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28. '성령의 약속' (행 26:1-7) 김양재 담임목사님
한주 동안 성령의 위엄으로 잘 사셨는가? 아니면 세상의 위엄으로 꺼떡대셨는가?
성령의 상소할 때 너무 위축되니 위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본향, 천국백성의 확신이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약속을 받아 누려야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잘 살수 있다.
오늘은 성령의 약속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성령의 약속은
1.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1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세상의 위엄을 잔뜩 갖춘 아그립바 왕이 저마다 위엄을 갖추고 잔뜩 치장하고 나온 높은 사람들을 거느리고서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내게 허락하노라 하며 큰 호의를 베푸는 듯한 여유를 부리면서 바울에게 말하라고 명한다.
바울은 변명에 앞서 손을 든다. 특히 손을 들면서 변명한다. 바울은 늘 사과하는 듯한 태도로 복음을 전한다.
손을 드는 행위는 당시 연설가들의 특징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에 쓰이는 들다라는 단어가 에크테이노이다. 이 단어가 연설가의 손동작으로 쓰인 경우는 없다. 그런데 이 접견장소에서 조사를 받는 입장에서 바울이 눈치도 없이 그 연설가의 멋들어진 동작을 했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그러면 왕을 향한 경의의 표현일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봐야 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거의 예수님에게만 쓰였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손을 내밀어 고치실 때 이 단어로 표현했다 (마8장, 12장). 행 4:30에서도 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라고 기도했다. 즉, 자기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모본을 따라서 사역하기 원한다는 결단의 표현이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표시로 손을 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닌 사람에게 쓰인 것은 두 곳이다. 이 곳과 요 22:18 이다. 주님이 베드로의 앞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라고, 네가 십자가 지고 이 사도의길을 걸어갈거라고 할 때 쓰인 단어가 이 에크테이노 이다. 이것은 주님의 힘을 의지하겠다는 표시이다.
따라서 바울이 변명을 시작하며 손을 든 것은 습관적인 제스쳐나 경의의 표현이 아니다. 지금이 중요하지만, 불편한 순간, 위기의 순간, 괴롭힘이 반복되는 이 지겨운 순간에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능력을 의지한다는 기도의 표시이다. 세상 위엄이 아니라 성령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다.
아무리 지적인 사람도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빠지면 감정에 앞선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잠시 후를 생각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반응을 한다. 사고를 치는 것이다. 아무리 지적이라도 5초, 10초를 못 참는다. 그러나 사고를 쳤을 때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그나마 조심한다. 잃기 싫은 것 때문에 내일도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성도는 어떤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소유와 재물만으도 내일을 걱정하는데, 천국을 보장받는 성도는 더욱 더 내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잃을까 두려워서 내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장된 것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당하는 크고 작은 일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 위엄으로 가득 찬 접견장소에서 당황하고 위축되고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 수 있었다.
우리도 어떤 일을 당할 때 무릎 반사처럼 자동적으로 나오는 이 감정에 휩싸여 반응하는데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거기서 손들고 나와야 한다. 내 감정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손을 들고 부르짖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성령의 약속을 받은 사람의 징표이다. 큰소리로 안내도 된다.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주여 도와주세요 하면 된다.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손을 드는 행위는 말씀을 펴는 것이다. 성경책 가지고 아무데나 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매일 함께 정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날 상황을 그 말씀으로 비춰 해석하며 주여 하는 것이다. 그 묵상 자체가 주님께 손을 드는 것이고 그 말씀대로 기도하는 것이 모든 적용의 시작이고 그 기도를 주님께서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어제는 배상을 하라 그러셨다. 오늘은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재판장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오늘 수간하지 말라고도 한다. 수간이 얼마나 더러운가? 그러나 이것이 창세기 출애굽기에 있다. 인간이 너무 악하다. 가난해서 먹고 살 것이 없을 때는 성범죄가 없다. 그러나 조금 먹고 살만 하면 그렇다. 유럽에서는 수간을 합법화 해달라고 한다. 동성애를 허용해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수간을 허용해달라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잘살게 해줄수록 죄악이 관용되고 그 죄악을 차별이라 하며 허용해달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말씀에 나왔다. 그러면 이엇을 묵상하고 손을 높이들고 말씀대로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잘살게 되면 돈이 조금 생기면 쾌락을 법제화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악이다. 차별금지법, 속으면 안된다.
