 정죄하고 비난하며 자해하는 것이 예수를 박해하는 것임을 아십니까?
그 가시채로 인해 내 삶을 돌이켜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가시채 욕만 하고 있지 말고 이제 돌이켜야 한다.
바울이 엎드러지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운드가 아닌 보이스로 들린 것처럼.. 내가 엎드러지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권한이 생긴다. 날마나 말씀붙잡고 깨닫고 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말씀이 들리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성령의 권한이다.
환경이 아니다. 결국 내 자기애, 자기열심 때문에 인생이 힘든 것이다. 가시채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내가 돌이키면 나도 그랬다의 간증으로 사람 살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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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
승민: 학교 잘 다닐 수 있도록.
한결: 프로젝트 마무리하는 게 너무 어렵고 두려운데 가시채에 그만 찔리고 자유함과 기쁨으로 하루하루 살아낼 수 있도록. 학교 즐겁게 다닐 수 있도록.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수 있도록.
승준: 잘 쉬고 잘 놀고 잘 회개하기. 진로 결정에 있어서 많이 물을 수 있도록. 제주도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