적용) 분노조절장애, 우울증, 전두엽 등 각종 병명 뒤에 숨어서, 거기에 묶인 채로 감정의 노예로 살 것인가요? 거기서 손들고 나와서 큐티하고 나누며 치료받을 것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어떤 나눔을 봤다.
저는 제 아들을 하루도 아들을 키우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집에서 나와서 별거했다. 말도 안되지만 그때는 내 감정만 중요해서 처와 싸우고 불편한 환경이 싫어서 나와서 헤어졌다. 그런데 우리들교회 와서 교회 권면으로 아들을 보려고 소송하고 있는데 아들이 벌써 10살이다. 아들은 10년동안 아버지 없이 컸다. 그런데 목사님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구원 향해 나가라는 말씀 때문에 아들에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내가 잘못했다' 하고 마음을 전하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제가 36살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예수님의 대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내 아들은 좀 일찍 예수님을 믿어 나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난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적으로 산다. 내가 왕노릇 하는 것이 사단의 종 노릇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안하고 육아도 안한다 한다. 그래서 반려견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반려견 키우다 보니 수간 이야기도 하는 것이다.
내 감정이 왕노릇 하여 아들을 버린다. 불편하고 싫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이 분도 의사이고 잘났기에 내 감정이 중요해서 아들을 버린다. 죄의식이 하나도 없다. 이 땅에 어떤 사람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죄의식이 없어서 이혼도 마음대로 하고 아들도 마음대로 버린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 내 감정이 왕 노릇 하면서 자기 아들을 버렸지만 지금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정죄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성령의 약속 두번째는
2. 어떤 일도 다행히 복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2-3절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그립바 왕을 향한 바울의 변명 첫 마디는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 이다. 다행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운 좋게 여기다, 행운이다 이런 뜻일까?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변명하게 된 일이 행운이라는 것일까?
다행이라고 번역한 것은 마카리우스, 즉, 복되다 이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바울은 지금 자신을 복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와야 한다. 복있는 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팔복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
지겹게 반복되는 심문과 조사의 자리에서 다시 선 바울은 왜 자신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었을까? 마5:10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는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지겨운 괴롭힘이 반복되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써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주님 때문에 박해 받는 자에게 천국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그 약속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이 약속을 받은 인생 자체가 복된 인생임을 알면 어떤 일을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그것을 다행히 여길 수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불행한 일인데 성령의 약속을 받은 성도의 관점에서는 그 모든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이다.
왜 복이 있는가? 바울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할 전도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행9:15에 언급된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전하리라는 말씀을 이루는 일이고, 말씀을이루는 일이기 때문에 붙어도 떨어져도 오늘 말씀대로 나가서 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행이라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오늘 말씀대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나가서 이것을 이야기 하니 다행이고 복이 있다는 말이다. 말씀대로만 이야기하면 복이 있는 인생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이후 로마로 이송되기 전까지 모두 5번의 변론을 한다. 이번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는 변론이 5번째인데, 가장 길고 상세하고 논리적이다. 다른 변론보다 더 신중하고 문법도 더 고전적이고 문체도 더 문학적이다. 그러면서도 내용은 좀 더 간결하고 직설적이고 연설문으로는 훨씬 유창하고 예절이 갖춰졌다 할 수 있다.
바울은 이전에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무리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이전과 다르다. 특히나 이번 변론을 듣는 청중들은 바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가이사랴 최상류 계층이었다. 바울 앞에는 유대 종교에 정통한 아그립바 왕이 서 있었다. 천부장 총독 분봉왕 로마황제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황제에게 이미 상소한 상태였지만 아그립바가 말을 해보라고 변론의 기회를 줄 때 거절하지 않았다. 아그립바가 바울의 말을 들어줄까 싶어서일까?
아니다. 아그립바가 친로마적이고 부도덕하고 악한 왕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변론에 귀를 기울여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아그립바 왕이 결코 법정에 앉아서 남을 판단할 만큼 윤리적이거나 공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오늘 출애굽기 말씀처럼 재판장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고 한다. 악한 사람을 돌이킬 은사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아그립바에게 결코 무리하지도 배타적이지도 않고 친절하게 자신의 지나온 행적과 신앙을 변명한다. 어제의 원수라고 계속 원수처럼 대하면 안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그렇다. 구원이 오직 목적인 사람은 항상 해야 할 말과 안해야 할 말과 태도를 잘 안다.
바울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지도급 인사가 다 모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함이었다. 지금까지는 산과 바다를 넘어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 매진했다. 그러나 복음이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자들도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없을 이 기회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목적이다. 다섯번을 전하는데 아무도 안 믿었다. 변론을 아무도 안 믿었다. 그래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했다.
그것을 왜 전하나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2000년 동안 기록으로 남아서 우리가 믿는다. 바울의 모든 변론이 기록으로 남았다. 그래서 우리가 믿었다. 그 당시 부자들은 안 믿었어도 후세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유대 풍속과 문제 전문가인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은 다행이다, 복으로 여긴다 하면서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란다고 한다.
너그러이 라는 말은 신약에서 여기서만 쓰인다. 그것은 인내하며 견뎌야 할 일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잘 참고 들으라는 말이다. 힘든 일을 너그럽게 잘 당하라는 말이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아그립바 왕에게 자기 말을 인내하며 들으라고 요청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교해보겠다. 24장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면서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했다. 여기서 관용하여 라는 말은 너그러운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뜻이다. 들어주는 그 호의에 대한 조건으로 대강 여쭌다고 하는 말은 짧게 말씀드릴 테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어달라고 하는 부탁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짧게 말씀드리라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이 길고 듣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서 잘 들어주시라고 요청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지금 이 자리는 엘리트가 모인 장소이고 상식이 넘치는 장소이다. 여기서 왕이 한번 이야기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뒤집지 못한다. 그런데 적대적인 무리 앞에서 내 말을 인내하며 끝까지 들어달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니 때에 따라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여기는 들어줄만 하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체도 고전적이고 아카데믹 하게 하면서도 간결하게 한 것이다.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아그립바 왕이 유대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알아서 오는 유익이 무엇이냐면, 그래도 바울이 전하는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뜻도 된다.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변명은 자기 무죄를 밝히는 피고의 변론이나 변호가 아니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자기 간증에서 시작해서 아그립바를 비롯한 거기에 있는 모든 높은 사람들이 다 예수 믿기를 권유하는 전도로 끝이나는 복음의 변론 성령의 말함인 것이다. 바울이 성령의 위엄을 받았기에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다.
바울이 성령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이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복있는 사람임을 아니까 위축되지 않고 이 부담스러운 일도 다양한 일로 여기며 전도의 사명을 감당한다. 마지막 종착지가 전도의 사명이다. 마지막 종착지가 가족의 안녕이 아니다. 가족의 안녕도 결국 전도의 사명을 위해 때에 따라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도 다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적용) 지겹고 무서운 환경에서도 나는 복 있는 사람인가요? 그래서 '내 말을 인내하며 너그러이 들어보라' 며 어떤 만남과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고 있습니까?
이것이 성령의 약속을 주시는 이유이다.
전도할 때 차별없이 전하며 상대방의 눈높이와 정서, 상황에 맞게 다가갑니까?
바울처럼 전도하다가 너무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은 이것을 잘 안다.
나눔
'내 인생의 가장 억울하고 힘들었던 일은 역시 감옥에 갇힌 사건이었다. 억울한 것은,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겨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감옥행이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욕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거기 들어가보니 별별 죄목이 다 있었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지 살아나려고 다들 1심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는 그 상황에서 항소를 포기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있었다면, 어떻게 보면 총에 맞아-눈총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감옥에 보낸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아니면 내가 분노로 내가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둬둔 것 같다. 오늘 바울처럼 그렇게 가둬두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교회서 이런 일이 일어나니 너무 억울한데 참을 수 없어 혈압이 200이상 올라가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 내가 옥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분명히 사고를 쳤을 것 같다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봐야 성령의 약속을 생각하며 내 사건이 너무나 다행이고 복으로 생각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는다.
우리는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급한 상황에서 기도한다. 그러면 그것을 복으로 여기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면 복으로 여기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려고 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인생이 짧기에 힘든 배우자 만나고 힘든 자녀 장애우 식구로 몰아준 것은 짧은 인생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컨셉이다. 이것 때문에 주님을 만나면 그것이 비교가 안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나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다. 인생이 복 있는 인생이다. 우리가 급할 때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언제나 창조주이신 주님을 매번 불러낼 수 있다.
성령의 약속은
3. 기복의 약속이 아닌 팔복의 약속입니다.
4-7절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어린시절에 예루살렘에서 유학해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는데, 최고의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에게 배웠다. 어릴 때부터 그를 알았던 친구들이 있다고 한다. 즉 동창과 동문도 있다. 게다가 바울은 우등생이다. 그리고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한다 (갈 1:14).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해 더욱 열심이 있었다.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 이라고도 했다 (빌3).
자신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얼마나 엘리트 유대인이었겠는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적을 지경이다. 얼마나 일류 바리새인인지 증언할 유대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바리새파 중에서도 가장 엄한 파이고 다른 종파를 능가하는 꼼꼼하고 엄격한 해석을 하고 적용도 가장 철저하다고 한다. 그러니 유대교와 관련해서는 바울의 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믿기 전 까지 평생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한, 평생 바리새인 그 자체로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대인 중 유대인인 그가 고소를 당해서 몇 년을 감옥에서 피고로 살고 있는지, 왜 황제에게 상소를 하고도 내가 재차 심문을 받는 자리에 서 있는지에 대해 바울은 스스로 답한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바울 개인에게 약속하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에게, 따라서 그들에게 태어난 모든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기에, 그 약속하신 것에 소망을 두고 있기에 같은 유대인인 아그립바와 높은 분들 앞에서서 심문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 본문에서 베스도가 죄목도 없이 무리한 일로 바울을 보낸다고 한다. 바울이 말하는 이 내용도 사실 참 무리한 일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때부터 백성에게 주신 것이기에, 바울이나 다른 유대인들은 똑같이 약속 받은 백성이고 이스라엘 12지파 전체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소망한다. 똑같다.
그러나 똑같이 간절히 섬기던 그들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바울 대 유대인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겉으로는 똑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백성인데, 한쪽이 다른 쪽을, 그것도 여럿이 한 사람을, 그것도 유대인이 이방인인 로마 황제에게 고소하는 이런 무리한 일이 일어났다. 이해가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바울도 로마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냐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2년동안 참고 또 참았다.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복음을 위해서 로마시민권을 썼다.
그러면 이해가 안되는 이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바울과 이 사람들의 차이가 뭘까?
바울은 성령의 약속이 나사렛 예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지만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믿지 않는다. 왜 안믿을까?
하나님이 자기 조상과 약속하신 그 약속이 무엇일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것 처럼, 학대받는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니 여기의 약속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약속은 기복이기에 출애굽을 했는데도 모세를 계속 비난한다. 왜 애굽에 두어 고기 먹게 하지 데리고 나왔냐 한다. 끊임없이 기복으로 간다. 온 족속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하니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이스라엘이 부강한 나라가 되고 온세상을 다스리고 거기서도 유대인은 군림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먹고 잘 사는 기복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약속이 인간적으로 아무 볼품없는 나사렛 출신의 청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믿겨지겠는가? 기복의 약속을 바라고 있기에 성령의 약속을 이루실, 죽었다 살아날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 우리도 예수 잘 믿어서 이왕이면 부자되고 공부 잘하고 사법 입법 행정부의 최고의 자리에 가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그러니 망해서 끔찍한 사람이 잘믿는다, 그 사람이 구세주라고 하면 믿고 싶지 않다. 여기서 간증할 때 마다 너무 싫어 하는 것이다. 살인자 고재봉이 지존파가 믿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믿으니 나는 안 믿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간증을 자꾸 비하한다.
생각해보라. 그 당시 예수님이 나라가 정하는 법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그러니 누가 믿고 싶겠는가? 가장 최악의 극형에 처한 청년 예수가 구세주라 하니 누가 믿고 싶겠는가?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가 간증 해서 너무 힘든 이야기하면 나는 저렇게 믿고 싶지 않다, 너무 이상해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 상관이 없다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똑같다 왕복 입고 왕과 왕비 되는 것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바울 또한 그들과 같이 열심으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똑같이 받들어 섬겼다. 기복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기복의 가치관에 가득해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열심으로 내가 최고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를 잔멸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이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하던 나사렛 예수가 구세주 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좋은 공동체를 만나 양육도 받았고 광야에서 주님과 독대하며 훈련받았다. 그리고 자기 죄가 얼마나 큰 줄 알았기에 기복이라는 말 조차 바울은 올릴 수 없었다. 자기가 죄인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알아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따라 복음을 전했다.
기복적 관점으로 볼때는 참 박복한 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길을 기꺼이 따라갔다. 그리고 2년째 감금된 피고로 선 자신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간증한다. 복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기복에서 팔복으로 바뀌었다. 인생의 가치가 율법에서 복음으로, 세속사에서 구속사로 바뀌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이 나사렛 예수이심을 주님을 만난 이후 알게 되었다.
우리들교회 특징은 처음에 와서 다 말씀이 안들린다고 하는 것이다. 제 설교 듣고 정착하지 않는다. 목장에서 해석해줘서, 목장에서 앞서간 증인들이 아끼지 않고 해석해서 다 사람 만들어 놓는다. 제 설교는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방언하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죄인지도 모르고 저에게 그렇게 욕을 한다. 함부로 욕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목장에서 마음대로 한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오래 산다. 그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런 설교가 말이 안된다. 대단한 사람이 구세주지 어떻게 목수의 아들이 구세주야? 한다.
바울이 성령의 약속을 붙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지겹게 반복되는 심문자리에 또 서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위엄 있게 간증할 수 있는가? 그저 억울하고 힘겹고 지겨워서 하고싶은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또 심문받는 그 상황에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심문을 받는지 따지지 않는다. 바울은 오직 주님이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것에 소망을 두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바랄 수 있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약속임을 믿었다.
저도 말씀묵상 가정중수, 거기에만 소망을 두었다.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또 이 말씀묵상이 살 길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바랄 수 있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약속임을 믿었다. 내가 오늘 큐티로 하루를 살면 그것이 약속이다. 그것이 최고이다. 그것은 내가 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약속은 기복이 아니라 팔복의 약속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이 권능이 무엇을 위한 권능인가? 지도자 권력자 왕이 되는 권능인가? 아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 전하는 증인이다.
증인이라는 말은 마르티스, 순교자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당하는 핍박의 결과 중가장 마지막이 순교이다. 이 핍박이 얼마나 당연한 것이었으면 증인은 곧 순교자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가 되었겠는가?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순교자이다. 똑똑할수록 예수님의 대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이 죽음에 이를 만큼 핍박받는 것도 무리할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핍박을 받는 만큼 세상의 악과 음란이 드러난다.
결국 성령의 약속대로 받는 모든 권능은 오직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주신 권능이다. 넒고 편한 길을 가라는 뜻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을 가라는 뜻이다. 그러려면 세상에서 오해 미움 핍박을 받아 순교자와 같은 처지에 놓이더라도 이상히 여기며 원망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신학교 가고 망하면 신학교 가고 망하면 선교사 간다. 그런데 제가 망하지 않고 큐티 모임을 했다. 그런데 큐티모임을 우리집에서 했다. 하면 할수록 내 신앙 인격과 우리집 사람이 다 드러난다. 먹고 살 것이 있는데 그것이 쉽겠는가?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약속의 소명이 아니면 올 수 없는 길을 온 것이다. 제가 망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복이 아닌 팔복을 쫓아가는 삶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향하는 삶이다. 멸망이 아닌 구원으로 향하는 삶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도저히 따라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이번 사도행전 설교가 길다. 사도행전 설교가 끝나기 전에 성령을 꼭 받으셔야 한다. 사도행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령을 못 받으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을 받으려면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임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려면 예루살렘 같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꼭 붙어서 기다려야 한다. 공동체가 아주 중요하다.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해야 하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말씀 묵상으로 인도함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사소한 것은 잘 묻다가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안묻는 분들이 있다. 시시한 것들만 묻는다. 내가 빛나는 것만 묻는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으면 성령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을 안 받으면 예수님과 3년을 같이 다녀도 제자들이 사도역할을 못한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 행전이라 하지 않고 사도행전이라 했다.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
2022년도 2/3가 지나고 4달 남았다. 남은 넉달을 매너리즘이나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예배를 사수하시고 목장에 참석하시고 매일 큐티하시라. 이것이 어려우면 듣기라고 하시고 본문에서의 단어 하나만이라도 기억해서 기도하시라. 하나님과 아침에 동행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는 적용이다. 성령의 약속을 구하며 주를 향해 손을 드는 것이다. 그 손을 성령님께서 꼭 잡으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실 줄 믿는다.
적용) 전자동으로 기복적으로 구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팔복의 복으로 증인 되어 순교자의 길 십자가 지는 적용을 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한마디로 오늘 구체적인 적용을 이렇게 해보면 좋겠다.
로또라도 당첨되면 여러분은 교회에 잘 붙어있겠습니까? 산으로 들로 세상으로 떠나겠습니까?
우리가 로또까지 갈 것도 없다. 조금 편해지면 갑자기 교회에 오는 길이 힘들어진다. 주차가 힘들고 아이 공부도 손해보는 것 같아서 가까운 데로 떠나야겠다 하는 분들이 계신다.
로또까지 가지도 않는다. 아이가 대학 붙어도 떠나고 싶고, 무시무시한 예수님의 십자가 감정을 듣기 싫다. 나사렛 예수 청년이 메시아라는 것이 듣기가 싫다. 멋있는 사람이 잘되었다 하는 것만 듣고 싶다.
조금 편해지면 힘들다. 힘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멀쩡한 정신으로 선남선녀가 교회 잘 다니기가 너무 어렵다. 부자가 낙타바늘 비유와 똑같은 것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목자님, 권찰님, 남편과 아내의 나눔을 읽어드리겠다.
'제가 요즘 많이 의심하는 것은 내 딸들이 진짜 변할까? 이다. 딸 둘이 날마다 주먹싸움을 하는데, 서로 너무 미워하고 있으니 저도 아이들 쳐다보기도 싫다. 그래서 방임하고 포기하는 것 같다'
여기가 다 엘리트이고 선남선녀이다.
그러니 아내가
'우리 딸이 아빠에게 자기는 사각턱이니 보톡스를 해달라, 엄마에게는 이마라인 문신을 해달라고 한다. 머리 조금 짧게 잘랐다고 한달동안 울고불고 하면서 붙임머리 비용 40만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렇게 괴롭혔던 아이가 이마라인 문신을 싸게 하는 다른 곳을 찾았다고 하는데 보니 원장이 아닌 수강생이 해주는 것이었다. 겨우 설득해서 말렸더니 이번에는 양악을 해달라고 했다.'
그러니 남편이
'ADHD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꽂히면 계속 해달라고 계속 징징대고, 그게 끝나면 또 다른곳에 꽂히는 것이다. 사무실에 있을 때 전화를 하는데 못 받으면 받을 때 까지 전화를 계속 한다'
그러니 아내가
'저도 절망의 옥 미움의 옥 의심의 옥에 갇혀 있는데, 딸이 편도가 부어서 병원 들렀다가 급식이 맛있는 것이 나오는 날이라고 학교 가겠다고 해서 너무나 황송해서 데려다 주었더니 금세 내가 집에 가야하겠으니 조퇴하겠다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데 정말 뚜껑이 열렸다. 어제도 데려다 주고 조퇴한다고 데려오고, 오늘도 여자목장 끝나고 잠시 쉬려는 틈에 연락이 와서 분노가 올라왔다. 얼굴 보면 너무 화날 것 같아서 카톡으로 차와 키를 줄테니 니가 알아서 하라고 차 키를 주고 걸어오는데 그 키를 던졌다. 그래서 다시 그 키를 찾았다. 근처 공원으로 가 화를 삭히고 있는데 전화가 20번 오고, 자기는 죽을 것 같은데 왜 엄마는 데리러 오지 않냐고 난리를 친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애를 데려다주고 화가 올라왔는데, 구원을 위해 참아야 한다는데 어디까지 참아줘야하나 싶고, 아이가 ADHD 조울이 있어서 그런것인데도 미워지고, 안변하는 저 때문에 아이가 수고하는 것도 같고, 정말 이 아이가 바뀔까 의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고 했다.
그랬더니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정말 자녀 양육이 회사 다니는 것 보다 100배는 힘든 것 같다.' 고 했다.
그렇기에 자녀를 키워야 한다. 자녀는 배반당하기 위해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 다들 반려견을 키운다. 정말 성경적이지 않다. 그래서 결혼도 안하고 육아가 힘들다고 자녀도 안 낳는다. 그런데 이것을 조장하고 그것을 법으로 정하려 한다. 100배 힘든 것 맞다. 자녀 때문에 힘들어서 주님을 만난다. 자녀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많기에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하려면 연필 하나를 못 세운다. 그러나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중심을 잡고 있으니 부딪히지 않고 다 가는 것이다.
내가 힘들다고 하는 기복, 이것이 결국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결론이다. 내가 팔복의 가치관이 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무중력에 떠가는 것이기에 힘들지가 않다. 그러니 바울처럼 참는 것이다. 처음 온 사람도 고난이 있으면 들린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안들린다. 팔복이라는것이 무중력에서 둥둥 떠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잣대로 해석하니 너무 힘들다. 이것이 힘든 자녀를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래서 회사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매일 사표쓸까 고민하면서도 아침에 눈 뜨면 갈 곳이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자유함이 있다고 한다.
권찰님이 정말 애통한 것은, 그래도 우리 가정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는데 이 아이들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도 아닌 신을 안믿는다 하니 마음이 내려앉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연락하고 싶어하는 모든 지체들은 교회지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다 만나게 해 주셨지 않느냐 해도 단호하게 자신은 믿지 않는다 하니 앞은 바다고 뒤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사방이 막힌 환경 같다 한다. 복음에 대한 이야기도 더는 못하게 하는 아이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하나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사람이 딸들이다 라고 하며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감정이 요동쳐서 분노하다 우울해 했고, 오늘은 병원에서 나와서 집에 오게 되면 따로 살게 해달라고 했다 한다.
남편이 괴로운 것은 딸이 내가 했던 말들, 욕이나 안 좋았던 말들을 다 되새김질 하는 것이라 한다. 지옥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본인이 아버지에게 똑같이 했는데, 30년 전에 아버지께 한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그대로 똑같이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모습들을 그대로 딸들에게 받으니 집에 있기도 힘들고 회사에 있기도 힘들어서 갈 곳이 없다고 한다.
제가 이 목장 나눔을 읽어보니 목자이시지만 아빠가 엘리트고 대기업 다니니 거기에 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임하고 포기한다고 하고, 아빠도 자책 충동에 소리치고 부딪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 그러나 아이들 탓만 할 수 없는 것이 자기도 방종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아빠와 살 자신이 없다고, 아빠의 사과와 미안한 마음을 계속 전해도 거기서 대화 진전이 안된다고 한다.
아빠도 충동적이니 감정에 숨지 말고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같이 가서 병원 가서 상담해보고 나도 아프다고 인정하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빠는 너무 똑똑하고 대기업 다니니 나는 아프지 않다고 하시면 안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누가 기도하고 누가 복이 있다 외치고 팔복을 외치겠는가? 이 선남선녀가 이렇게 기막힌 환경에 있으니 서로 목자가 되어 예배를 사랑하고 다른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서 약속을 붙들고 가는 복있는 인생이라고 언급하고 걸어가는 줄 믿는다. 이렇게 내놓았으니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예수 믿는데 아이들이 왜 속을 썩이나 하며 듣기도 싫다. 인생이 짧다. 우리는 천국에 가야 한다. 이 짧은 인생에서 천국에 가게 하는 식구들이 가장 공로자이고 환경이 가장 공로자이기에 내가 오늘 복이 있다고 외치는 것이다.
내가 사명 찾게 되면 나같은 사람을 살리게 된다. 사명 찾게 되면 아그립바와 버니게와는 비교도 안되는 평강으로 모든 사람들을 살리게 된다.
말씀 맺음
성령의 약속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서도 내가 손을 들어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다. 내 힘이 없다. 주님 나를 도와 달라고 진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도 다행히 복으로 여길 수 있다. 이것이 복이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없다. 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복의 약속이 아니라 팔복의 약속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케 되고 내가 믿음으로 오직 내 마음을 확정하는 이런 성령의 약속을 붙드시길 바란다.
[기도제목]
교희
1. 우울 공허의 감정이 몰아칠 때 휩쓸리지 않고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돌아가 안식 할 수 있도록
2. 혼란스러운 이 상황을 복으로 여기고 말씀으로 나의 경계를 잘 세워갈 수 있도록
보련
1. 한 주 말씀으로 살기
2. 하나님의 자존감 가질 수 있기를
은우
1. 냄새를 잘 맡을 수 없다는 것을 어제 알았습니다. 6개월 후에는 대부분 돌아온다고 하는데 냄새도 혼자서는 잘 맡을 수 없는 불쌍한 인생이고...지켜온 인생인 것을 기억 나게 하시고...매일 감사함으로 하루를 잘 살도록